001 화
차칵, 차칵.
멀리서 들리는 기척에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바위 그림자에 숨어 한참 숨을 죽이고 있자 다행히도 기척은 점점 멀어졌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둑한 그림자 속으로 걸어가고 있는 몬스터가 보였다.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지만, 끝이 금속으로 된 듯한 여섯 개의 다리를 보니 충왕류 같다.
만약 나를 발견하면 저 다리로 내 몸을 난도질해서 천천히 씹어 먹겠지.
그래서 충왕류 던전 공략에 실패한 헌터들은 시신도 찾을 수 없다.
온몸의 소름을 내리누르는 동안 몬스터는 천천히 모퉁이를 돌아 어딘가로 떠나버렸다.
일단, 당분간은 산 것 같다.
당분간은.
당장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내 상황이 최악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하지 못 하고 있다.
이곳에서 눈뜬 지는 꽤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해결책을 찾지 못 하고 있었다.
뭔가 건수라도 있어야 해결을 하지.
앞을 봐도 캄캄, 뒤를 봐도 캄캄, 미래는 더 캄캄한 이 암담한 상황에 대체 무슨 궁리를 하냐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여기가 던전 안쪽이라는 것이다.
헌터들이 공략을 하러 떠나는 그곳.
그런데 헌터도 아닌 내가 왜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던전 안에 있는 거냐고.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나는 던전에 들어온 적이 없다.
애초에 나는 던전에 들어오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
헌터가 아닌 민간인에게는 던전 접근 허가가 나지 않으니까.
나는 그냥 던전 침공 사태 이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헌터-민간인 중개 회사의 평범한 사무원일 뿐이다.
주로 싹수없는 전투 헌터들의 수발을 들어주거나, 정부에 제출해야 하는 문서를 처리해주거나.
소속 헌터들에게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계약 연장을 위해 점심 대접을 하거나.
헌터들의 비위를 맞춰주거나, 비위를 맞춰주고, 비위를 맞춰주는…….
회사를 생각하니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물론 회사에 가기 싫다고 습관처럼 외치긴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어!
뼈가 부서져라 일해도…… 아니, 마음이 부서져라 비위를 맞춰도 고작 반지하방 월세를 대는 게 고작인 상황이 슬프긴 했지만 죽고 싶을 정도로 비관한 건 아니라고.
몇 번이나 기억을 곱씹어도 나는 집에 돌아와서 잠자리에 누운 게 분명했다.
오는 길에 누군가에게 납치당해서 던전에 던져진 게 아니었다.
분명히, 분명히 집에 와서 누웠다.
누워서 알람을 두 개 맞출까, 하나 더 맞출까.
일어났다가 10분 더 자면 오히려 피곤하다던데 하고 고민하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것도 기억한다.
이불 위에서 잠든 게 분명한데 눈을 뜨니 던전 안에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서 현실인 걸 깨달았다.
이 습도, 이 공기.
모든 것이 꿈이라고 여길 수 없을 정도로 생생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이다.
자고 있던 내가 모종의 이유로 던전 안으로 이동한 것.
혹여 누군가가 나를 죽이려고 납치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일단 너무 번거롭잖아.
나를 죽이려면 그냥 어디 밤바다에 던져 버리는 게 돈도 적게 들고 편할 것이다.
던전 출입에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데.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런 수고를 해서 나를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을 만큼 원한을 산 적은 없는 것 같다.
굽실거리기 바쁜 사회초년생이 무슨 원한을 사겠어.
지나가다가 전봇대에 부딪히면 전봇대에게도 사과할 정도로 조심하며 살아왔는데.
죄송합니다, 제가 걸어 다니는 바람에 부딪혔네요, 하고 굽실굽실.
사실 이건 내 이야기야.
그날 회식에서 술을 좀 많이 마시긴 했지.
아무튼.
대한민국의 모든 던전 출입구는 정부의 관리하에 통제되고 있고, 출입인원을 엄격하게 관리한다.
만약 누군가 나를 납치해서 던전에 찔러 넣었다면 들키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일단 납치가 아니라고 치면 남은 경우의 수는…….
아, 이건 진짜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이게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가능해?
사람이 말려드는 건 단 한 번도 없었던 사례인데.
불규칙 균열.
그 단어를 떠올림과 동시에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안 돼.
참아, 지금 소리 내면 죽어.
하지만, 하.
정말로, 자는 사이에 불규칙 균열에 말려들었으면 나는 죽은 목숨이다.
‘던전’은 차원을 넘어 우리 세계를 침략한다.
그러다 보니 아주 약간의 흔들림이나 변동에 의해서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었다.
불규칙 균열은 그중 하나다.
정식 던전 입구가 아닌 곳에 아주 잠깐 작은 균열이 발생하는 것이다.
대부분은 특이 에너지 파장만 발생시키고 별문제 없이 끝났다.
하지만 아주 간혹 근처의 사물을 던전 내부로 빨아들이는 일이 있었다.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딱 두 번 발생했다.
두 번 모두 하수도관을 파열시키는 사고로 끝났다고 들었다.
그런데 하필 사람을 빨아들이는 최초의 사태에 재수 없게도 내가 걸리다니.
괜히 돈 아낀다고 반지하에 방을 얻는 게 아니었는데.
뒤늦게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나는 던전에 있고, 몇 번 운 좋게 이 던전에 서식하는 몬스터의 눈을 피하긴 했지만 어차피 시간문제다.
민간인 비전투원+혼자+던전=죽음.
지극히 당연한 공식이잖아.
그런 공식에도 불구하고 나는 꽤 오랜 시간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몰랐는데, 충왕류라는 몬스터가 생각보다 소음에 신경을 안 쓰고 돌아다니는 타입이더라고.
걸어 다니면서 내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바짝 곤두선 신경줄로 그걸 못 듣기가 더 힘들었다.
하지만 한 순간 목숨이 날아갈 수 있는 처지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게다가 수 시간이나 긴장한 채 보낸 덕분인지 옷은 식은땀으로 푹 젖었고 목은 갈증으로 바싹 말랐다.
믿을 수 없지만 허기도 느껴졌다.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데 배가 고프다니.
이러다가 충왕류가 지나갈 때 꼬르륵거리기라도 하면…….
어차피 내가 죽는 건 시간문제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업계에 떠도는 헛소문에 기대를 걸어보는 수밖에 없나.
던전 침공과 그에 관련된 지식들이 세상에 밝혀진 것은 불과 5년 남짓된 일이다.
이만큼 체계가 잡힌 것도 최근 2년간의 일이고, 사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나 법망이 닿지 않는 영역이 많이 있었다.
근거 없는 소문은 마치 곰팡이처럼 창궐했다.
물에게 음악을 들려주면 아이템이 된다는 허무맹랑한 소문부터 목숨의 위기가 닥치면 헌터로 각성할 가능성이 올라간다는.
그럴듯하지만 쉽게 테스트하기 힘든 것들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헛소문은 헛소문이다.
헌터가 되겠다고 자살 시도한 사람이 전부 각성자가 되었다면 아예 이론으로 자리 잡혔겠지?
이런 헛소문이 아니라.
물론 위기의 순간 각성한 헌터의 비율이 꽤 높은 편이기는 했다.
아예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희박한 확률에 목숨을 거는 건 바보짓이다.
이러나저러나 죽는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짓.
멀리서 움직이는 충왕류의 걸음소리가 들린다.
차칵, 차칵하는 쇠와 돌이 부딪히는 소리.
꽤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걸 보니 나름대로 순찰을 도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숨을 죽이고 마음을 다잡았다.
충왕류가 가까이 오면 이 바위에서 뛰쳐나가서 싸워보는 거야.
죽음의 위기를 극복하고 헌터로 각성하기만 하면 살 수 있을 거야.
차칵, 차칵.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 멀리에서 조금 멀리, 가까이, 좀 더 가까이, 그리고 바로 지척까지.
나는 숨을 멈추고 바위 너머를 홈쳐보았다.
마치 사마귀를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앞다리 두 개.
개미의 것을 닮은 거대한 배와 거기에 달린 칼날 같은 강철 다리들.
멀리 있을 때만 봐서 몰랐는데 내 키의 거의 두 배는 되는 것 같다.
여섯 개의 다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과 번들거리는 관절.
희박한 불빛에 반사된 칼날을 보는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무섭다.
너무 무섭다. 못 움직이겠어.
숨이라도 내쉬면 단숨에 목이 날아갈 것 같다.
저런 거랑 싸운다고? 어떻게?
도망이라도 칠 수 있으면 다행일걸.
결국 나는 얼어붙은 채 충왕류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덤빈다거나, 그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거나 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 했다.
상상만 해도 기절할 것 같다.
그래, 어차피 목숨의 위기는 자초하지 않아도 다 오게 되어 있다.
그때 가서 헌터로 각성하든가 어쩌든가 하겠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나는 내가 전투계 헌터로 각성해서 저 무서운 충왕류를 상대로 자신만만하게 싸우는 모습을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보통 전투계 헌터들은 몬스터를 보고 본능적으로 뛰어나가 싸우다 보니 각성을 했다고 하던데.
어떻게 그러지?
걔네도 사람이면서 저런 괴물 앞에 어떻게 나설 수가 있냐고.
차라리 굴착기랑 맨주먹으로 싸우는 게 더 승산이 있겠다.
방금 죽음을 자초하려던 탓인지 충왕류가 지나가고 나자 온몸의 힘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잠깐 사이 머리도 등도 식은땀으로 확 젖었다.
아직 흘릴 땀이 더 남아 있었네.
그래, 어차피 죽게 되어 있는 거 너무 명을 재촉하지 말자.
지나가는 충왕류에게 뛰어드는 용기가 내게 없다는 건 확인했다.
그렇다면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한 가지뿐이다.
대체 얼마나 여기서 살아야 할지 모르니 뭔가 먹을 것을 찾아놓는 게 좋겠어.
사방에는 어슴푸레한 빛을 뿜는 이상한 식물들이 잔뜩 자라 있었다.
그 덕분에 형광등 하나 없는 이 동굴 같은 던전에서도 다가오는 충왕류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까 보니 충왕류 한 마리는 저 식물을 으적으적 씹어 먹기도 했다.
보아하니 먹을 수 있는 물건 같다.
물론, 걔한테 무해하다고 나한테도 무해하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뜯어두면 어디든 쓸모가 있겠지.
생각해보니 저거 던전 부산물이잖아.
그 비싸다는.
막상 채집할 생각으로 사방을 둘러보니 의외로 내가 아는 식물들이 꽤 보였다.
헌터들이 뜯어와 마켓에 내놓은 모습만 봤던 터라 이렇게 무성하게 자라 있는 모습은 좀 낯설었다.
그래도 던전 식물은 외양이 특이한 것이 많아서 구분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다행히 여기에 있는 식물 대부분이 별 독성은 없는 것들이었다.
이건 무슨 포션 만드는 재료라고 했던 거 같은데.
이름이, 에비타 니스였던가?
마치 초롱꽃처럼 꽃잎 전체가 하나로 붙어 있는 통꽃의 형태.
색은 흰색부터 연보라, 분홍색까지 다양하다.
기억하고 있는 모습과 같은 걸 보니 아마 맞나 보다.
헌터 마켓에서 이 꽃잎 하나가 10만 원에 팔리는 걸 봤었다.
송이버섯 뺨치는 가격이다.
그게 이렇게 지천으로 피어 있다니.
이러니 헌터들이 돈이 많지.
나도 이거 다 뜯어다가 살아 나가기만 하면 회사 같은 건 바로 때려치울 수 있을 텐데.
씁쓸한 기분으로 나는 에비타니스 줄기를 움켜쥐었다.
일단 뜯어다가 손질해서 먹을 수 있게 만들어 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풀을 뜯자마자 귓가에 경쾌한 알림음이 울렸다.
비각성자로서 단신으로 특수 아이템을 입수하였습니다.
조건: ‘던전 내 유일한 비각성자’ 달성!
조건: ‘홀로 들어온 던전 외부 생물’ 달성!
조건: ‘불완전 생성된 던전에 최초 입장’ 달성!
조건: ‘특수 아이템 입수’ 달성!
특수 조건: ‘발생 불가능한 우연’ 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