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36)
“……어어, 그렇군요?”
“어머나, 세상에. 고백을 이렇게 아찔하게 하는 분은 처음 보네요. 너무 돌려 말하면 때로 상대방은 알지 못한답니다, 대마법사님?”
내가 얼떨떨하게 대답하는 사이, 공녀 언니가 슬쩍 끼어들었다.
발데르의 얼굴이 처음으로 맞은편으로 돌아갔다.
내게 지었던 부드러운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차가운 표정이었다.
반쯤 뜨인 눈조차 없이 차가운 표정을 보니…… 확실히 이 남자가 내 취향의 얼굴이구나 싶었다.
아주 차갑고 무심한, 거기다 깊이를 품은 날카로운 빛마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적당히 끼어들어요. 공녀.”
“흐응, 무섭네요. 하지만 제 역할을 잊지는 않으셨지요? 저는 영애의 스승이랍니다.”
어째 가볍던 분위기에서 점차 무겁고 살벌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나는 황급히 손을 들어 올렸다.
저기요, 여러분. 저어기 정자 주변에 우릴 쳐다보는 시선이 엄청나게 많다는 거, 다들 잊지 않으셨지요?
게다가 왜인지, 발데르는 그냥 쳐다본 것뿐인 것 같은데 황태자가 어느새 공녀 언니의 앞으로 팔을 뻗어 가로막는 모습을 보였다. 와, 뭐야. 저건 지키려는 자세 같은데?
“자자, 다들…… 왜 그러세, 우욱!”
“영애?”
“에스테 영애!”
난 그저 이 세 사람을 정말 진정시키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우우욱! 우욱!”
입을 가로막았지만 차마 참지 못한 붉은 것이 손가락 사이로 뚝뚝 흘러내렸다.
나는 멍하니 테이블과 옷에 떨어진 붉은 자국을 보았다.
‘피? 왜, 내가……?’
피였다.
피 자체가 낯설지는 않았다. 이미 무수히 많이 흘려보지 않았던가.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피를 흘릴 이유가 없었다.
평화로운 한 때였다.
비록 지금 막 작은 실랑이 아닌 실랑이가 벌어질 뻔했지만…… 내가 겪어온 메인 퀘스트 중에서는 아주 안온하고 편안한 수준의 퀘스트였단 말이다.
그런데 대체 왜?
내가 놀라 피를 뚝뚝 흘리는 사이,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혼비백산했다.
하지만 한가닥 하는 공녀 언니와 황태자답게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았다.
“……지병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혹시 이렇게 피를 흘리는 병인가요?”
“지병? 아니면 독은요? 음독일 가능성은?”
“…애석하게도 가능성이 ‘0’은 아니겠군요. 날 노리려는 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가 갈수록 멀게만 느껴졌다.
어서 빨리 나를 옮겨야 한다는 말까지 들은 것도 같은데 어느 순간 더는 들리지 않았다.
‘이상한데……? 왜 건강 수치를 알리는 요정의 창이 안 떠?’
소리가 멀어질수록 신기하게도 이성은 명료해졌다.
의문점이 차례로 떠올랐다.
본래 내 건강에 이상이 있을 시 요정이 가장 먼저 나타나 내 상태를 알려야 했다.
내가 너무너무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놈은 항상 건강에 있어서만큼은 정확한 경보기였다. 무엇 때문에 아픈 건지, 얼마나 아픈 건지, 아무튼 내 상태가 얼마나 최악이 되었는지 상황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이상해. 두 번째 이야기까지 많은 건강 수치를 적립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세 번째 이야기에 접어든 나는 이렇게 피를 흘릴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왜?
무엇보다 요정의 창이 보이지 않는 점이 나를 초조하게 했다. 나는 숨을 거칠게 쉬었다.
일단 집으로 가야 하나? 가서 차분하게 생각을 해봐야…….
당장 여기서 요정을 부르느니 일단 집에 드러누워 생각을 하는 쪽이 좋을 것 같다.
‘마침 발데르도 옆에 있으니 나를 집으로 데려가 달라고 하자.’
그 순간 머리로 차가운 감각이 느껴졌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면…….
“달린.”
처음 보는 표정을 한 발데르가 보였다.
그의 주변으로 그의 예쁜 눈색과 같은 주황빛 아지랑이가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혹시…….’
요정의 창이 나오지 못하는 건 발데르 때문인걸까?
왜, 이전에 발데르가 요정의 창을 강제로 치워준 적이 있지 않았나.
이런 생각은 차차 느려져만 갔다. 우욱, 나는 다시 한번 피를 토했다.
[이런,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대폭, 아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떨어지고 말았어요! (⌯˃̶᷄ ﹏ ˂̶᷄⌯)゚ 현재 건강 수치: 23]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어요! 이 이상은 위험합니다! 현재 건강 수치: 18]
뒤늦게 정신이라도 차린 듯 푸르른 창이 미친 듯이 튀어나왔다.
아, 놀라라. 이 원수 같은 놈이라도 나타나지 않으니 얼마나 불안하던지.
그런데 대체 왜 이렇게 된 건데?
마지막으로 내 건강 수치가 적어도 50은 넘었을 텐데…….
내 입술로 피가 주르륵 흘렀다.
[빙의자 님은 ‘세계의 오류’가 남긴 독에 당했습니다! 빙의자 님의 영혼을 지탱하는 힘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어요……! 현재 건강 수치: 15]
조금씩 아득해지는 시야 속, 드디어 요정이 이유를 뱉어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뭐? 세계의 오류……?
그놈이 왜 이 순간에 나와……?
[요정이 사과해요. 요정은 깨닫는 것이 늦었어요! 하지만 요정의 탓이 아니에요! (இдஇ; ) ]
“하아, 대체 그게 무슨…….”
내 몸이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더는 지탱할 힘이 없었다.
그러나 형편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대신 단단한 것이 나를 붙잡아 주었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내 턱을 들어 올렸다.
“……피를 흘린 채로 고개를 숙이면 기도가 막혀서 위험해요, 달린.”
나지막하고 차분하며 부드러운 목소리.
발데르가 나를 고쳐 안으며 속삭였다.
“혹시 자살하고 싶었던 거예요? 힘들었어요?”
“……네?”
이건 또 무슨 독수리가 궐련 피우는 소리야?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콜록 기침을 했다.
어느새 맞은 편에는 황태자와 공녀 언니의 사람들인지 기사들이 잔뜩 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째서인지 우릴 보면서도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나는 이것이 혹시 발데르 주변으로 일렁거리는 기운 때문은 아닌가 싶었다.
예전에 라이칸이 화를 내거나, 휴고가 부하들을 다그칠 때 무시무시한 기운이 흘러나오곤 했다.
그 기운을 정면으로 받은 사람들은 저런 얼굴을 했던 것 같았으니까.
“……왜 이다지도 많은 마법독을 삼켰어요?”
발데르가 내 이마를 쓸어주는 동시에 머리가 시원해졌다.
마법독? 그게 무슨 말이지.
“이건, 천천히 죽어가는 방법이에요. 조금씩, 조금씩, 독이 쌓여 언젠가는 세상 그 어떤 해독마법도 해독약도 통하지 않는 수준에 다다랐을 때 숨이 끊기는 방법.”
“…….”
“달린, 당신은 왜 이런 방법을 택했죠?”
발데르가 내 얼굴을 쓸어주고 어깨를 토닥일수록 고통은 덜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기운을 쏟아낸 것처럼 나른해졌다. 정신을 붙잡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잠이 쏟아질 것 같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 겠어요.”
가까스로 뱉은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다 죽어가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지켜보던 황태자와 공녀 언니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갔다.
하지만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건강 수치가 떨어지는 게 멈췄어.’
다행스럽게도 더는 떨어지지 않는다.
이러다 수치가 0이 되어서 오랜만에 ‘불굴의 의지’ 스킬을 쓰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천만다행이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마지막 남은 이성을 참고 차근차근 생각해보았다.
‘조금씩, 조금씩 독이 쌓여왔다고?’
마법 독이라니, 당연하겠지만 금시초문이다. 내가 언제 이런 약에 당할 일이 있었냐고.
‘하지만 ‘약’이라는 이 자체에 집중한다면?’
생각나는 게 있었다.
‘……내가 먹은 약.’
그간 내 건강을 위해 먹어온 약, 지병을 치료하겠답시고 먹어왔던 무수히 많은 알약들.
나는 언제부터 이 약을 먹었다고 했더라?
‘분명, 내가 빙의하기 전부터 먹었다고 했어…….’
힘이 빠져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온몸에 소름이 확 돋았다.
설마, 내가 빙의하기 전부터 ‘달린 에스테’와 ‘세계의 오류’ 사이에 무언가 관계가 있었단 말이야?
무엇 때문에 세계의 오류는 ‘달린 에스테’를 천천히 죽여야 했는가?
‘그럼 내, 부모님은…….’
설마 부모님도 세계의 오류가 벌인 일에 동참했단 말이야?
그러나 나는 억지로 고개를 흔들었다. 혼신의 힘을 짜내어 흔든 것이었다.
‘아냐, 정신 차려 달린! 아무리 죽어가는 상황이라도, 천사 같으신 분들에게 무슨 헛소리야.’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그동안 딸을 죽이는 약인 줄도 모르고…… 먹였단 말인가.
눈물이 핑 도는 동시에,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꾹 참았다.
“끕, 쿨럭, 콜록콜록!”
그렇지 않아도 숨이 가쁜 참에 갑작스럽게 숨을 참았던 탓인지 기침이 흘러나왔다.
“대마법사! 일단 그 기운 좀 누르시오! 에스테 영애까지 질식하게 만들 셈인가?”
“대마법사님, 지금 영애는 안정이 필요해요!”
황태자와 공녀 언니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기침을 참으며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두 사람은 마치 발데르가 나를 쉬지도 못하고 어디로도 데려가지 못하게끔 잡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아니야.’
조금 전엔 순간적으로 너무 아파서 느끼지 못했지만, 발데르 주변으로 보이는 이 기운.
분명 나를 진정시키는 의도인 것 같았다. 발데르가 등을 쓸어는 동시에 더욱 상태가 나아졌으니까.
이번에 기침과 함께 피를 흘린 건 그저 방금 깨달은 진실에 놀라 터져 나온 것뿐이야.
‘일단 기절하는 대신에 발데르에 대한 오해도 풀고…… 이 상황을 어떻게든 설명해야…….’
그러나 열심히 닦았음에도 미처 신경 쓰지 못한 가는 핏줄기가 입가로 흘러내렸다.
닦고 싶었으나 더 이상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타닥타닥 불에 지진 듯 고통받던 신경줄이 더는 못하겠다고 파업이라도 선언한 것처럼, 온몸을 꼼짝할 수 없었다.
가물거리는 시야에 왜일까, 익숙한 얼굴이 잡혔다.
‘어라…….’
왜 저 사람이 여기에 있지?
나는 억지로 눈꺼풀을 붙잡으려 했다.
정자 바로 밖에서 놀란 듯이 입을 벌린 사람, 그 어느 때보다 놀란 표정. 사색이 되어…….
마치 자신이 죽을 것 같은 표정.
‘라이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