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35화 (235/281)

◈235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74)

서서히 순진한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나는 딱딱하게 굳었다.

아니,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리제는 그마저도 알고 있다는 듯 눈을 휘었다.

그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리제.”

“응 그렇겠지. 그럴 수 있어.”

리제가 팔짱을 끼더니 상체를 뒤로 기울였다.

“못 알아듣겠지. 그래야만 하니까.”

자세만 바뀌었을 뿐인데, 그 삐딱한 자세 하나로 그간 리제에게 가지고 있던 이미지마저 모두 지워지는 기분이었다.

리제가 나더러 누구냐고 물었나? 나야말로 묻고 싶었다.

“이상하네.”

넌, 누구야?

“……어느 회차에서도 이런 일은 없었는데. 그저 우연의 일치려니 했지.”

우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분명 리제는 조금 전 ‘달린’이 아니라고 말할 때, 확신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회차’라는 말.

나는 숨을 삼켰다.

“너……. 리제 맞아?”

“응. 맞아. 달린의 친구 리제.”

긴장이 어린 내 말투와는 다르게 리제의 말투는 가볍기만 했고 평온했다.

“모두가 알고 있는 ‘리제’라는 이름은 그저 애칭에 가까워.”

리제가 가벼이 웃더니 쇼파 손잡이를 툭툭 두드렸다. 곧이어 검지와 엄지를 부딪쳤다.

“내 진짜 이름은 리델라제 트리샤.”

곧 리제의 머리카락이 차차 검게 물들었다. 이뿐 아니라 그녀의 키가 조금 더 커지더니, 동시에 동글동글하게 생겼던 인상이 차차 차분하고 어른스럽게 변했다.

빛나는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검은 머리카락. 보석같이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

……리델라제라는 이름.

나는, 이런 이야기를 알고 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나는, 회귀자야.”

……네 번째 이야기다.

[메인 퀘스트가 도착했어요! ( ๑˃̶ ꇴ ˂̶)♪⁺]

[퀘스트(메인) - ‘진정한 친구란 무엇인가요?’

드디어 네 번째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어쩌면 좋을까요,

네 번째 이야기는 이미 ‘세계의 오류’가 심각하게 훼손해 버린 지 오래 입니다!

너무 오래 지났어요. ……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리제의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지긋지긋했어. 아주 많이……. 이런 삶에 네가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요정의 창을 빠르게 읽는 와중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겁고 나직한 음성이었다. 그 음성에 담긴 우울함과 어둠에 순간 등골이 오싹했을 만큼.

시선이 돌아갔다.

“네가 사라지는 줄 알았다면 나는, 몇 번째인지 모를 지난 삶을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 목소리에는 생각지도 못한 큰 울분이 실려있었다.

분노 가득한 시선과 무게 실린 목소리에 내가 멈칫한 사이, 자신을 잊지 말라는 듯 띠리링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눈을 살짝 옮기면 요정의 창에 쓰인 글씨가 더욱 진해졌다.

당장, 모두 읽으라는 듯이.

[네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의 정체는 ‘무한 회귀자’입니다.

본디 회귀자인 주인공은 ‘세계의 오류’의 계략에 빠져 회귀를 무한 반복 중입니다.

이로 인해 주인공은 끔찍한 강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오직 ‘세계의 오류’를 향한 복수와 증오만으로 살아가는 주인공!

가장 소중하게 여긴 친구 ‘달린 에스테’를 잃고 가진 우울증과 인간 불신증이 최고치에 도달합니다!

네 번째 주인공은 당신이 ‘세계의 오류’와 한편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주인공과 친구가 되어 세계의 오류를 저지하세요.

사실, 네 번째 이야기에서 시작된 오류가 다른 이야기들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대로라면 세계의 모든 ‘이야기’들이 엉망이 되고 멸망할지도 모릅니다.

내용: 회귀자 ‘리델라제’의 신뢰도를 100 달성하세요.

※현재 신뢰도: (산정 중입니다)

기한: 10일

실패 시: 사망, 세계 삭제

보상: 요정의 소원권]

모든 이야기를 읽었을 때, 숨이 턱 막혀왔다.

‘……이게 뭐야.’

팔에 매달린 사이렌 오더를 보았다.

왜, 진작 보지 못했을까? 팔찌는 새빨간 빛을 발하고 있었다.

리제의 달라진 모습에 놀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주 오래 전, 리제와 함께 있을 때 사이렌 오더에서 빛을 발한 것처럼 보였지만, 착각으로 치부했던 것을 기억했다.

‘왜, 진작에 빛이 나지 않았던 건데? 이렇게나 자주 붙어있었는데?’

[네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정해진 조건을 달성하지 않으면 정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나는 숨을 삼켰다.

‘설마, 그 조건이라는 게…… 리제가 내가 진짜 ‘달린’이 아니란 걸 깨닫는 거야?’

[요정은 그렇다고 대답해요!]

깊은 물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이건 기만이었다.

메인 퀘스트에서 보았던 말, 리제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 ‘달린 에스테’.

그토록 소중한 친구를 잃은 사실을 깨달아야, 네 번째 메인 퀘스트가 시작한다니?

‘너무…… 잔인하잖아.’

얼굴을 쓸어내렸다. 침착하자. 침착해.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번 네 번째 이야기는 아주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제야 이 요정 놈이 내가 읽은 로판들에 대한 기억을 주는 건가 싶을 정도로.

……인상 깊게 읽은 소설이었다.

[세계에 대한 정보가 일부 해금되었어요!]

[네 번째 소설 <그 가주, 내가 되겠습니다>

사이다 #가족 모두가 후회한다 #왜 이제 와서? #가주는 나야 #상단주인여주 #집착남 #암흑세계 보스 남주 #서브 남주 맛집

빙의자님의 평점: ★★★★★

[독자 한줄평: 지금까지의 가족 후회물이랑은 다릅니다. 가족이 후회는 하는데 여주가 용서를 안해요...!(물론 가족이 진짜 나쁜놈들입니다!!!!) 회귀물 클리셰인데 복수가 아주 시원시원하고 여주가 가주까지 해먹습니다. 복수과정이 상세하고 상단 차리는 것도 재밌네요, 처절합니다. 과정이 독특하고 재밌어서 강추합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 한 줄 평은 너무나 익숙했다.

‘……이건 내가 쓴 거야.’

사람에게 잊을 수 없는 소설이 하나씩 있다.

재미와는 별개로, 내게는 이 소설이 그러했다.

아프고 힘들었던 삶을 살았던 여주, 회귀해서 다시 한번 찾아오는 위기를 이겨내지만 그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처절하게 승리하는 여주.

나는 대체로 남자주인공의 매력을 즐기며 소설을 읽는 독자였지만, 이 소설만은…… 여자주인공을 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때 내가 이불을 적시며 울었던 이야기 속 주인공이 눈앞에 서 있었다.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나는 속으로 허탈하게 미소지었다.

‘알아보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모습이 완전히 달랐는데, 어떻게 알아봐?

소설 내에서 여주가 아주 잠시 다른 사람으로 변장해 숨죽이고 사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사용했던 이름이 ‘리제’였던가?

이제 생각해보니, 이전의 외양은 그때의 모습인 것 같았다.

갈색 머리를 가진 귀여운 친구, 날 향해 언제나 손수 쿠키를 구워오던 수줍은 미소를 가진 친구는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진정하자.’

정신차리기 위해 손을 꾹 쥐었다가 폈다.

이 이야기는 정리하자면 회귀한 여주가 자신을 학대한 가족을 버리거나 복수하고 가주가 되는 이야기다.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자면, 여주는 가족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상단을 차리는데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상단주로 활동 중에 남자주인공을 만나 그가 복수 동지로 참여해 함께 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1번의 회귀도 아니고 무한 회귀, 즉 회귀를 반복했다?

대체 지금 저 리제, 아니. 리델라제가 어떤 상태일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메인 퀘스트에 보였던 문구들이 신경 쓰였다.

‘무한 회귀로 인해 끔찍한 강자가 되었다? 게다가…… 우울증에 인간 불신증.’

어째 말들만 들어도 두 번째 메인 퀘스트, 북부 대공의 광증을 막는 것보다 훨씬 어렵게 느껴졌다.

[이제야 말할 수 있다! 처음 ‘세계의 오류’가 나타난 이야기는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나는 두 번째 메인 퀘스트, 뒤틀린 시간에서 휴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거기서 분명 세계의 오류를 처음 마주했었지.

‘그 이야기부터 시작해 다른 이야기에도 깽판을 쳤다?’

[요정은 그렇다고 말해요, ‘세계의 오류’가 나타난 순간 다른 이야기에도 오류가 발생했어요. ‘세계의 오류’는 이를 발견하고 더욱 크게 만들었다고 말해요.]

마지막이라서일까, 요정은 선선히 지금까지는 말하지 못했던 건지 말하지 않았던 것인지 모를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세계의 오류’는 네 번째 이야기를 가장 마음에 들어했어요. ‘세계의 오류’의 본체도 이 이야기 속에 있다고 말해요!]

이 이야기를 읽는데, 요정의 창이 치지직 거리면서 꺼졌다.

나는 흠칫 놀라는 동시에 시선을 옮겼다.

리제가 나를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능력인지는 몰라도, 리제의 검은 머리카락이 너울너울,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이렇게 보니,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새카만 머리카락이 잘 어울렸다.

“다시 물을까? 넌, 뭐야. 네가 뭔데 내 소중한 친구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리제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심장이 조금 아팠지만 한편으로 나는 선택해야 했다.

‘……여기서 진실을 말하느냐.’

아니면.

‘지금까지의 메인 퀘스트들처럼 약간의 거짓을 더해 퀘스트를 완료할 것인가.’

내가 리제를 빤히 바라보는 동안, 리제의 근처에서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이제 내게는 마력이 있었고, 어렵지 않게 리제 주변의 기운이 아주 위험한 것이란 걸 알아냈다.

[신뢰도 산정이 끝났습니다! 회귀자 ‘리델라제’의 빙의자님을 향한 신뢰도가 공개됩니다.

신뢰도: -512 / 100]

나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야 원, 첫 번째 메인 퀘스트 생각나네.’

그때는 호감도 올리기였지?

시작이 마이너스인 것도 같았다. 이 무슨 수미상관인가 싶었다.

[요정은 모든 진실을 직접 말하면 사망할 거라고 속삭여요.]

‘조용히 해. 기억하고 있으니까.’

시작과 끝이 같다라.

나는 결정을 내렸다.

“리제.”

리델라제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나는 생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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