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74)
휴고는 그간 놀랍도록 안정세를 띠었다. 심지어 최근엔 스스로 발작을 참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만약 내가 습격을 당했단 소릴 들으면 당연히 이곳으로 구하러 올 사람이야.’
그래, 이렇게 영지에서 폭주할 게 아니라 내가 성 밖으로 강제 이동 당했던 때처럼 달려와야 했다.
설마……. 영지에 뭐, 내가 죽었다고 알려지기라도 한 건가?
나는 타당한 추론에 이른 동시에 탄식을 뱉었다. 이미 그 남자의 호감도는 맥스에 플러스 알파까지 돌파한 상태, 너무나 잘 안다.
그 남자는 나를 아주 사랑했다.
만약 나 때문에 폭주한 거라면……!
“둑스, 큰일이야, 나 당장 돌아가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간 내에 영지로 돌아가야 한다.
아니, 대공님을 만나 폭주를 잠재우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더욱더 빨리!
‘이성을 잃었을까? 잃었겠지?’
배드엔딩은 나와 상관없이 영지 내 모든 사람이 사망하는 엔딩.
이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그래야 할 것 같다, 인간. 이 몸의 땅이 심상치 않아…….
둑스는 땅의 주인답게 이미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하지만 절벽에 갇힌 상황에서 어떻게 돌아간단 말인가? 무엇보다 아까부터 다리가 지끈지끈 아픈 것이…….
치마를 살짝 들추자,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부상으로 인해 엄청 부어오른 상태.
‘부러진 건가? 걸을 수는 있나?’
다리를 옮겨보자 고통이 온몸을 자극했다. 이래서야 대공님에게 가긴 더욱 힘들어졌다. 이제 어떡하지?
그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명약!’
나는 황급히 목을 더듬어 자그만 주머니가 달린 목걸이를 꺼냈다. 끊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주머니 안에서 라이칸이 줬던 명약을 꺼냈다.
혹시, 이걸로 괜찮은 효능을 볼 순 없나?
얼른 입에 넣었다.
[빰빠라밤밤! ‘전설의 명약’을 먹었습니다!]
[빙의자님의 건강 수치가 폭발적으로 오릅니다! ₍՞◌′ᵕ‵ू◌₎♡ 현재 건강 수치: 90]
[모든 부상과 상처, 상태 이상이 회복됩니다!]
몸이 가벼워졌다. 아니, 뭐야. 이 정도의 효능이 있다고?
놀라기도 잠시 요정이 부연 설명을 붙였다.
[이 약은 깊은 사랑이 담긴 명약이에요! 사랑의 힘은 위대해요!]
놀리는 듯한 그 말을 무시한 채로, 나는 멀리 떨어져 있을 라이칸에게 감사했다.
‘고마워요, 라이칸 황자님. 은인이야 정말! 돌아가면 그래, 소원이라도 하나 들어드릴게요!’
대공님의 폭주를 막지 못하면 나도 메인 퀘스트를 마무리 못하고 사망할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이게 아니더라도 베드엔딩을 반드시 막고 싶었다.
나는 이 땅과 영주성의 사람들을 좋아하게 됐으니까.
“문제는…….”
이제 남은 건 하나, 영지로 어떻게 돌아가느냐.
스킬을 써서 절벽을 오를까? 아니, 그러기엔 시간이 없어.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둑스를 응시했다.
“둑스, 이 땅을 지키고,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선 나는 지금 당장 돌아가야 해. 시간이 없어. 혹시…… 영지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어쩐지 이 조그만 신님에게 방법이 없을까.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있을지도 모른다.
아기 여우가 마찬가지로 진지한 표정으로 저 멀리 영지 쪽을 향했다.
둑스에게서 주황빛 빛이 새어 나왔다.
-인간, 말했듯 나는 힘을 거의 잃었다. 하지만 아주 잠깐 분수대에서 남은 힘을 가져온다면…… 이 몸에겐 아주 위험한 일이지만 딱 한 번 그곳으로 이동할 수 있을 듯하다, 컁!
“정말?! 고마워! 정말 고마워!”
둑스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몸이 고마워해야 할 듯하다…… 컁. 이 땅이 멸망하려 하는 듯하니까.
나는 멈칫했다.
-신은, 숭배하는 인간이 없으면 사라진다. 컁.
나는 그제야 둑스가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이동시키려는 이유를 알았다.
-……내 땅을 죽은 땅으로 만들지 말아줘, 인간.
“응.”
나는 조그만 아기 여우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나한테 맡겨.”
아무도 죽게 하지 않을 테니까. 분명 대공님 또한 이런 결과를 달가워하지 않을 테니까.
주황빛이 온몸을 감쌌다.
* * *
눈을 뜨자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분수대였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사방이 몬스터 사체로 가득했다. 악취는 물론 땅이 검은 피로 젖었을 정도였다. 나는 악취에 찡그리면서도 상황을 확인했다.
그러다 문득 거대한 무언가를 보고서 잠시 멈칫했다.
뱀 괴물, 설마 30년 전에 나타난 그 괴물인가?
그러나 곧 함께 있던 둑스가 내 추측을 정정해주었다.
-그때와 같은 존재지만 힘과 크기는 더욱 크다!
“그래?”
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어째서인지 검은 피들 사이로 흩뿌려진 붉은 피가 불길하게만 느껴졌다.
휴고는 어디 있지?! 왜 이 분수대엔 사람이 전혀 없는 거야?
마치 이 공간이 텅 비워진 것처럼…….
그 순간 어딘가에서 거대한 소리가 들렸다. 땅이 흔들린다. 고개를 돌리면 저 멀리 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영주성 근처인가?’
집이 마구 뒤엉킨 탓에 위치를 감 잡을 수가 없었다. 이런, 시간이 없는데!
[빙의자님을 위한 요정의 특별 보너스! 바로바로 ‘요정 네비게이션’! ꒰ღ˘‿˘ற꒱]
그 순간 푸르른 창이 떠올랐다.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위치를 알려드립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당연하지, 당장 켜! 내 외침에 눈 앞으로 녹색 화살표가 떠올랐다.
‘전방 30m에서 우회전 하세요!’ 익숙한 문구였다.
나는 화살표를 따라 서둘러 이동했다.
바닥에는 녹색 선이 그려져 거리를 착각하지 못하게 도와주었다.
이 놈이 왜 갑자기 이런 친절을 베푸는지 순간 궁금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요정은 빙의자님이 지금 퀘스트 실패로 죽으면 곤란해요! 쉿, 하지만 이건 아슬아슬하게 규칙 위반이니까 언제 사라질지 몰라요! o(〃^▽^〃)o]
화살표를 쭉 따라서 뛰었다. 10분쯤 뛰었을까, 건강 수치가 최상에 도달한 덕분에 숨이 거의 차지 않았다.
나는 익숙한 얼굴을 맞이했다.
“여, 여, 영애님?!”
“제타르 경!”
폐허 속 피투성이가 된 제타르 경이었다. 한눈에 봐도 절대 멀쩡해 보이지 않은 그는 벽에 간신히 기대 앉아 있었다. 마치 치료할 시간도 부족한 것처럼.
“사, 살아 계셨습니까? 흡, 살아계셨던…….”
“네! 걱정 끼쳐서 정말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그런데 지금 상황이 급하죠?”
“……흡, 네.”
“그래 보여요, 대공님 상태는요?”
그를 부축하는 이조차 없는 걸 보면 대공님 쪽으로 모두 달려간 게 틀림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타르 경이 신음하면서 더듬더듬, 하지만 빠른 속도로 설명했다.
“크흡, 짐작하시는, 것처럼… 대공님께서 발작을 일으키셨습니다……! 여, 영애께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로.”
“…….”
“하지만 여느 때와는, 너, 너무 다릅니다.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시고……. 하아, 모든 병력이 막고 있지만, 언제 사망자가 발생할지……. 쿨럭!”
“알았어요. 이해했어요.”
“가, 가시는 겁니까?”
몸을 움직이려 하자, 제타르 경이 황급히 손을 뻗었다.
“영애, 이번에 대공님은, 영애를 알아보지 못하실지도 모릅니다.”
“…….”
“제가 대공님이라면…… 영애께서 차라리 앞에 나타나지 않는 쪽을 원, 할 겁니다.”
나를 딸처럼 아낀다던 기사님의 얼굴은 절박하고 다급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손에 죽길, 바라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쿨럭, 대공님께서 정상으로 돌아오실 때까지만…….”
“아니요, 제타르 경. 고맙지만 그 말은 틀렸어요.”
아마 이것이 최후의 발작. 대공님은 시간이 지나도 결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영지의 모든 사람을 죽일 때까지.
“늘 나를 아껴줘서 고마워요. 기사님들 중에서 가장 먼저 내 편이 되어준 것도요.”
나는 작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렇기에 나는 가야 해요. 사람들을 지키고 싶으니까.”
“…….”
“대공님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고개를 돌렸다.
“막을 수 있는 건 나뿐이에요.”
그의 손을 놓고 나는 걸음을 옮겼다. 다시 달렸다. 등 뒤로 작은 울음과 함께 시선이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 * *
달려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٩(•̤̀ᵕ•̤́๑)૭✧]
거대한 돌덩어리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었다. 영지와 영주성을 나누던 성벽이었다.
영주성에 마나홀이 나타났을 때, 몬스터가 바깥으로 향하지 못하게 막아주던 벽은 산산조각이 난 채 뻥 뚫려 있었다.
바닥에는 온통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모두가 기사들…….’
아주 늦진 않았다. 아직은 민간인을 해칠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도 시간문제다. 멀지 않은 곳에 까만 옷을 걸친 기사들이 검을 내밀고 헉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들의 뒤에는 마법사들이 있었는데, 골목길이며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마법사들은 무언가를 외우기 바빴다.
빛으로 만들어진 반투명하고 꽤 커다란 돔 안, 그 안에 번개같이 번쩍 빛나는 사슬에 묶인 사람이 보였다.
대공님이었다.
정갈하게 내렸던 머리는 헝클어진 채, 옷 여기저기가 찢어진 모습이었다.
그뿐 아니라 손과 얼굴에도 상처로 가득했다.
아마도 그 거대한 뱀과 다투며 얻은 상처가 아닐까?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지금 이런 기운을 내뿜어내는 휴고는 도저히 인간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