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19)
“좁군.”
내 옆에 앉기는 했지만 나도 동감이었다.
그가 생각 이상으로 덩치가 큰 탓에 우리가 나란히 앉아서는 이 모포를 같이 두르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라이칸도 똑같은 감상을 느낀 듯 찰나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실례해도 되겠나?”
“네? 네. 앗!”
몸이 번쩍 들리는 기분과 함께 정신 차려 보면 그의 다리 사이에 앉아있었다.
정신이 확 드는 기분이었다.
“함부로 들어서 미안하다. 사과하지. 조금 전부터 모포를 걸쳤는데도 떠는 그대의 어깨가 신경이 쓰여서…….”
“으음, 괜찮아요……. 이렇게 있는 쪽이 라이칸도 불을 쬐기에 좋은 것 같고.”
툭, 내 어깨 위로 살갗이 닿았다.
“그렇게 자꾸 허락하지 마라. 정말 나쁜 상상을 할 것 같으니.”
라이칸이 이마를 기댄 것 같았다. 등으로 따끈따끈한 체온이 느껴졌다.
이렇게 있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던 듯 차가워졌던 체온이 금방 오르는 것 같았다.
라이칸이 내 몸을 받치기 위해 자세를 잡아준 덕에 편안하기까지 했다.
다만, 그의 몸이 주는 푹신하면서 단단한 감각이 등을 타고 전해지면서 졸린 듯한 나른함을 쫓기에 충분했지만 말이다.
“라이칸, 불편하진 않아요?”
“……난 괜찮다. 그대만 괜찮다면 잠시 이대로 있지.”
“뭐, 저야 좋지만…….”
따끈따끈했다.
어째 소설 속 클리셰 같은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조금 전의 야릇하기만 했던 긴장감이 모두 차지했을 때보다 지금이 좋았다.
라이칸을 아끼고 좋아하고 사랑하니까 그런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지만. 아직은 좀 더 시작할 때의 설렘을 만끽하고 싶달까…….
‘아, 물론 아까의 그런 분위기도 좋긴 했어.’
나는 라이칸에게 백허그 당한 채로, 사실 라이칸이라면 어느 쪽이든 좋은 거구나 결론을 내렸다.
난 모포를 조물조물 만지며 손장난을 하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되긴 했지만……. 그래도 저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라이칸이랑 이렇게 있는 상황이요.”
그리곤 툭 등 뒤로 머리를 기댔다. 그런 채로 깜빡깜빡 눈을 깜빡이면서 타오르는 불을 응시했다.
‘아, 이런 걸 불멍이라고 하던가?’
열심히 타오르는 불을 보고 있으려니 절로 몸이 이완되고 평온해지는 기분이었다.
평생 보고 있으라고 해도 할 수 있을 만큼 편안한 기분이기도 했다.
“좋네요.”
“무엇이 좋은지 물어도 되겠나?”
“저는, 이렇게 편안하게 쉴 시간이 거의 없었거든요…….”
그렇지. 한 이야기가 끝나면 언제 다음 이야기가 시작할지 모르니까,
쉬어도 쉬는 게 아니지.
항상 응급 연락이 올지 몰라 대기하는 소방관이나 119 대원처럼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참 바빠야 하는 시간인데, 이렇게 있으니 좋네요. 라이칸이 옆에 있어서인가.”
“……달린.”
라이칸이 머뭇거리다가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단단하게 감싸오는 이 팔이 좋았다. 작게 웃는 동안 귓가로 신중한 목소리가 닿았다.
“그대가 진정 바라는 건 무엇인가?”
“바라는 거요? 갑자기요?”
라이칸이 바로 옆에서 말한 탓에 귀가 간지러웠다. 그가 잠깐 고민하다 응답했다.
“그냥, 그대는 항상 바빴던 것 같으나 생각해보면 그대가 아닌 타인을 위해 움직인 것은 아닌가 싶어서.”
“아, 틀린 말은 아니네요. 진정 바라는 거라…….”
내 소원 같은 거겠지? 소원, 소원이라.
살아남는 거?
하지만 이건 갑자기 닥친 위기에 대해 반작용으로 생긴 본능이었을 뿐 생각해보니 진정한 소원이라 하기엔 이상했다.
덕분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던 나는 문득 그런 게 있었지. 할만한 시점에 다다랐다.
“소원……. 집에 가는 거려나…….”
바로,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순간이었다.
낯선 세계에서 눈을 뜨자마자 간절히 바랐던 것. 생각해보면 그땐 내 진짜 이름도, 내가 누구였는지 모두 잊지 않았던 것 같다.
“……집?”
“네, 집.”
서서히 잊어간 것이다. 생존을 위해 바삐 움직이는 동안에.
이건 요정이 바라는 바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진짜 나를 다시 떠올리고 싶은가?
내가 소설 주인공이라면 그렇다고 대답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런 생각이 크게 들지는 않았다. 이 또한 요정이 바라는 바일지도 몰랐다.
“집에…….”
라이칸은 내 말을 어떻게 알아들은 것인지,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에스테 저택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하고 중얼거렸다.
바로 옆에서 속삭인 탓에 어렵지 않게 들렸다.
나는 속으로 웃음 지었다. 집. 그에게는 이렇게 들릴 수 있겠구나 싶었다.
“새삼스럽기는 한데, 우리 여기에서 빠져나가고 오늘 가지고 나온 걸 처리하면요…….”
“듣고 있다.”
“이번엔 진짜 제대로 데이트할까요? 암흑가 말고, 이런 낡고 무서운 대신전도 말고. 깨끗한 호수라거나, 으음 공원이라거나……. 아 함께 쇼핑도 좋겠네요. 쇼핑 좋아해요?”
“……따로 해본 적은 없다만, 그대와 함께라면 분명 즐겁겠지.”
“와. 그런 말도 할 줄 아세요?”
“그댄 가끔 나를 뭘로 아는 건가 싶어…….”
나는 라이칸의 품에서 숨죽여 웃었다.
그때였다. 라이칸이 나를 좀 더 힘주어 안았다.
“나 또한 지금 이 순간에 여기서 이런 말을 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달린, 나는 가끔 그대가 어느 날 갑자기 휙 사라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건 어쩌면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사는 영혼이 다른 영혼을 바라보는 감각 같은 걸까?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 있다.
“그래요? 그런 불안을 느끼시는구나…….”
나는 라이칸의 손을 다독이면서 생각을 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세계에 떨어졌던 것처럼 또한 갑자기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면?
요정은 이것에 관해 이야기를 해 준 적은 한번도 없지만,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나는 이 남자와 시한부 연인인 셈이다.
그럼 이 남자와 연인이 되지 않는 게 맞았나?
그건 아니었다. 내가 이 남자에게 고백하는 순간은 불가항력의 순간이었다.
쌓이고 쌓인 마음이 이제는 담아둘 곳 없이 밀려나 결국엔 흘러나오고만 그런 마음.
진심으로 애틋하고 소중했다.
“그럼 만약에 저와 어느 날 갑자기 헤어지는 날이 온다고 가정하고, 미리 이 사실을 알았다면 라이칸은 저를 좋아하지 않았을까요?”
“그건 불가능하지.”
단호한 대답이었다.
라이칸은 내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 입을 지그시 맞췄다.
“그대를 사랑하는 건 불가항력적인 인력이었다.”
나와 같은 감상이어서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한편으로는 내가 만약 정말로 내 세계로 돌아가게 되면 당신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런 생각마저 들었지만 지금 생각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 치부하며 뒤로 미뤄두었다.
당장은 코앞까지 닥친 위기를, 메인 퀘스트를 돌파하지 못하면 죽을 테니까.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저 졸려요…….”
“좀 자둬라. 불침번은 내가 서겠다.”
불침번이라니. 몽롱한 기분에서 갑자기 현실로 끄집어진 것 같아 작게 웃었다.
“자는 거 조금 아쉬워요.”
“왜?”
“왜냐면…… 어쩐지 이대로 자고 일어나면 황실에서 저희를 찾아내, 데리러 올 것 같거든요.”
단정적인 내 말에 잠시 침묵하던 라이칸이 조심스럽게 재차 물었다.
“그건, 그대의 감인 건가?”
감이라…….
“네. 감이에요.”
맞는 말이다. 감이었다.
그리고 내 감은 틀린 적 없었다. 이번에도 그렇겠지.
나는 라이칸의 손을 놓고 몸을 돌렸다.
그가 놀란 눈을 하다가 얼른 시선을 돌렸다. 실수로라도 내 몸을 보지 않겠다는 듯이.
이 빈틈없이 단정하고 예의 바른 남자를 어쩌면 좋을까. 얼굴은 세상 까칠하고 날카로우면서 말이야.
“그러니까, 저는 아쉬워요. 라이칸 황자님.”
나는 그의 가슴에 양손을 얹은 채로 또박또박 말했다. 단 하나의 어절에도 망설임이 없게.
손바닥 아래서 쿵쿵, 그의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림자 진 아래, 우리의 시선이 허공에 맞닿았다.
그가 혀로 입술을 축였다. 나는 그의 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아나?”
“네. 잘 알아요.”
다시 한번 돌아온 명료한 대답에, 라이칸의 얼굴로 돌아갈 길마저 잃은 여행자 같은 표정이 얼핏 떠올랐다.
이토록 예의 바른 남자라서 내가 먼저 일탈을 시작하기로 했다.
안 그랬다가는 결코 내게 자신이 생각한 무례를 저지르지 않을 테니까.
나는 그의 목 뒤로 팔을 감았다. 새가 부리로 쪼듯 쪽쪽 입을 맞추고는 배시시 웃었다.
“……후회하지 마라.”
그답지 않은 약한 말에 웃고 말았지만.
곧 아프지 않게 잡힌 목이 휙 앞으로 당겨져 왔다.
나는 거칠게 내 입술을 흡입하는 입술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짹짹잭-.
어디선가 맑은 새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궁금해 눈을 뜨고 싶었지만, 이놈의 눈꺼풀이란 게 좀처럼 일을 하지 않았다.
내가 끙끙대자, 곧 단단한 것이 어깨와 허리를 감싸더니 나를 품어주었다. 푹신하면서도 단단하고 또한 따뜻한 감촉에 나는 속절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대로 머리를 기댄 체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스르륵 절로 눈이 뜨였다.
‘아.’
눈앞에는 눈을 감은 채 색색 잠든 미친 미모의 미남이 있었다.
와, 깜짝이야. 심장에 안 좋네…….
‘이 사람이 내 연인이란 말이지……?’
라이칸은 세상 모르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내 몸은 그에게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는데, 굉장히 안정적인 감각이라 딱히 벗어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밤새 팔베개를 해준 건가?
누가 그랬는데. 밤새 팔베개는 평생 갈 사람에게 해주는 거라고. 자신의 혈관과 근육을 희생한 결과라나.
엉뚱한 생각을 하는 동시에 자는 그의 얼굴을 구경했다.
그러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통증에 얼굴을 살짝 붉혔다.
‘……정말, 끝내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