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48)
“그로지. 그럼 지금 영주성에 가자. 어차피 롤린, 널 만나러 온 고니까.”
“저를요?”
“구래, 곧 다시 보게 될 거라 말했쟈나?”
“아니, 그걸 여기서 볼 거라고 알아들을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당연히 황성에서 다시 보자는 말인 줄 알았지…….
“서푸라이즈다!”
“하하, 좋긴 좋네요…….”
다만 즐길 수 없어서 슬프지만요.
내 다급한 표정을 알아차렸는지, 래빗과 라이칸은 자세한 사정은 묻지 않았다. 대신 내게 마차에 타길 권유했다.
난 감사히 받아들여 마차로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 했다.
그와 동시에 파지직! 붉은 번개가 쳤다.
놀라 돌아보니, 라이칸이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황자님!”
[경고! 요정이 세계관의 충돌을 감지했어요!]
[첫 번째 이야기의 주요 인물 ‘라이칸(2황자)’은 퀘스트 충돌을 우려하여 두 번째 이야기 필드에 진입이 불가합니다!]
뭐? 나는 놀라 요정의 창을 쳐다봤다.
“무순 일이냐!”
라이칸의 손에 붉게 부풀어 오른 상처가 보였다. 딱 봐도 심각한 화상이었다.
“이런, 포션을 붓겠습니다!”
다행히 기사들 중 마법약을 가진 이가 있었다. 황급히 푸른 물약을 붓자 상처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른 사람은 되는데 2황자만 안된다고?’
나뿐 아니라 자리에 있던 모두가 심각한 얼굴을 한 채 라이칸을 보았다.
래빗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뭐야, 갑자기 번개가 쳤어? 너 모했누냐? 아니, 아무것도 안 했던 걸로 보였눈데?”
“나도 의문이군. 하지만 추측하자면…….”
라이칸이 앞으로 손을 뻗었다. 신기하게도 그의 손이 허공에 멈춘다. 투명한 유리에 가로막힌 것처럼 손이 꽉 눌렸다.
“결계가 있는 듯하다. 진입을 막고 있어.”
“결계라고?”
래빗이 고개를 갸웃하며 걸어갔다.
래빗은 아무렇지 않게 통과해 라이칸을 올려다보았다.
이어서 함께 있던 기사들도 걸어 들어가 보았지만 래빗과 마찬가지로 아무렇지 않게 통과했다.
“오뺘, 너만 막는 것 걑다만, 어찌 된 일이지? 너 혹시 북부에서 사고 친 적 있누냐?”
“그럴 리가, 형님이라면 모를까 난 북부 방문 자체가 처음이다만.”
낭패였다. 라이칸의 진입이 막힌 이유는 나만 알고 있었으니까.
‘왜 이제 와서 갑자기? 거기다 래빗은 되면서 라이칸은 안 된다고?’
이 2황자님만 막을 이유가 있단 말인가?
‘설마 이성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영주성에 이미 내 또래 이성 기사들도 많은 걸로 아는데…….
대공가에 충성하는 기사냐, 황실에서 온 타인이냐의 차이인가?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가 발동 중입니다.]
고민하기엔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몬스터만 득실대는 이곳에 2황자님만 남겨 두고 갈 수도 없었다.
‘급한 대로 먼저 보내 달라고 해야 하나?’
내가 끙끙대는 순간이었다.
내 쪽에서 분홍빛이 흘러나오더니, 라이칸의 손으로 스며들었다.
[빠라밤밤! ‘나만의 로판’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٩(๑❛ワ❛๑)]
[인물 ‘라이칸’의 역할에 관여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에 개연성을 만들었어요! 단, 두 번째 이야기 ‘메인 퀘스트’에 영향을 미칩니다!]
[인물 ‘라이칸’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합니다! (역할: 산정 중)]
나는 물론 라이칸 또한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에게 말했다.
“황자님, 혹시 지금도 결계에 막히세요? 손 뻗어 보세요!”
“……되는군. 지금 대체 무얼 한 거지 영애?”
“죄송해요, 설명은 나중에 해 드릴게요. 래빗 황녀님! 빠르게 출발해야 할 것 같아요. 현재 제가 사라져서 성이 난리가 났을 거예요!”
“아라따.”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보더니 날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저쪽운 두 세력우로 나뉜 모양이지?”
래빗은 내 한마디로 상황을 대충 파악한 모양이었다.
“조져버릴 놈운 가서 보면 되겠군.”
“하하하…….”
이번에야말로 출발하기 위해 마차로 돌아섰다.
아마, 멀지 않은 곳에서 폭발음이 나지 않았다면 서둘러 달렸을 터였다.
“에스테 영애!”
“영애님!”
“대공비님!”
귀에 익은 목소리에 내 걸음이 그대로 멈췄다.
멀리 보이는 몬스터 하나가 그대로 쓰러진다. 난 몬스터가 쓰러진 쪽으로 몸을 홱 돌려 앞서 걸어갔다.
“롤린!”
“황녀님, 북부 쪽 특무대에요!”
곧 한 무리의 기사들이 보였다. 새카만 정복, 특무단이 걸치는 옷이었다.
내가 반가움에 소리치려는 찰나, 누군가의 커다란 그림자가 나를 덮었다.
고개를 들자 숨을 헐떡이는 얼굴이 보였다.
“여, 영애…….”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치 엄마를 잃은 아이처럼 절박한 표정, 충혈된 눈,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본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대공님이었다.
“살아, 살아 계셨군요…….”
하지만 그는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이마에 불룩 튀어나온 핏줄이나 검은 피가 흥건한 손, 손에서부터 어깨까지 이어지는 잔 떨림이 이를 증명했다.
특히나 관자놀이 근처에 툭 불거진 핏줄은 그가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지 보여 주었다.
마치 무언가를 참는 듯이.
‘설마…… 광증이 올까 봐 참고 있었던 거야?’
대공님이 내게 손을 뻗었다.
그러다 피로 잔뜩 물든 제 손을 그제야 보았는지 움찔 멈췄다.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이 빙의자님을 향한 호감으로 인해 폭주를 견뎠습니다!]
[대단한 성과! 추가 보상이 주어집니다!]
[빙의자님의 건강수치가 대폭 오릅니다! ♪~ ᕕ( ᐛ )ᕗ]
내가 허공에 뻗은 그 손을 덥석 잡았다.
“괜찮으세요?”
“아…….”
“여기까지 친위대분들이랑 오신 거예요? 절 어떻게 찾…….”
“정말 영애로군요…….”
나는 허리를 파고든 손에 움찔했지만, 곧 그대로 두었다.
내 어깨가 푹 젖어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 미치지 않으려 애썼어요…….”
“…….”
“그, 그럼 영애를 찾으러 가, 갈 수 없을 테니까…….”
그의 목소리가 서럽게 젖어든다. 남자가 얕게 흐느끼고 있었다.
“처음으로 내, 내 영지가 미워졌어요.”
나보다 덩치가 훨씬 큰 남자가 덜덜 떨고 있었다.
“아, 음…… 놀라셨죠? 저도 갑자기 이동 당하는 바람에…….”
“영애가, 사라졌다고…… 사라졌다고 해서…….”
나는 우는 래빗을 달래듯이 커다란 등을 토닥거렸다.
그러다 아래에 있던 래빗과 눈이 마주쳤다.
래빗은 나와 덜덜 떠는 대공님의 모습을 보다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나름대로 이해를 마친 얼굴이었다.
‘이것두 신의 계시도냐?’
곧 입 모양으로 내게 속삭였다.
‘너룰 함부로 대하진 않운 모양이구나.’
나는 대답 대신 작게 하하하, 웃어 보였다.
내 웃음소리를 들은 대공님의 팔이 나를 더욱 세게 안았다. 그렇지만 힘을 조절했는지 아프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뒤쪽에 2황자님도 계실 텐데…….
슬슬 대공님에게 두 황족의 존재를 알려야 하지 않을까.
[인물 ‘라이칸’의 새로운 역할이 결정되었습니다!]
내가 언제쯤 말을 해야 하나 망설이는 동시에 눈앞으로 요정의 창이 떠올랐다.
나는 글자를 읽는 순간 그대로 멈췄다.
[인물 ‘라이칸’은 두 번째 이야기의 ‘서브 남주’입니다. ( •⌄• ू )✧]
……뭐?
애석하게도 내 입에서 더는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경고! 스킬의 지나친 과부하가 빙의자님의 몸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상 현상! 소환 대상이 스킬의 과부하를 일부 가져갑니다.]
[상태 이상 ‘급성 기절’에 돌입해요! Σ(゜ロ゜;)]
여러 창이 앞다퉈 눈앞을 가렸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눈이 가물가물해졌다.
[스킬 ‘몸에 나쁜 각성제(lv.2)’가 활성화됩니다!]
[지나친 과부하로 스킬 ‘몸에 나쁜 각성제(lv.2)’가 자동 종료됩니다.]
눈앞이 까맣게 점멸했다. 쓰러지면서 나는 의문을 숨기지 못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서브 남주라니?
두 번째 이야기에 그런 역할은 없었잖아?
* * *
달린이 그대로 쓰러진 순간, 그 자리에는 고요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2황자를 따르는 기사들은 달린을 안아 든 대공을 보이지 않게 경계했다.
북부 영지와 황실은 군신 관계이면서, 핏줄로 이어진 관계이기도 했다.
또한 북부 영지의 특수성 때문에 자치권이 존중되었기에, 예로부터 북부는 칭송과 견제를 함께 받는 세력이었다.
라이칸의 날카로운 얼굴로 서리 같은 서늘함이 내려앉았다.
푸른 눈동자는 줄곧 달린을 안아 든 손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숨을 색색 내쉬는 달린은 다소 힘들어 보였다. 라이칸은 손을 꾸욱 쥐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사실 라이칸은 달린이 정확한 어떤 연유로 북부 영지로 가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기도 전에 바로 북부 영지로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보며…….
그는 자신이 더욱 빨리 와야 했던 것은 아닌가 자책했다.
그의 주먹이 피가 통하지 않아 새하얘졌다.
“대공 전하!”
곧 몬스터를 모두 쓰러트린 달린의 친위대가 도착했다.
친위대 대장 제타르는 모여 있는 이들을 보며 흠칫했다.
마차에 새겨진 문양은 황실의 문장이었다.
거기다가 이곳에 서 있는 이들의 머리색은 저 높은 하늘을 닮은 색. 이 제국에서 유일하게 황족만이 가진 색이었다.
제타르를 비롯한 기사들이 라이칸을 향해 예를 갖췄다.
“인사눈 그쭘 하고, 최대한 빠르게 돌아갔우면 한댜.”
상황을 정리한 건 아주 작은 어린아이였다.
황녀, 황실의 보물이라 불리는 래빗의 위명은 북부까지 자자했다. 이 어린 황녀를 호위하기 위해 대공이 직접 나서기도 하였으니까.
래빗이 미간을 찡그린 채 소리를 높였다.
“우리 달린이 아프댜고!”
소리치는 황녀를 무어라 하는 이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순간에 달린의 건강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모든 인물이 공통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이, 이동마법을 준비하겠습니다!”
대공과 함께 나온 리바를 비롯한 마법사들이 빠르게 마법진을 펼쳤다.
대공, 휴고는 고요히 앞을 응시했다.
그에겐 할 일이 남아있었다.
‘영애를 이곳으로 옮긴 자.’
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벼려진 검 같은 귀기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