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64)
분명 이렇게 된 데엔 어떤 원인이 있을 터다. 하지만 그게 뭔진 내게 알려주지 않았지.
세계가 비틀린 근본적 원인이 뭔데?
“둑스, ‘요정’은 대체 어떤 존재야?”
-으음, 인간 네게는 설명할 수 없다! 컁!
“그래? 너처럼 신과 같은 존재는 아니란 말이지?”
둑스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같으면서 다르다! 이 몸은 이 땅을 책임지는 신, 하지만 ‘요정’은 이 몸과 다르게 이 세계 전체의 무언가를 관장하고 있을 거다! 컁!
“무언가?”
-이를테면 균형이라거나…….
둑스의 귀가 쫑긋쫑긋 움직였다. 둑스가 무어라 더 말한 것 같은데, 내게는 사람의 말로 들리지 않았다.
둑스는 이건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개념이라고 했다.
“그럼 있잖아, 둑스. 하나만 더 물어보자면 난 음, 뭔가를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을 받았거든? 목숨을 담보로 말이야.”
턱에 손을 얹고 곰곰이 고민하던 내가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렇다면 내가 오기 전에 비틀어진 이유가 뭘까? 이 세계 말이야.”
-인간, 이 몸은 그렇게 포괄적인 건 생각하고 싶지 않다, 컁!
“신이라며, 조금만 도와줘. 응?”
-끄응, 인간 네게 도움이 될 말을 하나 해보자면 보통 신체가 엉망이 되는 이유는, 이물질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컁.
……세계에 이물질이 나타났다?
-인간의 신체도 병균에 대항하지 않나, 컁?
“그렇지.”
그렇다면 나는 이 세계에서 ‘백혈구’ 같은 역할인가? 병균을 때려잡는?
그런데 목숨을 담보로 움직이는 백혈구고?
근본적인 원인에 도달하진 못했지만 대충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사실 요정은 스스로는 이 병균을 잡지 못하기 때문에 나를 끌어들여서 이 병균을 때려잡으려 한 게 아닌가 싶은 가설 말이다.
그와 동시에 둑스가 더는 어렵다며 결계를 풀어냈다.
결계가 사라지는 동시에 푸르른 창이 마구 떠올랐다. 대체로 화난 표정의 이모티콘이 가득한 창들이었다.
나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어디서 위협이야.’
요정이 날을 세우고 날 위협하는 것이야말로 당황했다는 증거 같았으니까.
‘너에 대해 낱낱이 파악해 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
답이 없는 문제는 없다. 그렇기에 나는 이 문제를 완전히 이해하게 될 날을 계속 고대해왔다.
이날이 머지 않았다는 것 또한 느꼈다.
둑스가 피곤하다며 내 허벅지 위로 올라와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고마운 마음에 둑스의 등을 마구 쓸어주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곧 문이 열리고 대공님이 들어왔다.
“영애……!”
대공이 꽤 특별한 모습으로 나타났기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저건.’
그의 얼굴에는 커다란 안경이 씌워져 있었다.
나는 의아한 마음에 입을 살짝 벌렸다.
이 대공님이 시력이 나빴던가? 당연하겠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난다긴다하는 사람들이 모인 북부에서 단연 최고로 꼽히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신체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의상은 지난번처럼 꽤 가벼운 차림이었다.
다행히 이번엔 가운만 걸친 차림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셔츠 단추를 풀어헤친 차림이긴 했지만.
‘나쁘지 않은데……가 아니라.’
난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본능에 충실한 생각이라니.
이제 정말 퀘스트 완료만 앞뒀다고 생각하니 사고가 좀 해이해지는 모양이었다.
“하시려던 일은 모두 보셨나요?”
“네, 영애. 조금 늦어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시간을 약속한 것도 아닌걸요. 음, 대공님이 언제 오시려나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어요.”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1) 현재 호감도: 100(+α)]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한계치를 넘었어요! 더는 오르지 않습니다! (´∇ノ`*)ノ]
나는 딩동딩동 떠오르는 푸른창에 살짝 찌푸리다 눈을 올렸다.
이미 호감도가 한계치를 벗어난 건 알고 있었어.
‘그러니 남은 건 ‘클라이막스 연출’ 뿐이라는 거지.’
대공님이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는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어깨를 조금 움츠린 채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이었다.
“저, 대공님 왜 그러세요?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네, 네?”
“아, 표정이 조금 불편해 보이셔서요. 그 하시려던 일이 잘 안 됐다거나…….”
혹시 지하 감옥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었나? 거기 갇힌 이들이 누군지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대공님이 깜짝 놀라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아뇨.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저, 그게 지금은, 으음…….”
“네. 편히 말씀하세요, 대공님.”
모든 걸 털어놓은 이후로 나는 전보다 더 대공님을 좋게 보고 있었다.
인간적인 호감에 불과하지만 부정할 수 없다.
솔직하게 털어놓았을 때 폭주를 한다거나 거칠게 분노하는 대신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었으니까.
하지만 이도 잠시, 시선이 마주한 순간 안심하던 마음이 쏙 날아갔다.
“음, 어, 방에 단둘만 있다고 생각하니…… 의식이 되어서요.”
“……네?”
“둘만, 이잖아요. 영애. 아, 무슨 짓을 하려는 건 아니에요! 절대!”
“어…….”
나는 방을 돌아보았다. 난감한 기색이 얼굴을 스쳤을 게 분명했다.
아니, 이제 와서?
그간 이 방에 둘만 있던 무수한 시간이 스쳤다.
“……그, 너무 새삼스럽지 않나요?”
“하지만 깨달았는걸요.”
대공님이 발긋 달아오른 얼굴로 차분하게 말했다.
아니, 말투는 조금 더듬더듬했는데 목소리는 의아할 정도로 명료했다.
“영애를 향한 마음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이 마음을 나 스스로조차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요.”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나는 잠시지만 벼락이라도 맞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
[스킬 ‘몸에 나쁜 건 날아가라!’가 종료됩니다.]
그 순간 몸 안으로 일시에 어떤 나른한 기운이 퍼지더니, 눈앞이 몽롱해졌다. 잠시였지만.
“영애?”
“아, 대공님…….”
곧 다시 대공님을 보았을 때, 몽롱해지기 전보다 더욱 정신이 맑아진 것만 같았다.
조금 전에 고민하던 것이 무엇이었더라?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가 발동 중입니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단지 몇 초 전보다 감정이 차분해졌다는 것.
그리고 이젠 깨달았다.
이 차분함이 꽤 비정상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아무래도 내가 스킬을 통해 감정적인 부분에 영향을 받는 모양이지?’
나는 가슴을 짚고 생각해보다가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으음, 내게 지시한 대상이 아무래도 위기감을 느끼나 봐요.”
“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고민이 되네요. 이래서야 제대로 된 연애가 가능한 건 맞는지……. 대공님, 아무래도 전 누군가에게 쉬이 호감을 갖기가 어려울 것 같거든요.”
난 내 상태를 스스로 점검해보았다. 조금 전에 느꼈던 감정들이 좀 희미하게 느껴졌다.
바로 직전에 느꼈던 것들인데도 말이다.
이뿐만 아니라 2황자의 고백 또한 마치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확실히 이런 상태라면 나는 그 어떤 것보다 내 생존과 퀘스트 수행에만 집중할 수 있겠지. 동시에 요정의 입장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가 아닐까?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뭔 사람을 강제 연애 고자로 만들어놓고 있어.’
불만은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내게 아주 손해는 아니었다.
물론 감정에 제한이 걸려 있단 사실조차 모른 채로 있었다면 손해였겠지만, 지금은 내 감각에 누군가가 개입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문제는 문제를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좋았어. 조금씩 단서가 보인단 말이지. 내가 어떤 처지인지.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
무엇보다 이제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를 종료할 수 있는 스킬도 생겼으니 말이다. 비록 확률에 맡겨야 하겠지만 말이지.
“대공님은 정말로 이런 저라도 괜찮으신 건가요?”
“영애. 영애를 향해 사랑에 빠진 순간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순간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사랑을 끝낼 수 있는 시간은 내가 스스로 정할 수 있다면. 분명히 말하건대 제가 먼저 끝내겠다고 할 일은 없을 거예요.”
대공님이 양손을 꾹 모아쥐었다. 진지한 얼굴이 나를 향했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해보지 않았으니까요. 그대의 진정한 마음을 얻기 위해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향한 미묘한 감상은 사라졌다지만 진심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된 건 아니었다.
“네, 사실 한편으로는 누가 됐든 음…… 저도 사랑에 빠져보고 싶네요.”
“네?”
“아, 혹시 이게 제 이상한 상태를 벗어나게 해주는 방법이 아닐까 싶어서요.”
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냥 느닷없이 뱉은 말이지만, 그럴싸한데? 만약 지금 남에게 호감을 잘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 이러다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다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공님에게로 다가갔다.
“대공님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네, 네? 여, 영애?”
“잠시 손 좀 잡아볼게요!”
그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의 손을 잡고서 대공님을 한참 응시했다.
‘흐으음, 이성에 대한 긴장을 못 느끼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내 취향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으니 기분이 좋아진단 말이지.
나는 대공님의 손을 놓아주었다.
‘다른 얘기지만, 메인 퀘스트에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두 번째 퀘스트는 단 30일만 주어진 미션. 더는 생각과 고민만 할 수는 없다.
슬슬 마지막 엔딩에 도전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참에 바로 ‘클라이막스 연출’을 시도해볼까?’
이미 상황과 대사는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 ‘연출’이란 거 말인데…… 대공님에게 미리 알려주고 시작해도 되는 건가?
일종의 대본처럼 말이다.
“있잖아요, 대공님 한 가지 부탁을 드릴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