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70)
아, 다행이다. 눈을 뜬 거지?
“이런, 제 발로 걸어 들어갈 줄이야.”
멀지 않은 곳에서 웃음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쾅!
나는 강력한 충격을 받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본능적으로 팔을 휘둘러 막기는 했으나, 겨우 참고 있던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경고해요! 특수한 공간에 들어왔습니다! 결계가 빙의자 님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어요!]
[건강 수치가 떨어지고 말았어요! 남은 건강 수치: 15]
[출혈이 심합니다!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떨어지고 말았어요! o(இдஇ;)o !! 현재 건강 수치: 13]
“그렇지 않아도 그분의 종을 만들기 위해 뛰어난 영혼이 하나 필요하던 참이었습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까다롭게도 그 영혼은 젊고 깨끗하며 검기를 쓸 수 있는 소재여야 했는데, 어쩜 이렇게 뚝 떨어졌는지.”
늘 커다랗다고 생각했던 눈이 뜨여 있었다.
하지만 그 눈은 초점 없이 까맣게 죽어 있었다. 래빗의 조그만 어깨 너머로 히죽히죽 웃는 대신관 로알의 얼굴이 보였다.
“거기다 놀랍게도 황녀님께 정신 붕괴까지 선사할 수 있으니, 참으로 뛰어난 재료로군요.”
내 어깨에는 래빗이 만든 검이 관통하고 있었다. 나처럼 돌을 잡은 채 기로 만든 검이었다. 나는 그제야 쿨럭 기침을 토해냈다.
내 안에서 엠버넷이 울고 있었다.
“……래 ……빗, 황녀님…….”
[치명적인 부상!]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대폭 떨어집니다. 현재 건강 수치: 5]
[출혈이 이어집니다!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떨어지고 말았어요! 현재 건강 수치: 3]
스킬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손을 더듬어 래빗의 손을 붙잡았다.
“괜, 쿨럭, 찮아요……?”
커다랗던 래빗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미안, 해요……. 옆에, 있어 주려, 했는데…….”
초점 없이 검게 죽어 있던 눈에 찰나지만 다시 색이 떠올랐다.
내가 익히 알던 래빗의 눈동자 색이었다.
그 커다란 눈에 눈물이 솟는 게 보였다.
“다, 달린, 달린, 내, 내갸, 내갸, 너, 녈.”
“하아, 화, 황녀님…….”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고개를 저었다. 사실 이제 목을 가누기도 힘들었다.
“고, 괜찮, 아…….”
이게 바로 황제와 황태자가 설명했던 ‘금지된 신성력’의 힘일 터다. 저들은 래빗을 세뇌해 인형으로 삼으려 했던 거야.
래빗이 다시 태어나서도 절대로 잊지 못하던, 그 끔찍한 멸망의 기억을 보여 주면서.
그리고 이제는 래빗의 손으로 나를 찌르게 만들어서.
래빗의 뒤에 푹 꽂혀 일렁이는 검은 안개를 노려봤다.
“잘, 들으세요, 래빗, 황녀님……. 하아, 쿨럭!”
나는 아기의 손을 꽉 잡았다.
이렇게 작은 손인데! 당신은 이런 것을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데.
“구, 하러…… 올 거예요.”
“아, 꿈, 꿈인고냐? 모, 모둔 게 꿈이고…….”
그러자 위쪽에서 기다렸다는 듯 은밀하고도 다정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네, 황녀님. 제 말이 들리십니까? 맞습니다, 꿈입니다. 모든 게 꿈이니 이제 다시 잠들면 행복한 일이 찾아올 것입니다.”
“염병, 쿨럭, 하네! 래빗 황녀님!”
“아, 아아, 아!”
“모든 건, 현실이에요! 정신, 차려요, 황녀님!”
나는 하아,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같이, 행복 해지기로 했잖아요!”
[출혈이 이어집니다!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떨어지고 말았어요! 현재 건강 수치: 2]
래빗의 눈물 가득한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 도망치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이전처럼 전생에 얽매어 자신을 가두든, 지금처럼 현실을 회피하든.
도망친 곳엔 천국은 없을 거예요, 황녀님.
“구, 구하러 올 거예요!”
“…….”
“분명히!”
[부상이 깊습니다!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떨어지고 말았어요! 현재 건강 수치: 0]
눈앞으로 검은 창이 떠올랐다.
[빙의자 님은 사망했습니다.]
컴퓨터가 픽 꺼지는 듯한 기계음을 들은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건 잠시뿐.
[스킬 ‘불굴의 의지’ 발동 조건 달성! 스킬이 활성화됩니다!]
[건강 수치가 1시간 동안 1로 고정됩니다.]
[※주의, 1시간 뒤에는 사망하므로, 빠른 치료가 필요합니다!]
나는 참았던 숨을 토했다. 아주 짧았지만 정말 죽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란 어렵지 않았다.
“콜록, 콜록, 콜록!”
거기다 이제 남은 시간은 정말로 딱 한 시간뿐.
젠장, 그 사이에 정말 누가 오긴 할까?
‘피가 안 돌아…….’
래빗에게 내 눈이 감기는 모습은 절대 보여 주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눈에 힘을 줬다.
이대로 래빗의 정신이 무너지게 둘 순 없다. 절대 저놈들이 원하는 대로는 두지 않을 테다.
당신은 행복해져야 하니까.
“누, 누가 구하러 온댜는 거야. 지, 짐에겐 아무도 없어, 뎌는 아무도…….”
“하아, 황녀님 가족들이요.”
“미, 믿지 않야!”
“올 거예요, 오면, 믿어 주시는 거예요.”
다행스럽게도 ‘불굴의 의지’란 스킬이 고통마저 사라지게 해 주는지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 덕에 말이 또박또박 흘러나왔다.
“사실은 모두가 황녀님을 너무너무 좋아하고 있었어요.”
언젠가 래빗이 마음을 열길 기다리면서.
그러나 열리지 않을 성이었다.
내가 래빗의 성을 열었다. 내가 만든 이야기였다.
클리셰? 정해진 시련? 그딴 게 다 뭐라고. 나는 그냥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는데.
그러니까, 이 이야기의 끝은 무조건 해피엔딩이다. 그래야만 해.
나는 그런 엔딩이 보고 싶어졌으니까.
“구하러 올 거예요. 반드시.”
그렇게 말하는 순간 툭, 내 손에서 힘이 빠졌다.
래빗이 놀란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조금 전보다 더 선명해진 눈동자 색이었다.
“달린!”
“아, 이제야 이름, 불러 주시네…….”
나는 헤헤, 웃었다.
“가족은 믿지 않아도 저는 믿으시죠?”
“…….”
“그럼 황녀님 가족을 믿는 저를 믿으세요. 그분들은 꼭 오실 거니까.”
그 순간이었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바닥이 진동했다.
눈앞이 가물가물한 중에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소리와 진동이었다.
멀리서 눈부시게 솟구치는 빛을 본 것도 같았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모두, 포위해!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와르르 쏟아지는 은색 갑주의 기사들, 은빛 물결 사이로 역광을 뚫고 나온 사람이 보였다.
나부끼는 하늘색. 너무나도 익숙한 색이다.
“다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라.”
오싹하도록 싸늘한 목소리가 이 거대한 공간을 지배했다. 나는 가물가물해지는 시야를 두고, 이 목소리에 살짝 웃었다.
“대신관님!”
온 힘을 다해 고개를 돌리니, 로알이 바닥에 처박혀 두 기사에게 짓눌린 채 목을 밟히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목을 밟은 자는 바로 황제였다.
“지금부터 움직이는 자는, 즉시 목을 베겠다.”
“…….”
“아, 물론 움직이지 않더라도…… 살 수 있을 거란 착각은 말도록.”
우리를 감싸고 있던 결계가 사라지며 숨통이 트였다. 나는 간신히 상체를 일으키며 고개를 돌렸다.
“하하하, 아버지 너무 다정하게 말씀하시네요…….”
소리가 들린 쪽은 로알의 옆, 그곳엔 또 다른 대신관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의 위로 검을 꽂아 넣으며 다른 손으로는 턱에 튄 피를 닦는 황태자가 보였다.
“저 같으면 그냥 목을 베고 들개의 먹이로 던져 준다고 할 텐데.”
뒤쪽에서는 대신관인 노인이 누군가에게 붙잡혀 무릎 꿇은 채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있었다. 2황자였다.
뒤통수를 꽉 밟고 있는 얼굴에는 지금까지 전혀 보지 못했던 난폭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아, 늦지 않았네. 다행이다…….’
나는 래빗과 눈이 마주쳤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제 말 맞죠? 이제 믿어 주시는 거예요, 가족들도. ……폐하도.”
그리고 래빗의 눈이 커지는 게 내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던 것 같다.
“아, 황녀님 마지막으로 저 한 시간 이내로 치료 해 주시기……에…요.”
“달린!”
* * *
쿵! 달린의 몸이 쓰러졌다. 래빗은 그대로 제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느꼈다.
“달린, 달린! 달린!”
핏기없이 창백한 몸은 살아 있는 자라고는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래빗은 멈췄던 눈물이 다시 솟는 것을 느꼈다.
래빗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끼며 달린의 연약한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어떻게 만났는데, 또 누군가를 보낼 수는 없었다. 혼자 남기 싫었다. 무서웠다.
누군가 래빗의 조그만 어깨를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부드러운 만류였다.
“흔들지 마라, 출혈이 심하다.”
나지막한 목소리에 래빗이 고개를 돌렸다. 라이칸이었다.
“다, 달린이 눈을 뜨지 않는댜…….”
그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에 잠깐 흠칫하는 듯했지만 곧 조심스럽게 달린에게서 래빗을 떨어트렸다.
“괜찮아. 이제 괜찮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