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2)
그리고 여주의 행보도 당황스러웠다.
원작대로 최악의 결혼 상대 대신 대공과 계약 결혼, 즉 정략혼을 잘 성사시켜 놓고서는 왜 갑자기 이런 선언을 하고 도망간 거지?
계약 결혼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고, 결국은 도망가기 위한 밑그림이었나?
밑그림에 똥칠해 놓고! 그 뒷수습은 나와 에스테가더러 하라고?
파올로가 기운 없이 덧붙였다.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고 하더라…….”
“……정말 대단한 언니네.”
문제는 당장 지젤을 찾을 길은 요원했고 분노한 대공가의 칼은 코앞에 드리워졌다는 것이었다.
이게 다 이 똑똑한 여주 님이 본인의 뛰어난 두뇌를 실종과 도망에 적극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그야말로 장르의 재발견이군. 이게 만약 진짜 소설이었으면 일단 바로 읽었다. 이런 신박함이라니.
“오빠, 무슨 방법이 없을까? 뭐든 좀 생각해봐. 아버지 얼굴이 반쪽이야…….”
어떡해야 할까.
처음엔 지젤을 대신할 대리 여주인공을 내세우는 방법을 생각해 봤지만, 일찌감치 기각됐다.
애초에 대공가에서는 지젤의 얼굴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이 바란 건 ‘레스터풀 백작의 딸’이었지,
상황을 보아서는 이제 와 비슷한 나잇대의 여성을 추천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요정, 이 이야기의 여주인공은 반드시 지젤이어야 해? 다른 사람은 안돼?’
[요정은 그렇게는 안 될 거라고 조언해요. (·•︠_•︡ ) ]
어쩐 일로 이 요정 놈이 힌트를 줬다.
[요정이 특별히 주는 힌트! 이 소설은 오직 ‘남자주인공(대공)’의 ‘약혼자’만 여주인공으로 인정해요!]
그게 지젤이잖아?
저기요, 결국 지젤만 가능하단 소리잖아요, 예?
그랬다. 현재로서 대공가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지젤을 데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면 지젤을 데려오라는 서브 퀘스트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냐. 그리고 그 언니 찾을 수 있는 힌트라도 좀 줘…….’
어째서인지 첫 번째 이야기처럼 퀘스트가 바로 주어지지 않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여길 겨를은 없었다. 우리 집안 상황이 이토록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오전이 지나가도록 파올로와 나는 머리를 맞댔다. 물론 뭐 하나 건진 것은 없었다.
“아버지는 외출하셨지?”
“아아, 어.”
“어머니는?”
현재 부친은 레스터풀 백작의 눈물 어린 요청으로 투자자들을 만나러 갔고, 모친은 돈을 융통해 보려 먼 친척을 만나러 갔다고 한다.
“초르주 자작은 어머니의 먼 친척인데, 텐 왕국 상단과의 무역으로 꽤 돈을 벌었으니까…….”
“그 돈을 우리에게 빌려줄까?”
“모르지.”
파올로가 잠시 나를 빤히 보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인간은 별로인데…….”
“왜?”
파올로가 고개를 저었다.
“방계나 먼 친척 간의 약혼은 아예 제도적으로 막아 버리면 좋을 텐데 말이지.”
“갑자기 무슨 말이야. 왜 어디서 날 좀 데려가겠대?”
“애들은 몰라도 돼.”
누가 애야. 나는 심드렁하게 눈을 내리깔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충 짐작했다.
뭐 어느 가문에서 돈을 빌려주는 대신 나를 데려가겠다고 한 모양이다. 내 입으로 말하긴 조금 그렇지만 나는 예쁘장한 편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버지는 숙부님이랑 함께 나간 일은 잘될까? 마지막 기회라며.”
“모르지……. 일단은 그 숙부님이 애걸복걸해서 만든 자리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겠냐고 말했지만, 그리 말하는 파올로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봐서 그의 심정을 짐작했다.
‘오늘 자리도 가망이 없나 보네.’
우리 가문이 망하는 건 피할 수가 없다는 거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뭐라도 해 보려고.”
사실 황성을, 특히나 래빗을 떠올리지 않은 건 아니다.
비센은 황권이 강한 나라이므로 황제의 입김으로 해결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다.
단, 어디까지나 보통의 일이었다면 말이지.
상대가 체단 대공이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체단 대공은 계승 서열은 낮았지만 황실 핏줄을 이은 사람이다. 그리고 북부의 패자이자 국경을 지키는 자라서 제아무리 폭군이라 해도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단순한 파워 게임이었다면 황제의 우위를 점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또 상황이 미묘했다. 현재 명분은 투자한 돈을 돌려받겠다는 대공에게 있으니까.
황제가 끼어들면 아주 불편한 구도가 될 거다.
하지만 그래, 결국은 돈 문제니까, 내가 황제한테 돈을 빌리면 되지 않을까?
그럼 황제도 직접적으로 끼어들지 않아도 되고!
친구에게 하지 말아야 할 부탁 중에 첫 번째가 돈 부탁이지만, 일단 지금은 가족을 살려야 하니까……!
“나, 황제 폐하께 돈 빌리러 다녀올게! 돈만 구해 오면 되는 거 아니야?”
“야, 야. 달린!”
파올로가 뭔진 몰라도 내게서 심각성을 느낀 건지 나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때, 누군가 문을 급히 두드리더니 벌컥 문이 열렸다.
“아, 아가씨! 도련님! 큰일 났습니다!”
“리버, 무슨 일이야?”
“그, 그, 체단 대공가에서 찾아오셨습니다!”
엥? 대공가에서 우리 집을?
우리는 얼른 서로를 마주 봤다. 내가 입술을 뻐끔거리자, 파올로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모르는 일이라는 소리였다.
그런 다음 파올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른 응접실로 모셔!”
“넷!”
달려온 시종 리버가 다시 달려가고 우리는 그 뒤를 빠른 속도로 따라갔다.
“대공가에서 우리 집을 왜 찾아와? 찾아가도 레스터풀 백작가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레스터풀 백작이 이곳에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잡으러 온 건가…….”
“엥? 오늘까진 괜찮은 거 아니었어?”
그래서 부친이 레스터풀 백작과 함께 투자자들 설득하러 간 걸로 알고 있었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는 찰나 파올로가 심각한 얼굴로 따라오지 말라며 만류했다.
아니, 여기서 어떻게 빠져. 당장 집안이 망하게 생겼는데!
“됐어, 나도 같이 가.”
“있으라니까.”
“나는 에스테 아니야?”
파올로는 끙, 신음과도 같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결국은 늘 내 고집을 들어주는 가족답게 양손을 들며 항복을 선언했다.
그렇게 우리는 나란히 응접실로 향했다.
“일단 넌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파올로가 여기서부터는 양보하지 않겠다는 얼굴을 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 앞에 남았다.
일단 상황을 보고 도저히 안 되면 황성으로 가야겠어.
으윽, 래빗에게 이런 이야기는 들려주고 싶지 않은데. 밝고 예쁜 것만 봐야 할 우리 래빗에게 빚 얘기라니. 살려달라는 요청이라니.
‘정말 미안하지만 리제에게도 한번 얘기를 해봐야겠어.’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방안을 짜내고 있는데, 뺨으로 따가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웬 노기사가 나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흑빛 갑주, 거기다 갑주에 새겨진 거대한 맹수 문장. 체단 대공가의 기사였다.
‘근데 난 레스터풀 백작가 사람도 아닌데 왜 저렇게 노려봐?’
누가 보면 내가 저 기사 아저씨의 손주라도 해친 게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강렬한 시선이었다.
아, 혹시 저들에게는 레스터풀이나 에스테나 다 같은 편으로 보이나?
하지만 어째 채권자가 빚쟁이를 노려본다기엔 너무나 열렬한 시선인지라 신경이 쓰였다.
가릴 만한 건 없나.
“흐음…….”
한편으로 자연스럽게 저 기사의 주인, 체단 대공이 떠올랐다.
‘그 사람, 황제를 알현하던 날에 넘어지던 걸 붙잡아 줬었지.’
어렴풋한 기억이었지만 내가 읽었던 책 속에서는 ‘북부 대공’이라는 네 글자를 사람으로 만들면 딱 그럴 것 같은 이미지였다.
검은 머리칼과 잔혹함을 담은 붉은 눈동자. 살벌한 인상.
실제로도 차갑고 냉정하며, 목적을 위해선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피도 눈물도 없는 성정. 거기다 거친 북부의 환경에 최적화된 남다른 피지컬까지.
로판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성격의 캐릭터이기도 했다.
차갑고 냉정한 군주지만 내 여자에겐 따뜻할 테니까, 암암.
가만 보자, 이 소설 읽다가 왜 15세가 아니냐고 외쳤던 것 같기도 한데…… 이 소설이 맞나?
아무튼 내 기억이 맞다면 두 주인공의 어른스러운 성격으로 인해 남녀 간의 텐션이 높던 소설이었다.
그렇지, 으른들의 연애란 느낌이었지.
그런 연애를 바로 옆에서 관람할 수 있었는데, 놓치게 되어 살짝 아쉽지만 내 코가 석 자였다.
그때 문이 달칵 열리며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파올로?”
한 사람은 파올로였고 다른 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검은 제복을 걸치고 있어 어렵지 않게 대공가 사람임을 알아봤다.
갈색 머리를 정갈하게 올린 젊은 남자는 대공가의 검은 제복을 걸치고 있었음에도 어딘가 학자 같은 느낌을 풍겼다.
한데 꽤 부드럽고 잘생긴 얼굴이 나를 본 순간 와락 일그러지더니,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