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4. 회귀자가 회귀를 거부함! (13)
* * *
오래된 대신전은 이름에 걸맞게 아주 낡은 겉모습을 자랑했다.
거대하긴 했지만 곳곳에 이끼가 끼어있었고, 돌기둥은 여전히 두꺼운 위용을 보였으나 겉면에 풍화된 흔적이 가득했다.
“달린.”
다정한 부름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 옆에는 편안한 차림을 한 라이칸이 보였다.
음, 누구 애인인지 몰라도 참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모습이네.
나는 안 본 척 열심히 라이칸을 훑었다.
“불렀어요, 라이칸?”
“무슨 생각을 그리하지?”
“아, 별건 아닌데요.”
라이칸은 내게 물으면서 허리춤에 찬 검의 끈을 다시 묶고 있었다.
“여기 대신전을 함께 들어가는 것도 데이트에 속하는가 하는 생각이요.”
라이칸의 손이 휙 미끄러졌다.
분명 이걸 봤는데 고개를 든 라이칸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데, 데이트는……,”
“네. 데이트는?”
“나와 네가 함께 있다면 어디에 있든 데이트가 되지 않겠나.”
“오, 낭만적이에요.”
그러자 라이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달싹이는 것을 보아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 같지만 더는 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조금 아쉬웠다.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게 품고 있던 의문이 툭 튀어나왔다.
“그런데 말이죠, 라이칸.”
“응?”
“우리 사귀는 거 맞죠?”
걸어가려던 라이칸이 아주 살짝이지만 발을 삐끗했다.
라이칸은 잘생긴 얼굴에 미묘한 주름을 지며 나를 향했다.
“……그건 무슨 말이지? 우리가 그럼 사귀지 않으면.”
“음, 그렇죠? 그런데…… 저희 둘 다 사귀자고 말한 사람은 없잖아요?”
“…….”
“…….”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해요. 첫 연애라 제가 너무 모르는 소릴 했나요?”
“나도 처음이야.”
“네?”
“나도 처음이라고.”
오, 뺨을 붉히면서도 까칠하게 할 말을 다 하는 미남의 모습이라.
너무 취향이라 나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가고 말았다.
라이칸이 나를 향하면서도 긴장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씩 웃었다.
“그럼 저기 들어가볼까요?”
이대로 있다간 오늘 하루 종일 이 남자만 보고 있으라고 해도 가능할 것 같으니.
라이칸은 조금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내게 동의했다.
바닥에 돌이 많다며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을 때 나는 웃음을 꾹 참았다.
‘그냥 손잡고 싶다고 말씀하시지.’
그렇게 나는 라이칸의 손을 잡고 걸어 들어갔다.
“와 안쪽은 더 크네요.”
“예전에는 제국에서 가장 큰 신전이었다고 하더군.”
라이칸이 이 신전에 얽힌 비화를 짤막하게 알려주었다.
본래 신을 모시던 이 신전은 어느 날, 타락한 대신관이 권력을 쥐고 남몰래 악신을 모셔 사람들을 차차 광신도로 만들어가다가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황제의 손에 처형당하고 신전은 폐쇄당했다고.
“와, 잘 아시네요.”
“일단 황자의 교육에 역사도 포함되는 데다가…… 유엘이 네가 이야길 듣는 걸 좋아한다고 하더군.”
“엇, 황녀님이요?”
“그래. 자기가 남에게 얘기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할 땐 언제나 네가 눈을 반짝인다고 하던데…….”
남에게 할 수 없는 이야기, 바로 알아차렸다.
그건 래빗의 전생을 말했다. 내가 래빗의 전생 얘기를 좋아했던가?
‘으음, 가끔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했는지 이런 얘기를 듣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아기 황녀님이 달콤한 쿠키나 따뜻한 우유가 주는 포만감에 취해, ‘라떼는 마리야~’하고 시작되는 아저씨들의 취중진담에 가까웠다고 할까.
조금 억울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맞는 말 같은 것이…….
‘내가 괜히 로판 덕후였겠어.’
무수히 많이 읽어서 내가 뭘 읽었는지도 모르는 독자가 바로 나 아니었던가.
나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좋아해서 이 고생을 하긴 했지만.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로판을 읽지 않을 때 나는 뭘 했더라?’
요정의 농간인지, 도무지 진짜 나에 대한 것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 진짜 이름도, 얼굴도, 가족은 몇이나 있었는지.
함께 로판을 즐겨보았던 정말 친한 친구의 얼굴조차도 말이다.
아마 이건 네 번째 메인 퀘스트까지 수행하고 세계의 오류를 쓰러트리면 자연스럽게 떠오르지 않을까? 막연히 이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오늘 이 곳에 오게 된 건 누군가의 부탁 때문이라고 들었다.”
“네. 맞아요. 친구의 부탁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그대의 친구라면…… 내 여동생 외에도 좋은 친구가 있었던 모양이군. 그대가 이런 부탁을 들어줄 정도라면 말이야.”
“네. 맞아요.”
나는 작게 웃었다.
“아주 소중한 친구예요.”
이제는 그만 행복해졌으면 하는.
신전 안쪽은 겉면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누구도 손을 대지 않은 흔적으로 가득했다.
가끔 돌무더기가 잔뜩 떨어져 있어 길을 피해 가기도 했지만 특별한 위험이나 고난 없이 무난하게 아래층에 도착했다.
‘리제가 이 아래 어디 있다고 한 것 같은데.’
리제에게 정보를 듣기로 이 신전 지하에는 성물을 보관하는 방이 있는데, 그녀가 말한 물건은 그 방 안 유리관 안쪽에 보관되어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라이칸에게도 이 사실을 전했고 우리는 열심히 성물 보관방을 찾았다.
그러던 중 지하에 줄줄이 서 있는 석상에 눈길이 갔다.
“저, 라이칸.”
나는 석상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 석상들…… 아무리 봐도 신전에 장식하기엔 너무 살벌하게 생기지 않았어요?”
그랬다. 지하, 거대한 기둥 사이에 석상이 칸마다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꽤나 기괴했다.
일단 석상이 새카만 색이라는 것도 그러했고, 인간의 모습이긴 한데…….
뒤틀린 외형을 가진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두개골이 살짝 함몰된 석상도 있었고 뼈가 튀어나온 석상도 있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같이 강시라도 된 듯 앞으로 손을 뻗은 모습이었단 거였다.
마치 누군가를 금방이라도 덮칠 것같이 생생한 모습에 괜히 소름이 돋았다.
‘1층에서는 유적 탐사에 가까웠는데…… 여긴 거의 호러 특급 체험장 같잖아?’
으스스한 기분에 라이칸을 응시했다.
“내가 알기로 저 석상은 아까 말했던 타락한 대신관이 만들도록 시킨 걸 거다.”
“그래요?”
“그래. 악신을 모시면서 광신도를 만드는 동시에 저런 뒤틀린 석상을 만들었다고 하더군. 저건 아마 인간이 ‘오염’되었을 때의 모습일 것이다.”
오염, 두 글자에 나도 모르게 북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메인 퀘스트 마지막 즈음에 나타났던 거대한 뱀, 뱀이라기엔 굉장히 징그러웠던 그 모습.
요정이 그러지 않았나? 둑스 같이 신이 될 수 있던 존재가 ‘오염’되어서 이렇게 되었다고.
‘여기서 오염이란 단어가 나온 게 우연은 아닌 것 같은데.’
이 기억을 떠올리자 괜히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채로 석상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이 석상 다 부수고 가면 그, 유적 훼손죄 같은 걸로 처벌 받을까요?”
“일단 제국법에 그런 죄가 있긴 하지만…… 이 신전은 그 법에 해당하는 장소가 아니다. 그런데 파괴는 왜?”
“뭔가 불길해서요. 으음, 꼴보기 싫다고 하면 좀 이상하죠?”
“아니, 그대가 그렇게 말하는 까닭이 있겠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감동 받은 얼굴로 라이칸을 응시했다.
방금 그 말은…… 마치 내가 달걀을 닭이라고 말해도 네 말을 믿어, 하는 것같이 무한한 신뢰가 느껴졌다.
“라이칸, 당신 나 정말 좋아하는군요?”
“……어째서 말이 그렇게 되는 거지?”
“후후, 부끄러워하지 말아요. 둘만 있는데.”
“……물론 사실이긴 하다만.”
라이칸이 내 손을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크흠, 일단 그대의 말대로 모든 석상을 파괴하는 건 조금 어려울 거다.”
라이칸의 말은 이러했다.
석상 하나하나를 파괴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이 건물은 전체적으로 풍화되어있고 석상을 부수다가 자칫 기둥이나 벽을 잘못 건드리면 신전이 무너질 위험이 있단 거다.
그 말에 나는 아쉬움을 느끼며 수긍했다.
중요한 건 리제가 말한 물건을 가져오는 거니까.
‘……왜일까. 찝찝함이 떨어지질 않네.’
나는 석상이 있는 복도를 벗어나면서도 마치 누가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듯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오싹하고 찝찝한 기분이 사라지질 않았다.
“여기 한 층이 더 있었나 봐요.”
“계단이 낡았으니 조심하도록.”
리제는 아래에 성물을 보관하는 방이라고만 알려주었지만, 막상 지하 1층에는 그런 방은 없었고, 우리는 한층 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만 발견했다.
다만 돌로 만든 계단은 낡아있던 탓에 우리는 아주 조심조심 걸어 내려갔다.
좀 더 깜깜한 지하가 우릴 반겼지만, 이젠 내가 마법을 쓸 수 있는 탓에 빛을 밝히는 건 어렵지 않았다.
라이칸은 내 마법을 보면서 신기함 반, 무언가 묻고 싶은 듯한 것이 반반 포함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지하 2층에서 성물을 보관하는 방을 찾을 수 있었다.
“아, 라이칸 저긴가 봐요!”
지하 2층은 거대한 광장 형태였고, 방으로 보이는 문을 하나 찾아냈다.
벽에 알아볼 수 없는 글씨가 쓰여있었는데 라이칸이 이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황족의 진명에 사용되는 고대 언어란다.
진명이란 말에 잠시 움찔하기는 했지만 곧 문 앞에 쓰인 단어가 ‘성물’이란 걸 알았다.
“잠겨 있군.”
다만 그 문은 거대한 검은색 사슬과 마찬가지로 검은색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신기하게도 모든 것이 풍화된 신전 속 이 사슬과 자물쇠만은 새것인 양 멀쩡했다.
“잠시 물러나 있도록.”
라이칸이 나를 물러나게 하고서 검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이었다.
[경고! 요정은 자물쇠에 ‘오염’이 묻어 있으니 조심하라고 알려요!]
눈앞에 요정의 창이 다급히 떠올랐다. 나는 바로 라이칸을 제지했다.
‘오염?’
1층에서도 들었던 단어이자, 나를 찝찝하게 만들었던 단어의 등장에 참지 못하고 찡그렸다.
‘요정, 오염을 막는 방법은? 저길 들어가야 퀘스트를 완료할 거 아니야.’
[요정은 빙의자님의 말이 타당하다 여겨요! 그리고 요정은 빙의자님이 이미 오염을 막는 기능을 알고 있다고 말해요!]
어째서인지 이모티콘 하나 없는 요정의 창이었지만, 도리어 이런 메시지가 슬쩍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이젠 요정이 어떤 말을 하든 짜증이 먼저 치미는 것도 있겠지만, 다시 한번 빙빙 돌려 말하는 화법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나는 금방 눈치챘다.
기능? 기능이라고 하면…….
하나밖에 없잖아?
‘나만의 로판 기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