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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98화 (98/281)

◈98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15)

눈물을 저 정도로 쏟으면 홍채 색도 흐려질 수 있단 걸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서 괜찮다고 한 걸요.”

자신이 무얼 했다는 자각도 없는지, 소리 없이 우는 대공을 보며 끙, 숨을 내쉬었다가 이내 살짝 웃었다.

음, 대공님.

“제가 왜 아픈 걸 못 느끼겠어요?”

저 아픈 거 싫어합니다. 겁나 싫어요. 거기다 죽으면 더 아프겠죠?

전 죽기 싫어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예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음, 그럼 염치없이 한 가지만 부탁 드릴게요.”

이대로는 계속 밖에서 펑펑 울기만 할 것 같아, 나는 한쪽을 가리켰다.

“저를 저기로 좀 데려다주실, 으아!”

타닥타닥, 모닥불이 타오르는 자리 쪽을 가리킨 거였는데.

손가락으로 가리키기 무섭게 그가 벌떡 일어났다. 시야가 휙 돌아가며 잘생긴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성인 여자를 무슨 강아지 들듯 번쩍 드네. 북부 사람들은 다 이렇게 힘이 센가?

“뭐, 뭣들 해!”

“아, 죄송합니다, 대장님! 뭐해, 다들 움직여!”

대공님은 나를 들어 올린 그대로 성큼 걷기 시작했는데 축지법이라도 쓰는 줄 알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모닥불 앞에 다다랐으니 말이다.

“대장님! 숄입니다!”

“대장님! 털신입니다!”

“대장님, 헤헤 저는 미리 끓여 둔 뜨거운 물입니다!”

대공님이 부대장인 제타르 경을 타박하고, 제타르 경이 단원들을 타박하고.

나를 모닥불 옆으로 옮기는 그 짧은 사이 순식간에 이뤄진 내리 갈굼 후에 나는 어느새 숄을 걸친 채 털신까지 신고 있었다.

아, 마지막에 따뜻한 물을 가져온 단원은 갈굼받았다.

“이 멍청한 녀석! 영애께서 팔팔 끓는 물을 마시란 말이냐!”

“영애님이 우리처럼 입천장을 데어도 금방 나을 것 같아?!”

“세 살짜리 내 딸보다 여리시단 말이다!”

……아, 왜 데자뷰가.

왜 이 사람들 뒤로 우리 가족이랑 3황자랑 래빗이 보이는 것 같지?

“아, 저어, 기사님들 전 괜찮아요. 후후 불어서 마시면 되니까 그냥 주세요.”

“수하의 실수를 감싸 주셔서 감사해요, 영애. 하지만 그러다 영애의 손에 끓는 물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렇게 대답한 건 대공님이었다. 그는 사나운 눈매를 한껏 시무룩하게 내린 채 눈물을 훌쩍거리며 말했다.

“그런 위험한 걸 가져온 손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 하지 않을까요?”

“히익! 대장님 잘못했습니다! 시, 시정하겠습니다!”

나는 숨을 삼켰다. 부하가 살려 달라고 하는데요…….

“……그으, 생각해 보니 저분께서 식혀서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네!”

물을 가져왔던 기사님이 호다닥 달려갔다. 중간에 ‘앗 뜨거!’ 하고 외친 것 같은데.

걱정스럽게 쳐다보자, 제타르 경이 스윽 시야를 막고 섰다.

“영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북부 사람들은 튼튼한 거 빼면 시체거든요.”

그가 엄지를 척 들었다.

“거기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정점을 찍어 마나까지 깨우친 놈들이 저희입니다.”

평범한 상처들은 하루나 이틀이면 낫는다고 설명하는데, 아무리 들어도 허풍 같았다. 하지만 얌전히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북부는 애들이 몬스터 발톱으로 공기놀이를 하는 곳입니다.”

“제 아들은 일곱 살에 스몰렛을 잡았지요! 아, 조그만 쥐새끼처럼 생긴 몬스터입니다!”

“제 딸은 벌써 철검을 잡았습니다.”

아, 이 사람들 대부분 애 아빠랬지?

신이 난 기사들이 한마디씩 떠들다가 갑자기 수그러들었다. 돌아보니 대공님이 시무룩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영애, 추위는 좀 가셨나요?”

“아, 네. 금방 따뜻해지네요.”

나는 어깨에 두른 숄을 팔랑 흔들었다.

“이게 아주 효과가 좋아요. 담요랑 털신도 아주 좋구요.”

대공님은 본인이 선물한 물건들을 하나씩 살펴보다가 허리를 숙였다.

아니, 허리를 숙인다고 생각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순식간에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남자가 보였다.

“죄송해요…….”

툭. 내 털신에 닿은 손이 그대로 내 발을 들어 올렸다. 읏, 나는 발목에서 느껴진 서늘함에 잠시 숨을 삼켰다.

장갑 낀 손이 차갑고, 얼어붙은 끝은 까끌거렸는데, 난 잠자코 그대로 두었다.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1) 현재 호감도: 84]

“북부에서는 이런 상처를 그냥 두면 치명적인 동상으로 이어져요.”

“아, 그렇군요. 몰랐어요.”

“모르셔도 돼요.”

“…….”

“……다신 이런 일이 없게 할 테니까요.”

장갑을 낀 손이 발등에 닿고서야, 그때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따끔한 고통이 느껴졌다.

슬쩍 내려다보니, 발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했다.

“이제 피가 돌아서 더 아플 거예요…….”

“아.”

대공님은 내 눈치를 보듯 나를 한번 보았다가 다시 내 발등으로 시선을 내렸다.

조금 신기한 마음이었다.

예전에 한번 황성에서 손을 베인 적이 있었다.

그때, 래빗이 내 손에 약을 발라 주며 울상을 지었는데, 지금 대공님 얼굴에 그와 비슷한 속상함이 비쳤다.

곧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 장갑이 얼었었네요.”

내 표정을 살핀 대공님이 황급히 손을 뗐다. 찌푸린 얼굴이 꽤 날카로워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대공님이 장갑 끝을 이로 물고 그대로 잡아당겨 벗었다. 퉤, 장갑을 바닥에 뱉은 뒤 맨손으로 다시 내 발을 잡았다.

일련의 동작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묘하게 성숙하고 날 것에 가까워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하지만 곧 발등에 뚝 연고가 올려지자, 집중했던 기분에서 벗어났다.

“미리 말을 해야 했는데, 오늘 밤만 지나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어요……. 내 잘못이에요. 조금 전 내 모습, 무서웠을 텐데…….”

살벌하긴 했지.

“아, 혹시 조금 전 그 모습은…….”

“내게는 광증이 있어요. 몬스터를 상대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성이 사라지고 몬스터를 베어 버려야겠다는 생각만 남아요. 마치 짐승처럼요.”

주변이 고요해졌다.

나는 주변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 사이에 흐르는 무거운 침묵을 느꼈다.

“그때는 주변 모든 것을 몬스터로 인식해요, 때로는 사람마저도요.”

광증이 일어날 낌새를 느끼면 아직 이성이 있을 때 멀리 자리를 피해서 밤새 몬스터를 벤다고 했다.

그러면 아침이 될 때쯤 정신을 차린다고 했다.

“몬스터를 벨 때뿐만 아니라, 감정이 심하게 격해질 때도 광증이 일어나긴 해요. 하지만 살면서 그런 일은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몬스터를 벨 때만 조심하면 됐다고.

더듬더듬 느릿하게 설명하는 모습이 체념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너무 빠르게 이성을 잃었어요. 영애에게는 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저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어요.”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제 부름에 정신 차려 주신 덕분에요.”

붉은 눈에 내 모습이 반사되어 보였다.

얼마나 선명한지, 내 얼굴에 그려진 불그림자마저 보였다.

“괜찮아요. 대공님이 원하지 않은 증세라면 그건 제가 병을 앓았던 것과 같은 거니까요.”

어차피 광증은 앞으로 자주 보게 될 모습이었다. 무섭다면 극복해야지, 어쩌겠어.

제발 남자주인공 검에 사망하는 엔딩만 아니면 좋겠다. 요정님, 듣고 있니?

“병에 걸린 게 제 탓은 아니지 않겠어요.”

이렇게 말해 주던 다정한 가족들을 떠올렸다.

래빗에겐 가족 같은 친구가 필요했다면, 이 남자에겐 괜찮다고 말해 줄 타인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도망가지 않아요?”

“도망가면 보내 주시나요?”

“무섭진, 않나요?”

“솔직히 무섭긴 했어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봐 온 기사님들은 충성스러웠다.

이 사람들은 감히 하늘 같은 주군에게 괜찮다는 말을 하는 대신 광증마저도 이 남자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혹시나 나와 비슷한 말을 했을진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눈높이를 맞춰 이런 모습도 괜찮다고 말하진 않았을 것 같다.

“그 검이 저를 향했다면 더 무서웠겠지만 그러지 않으셨고요.”

때론 가벼운 위로가 진지한 충언보다 도움이 될 때가 있는 법이니.

“저는 생각보다 무던하거든요. 대공님께는 그나마 다행이려나요?”

“…….”

“제게 시간을 주신 만큼 대공님에 대해 알아 가야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적응해 볼게요.”

그 말을 끝으로 신호라도 보낸 것처럼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얼마나 순박해 보이던지 이런 모습까지 봐도 되나 싶어 난감해졌다.

“영애는…… 다정, 하셔서…….”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을 보다 나는 슬며시 담요를 들어 올렸다.

“그만 우세요, 그으, 북부는 춥잖아요?”

“네……. 추, 춥지만 눈이 많아서 예쁠…….”

어떻게든 북부의 장점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 눈물 때문에 말이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

……북부에 있는 동안 이분 전용 손수건으로 취직하는 거 아니야?

“그럼 더욱 우시면 안 되겠네요. 근손실, 아니, 수분 손실 와요.”

앉아 있어도 우월한 체격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말이 헛나왔다.

아니, 이렇게 추울 때도 수분 섭취가 중요할 거 아니야? 이런 곳들은 물이 잘 얼어서 물 구하기가 더 힘들다고 알고 있다. 귀족들이야 마법이 있으니 괜찮겠지만…….

음, 괜한 걱정인가?

그사이 대공이 눈물을 그쳤다.

“아, 그치셨다.”

나는 싱긋 웃었다.

“이런 건 미리 말씀해 주시면 좋았겠지만 말 꺼내기 어려우셨을 거란 건 이해했어요. 하지만 괜찮으시면 다음엔 먼저 진솔하게 말씀해 주세요.”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면 좋겠다.

내가 대공님의 모든 것을 알아야 이 이야기 끝에 도달할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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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게요.”

이야기를 마치고 고개를 돌린 나는 흠칫했다.

‘뭐야, 이 시선.’

무수히 많은 눈이 나만 향하고 있는 기분이란…….

대공님의 눈 돌아간 모습을 볼 때랑은 다른 의미로 등골이 오싹했다.

이를테면 첫 콘서트에 올라간 가수나 무대에 처음 올라간 배우가 관객석을 보는 기분이 이러할까? 객석 가득한 기대와 초롱초롱한 눈을 마주하는 기분 말이다.

물론 이런 상황에 익숙할 연예인들과 다르게 일반인인 나는 매우 부담스러웠다.

이 기사님들이 딸 가진 애 아빠 군단이란 걸 알기에 더욱더 부담스러웠다.

우리 애가 그냥 영재도 아니고 천재였어요! 하고 쳐다보는 것 같다고. 아니, 체감상 그보다 더했다.

“크흠, 날이 늦었으니, 얼른 저녁을 준비할까요?”

제타르 경이 잽싸게 한마디를 꺼냈고 대공님의 허락하에 곧 다들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늦은 저녁 식사의 고소한 내음이 퍼졌다.

‘어째, 불안한데.’

저 수상한 시선에 관해서 한번 말을 꺼내 볼 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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