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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58화 (258/281)

◈258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23)

“그리고 폐신전에는 타락한 신관이 남겨둔 ‘오염’의 흔적이 있었어. 시몬은 그것마저 이용해서 제 힘으로 쓰고자 했어.”

리제는 그 시도에도 성공했고, 더욱 끔찍한 존재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그 힘으로 수도를 엉망으로 만들고 싶어 해.”

“수도를?”

나는 이렇게 반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몬 그놈이 망가트리려는 대상이 단순히 수도뿐만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요정이 세상의 멸망 운운하면서 호들갑을 떨지 않았을 테니까.

수도, 나아가 세상까지 모두 엉망으로 만들겠다는 거겠지.

“도대체 어떻게?”

“그건 나도 몰라. ……나는 항상 그놈의 목표를 추적하다가 죽곤 했으니까. 하지만 이건 알아. 이번 회차에서야말로 나는 그놈을 막을 수 있다는 것.”

리제가 이렇게 말하면서 마석을 꾸욱 손에 쥐었다. 결연한 표정이었다.

이를 보면서 저 마석이 리제에게 아주 큰 키포인트라는 걸 알았지만, 어디에 쓸 건지 물어보면 역시나 알려주지 않을 것 같았다.

‘이건 스스로 알아내야겠네.’

다행스럽게도 메인 퀘스트의 시간이 넉넉하게 늘어났다.

그러니 이제는 조금…… 쉬어도 된다는 거겠지.

“리제, 이제는 나 믿는 거지?”

“……뭐?”

“그럼, 나 조금만 아주 조금만… 눈 좀 붙일게…….”

“잠깐, 달린! 달린…… 여긴 온도가 추, 달린!”

나는 가물어가는 눈을 느끼며 리제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래, 나는 이 친구의 따뜻한 손을 좋아했었지.

이 손으로 내게 쿠키를 구워오던 날을 기억한다. 내가 막 이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였지. 네 덕분에 나는 낯선 기분을 빠르게 떨칠 수 있었어.

네 다정함 덕분에.

“……나 우리 오빠 좀 불러줘. 집에 가게……. 부탁해…….”

“달린, 달린!”

나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아, 한계야. 한계. 도저히 졸려서 못 참겠어.

나중에 한 생각이지만 졸린 와중에 파올로를 언급한 건 아주 잘한 일이었다.

* * *

리제는 스르륵 잠든 달린을 보고서 사색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게 ‘달린’은 그녀의 눈앞에서 잠이 들 듯 죽은 적이 있었다.

한번이 아니었다. 몇 번이었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있었다.

서둘러 달린의 맥을 짚은 리제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살아 있다.

죽지 않았어……!

그러나 곧 리제는 울듯한 표정을 지었다.

더는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언제인가 메말라버렸으니까.

달린, 나는 언제까지 이 불안을 반복해야 하는 걸까?

“리제. 왔어?”

눈 앞의 달린은 그녀가 지금까지 보았던 모든 시간의 ‘달린’과 달랐다.

그렇기에 경계하기도 했고 의심하기도 했지만, 끝끝내 보이는 모습들은 자신의 다정한 친구였다.

“바꿔 생각하면, 넌 어느 순간부터 나를 의심하고 또 의심했겠지. 그럼에도 내게 변함없이 잘해준 시간이 있는 거야, 그렇지?”

그래, 나는 너를 의심했어. 내가 아는 ‘달린’은 이렇게 건강하게 뛰어다닐 수 없었어.

나와 함께 연회를 갈 수 없었으며, 추운 북부는 엄두도 내지 못했어.

이뿐일까? 너는 모든 장기가 약해서…… 내가 만든 쿠키를 거의 먹지 못했어.

“나는 이 모든 감정이 한순간에 거짓이 되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

사실은 평범한 친구로 돌아간 네 모습이 좋았어, 달린.

동시에 밀을 수가 없었지. 차라리 꿈을 꾸는 게 아닐까? 건강해진 네 모습이라니.

리제는 자신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그러나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나긴 무한 회귀를 지나, 지금 이 순간은 자신에게 찾아온 기적 같은 시간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반드시…….”

리제는 색색 잠든 달린을 바라보다가 쇼파에 떨어진 마석을 꾹 쥐었다.

“반드시 이번엔 끝내고야 말겠어.”

리제는 그 뒤로도 친구를 한참이나 응시하다가 돌아섰다.

세상모르고 잠든 달린의 몸 위로 어느새 포근한 담요가 덮여 있었다.

잠시 뒤, 리제의 상단으로 누군가가 헐떡이면서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에스테 경.”

파올로였다.

자신의 여동생이 여기에, 그것도 제 발로 올 수 없는 상태로, 잠들었다는 소리를 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참이었다.

파올로는 여기서 리제를 마주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연락이 분명 리제 양에게 온 것이었지만…….’

실제로 이런 거리에서 리제를 보니, 믿기지가 않았던 탓이다.

리제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상단을 운영한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 달린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달린에게는 간접적으로만 털어놓았는데, 이렇게 이름까지 기억하고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왜 이 남자를 여기까지 불렀을까. 내가 데려다줘도 될 것을.’

어쩌면 지치고 힘든 자신은 이제는 덜 힘들고 싶다는 본능의 발악이 아니었을까?

리제에게는 손발과도 같은 유능한 수하들이 넘쳐났다.

그녀는 무한히 회귀했고, 그것은 유용한 자산으로 남아 이제는 누가 가장 유능하며 어떤 일에 쓰면 좋을지, 적재적소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 그럴진대. 이 남자를 부른 것은.

리제는 복잡한 눈으로 숨을 헐떡이는 파올로를 보았다.

파올로는 갑작스레 맞닥뜨린 리제의 모습에 놀라 황급히 자신을 정돈하는 행동을 보였다.

푸슬푸슬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수습하는 모습이 수더분하여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달린은 윗층에 있어요.”

리제에게 있어 파올로는 참으로 신기한 존재였다.

무한히 반복하는 시간 동안 모두가 변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그 사이에서 변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이 남자였다. 처음엔 그저 친구의 남매였을 뿐이었는데 그래서 눈에 띄었다.

“어서 오세요, 트리샤 양.”

사람은 영원히 선하지 않고 영원히 악하지 않다. 선인으로 만났던 이도 악인으로 만났던 이도 환경에 따라 선악을 달리했다.

“……괜찮으신가요? 아프신가요?”

유독 이 남자만이 변함없었을 뿐이었다.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함께 있어 드릴까요?”

그렇기에 리제는 자신을 동정하는 이 남자에게 화조차 내지 못한 채 그의 위로를 모른 척 받아들이곤 했다.

다른 이들이 똑같이 동정을 보였다면 그 자리에서 가만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 힘도 있었다.

“들어오세요, 달린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드리죠. 참고로 여기 있는 의사에게 먼저 진찰을 시켰는데 이상은 없고 피곤해 잠든 것뿐이라고 해요. 믿기지 않는다면 돌아가 에스테 가문 주치의에게 다시 진찰받아도 상관없습니다.”

“저어, 리제 양!”

파올로가 서둘러 리제를 붙잡았다.

차마 잡지 못한 손이 리제의 손목 언저리를 맴돌다 떨어졌을 뿐이지만 리제를 붙잡는 데에는 충분했다.

“제 여동생은 그저 잠든 것뿐이라니 정말 다행입니다. 믿지 않는 거 아닙니다. 믿어요. 리제 양은 내 여동생의 하나뿐인 좋은 친구이니까요.”

리제는 입술이 바짝 마르는 기분을 느꼈다.

“제 여동생에게 늘 다정한 친구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남자의 태양광 같은 시선을 받을 때면 목이 말랐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

리제는 아주 오래전 시몬이라는 남자를 사랑했다.

그와 함께라면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건 이제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 되었다. 사랑했던 남자는 어떤 존재에 씌워지고 삼켜진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리제에게 남은 건 긴긴 시간 동안 건조하고 메마른, 이제는 바닥조차 남지 않은 버석한 감정 찌꺼기뿐이었다.

그래서 리제는 지금 이 순간 느껴지는 이 감정이 대체 무엇인지 이름 붙일 수 없었다.

* * *

눈을 떴을 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일어나보니 내 침대였다.

‘흐암, 리제가 날 돌려보낸 모양이네.’

리제를 붙들고 있다가 스르륵 잠이 든 게 바로 몇 분 전 같은데, 하늘의 빛이 어느새 바뀌어있었다. 깜깜한 밤하늘을 보며 흐아암, 하품했다.

개운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래도 발데르가 준 마력은 건강을 돌려준 것뿐만 아니라…… 체력도 좀 높여준 것 같단 말이지.’

이 세계에서 갓 눈을 떴을 때 산책조차 힘겨웠던 걸 생각하면 거의 다시 태어난 수준의 체력이었다. 덕분에 움직이기 편해서 좋긴 하지만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참으로 고마운 그가 준 마력을 어떻게든 더 잘 써봐야 할 텐데 말이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돌리다가 나는 화들짝 놀랐다.

“아! 깜짝이야!”

놀랍게도 어둠이 깔린 내 방, 희미한 달빛을 등진 채로 누군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마도 내가 일어날 때부터 지켜본 것 같은데, 내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동시에 내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있었단 소리기도 했다.

“파올로? 오빠, 거기서 뭐 해?”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파올로였다.

부모님도 아니고 파올로가 자는 내 옆을 지켰다고? 미묘한 기분이었다.

물론 오빠가 나를 가족으로서, 여동생으로서 아끼는 마음은 잘 알고 있지만 그 다정함과 애틋함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난 아프지도 않은데?’

아플 때도 안 하던 행동을 왜 지금? 나는 파올로를 물끄러미 보았다.

“오빠? 왜 대답이 없어. 거기서 뭐 해.”

“…….”

조금 생경한 기분이었다.

파올로는 언제나 조금 순박한 듯 다정한 미소를 기본으로 띤 얼굴이었는데, 이렇게 미소를 지우자 무뚝뚝한 얼굴이 더 잘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보니 새삼 기사가 천직이구나 싶었다.

‘우리 라이칸은 까칠하고 날카로워서 기사랑은 영 안 어울리는 얼굴인데 말이지. 아 물론 그래서 더 좋아하지만.’

파올로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니, 나는 그대로 무릎을 세워 뺨을 기댄 체 멍하니 생각했다. 저쪽에서 말할 때까지 기다릴 심산이었다.

기다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몸은 괜찮냐?”

“응. 괜찮지. 안 괜찮을 게 뭐 있어?”

황실에서는 이번 일을 함구하기로 했다. 그러니 에스테 저택에 전달된 사항은 없을 것이다.

있다면 내가 폐신전에 갔다가 잠시 조난을 당했고, 황실의 구조로 아무런 문제 없이 돌아왔다는 정도겠지.

물론 평범한 영애의 일이라면 이것도 큰일이기는 하겠지만, 워낙 많은 일이 있었다 보니 내게 이 정도면 별일 아닌 수준이 되어버렸다.

‘화를 내려나? 집으로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나는 리제가 날 마차에 태워서 보냈겠거니 싶었다.

“그래, 그렇다니 다행이네. 그럼 이제 네가 왜 리제 양의 상단에서 잠이 들었고 내가 데리러 가게 된 건지 설명이 가능하겠냐?”

파올로의 이어진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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