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33)
그것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나는 다시 눈을 떴다.
나는 다시 분수에 서 있었다.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대폭 오릅니다! ₍՞◌′ᵕ‵ू◌₎♡ 현재 건강 수치: 36]
“……방금 뭐였지?”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 힘이었다. 고개를 드니 눈물이 고인 대공님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지난번 내가 막 눈을 떴을 때처럼 절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 대체 영애는!”
“아, 대공님…….”
대공님이 소리치는 건 처음 보는지라 눈을 깜빡였다.
이 사람, 이렇게 소리 지를 줄도 알았구나.
매번 고요히 화를 내길래 몰랐다.
그저 시무룩한 얼굴로 협박하는 게 전부인 줄 알았다.
내가 무어라 입을 떼려는데, 거대한 함성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와아아아아!”
“부, 분수대가! 분수대가 복구되었어!”
“말도, 말도 안 돼! 이건 기적이다!!”
환호 사이로 촤아아악,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뚝뚝. 대공님의 얼굴을 타고 물이 흘렀다.
놀랍게도 분수가 다시 물을 뿜고 있었다!
대공님의 등 뒤로 완전히 복구된 분수가 보였다.
뭐야, 원래는 이렇게나 큰 분수였어? 목이 꺾일 정도까지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다시 대공님을 향했다. 천천히 내 얼굴에 함박웃음이 어렸다.
“와, 대공님. 제가 기적을 일으켰나 봐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지만 퀘스트에 성공했다!
“이건 대공님 덕분일까요? 대공님이 너무 화내시지 않으면 좋겠고 광증도 일으키시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둑스께 소원을 빌었거든요.”
환호성 사이에서 대공님이 묵묵하게 로브 모자를 벗었다.
아니, 이미 거의 벗겨지다시피 한 상태였으므로 벗었단 말은 잘못되었을지도 몰랐다.
뚝뚝. 그의 머리에서 물이 떨어졌다.
신기하게도 종아리까지 차오른 물은 더는 차갑지 않았다.
“영애.”
그러나 나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 대신 다가오는 얼굴을 느꼈다. 선명한 붉은 눈동자는 더는 울고 있지 않았다.
“……그대는 언제나 날 걱정하게 해요. 여기 온 내내.”
등 뒤로 함성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아니, 소리가 더 커진 것 같았다. 이 남자에게 씌워진 마법이 벗겨져서인지도 몰랐다.
“내 잘못일까요? 하지만 난…….”
툭. 그가 맨손으로 내 뺨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흠칫 어깨가 튀어 올랐다. 한없이 진지한 눈동자가 나를 또렷하게 응시했다.
“영애가 갖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요.”
“…….”
“내가 영애를 욕심내듯, 당신이 날 원하고 가졌면 좋겠어요.”
물에 젖은 남자는 평소보다 더 윤곽이 또렷했다. 그윽한 시선과 날카로운 눈매에 나는 숨을 참았다.
“어떡하면…… 날 완전히 가져 줄 건가요?”
우리의 거리는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숨이 닿을까 싶어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분명 등 뒤로 더욱 커지는 환호가 들리는데, 이 순간 이곳만 모든 소리가 차단된 것만 같았다.
“내, 내가, 영애가 바라는 완벽한 남자가 되면……. 그때엔 영애도 날 달리 봐 줄까요?”
아울러 팽팽한 줄이 이 사람과 나 사이에 당겨진 것 같았다.
“……대공님은 지금도 충분히 멋있는 분이세요.”
“하지만, 영애를 사로잡기엔 부족한 거죠?”
“…….”
나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가 멈칫했다.
‘영애는…… 언제나 손, 대도 돼요. 언제든…….’
섣불리 건드려도 괜찮을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손을 대선 안 될 것 같았다.
‘영애 거니까…….’
대공이 그 손을 잡아 자신의 뺨을 가져다 댔다. 그저 이거면 충분하다는 듯이.
손가락이 이빨처럼 살갗을 파고든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이 마치 맹수의 것처럼 날카롭고 깊었다.
그가 더욱 가까워졌다.
어, 잠깐, 잠깐. 이 각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날숨이 귓가에 느껴질 때까지.
“어떡하면, 저를…… 저만 봐 주실까요.”
“…….”
와, 진짜 키스하는 줄 알았다. 다소 급박한 숨이 튀어나오고, 온몸에 감각이 두 배는 예민해진 것 같았다.
“그렇지, 짐승의 신을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그가 작게 속삭였다.
“영애의 말만 듣는 짐승은, 필요 없으신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내 뺨을 스친 얼굴이 내 어깨에 놓여 있었으니까.
그의 날숨이 목덜미에 적나라하게 닿았고, 등이 절로 펴졌다. 배 안쪽이 간질간질했고 절로 다리가 움츠러들었다.
그의 어깨를 슬며시 잡자, 커다란 손이 내 등을 쓸어내리고는 그대로 떨어졌다.
“……어떡해서든 결혼을 지속하고 싶어졌어요.”
대공님은 그대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계약이 아니라.”
나는 그 순간 덫에 걸린 토끼처럼 숨만 꼴딱 넘겼다.
“영애가 더는 계약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제가 노력할게요…….”
그와 동시에 그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늘어트린 눈꼬리가 가늘게 휘어지는 모습.
성숙한 남성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미소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주 많이요.”
이어서 아이처럼 웃는 해사한 미소가 마치 앞으로 두고 봐달라는 신호 같았으니까.
그 순간 띠리링, 낯익은 알람 소리가 들렸다.
[메인 퀘스트가 갱신되었습니다!]
[퀘스트(메인) - ‘북부 대공 프로듀스! 계약 결혼을 완수하라!’
내용: 2) 완전한 ‘북부 대공’이 된 남자주인공과 클라이맥스 장면을 연출하세요!
선정 장면: 계약 결혼의 끝을 알리고 헤어짐을 통보하는 여자주인공과 그녀를 가지 못하게 붙잡고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남자주인공
(예시 장면을 환상으로 보여 드립니다. 필요시, ‘관람’이라고 외치기)
필수 대사:
<여자주인공: 계약이 끝났으나 난 가겠어요.>
<남자주인공: 계약은 무효야.>]
……저기요?
메인 퀘스트의 주요 조건이 공개되었지만 절대 기쁘지 않았다.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눈을 끔뻑이며 대공님 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뜻밖에도 대공님은 생각에 잠긴 낯이었다. 왜 이러시지?
그때 찬바람이 살짝 불어왔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체온이 보통 사람보다 뜨거운 탓인지 아직은 견딜 만했다. 이 사람 완전 인간 난로잖아?
나도 모르게 뺨을 기댔다가 스스로에게 화들짝 놀랐다. 그는 나를 잠시 보더니,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가 성큼 올라간 곳은 조금 전 양초를 팔던 이가 놓아둔 웬 상자 위였다. 가뜩이나 커다란 사람인데 상자 높이까지 더해졌으니, 더욱 커 보일 터였다.
무슨 상황인지 얼떨떨함에 추위가 확 가셨다.
수없이 많은 시선에 솜털이 곤두선다.
‘뭘 하려는 거야?’
그는 좌중을 돌아보더니 고개를 숙여 내게 작게 속삭였다.
“영애, 영애께서 제게 이성적이며 냉정한 사람이 되어달라고 말씀하셨지요.”
“어, 꼭 그렇게 되어 달라고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네요.”
“…….”
그가 내게만 들릴 정도로 매우 작게 속삭인 탓에 덩달아 내 목소리도 아주 작아졌다.
“그런 얼굴이 필요하다고 하셨죠. 영애를 대하는 게 아니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는 고개를 돌렸다.
긴장될 법도 한데, 나와 다르게 그는 태연해 보였다. 마치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고 거역할 수 없는 위엄마저 보였다.
“모두 들으라.”
맑으면서도 무게 있게 내리깔리는 목소리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대들은 오늘 이 자리에서 일어난 기적을 눈앞에서 보았을 것이다.”
“…….”
대중없이 떠들던 영지민들이 누구랄 것도 없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숨이 꼴딱 넘어갔다.
그의 눈꼬리는 이제 나를 대할 때처럼 축 처져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은 내 반려가 될 에스테 영애의 공.”
“…….”
“그대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30년간 대륙의 내로라하는 마법사들조차 고치지 못했던 성소를 누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주었는지.”
잠시 낮게 숨을 내쉰 대공님이 느릿하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나는 내가 잡아 주었던 얼굴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그의 표정에 소름이 살짝 돋았다.
이 남자는 정말로, 내가 부탁했던 표정을 하고서 이 순간 대중에게 외치고 있었다.
“다시 묻겠다. 누가 복구하였지?”
“…대, 대공비님입니다!”
“누구라고?”
“대공비님입니다!”
와아아아아! 한차례 환호성이 터졌다. 이전보다 더욱 큰 함성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을 꾹 쥐었다. 이거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저기요, 이러면 제가 나중에 이 이야기에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슬슬 고민이 되는데요…….’
“오늘 부정한 소문을 입에 담은 자가 있음을 알고 있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주변을 향해 대공님이 옅게 웃으며 부드러운 한마디를 덧붙였다.
“오늘 일을 잊고서 혀를 놀리는 자가 있다면, 그때야말로 그 혀를 세상에서 지워 주도록 하지. 물론 그때…… 손발이 성할 거란 생각은 말도록.”
우렁찬 대답이 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의 옷자락을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엄마야, 아무래도 나 방향을 잘못 잡은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요……! 저기요, 요정님? 들리나요? 들리냐고.
대공님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나를 보더니 고개를 살짝 내렸다.
귀로 다정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어때요? 더 차갑게 말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