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76)
높은 작위의 남자가 보이는 태도라기엔 지나치게 정중했던 탓이다.
난 일단 웃어 보였다. 슬쩍 손을 뻗어 부채를 받자, 빛을 받지 못해 새하얀 내 손목이 싱그러운 햇살 아래에 드러났다.
갑자기 희미하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어째서인지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린 남자가 보였다. 뭔가 곤란하다는 듯 입을 살짝 가로막은 채였다.
살랑, 바람에 흔들린 머리카락 사이로 슬쩍 보인 귀가 약간 붉은 것도 같았다.
“저, 대공님?”
이렇게 불러도 되나? 이 사람한테도 뭔가 특별한 인사를 올려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남자는 대답이 없었고, 대신 휙 고개를 돌려 내게 말끔하게 목례했다.
나는 다시 눈이 마주치고서야, 남자의 눈 밑에 조그만 눈물점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남자가 그대로 돌아섰기에 더는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거, 되게 말이 없는 분이시네.”
대공이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중얼거렸다.
어느새 팔찌, 사이렌 오더의 빛은 꺼진 뒤였다.
저 사람이 아마도 다음 소설 주인공이란 말이지. 대체 이번엔 이야기가 어떻게 된 거야?
북부 대공이 나오는 소설의 클리셰라…….
‘너무 많아서 짐작도 못 하겠네, 진짜.’
난 답답함에 이마를 북북 문질렀다.
“가문이 체단…… 끙, 아직은 모르겠는데.”
아, 이놈의 기억력! 뭐 하나 제대로 기억하는 게 없어!
하지만 내 대뇌도 억울할 거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많이 보랬냐! 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서 세세한 것까지는 기억 못 하는 걸 어떡하라고!
……그래, 그 말은 맞지. 많이 읽은 내가 죄인이지.
거, 요정 선생님. 못 해 먹겠어요, 진짜.
오랜만에 현자 타임이 찾아와 한숨을 내쉬는데, 마침 사라졌던 시종이 나타나 나를 다시 이끌었다.
“이쪽입니다.”
처음 보는 알현실 앞에서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마지막으로 갔던 알현실보다도 더 컸다. 커도 너무 컸다.
이 미천한 몸이 들어가기엔 문이 너무 크고 화려해 보이네요.
“폐하께서 영애님을 위해 특별히 황족을 위한 문으로 드실 수 있게 허락하셨습니다.”
그 허락, 취소 안 될까요?
그러나 곧바로 문이 활짝 열려 그 말을 할 기회조차 없었다. 문이 어찌나 컸는지 여는 순간 바람까지 살짝 이는 듯했다.
나는 걸음을 디뎠다.
다행이랄지, 긴장감으로 뻣뻣해진 덕에 발에서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달린 에스테 영애께서 드십니다!”
연회도 아니건만 시종이 크게 외치는 바람에 알현실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황실에서 미리 전한대로 알현실에는 매우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아마 저 중 어딘가에는 부친도 있을 테지만 찾아볼 정신이 없었다.
레드카펫이 깔린 길 끝, 계단 위에 황제가 앉아 있었다.
바로 아래 계단에는 차례로 황태자와 2황자, 3황자, 그리고 우리 사랑스러운 래빗이 각기 앉거나 서 있었다.
‘래빗!’
래빗을 보자, 신기하게도 긴장이 풀렸다.
우리 사랑스러운 래빗은 본인만큼이나 조그만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이 얼마나 큐티한 광경인지.
오늘도 한계치를 초과한 귀여움이었다. 누가 의상을 골랐는지 몰라도 하늘색 리본 아주 굿이야, 굿.
“창공의 날개에 안식의 숨결을. 위대한 날개는 패배하지 않을 터이니.”
황제의 앞에 다다라 고개를 깊이 숙였다. 내 위로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날개에 앉은 영광이 그대를 가호하길 바라지.”
고개를 들라, 황제의 허락에 시선을 들었다.
“아울러 앞으로 날개의 가호가 그대에게서 떠날 일은 없을 것이다, 달린 에스테 영애.”
폭군의 말에 모여 있던 대신들, 귀족들이 작게 술렁거렸다.
인사말에서 날개는 황실을 뜻한다.
이는 즉 ‘앞으로 내가 너의 뒷배는 아주 빵빵하게 봐주겠다’ 하고 선언한 셈.
음, 좋기는 한데 왜 무서운 마음이 먼저 들까요. 그간 폭군 폐하와 그리 좋게 엮이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댁의 아드님들이 무슨 사냥감 보듯 누구는 재밌다는 듯이, 또 다른 누구는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어서일까요.
‘저 황태자랑 2황자는 왜 저렇게 쳐다보는데!’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몹시도 부담스러웠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티를 낼 수가 없는 상황이지.’
황자들이 아니더라도 저 대신들이나 대귀족들의 눈도 충분히 부담되었다.
그리고 이상한 얘기지만 어느 순간 한계치에 도달하니 오히려 부담감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될 대로 되란 마음가짐이랄까.
“그대는 2주 전, 신전이 벌인 극악무도한 계략 하에 실행된 황녀 납치 사건에서 황녀를 구출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계략’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순간 황제의 목소리에 살기가 감돌았다.
서 있던 귀족들이 움찔하고, 그들을 곁눈질하던 나도 움찔할 만큼 압도적인 기세였다.
“아니, 그대야말로 최고의 공로자였지. 영애가 아니었다면 내 딸을 구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만약 그날 래빗을 못 구했으면 폭군은 그 즉시 육아물 아빠 자격을 내놓아야 했다. 물론, 제때 오지 않았으면 내 목숨도 없었겠지.
한번 죽음을 겪은 이후 단 한 시간의 목숨을 부여받았던 건 정말이지 신선한 경험이었다.
너무 신선해서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아!
“황실을 대표해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는 바.”
황제를 슬쩍 보았다. 어쩐지 2주 전보다 조금 더 부드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 래빗을 쳐다봤구나.
“짐의 딸을 구해 준 공로를 몇 마디 말로 끝낼 생각은 없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난 건 좋은데, 왜 난 좀 불길한 느낌이 드는 거지?
“오늘 이 자리에 모든 대신과 수도의 대귀족들을 함께 모은 것은, 여기 내 딸 유엘의 모습을 알리기 위함이다.”
그간 래빗은 공식 석상에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고, 탄신연에서도 도망쳐 버렸다. 그날 래빗을 처음 만났던 순간이 생생하다.
왜 내 공을 치하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을 불러들였는지 이해했어.
음, 그러니까 이제는 래빗의 존재를 만천하에 공표해서 대놓고 니들 건드리면 죽여 버리겠다, 선언하시겠다는 거군.
“유엘.”
놀라운 건 황제가 손을 내밀자, 래빗이 의자에서 일어나 타박타박 걸어가더니,
무려! 황제의 손을 잡았단 점이었다!
물론 약간 뚱한 표정이었다. 다행히 나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미세한 표정이었지만.
와, 정말 감격스럽다.
사람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감탄사들 또한 내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저분이 황녀님이신가……. 오오, 나는 처음 보는군.”
“실로 사랑스러운 외모이시군. 머리색은 폐하를 닮으셨어.”
“거기다 실로 신성한 색이 아닌가!”
그래, 그렇지. 원래 육아물은 이렇게 우리 애 찬양 듣는 맛에 읽는 거다.
이런 일은 쌍수 들고 반겨야지. 더, 더 하라고. 오늘부로 우리 래빗의 사랑스러움이 만천하에 알려져라, 알려져!
황제가 무어라 속삭이자 래빗이 인상을 확 찡그렸다.
그러나 곧 손을 들어 대신들을 향해 성의 없이 흔들었다. 감탄이 더욱 커졌다.
……래빗, 대체 황제가 뭐라고 했길래 손을 흔든 거야?
아니, 그보다 왜 또 불안해지는 거냐고.
불안한 예감은 현실이 됐다.
“영애, 그대를 위해 이 제국 수도의 전체를 초대해 성대한 연회를 열까 한다만.”
아니, 아니 아니. 아니요. 그러지 마십쇼, 제발.
“……황송합니다. 하오나 제가 병석에서 일어난 지 오래되지 않아 저를 위해 성대한 연회를 열어주심에 감사하나 혹 폐하께서 베풀어 주신 크나큰 은혜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 못할까 걱정되옵니다. 감히 그 말씀을 거둬 주시길 청하는 마음을 이해해 주시옵소서.”
파티 싫어요, 건강에도 좋지 않아요. 곧 바쁠 예정이에요! 두 번째 이야기가 절 기다린다구요.
난 그저 이 자리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었다.
“흐음, 이건 여기 있는 내 딸의 의견이었다만, 싫은가?”
아아, 래빗이요? 그건……. 나는 잠시 간절한 눈으로 래빗을 보았다.
미안합니다, 친구님. 이건 래빗이라도 안돼.
래빗이 열 명이 있더라도…… 그건 생각해 보겠지만 아무튼 안 돼.
“좋아, 알았네. 영애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대신 지난 기회에 제대로 열지 못했던 내 딸의 탄신연을 재차 진행하는 걸로 하면 되니까.”
“누구 맘…… 후우.”
래빗이 발끈하려다가 꾹 참았다. 아니, 저기요. 저를 위한 자리는 괜찮고 본인이 주인공인 자리는 싫다는 겁니까?
무슨 차이인데? 어차피 둘 다 참석하게 되는 거잖아?
“이 자리는 연회를 공표하는 자리로 하지.”
황제의 선언에 모든 대신들이 고개를 숙였다.
사실 나라면 시답잖은 일로 불렀다고 불평할 것 같은데, 황제의 기세가 아예 이런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하게 하는 듯했다.
“아니, 전 대륙에 내 딸의 사랑스러움을 공표하도록 하지.”
음, 대체 2주간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 황제님은 단어 선택부터 싹 달라진 걸까? 궁금했지만 딱히 물어보진 않기로 했다.
결국 옳은 방향으로 간 모양이니까.
내가 목숨까지 걸었던 도박의 대가로는 래빗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이면 충분했다.
“그래, 그렇다면 영애. 그대는 무엇을 원하지? 바라는 것을 말하라.”
다시 화살이 내게로 돌아왔다.
“짐의 이름을 걸고 무엇이든 들어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