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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63화 (163/281)

◈163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2)

나는 흠칫 놀라 뒤로 슬쩍 물러났다.

휴고가 능숙하게 팔을 뻗어 휘청거리는 내 몸을 잡아주었다.

“인사, 받아주시는 건가요?”

“네, 네?”

“올라가면, 당신을 볼 수 있나요? 말을 할 수도 있는 건가요?”

“……어.”

이게 아닌데.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내 말이 휴고의 어떤 스위치를 꾹 눌러버린 것만 같았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래빗. 아니, 둑스. 둑스? 지금 여기 없지만 갑자기 네가 너무 그리워.

그 순간 내 앞에 멈춘 마차의 문이 열렸다. 하얀 말이 다가오더니 그 위에 앉아있던 기사가 자리에서 내렸다.

남자가 얼굴을 가리도록 푹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위로 올렸다.

“돌아갈 시간입니다. 에스테 영애.”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잠깐만. 이 목소리는……?

모자 아래로 보이는 은하늘색 머리카락을 본 순간 눈을 크게 떴다.

까칠하기 짝이 없는 눈매와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목소리까지.

모자 아래로 보이는 얼굴은 분명 2황자 라이칸이었다.

“황…….”

라이칸이 자신의 입으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황자께서 이곳까지 어쩐 일이신지?”

나 대신 휴고가 물었다.

“황제 폐하의 명이다. 황자 중 직접 에스테 영애를 모셔오란 명이었지.”

라이칸은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무뚝뚝하게 받아쳤다. 라이칸의 눈은 나를 붙잡아준 휴고의 팔에 고정되어 있었다.

뭐야, 뭔데.

……왜 나는 바라지도 않았던 인기 체감 시간이 찾아온 건데?

“제 약혼자가 황제 폐하께서 직접 명을 내리실 정도로 공을 세운 일이 있었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군요.”

“의심스러운가? 정히 그렇다면 대공이 폐하께 직접 여쭤보도록.”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대화에 나는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어째 이젠 허허 웃는 오빠 파올로의 얼굴마저 그리울 지경이었다.

“왜 하필 당신입니까.”

“황성엔 직계 황족이 넷 있고, 셋째는 너무 어리니 열외가 되었다. 형님은 절대 가기 싫다더군. 눈은 싫다면서.”

“…….”

“아니면 연약한 막내동생이 오길 바라기라도 했나?”

래빗의 어디가 연약한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눈을 굴렸다.

“……차라리 그게 나았겠군요.”

휴고가 입술을 깨물며 나를 놓아주었다. 그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내 허리만 놓아줬다 뿐이지, 그는 아직 내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에스테 영애, 돌아갈 시간이다.”

동시에 라이칸이 마차 앞에서 나를 붙잡아주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 순간이었다.

[‘나만의 로판’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제한 조건을 충족하여,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모든 정보가 공개됩니다!]

눈앞으로 푸르른 창이 두 개 떠올랐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두 번째 인물 ‘라이칸’

-인물의 역할: 주인공 ‘달린’의 남주 후보 ]

[세 번째 이름 ‘휴고’

-인물의 역할: 주인공 ‘달린’의 남주 후보]

엥?

……아니, 이게 뭐야?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이로도 모자라 눈을 열심히 비볐다.

다시 봐도 똑같았다. 이놈의 요정의 창의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남주 후보? 진짜 남주 후보?’

황당함과 놀람, 당혹스러움이 한 번에 교차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이야. ‘나만의 로판’에서 내가 주인공인 거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치고.

‘나한테 남주 후보가 왜 필요한데?’

요정은 답변이 없었다. 하여간 저 원할 때만 나타나는 제멋대로인 놈이었다.

나는 두 남자를 한 번씩 보았다.

각기 다른 시선으로 서로를 노려보던 남자들이 내 시선이 닿기 무섭게 나와 눈을 마주했다.

나는 찔끔했다.

‘……아니, 이제 와서 이렇게 내 취향인 남자들을 남주 후보라고 하면, 뭐 어쩌라는 거야.’

솔직히 말하면 싫진 않았다. 싫을 게 뭐 있나? 완벽하게 내 취향에 부합하는 남자들을 후보로 넣어주겠다는데.

다만 마냥 좋아하기엔 의문인 구석이 너무 많아서 그렇지.

[요정이 슬쩍 조언합니다!]

보다 못했는지, 요정이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어떤 누군가는 빙의자님만의 이야기 결말을 보고 싶어하지 않을까요?]

나는 바로 찡그렸지만 말이다.

‘누가, 누군데. 그게 너 아니야? 요정놈아?’

요정은 다시 한번 대답이 없었다. 내가 더욱 찌푸리는 사이 손끝에서 체온이 느껴졌다.

“달린?”

“에스테 영애.”

두 남자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물론 나를 부르는 동시에 서로를 못마땅하게 보긴 했지만.

“어디 불편하신 건가요? 표정이 좋지 않아요.”

“얼굴이 새하얘졌군. 혹시 추운 건가?”

“아뇨, 아뇨. 불편하지도 않고 춥지도 않아요.”

난 어색하게 웃었다. 여전히 둥실둥실 떠 있는 저 ‘남주 후보’ 창을 보면서.

‘저 창은 뭔데 사라지지도 않아?’

마치 내가 인정할 때까지 자리를 지킬 기세라 나는 찌푸리며 속으로 요정에게 알겠으니까 창부터 치우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요정이 슬그머니 창을 치우더라.

“그럼 휴고, 감사했습니다. 아프지 말고 항상 건강해요.”

나는 그가 잡고 있는 손을 잠시 마주 잡았다가 놓았다.

어떤 신호처럼 느껴졌는지, 휴고가 비로소 내 손을 놓아주었다.

“이제 좋은 일만 있을 거예요.”

라이칸을 볼 때만 해도 경계 어린 낯이 되었던 얼굴은 어디에도 없이, 그가 울적한 표정으로 시무룩하게 끄덕였다.

“제게 행복을 느낄 행운이 찾아왔던 건 모두 달린 덕분이에요. 나는 그 사실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왜인지 다시 마주한 붉은 눈 어딘가에는 조금 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작은 빛같은 것이 반짝거렸다.

* * *

나는 창문으로 한없이 멀어지는 설산을 응시했다.

‘와, 이런 날이 오긴 하는구나.’

두 번째 메인 퀘스트를 받은 날의 황당함. 그리고 이곳에 처음 도착한 날 나를 적대하는 가신들을 보면서 느꼈던 막막함이 머리를 스쳤다.

‘시간이 지나면서 메인 퀘스트가 쉽게 느껴지기는커녕 이거 과연 성공할 수 있는 건가 싶어서 걱정만 더욱 커졌던 것 같은데.’

결국 이렇게 이 땅을 떠나 돌아갈 수 있게 되었구나 싶었다.

이번에도 무사히 살아남았어.

손을 내려다 보았다. 이 손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내 손 위에 앞발을 올려두길 좋아했던 작은 아기 여우의 모습이 스쳤다.

잠시 울적해졌던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그래, 모든 게 끝은 아니잖아. 둑스도 잠에서 깨어났고. 원한다면 언제든 볼 수 있어.’

거기다 이제 휴고는 다신 폭주하지 않을 테고, 이는 가신들이 최고로 걱정하는 부분이었으니 북부는 가장 커다란 문제를 해결한 셈이다.

나름 정이 들었던지라 휴고를 다시 보기 어렵다는 게 조금 아쉽긴 했지만, 네 번째 이야기까지 진행하다 보면 한번쯤은 다시 보지 않겠어?

커다란 연회에서라거나…….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

현재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난 이곳에 혼자가 아니었다. 내 맞은편 자리에는 조용히 그림처럼 앉아있는 남자가 있었으니까.

라이칸이었다.

그는 창문을 바라보다 말고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제복 위로 다시 새하얀 로브를 걸쳐서인지, 오늘따라 다소 성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어째 말 걸기가 더욱 힘든 분위기가 됐네.’

라이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영애, 왜 그러지? 무언가 필요한 게 있나?”

“네? 아뇨. 아뇨.”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고요…….”

의문이 들긴 했다. 마차를 가져올 때는 말에 타고 왔던 것 같은데, 왜 돌아가는 길에는 나와 같이 마차를 탄 걸까.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막상 북부에 와보니 추워서 같이 탄 건가.

“황자님, 혹시 황자님 어디 아프신 건…… 아니시죠?”

“뭐? 나는 지극히 건강하다. 이상 같은 건 없다만, 왜 묻는 건가?”

“아, 마차에 함께 타셔서 혹시나 아프시거나 날이 너무 추워서 함께 타신 건가 싶었어요.”

“…….”

“이게 아니라면 다행이에요. 아니면 뭐 제 옆에 꼭 붙어 있고 싶으셔서 타셨나 싶었는데…….”

농담이었다. 분위기를 좀 가볍게 하고자 싶은 농담이었다고. 그러나 나는 말을 하다 말고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슬그머니 말을 멈췄고 라이칸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진짜였어?’

안 그래도 고요하던 분위기가 조금 전보다 더욱 어색해졌다.

‘아니, 나도 저 남자가 나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지.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걸 잠깐 깜빡할 수가 있지?’

지켜보고 있으려니 마치 머릿속이 하얘진 것처럼 이 남자가 내게 고백했던 순간이나, 했던 말들이 조금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정곡을 찌르면 조금 곤란하다, 영애.”

“아. 죄송해요.”

“아니, 사과를 들으려 한 말은 아니야.”

라이칸이 손을 내저었다.

“난 그냥……. 뭐가 됐든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어엄…… 그렇군요.”

라이칸이 갑자기 기름칠이 덜 돼 철컥거리는 로봇처럼 어색하게 군 탓에, 이 마차 안 온도가 조금 오르고 어색함도 약 30 정도 오른 것 같았다.

나는 이런 분위기를 의식하며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뭐지, 이 선보는 자리 같은 분위기는.’

처음 보는 미혼 남녀가 선 자리에서 서로를 지나치게 정중하게 배려하는 그런 느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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