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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79화 (179/281)

◈179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18)

“아, 정말, 진짜 재밌네요. 영애? 내 앞에서 이렇게 멋대로 구는 영애가 잘 없는데. 어디서 이런 보물이 나타났을까. 과거 에스테 가문의 선조들이 가졌던 당당함과 순발력이 당신에게도 없지 않은 모양이네요.”

에스테는 달린 에스테가 아프면서 서서히 몰락했다. 병 치료를 위해 수많은 돈을 썼기 때문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뭐, 좋아요. 이미 다 보였다고 생각한 마당에 그냥 말하죠. 난 지금 쓰레기와 약혼 중이에요. 당장 쫓아내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그게 어려워진 데다 곧 사람들에게 도 대대적으로 알려질 예정이라 아주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요.”

공녀 언니는 생각보다 순순히 본론을 얘기했다.

말을 하는 걸 보아선 조금 있으면 이 제국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될 일이라 더 편히 말하는 것 같았다.

“내 목적은 그놈을 쫓아내는 것, 다신 이 저택에 들이지 않는 것. 이 둘뿐이지만.”

“잘 안되신단 거지요? 음, 이사야 후작님을 쫓아내는 게…….”

공녀 언니는 나를 보더니 재밌다는 듯 싱긋 웃었다.

“저택 정문에 들어오자마자 그놈을 만났죠?”

“어? 어음, 네…….”

“내가 이래서 집으로 친구를 부르질 못해. 일단 유혹부터 하고 보거든요.”

“오…….”

생각보다 더 쓰레긴데?

“집으로 친구를 부르지도, 살롱도 열지 못한 채로는 나만 고립될 뿐이죠. 그리고 그 남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바로 이것일 테고, 난 잘 알고 있어요.”

“……언제부터 그러셨던 건가요? 가족분들은 아시나요?”

공녀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 아버진, 그놈을 아들처럼 여겨요. 아들이 없으니 더욱 아들을 가지고 싶어하던 분이셨죠. 본래도 그렇긴 했지만 그래도 외동딸인 나를 아주 사랑하셨던 분인데…… 어느 순간부터 그놈에게 모든 권한을 넘기고 있고.”

이사야 후작이 하는 일을 그대로 방조하는 중이란 말이었다.

중간중간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긴 했지만 아예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라 나는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장, 그 후원에 영애가 있었을 줄이야. 나도, 뮌 그놈도 생각도 못 했던 상황이에요. 그래서 사실 아주 불쾌하고 또 짜증이 나긴 했지만…….”

내게 그 장면을 들킨 것이 이 언니에게는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나보다.

“……과거에 뮌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아니, 이건 중요하지 않죠. 어쨌거나 나는 집안끼리 맺어진 이 약혼이 세간에 알려지기 전에 산산조각 나길 바라요. 다신 그놈이 발을 못 들이게도. 영애를 부른 건, 그날 본 것을 모두 잊으란 의미로, 경고하기 위해 불렀단 거라 치죠.”

아련해지던 얼굴이 다시 표독스럽게 돌아와 나를 올곧이 응시했다.

소꿉친구, 짝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현재는 필요하면 친우까지 유혹하는 약혼자.

모든 것을 들으면서 이 언니 참 마음 고생 했겠구나 싶었다.

평소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입도 벙긋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자크 닫는 시늉이라도 했겠지만.

“으음, 실례지만 제가 만약 공녀님께서 바라시는 걸 들어줄 수 있다면 어쩌시겠어요?”

“영애가요? 글쎄요. 그렇게는 보이지 않는데요.”

으음, 그렇게 보일 수 있죠. 하지만 저는 전생의 정복 황제를 감동시키고, 신전의 음모를 막았으며! 북부의 멸망을 막아낸 사람이랍니다.

제 입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말입죠.

“영애에게 바라는 건 입을 다물어주는 거예요. 부탁이 아닌 경고죠. 그래요, 어쩌면 이야길 나눌 사람이 없어 오랜만에 즐거운 마음으로 쓸데없이 주저리 떠든 것 같기도 하네요.”

“앞으로 이렇게 들어드리는 것뿐 아니라 확실하게 도와드릴 수 있다니까요?”

“그대가요? 어떻게 말이죠?”

그렇게 못미더운 눈을 하면 상처, 까지는 아니고 그럴 수는 있다곤 생각되지만.

“결국 공녀 언, 아니 공녀님께서 바라시는 핵심은 그 남자와 약혼을 하지 않는 것. 공작가에서 완전히 쫓아내서 다시는 상종하지 않는 것 아닌가요? 그럼 핵심부터 바꾸면 되죠.”

나는 짝짝, 박수를 치며 해사하게 웃었다.

“공녀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러자 표독스러운 얼굴을 한 공녀 언니의 얼굴이 한순간 애매해졌다.

“가짜 상대라도 구하라는 건가요? 그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마지막까지 비밀을 지켜줄 마땅한 상대를 구하는 것도 어렵고.”

“거기다가 때가 되면 적당히 헤어져 줄 상대로 구하셔야죠. 그런 상대를 제가 구해드리면요?”

“……영애가 말인가요?”

“네!”

“당신이 대체 왜 날 돕죠?”

오, 이 언니의 얼굴로 불편한 심기가 드러났다.

보통 이렇게 고귀한 사람들은 자신을 동정하는 것에 더 빡쳐 하는 경우가 많지.

나는 난감한 티를 내지 않으면서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야 저 또한 공녀님께 바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그게 뭔데요?”

“공녀님께서 저와 협력하시기로 한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그냥 들으면 무슨 황당한 개소릴 하냐고 하실 수 있어서요.

이런 내 태도가 이상한지 공녀 언니는 찡그렸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의심스러운 자와는 손을 잡지 않아요.”

“이런, 우연이네요. 저도 그렇답니다!”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공녀 언니가 눈을 가늘게 좁히는 동시에 아름다운 얼굴이 삐딱하게 돌아갔다.

곧 예쁘지만 사악하다라는 느낌에 걸맞는 미소가 스쳐 갔다.

“어쩐지 영애 당신의 얼굴은 남을 속이고 등쳐먹을 얼굴로는 보이지 않는군요. 그래요, 굳이 따지자면 내가 어린 시절 기르던 조그만 고양이를 생각나게 한달까. 귀가 짧고 높은 곳을 무서워하던 조금 멍청한 귀여움이 있던 고양이였죠.”

오, 이젠 고양이까지 간 건가. 래빗에게 하도 갓 태어난 토끼니, 사슴이니, 햄스터니 하는 소릴 들어서 면역이 된 건지. 난 그냥 웃고 말았다.

“종종 듣던 소리네요.”

“좋아요, 그럼 어디 한번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보죠. 그래서 영애가 내게 어떤 방법을 제시할지 궁금하네요. 말해봐요. 앞으로 어떻게 할 거죠? 아니, 어떤 상대를 구해주려고?”

“음, 어…….”

나는 눈을 굴렸다. 대답을 원하는 시선이 바로 앞에 있었다.

음, 사실 이 언니랑 일단 협력해야 하니 지르고 본 건데 여기서 이렇게 말할 순 없으니.

그래, 일단 부탁할 곳이 아예 없는 건 아니잖아? 더 지르고 보자.

“기다려주세요. 우선은 목록을 뽑아서 드려야 할 테니까요.”

“흐응? 설마 남자 목록?”

내가 대답하지 않았지만 침묵은 충분히 긍정의 답이 되었다.

그러자 공녀 언니가 흥미롭다는 듯 자신의 목을 느릿하게 팔짱을 꼈다. 동시에 깊은 웃음이 스쳤다.

장난스럽기도 하고, 확신이 스민 미소였다.

“과연, 당신을 둘러싼 여러 소문 중에 대체 어떤 것이 진실일까 싶었는데…….”

그 웃음이 순간 은밀한 것으로 변했다.

“이렇게 협력하게 된 김에 내게만 말해봐요, 영애.”

“네? 뭐, 뭐를요……?”

“정답이 있긴 있었나 본데.”

그러니까 뭐가?

“수많은 소문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게 하나 있었단 말이죠…… 양다리를 걸쳤던 건가요?”

예?

나는 대답할 타이밍조차 잃고 눈을 깜빡거렸다.

“양다리라니 그게 무슨.”

“아, 그렇다고 진짜 양다리라는 건 아니고 표현하자면 그렇다는 거죠. 양손에 꽃, 거기다 이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두 송이나 손에 쥔 여자?”

“…….”

“거기다 예쁘고 아름답지만 타고난 병약함으로 인해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도 없어, 성격이 어떤지도 아무도 몰라. 그저 이름밖에 알려진 게 없는 상태에서 어느 날 황녀님의 유모로 나타남. 다음 행보는 대공의 약혼자, 그리고 파혼. 2황자님과 함께 연회장 입장까지. 세간의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던걸요?”

웃음을 가득 머금은, 꽤나 친근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어쩌면 세기의 악녀 등장이 아닌가 하고?”

[요정의 눈은 틀리지 않았어요!]

닥쳐.

요정에게 울분을 토했지만 풀리지 않았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이 망할 요정 놈아! 내 평판 물려내! 물려내라고!

생존을 위해 허겁지겁 뛰어다니는 사이, 그런 나의 모습이 세간에서 그리 비쳤다니.

탄식을 멈출 수가 없었다! 와, 난 억울하다고!

[퀘스트(서브)- ‘내가 바로 악녀의 계승자!’

축하드려요, 빙의자님의 악독함이 처음으로 올랐습니다! (+5) 현재 악독함: 5/100]

이 와중에 요정은 멈추지 않고 내게 창을 띄웠다.

마치 자랑스러워하라는 듯이!

뒤지고 싶나, 진짜.

‘거기다 악독함이 뭐야? 결국 사람들이 보는 눈에 따라 오르는 거라면 차라리 악명도가 맞는 거 아니야?’

[빙의자님의 요청을 받아들여 호칭이 정정됩니다. (악독함 -> 악명)]

[요정은 의견을 적극수렴하는 착한 요정이 되기로 하였어요! ٩(•̤̀ᵕ•̤́๑)૭✧]

젠장, 웃기지 마! 니가 언제부터!

그런 거라면 두 번째 이야기에서 나 죽을 것 같을 때 도와주기라도 하던가!

[하지만 요정은 정해진 규칙과 운명은 바꿀 수 없는걸요.]

[요정이 슬퍼합니다 (╥╯^╰╥) ]

내가 진정한 건 몇 분이 흐른 뒤였다.

신기하게도 이 공녀 언니는 내가 홀로 분을 삭이는 시간 동안 얌전히 기다려주었다.

물론 옆에 있던 차를 마시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구경은 했지만 말이다.

“무슨 영문인진 모르겠지만 내가 말한 건 사실이 아니었나 보죠?”

“네에……. 절대요. 절대로 아니에요.”

“그렇구나. 영애의 울그락불그락 하는 얼굴을 보는 건 꽤 재밌었어요.”

재밌으라고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공녀 언니가 즐거웠다면 됐다.

내가 어색하게 웃는 동안 이 언니가 톡톡 우아하게 입술을 닦았다.

“어쨌거나 농은 아니었어요. 이렇게 되었으니 잘 부탁해보죠.”

“네…… 크흠, 맡겨만 주세요. 최선을 다할게요.”

세 번째 이야기까지 와서 죽기는 싫거든요.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이런 타이밍엔 악수를 하는 게 아닌가? 공녀 언니가 눈을 깜빡이더니 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것 참, 악수를 한 건 아버질 대신해서 가주 대리 노릇을 하던 것 이후로 처음인데.”

가볍게 흔든 손이 풀려났다.

“그래서 영애가 내게 바라는 건 뭐죠?”

멘탈이 탈탈 털린 이 시점에서 ‘당신의 악녀 기질을 원스텝부터 배우고 싶어요.’ 하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난 우선 공녀 언니의 일이 어느 정도 해결되거나 해결될 기미가 보이면 말하겠다고 했다.

이 언니는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내가 뭘 원할지 꽤 기대된다면서.

협력을 맺은 자리는 이렇게 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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