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13)
* * *
“롤린!”
래빗이 폴짝폴짝 달려왔다. 체통에 맞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나는 활짝 웃으며 우리 황녀님을 반겼다.
래빗의 뒤쪽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황태자가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그가 쯧, 혀를 찼다.
‘아이고야, 시선이 살벌하기도 하지.’
그는 래빗의 뒷모습을 보며 아쉬운 기색이 가득했다.
“황태자 전하.”
그러나 곧 자신을 찾으러 온 기사가 다가오자 한숨을 살짝 쉬면서 그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도 나를 보며 부러운 시선을 숨기지 않더라.
‘꼬시긴 한데, 약간은 안됐기도 하고.’
넘치는 애정을 조금만 절제하면 좋을 텐데, 우리 래빗은 고양이 같은 구석이 있어서 지나친 관심을 보이면 오히려 귀찮아했다. 유일한 예외가 나였을 뿐.
“왜 그로나?”
“아, 황태자 전하가 노려봤어요.”
“……다움에 눈알울 찔러줄가?”
“아니요! 농담, 농담이었어요. 하지 마세요!”
“이 몸도 농담이오따.”
거짓말, 황녀님은 거짓말 안 하시잖아요!
“구래, 구래서 데이투는 잘 했나?”
“아? 음, 아하하하.”
그걸 잘 했다고 해야 하나. 내가 답을 슬쩍 피하자, 래빗은 나를 흘끗 보다가 이내 말을 돌려주었다.
“젊운 사람이 욘애를 해서 나뿔 것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의무눈 아니지.”
“아하하하.”
이런 곳에서는 눈치가 또 빠르시다니까.
“롤린, 궁굼한 게 하나 있눈데.”
“네, 황녀님.”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흘끗댔다. 나보다는 래빗에게 관심이 많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폭군을 비롯한 황자들의 성격을 아주 잘 아는 이 나라 귀족들은 적당히 거리를 지켰다.
‘어째, 갈수록 나한테 몰리는 시선이 늘어나는 것 같은데.’
꿩 대신 닭이라는 건지.
“네가 받았다눈, ‘계시’ 말인데…… 지굼도 진행 중인 곤가?”
래빗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주변의 시선을 생각해서 목소리까지 낮춘 채였다.
그러나 나는 덩달아 진지해지기는커녕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래빗이 진지하다는 건 알겠는데…….
너무 귀여웠던 탓이다!
‘우리 황녀님은 대체 언제까지 귀여워지실 생각이지?’
분명 여기서 이걸 티 내면 또 부루퉁하게 볼을 부풀릴 것 같아 얼른 꾹 눌러 참았다. 표정 관리, 표정 관리.
“크흠, 흠흠. 맞아요. 아직도 진행중이에요. 그 ‘계시’요.”
이렇게 말하며 슬쩍 허공을 보았지만, 요정의 다른 반응은 없었다.
“북부에서 하돈 고를 계속 하고 있눈 곤가?”
“아뇨, 아뇨. 그건 이미 끝났고요. 새로운 거요.”
그러자, 래빗이 또 해야 할 일이 있는 거냐며 더욱 심각해졌다. 그러게 말이에요. 대체 이놈의 퀘스트는 언제 끝나는 건지.
“참고로 이야기 드리자면 이것도 끝이 아니긴 해요.”
“하지만 요본 것도 열심히 해야 하눈 고지?”
“네, 맞아요.”
난 쓴웃음을 지었다.
세 번째 메인 퀘스트를 아직 확인하진 못했지만, 패널티는 아마 100퍼센트 확률로 죽음일 것이다.
“그롬 이본 계시눈 수도에서 하눈 곤가?”
“아마도요.”
일단 악녀 후보와 대마법사 모두 수도에 있으니까. 정말 다행이야. 이번엔 저 먼 동쪽으로 가라거나 사막이 있는 서쪽으로 가라고 했다면…….
‘까라면 까겠지만, 요정한테 그지 같은 새끼라 욕 엄청 했겠지.’
내 슬픈 운명을 곱씹고 펑펑 울면서 말이다.
“그롬 내가 돕겠다. 아니 이 몸이 도울 수 있눈 게 많울 고다!”
“와, 정말요? 너무 든든한데요?”
나는 사양하지 않고 냉큼 받아들였다. 북부에서도 느꼈지만 이 황실에서 아마도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우리 황녀님의 도움은 정말 큰 도움이 되니까.
얼른 받아들였더니, 래빗이 더욱 뿌듯해하더라.
“이 몸만 미도라! 황졔, 아니, 부친도 내 손에 있노라!”
“황녀님, 말투, 말투 신경써 주세요. 그리고 호칭도요.”
그러나 래빗은 이렇게 고마운 말을 하고선 몇 분 뒤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어디론가 떠나야 했다.
그도 그럴 게 황제 폐하께서 막내딸을 부르셨으니까.
‘아니, 무슨 팔려가는 소처럼 따라가시네…….’
그러나 황녀는 나에게 마지막 말을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랏나, 달린! 젊운 사람은 젊운 사람이 많은 곳에서 놀아라! 요기 있소라!”
“어엄, 네에…….”
……가만 보면 아직도 무의식 중에 아저씨처럼 구는 모습이 남아있다.
본인은 이제 그만 젊다 못해 어리다는 사실을 무의식에서도 깨달아주시면 좋을 텐데 말이다.
“달린!”
래빗이 사라진 자리는 허전하지 않았다. 금방 나타난 리제가 채워주었기 때문이었다.
“아, 리제. 춤 추고 온 거야?”
“응! 에스테 영식이랑.”
“에스테 영식은 무슨, 언제나처럼 파올로 경이라 하지 그래?”
“그으, 아, 아니야!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음, 더 격식을 차려야…….”
리제가 잠시 허둥지둥하는가 싶더니, 손 부채질을 하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황녀님과는 좋은 시간 보냈어?”
“물론이지. 언제나 최고야.”
짜릿해. 귀여운 거 최고야.
“그보다 리제 있잖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나는 조금 전 래빗, 라이칸과 함께 나갔던 복도 쪽을 슬쩍 보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헤벤 공녀님이랑 이사야 후작님에 대해서 알아?”
“으응? 알기야, 당연히 알지만……. 그분들은 갑자기 왜?”
나는 주변을 슬쩍 돌아보고는 조금 전 라이칸과 함께 보았던 광경에 대해 말해주었다.
사실 내가 더 궁금한 사람은 악녀 후보인 공녀 언니 쪽이지만, 이사야 후작이라는 주변 인물도 함께 알아둬서 나쁠 게 없겠지.
“아, 두 분이 소꿉친구란 건 들었어.”
“맞아. 헤벤 공작가와 이사야 후작가는 아주 오랜 친분이 있으니까. 그 두 분도 오래전부터 유명했었어. 사실 이대로 약혼하지 않으실까 했는데…….”
“했는데?”
“아니, 사실은 할 뻔 했거든? 집안끼리는 거의 약혼 관계나 다름없었대.”
리제가 나처럼 주변을 슥슥 둘러보고는 내 귀에 속닥거렸다.
“그런데 거의 파혼하게 된 거지.”
“왜?”
“그게……. 후.”
리제가 숨을 꼴깍 삼켰다.
“이사야 후작 쪽이, 이름난 바람둥이야.”
“헉, 세상에.”
“그래서 암묵적으로 있던 약혼을 파기했다고 해. 아, 참고로 이건 세간엔 알려지지 않았어, 달린.”
“……그런데 리제 넌 어떻게 아는 거야?”
“으음, 유능한 상단이 있어서……?”
대체 리제가 도와주고 있다는 상단은 뭐 하는 곳이지?
급한 불만 끄면 꼭 한번 살펴보듯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부 정보에 이어서 이렇게 은밀한 정보를 또 알고 있다니.
“사실 정략결혼 관계에서는 따로 애인을 두는 게 이상한 게 아니잖아. 제국에 미남 미녀가 많기도 하고. 그래서 다들 이사야 후작이 여성 편력이 심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해도 다 그러려니 했거든. 어차피 부인은 헤벤 공녀가 될 거라 생각했으니까.”
“와, 진짜 싫다.”
조금 전 대화를 떠올렸을 땐, 공녀님은 후작을 좋아한 것 같았는데…….
그런 바람둥이를 진심으로 좋아했던 건가? 그 언니 마음고생 심했겠네.
“그런데 달린, 황자님과 밖으로 나갔다 왔다니 너 몸은 괜찮은 거야? 밤공기가 찬데 감기 걸리면 어떡해…….”
“아냐, 나 밖에서 20분도 있지 않았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난 네가 바깥에 1분밖에 있지 않더라도 염려할 거야.”
리제가 살짝 울상을 지으며 내 손을 꼬옥 붙들었다.
“난 항상 네가 다시 한번 쓰러질까 봐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
사실 최근 건강 수치가 매우 안정적이라 예전처럼 쓰러질 일은 없었다.
첫 번째 메인 퀘스트 할 때가 정말 쓰레기 수준이었긴 했지만.
“그, 하지만 리제, 1분이라니 사람이 깃털도 아니고 그 정도로 쓰러지지는…….”
“넌 깃털이야!”
현재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곳은 벽에 가까운 곳으로, 곳곳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대화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리제가 소리 높여 말한 탓에 주변 이들의 시선이 몰렸다.
한 미남께서 ‘깃털?’하고 중얼거릴 때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질 것 같았다.
나를 훑는 시선이 ‘네가?’처럼 느껴지는 건 과민 반응일 거다. 암, 그럴 거야.
“나 완전 튼튼해 봐! 봐봐!”
나는 현재 상당히 팔팔하고 멀쩡한 내 육체를 강조했다.
나를 유심히 살펴보곤 조금 뒤 안심한 리제가 내 손을 잡았다.
“그래도 조심해. 달린. 기억 안 나? 넌 이전에 바깥 공기를 조금만 쐐도 쓰러졌는걸.”
“그건 과거의 일인걸. 다신 그렇게 아프지 않을 거야. 미안해. 다음엔 꼭 이야기하고 갈게.”
그건 내가 빙의하기 전, 과거의 달린이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앞을 응시했다.
“달린, 우리 이쪽으로 가자. 너도 좀 쉴 거지?”
리제가 내 손을 잡고 이끈 곳은 영애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컵케익 같이 부풀린 드레스를 걸친 영애들이 나와 리제를 간간이 바라보며 웃어주었다.
……와, 언니들 예뻐요.
하나같이 예쁘고 화사한 미인들이 까르르 웃거나 부채를 접었다 펴며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황홀하기만 했다.
‘세상에, 여기서 앉아만 있다가 가도 좋겠네.’
몇몇은 나를 아는지 ‘에스테 영애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도 해줬다.
리제는 그들을 모두 지나쳐 빈 테이블로 향했다. 비교적 조용해서 이야기 나누기 좋았다.
“그런데 달린, 이사야 후작님에 대해선 왜 물어본 거야?”
“응?”
빈자리에 앉기 직전 리제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네가 좋아하는 분은 2황자 전하셨잖아?”
……뭐?
“사실 나도 너무 의외긴 해.”
“내가?”
”아니, 2황자님의 반응이나 태도? 말이야.“
리제는 홀로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돌연 머리를 갸우뚱 기울였다.
“2황자 전하는 여동생을 제외하면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인데.”
그건 그렇지.
사실 나만 해도 첫 번째 이야기로 엮이지 않았다면 평생 이야기를 해볼 일은 있었을까?
아직도 첫 만남 때의 까칠하면서도 경계 어린 표정이 선했다.
리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상하다는 듯 자신의 턱을 꾹 눌러잡았다.
“그러고 보니 정말 이상하네……. 분명 네게 관심을 가진 시간은 없었던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