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70화 (70/281)

◈70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64)

2황자는 스스로 되짚어보려는 듯 하나하나 말한 것 같았지만 설명이 이어질수록 내 등엔 식은땀이 송골송골 늘어났다.

이 사람 정말 로아타 황제의 유령을 본 거야? 아니, 그게 진짜 유령이 맞긴 한 건가?

‘대체 2황자는 뭐길래…….’

[이건 요정이 도와줄 수 있다고 손을 번쩍 들어요! 빙의자 님에게 ‘인물 열람’을 추천해요! °˖✧◝(⁰▿⁰)◜✧˖°]

오랜만에 요정이 조언했고, 나 또한 오랜만에 이 수상쩍은 창의 조언을 들을 마음이 생겼다.

‘인물 열람.’

[라이칸 포르 비센

칭호: 이적을 눈치챈 자(lv.3)

역할: 육아물 《제국의 아들부잣집 막내딸》 주인공의 둘째 오빠, ???

호감도: (현재 정산 중입니다)

현재 상태: ‘클리셰’에서 벗어났으나, 빙의자 님의 인도로 안정을 되찾은 상태. 안전합니다!]

분명 2황자를 처음 만났을 때 이런 창이 떴었지. 퀘스트에만 집중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여기서 이 칭호라는 게 래빗의 이상함을 눈치채게 만든 특성 같은 건가?’

그런 것 같았다. 표현부터가 이적, 즉 환생을 간접적으로 눈치챘다는 소리 같으니까.

‘본인은 단순히 유령 같은 걸로 치부하는 것 같지만 말이지.’

이어진 2황자의 설명은 내가 떠올렸던 가설을 그대로 받쳐 주었다.

“어째서인지 그간 그 애에게 다가서기가 어려웠다. 아니, 갈 수가 없었지. 다가가기만 하면 그 유령이 노려보더군. 어마어마한 살기였다.”

그랬겠지.

래빗은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영원히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지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동시에 적국을 향한 원한을 가득 품었고 특히나 황족을 미워했었다.

2황자가 자신의 턱을 짚으며 곰곰이 생각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 애에게 아무런 압박 없이 접근할 수 있었던 건…… 영애와 있던 그 날이 처음이었던 것 같군. 연회에서 보았던 때 말이다.”

응, 나도 기억하지. 설마하니, 그쪽이 로아타 황제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을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하지만 이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요정의 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필요 이상으로 클리셰를 파괴할 시엔 페널티가 주어진다고.

나는 절대 래빗을 제외한 등장인물에게 아기 황녀님의 환생에 관해서 말할 수 없을 거라고.

섣불리 움직였다 괜히 페널티를 안을 수는 없었다.

“죄송해요, 황자님. 당황스러워서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굳이 감상을 얘기할 필요 없다. 나도 내가 미친 건가 싶었으니까.”

“아뇨, 믿지 않는 건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란 걸 이 세상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나일 거다.

“그럼 지금도 보이세요? 그…… 유령?”

“그래. 그러고 보니 신기하게도 유엘이 영애와 함께 지내기 시작한 뒤로 가끔은 그 유령이 흐릿하게 보이기도 하더군. 한순간 사라진 경우도 보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왜 황자님께서는 그런 유령을 보시게 된 걸까요?”

“내게도 신성한 힘이 있어서인지도 모르지. 유엘을 제외하고 형제들 중에 미약하게나마 그 힘을 가지고 태어난 건 나뿐이니.”

신전의 힘이 영혼과도 관련이 있는 거구나. 혹시 몰라 내가 짐작한 바가 맞는지 2황자에게 묻자,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모두 미친 소리라 치부해도 상관은 없다.”

조금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를 내려 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지금껏 내놓은 말들이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믿기 어렵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믿어요. 황자님께선 괜한 소릴 하실 분이 아닌걸요.”

“…….”

래빗을 그토록 아끼는 사람인데, 그런 여동생을 두고 헛소리나 거짓말을 할까.

나는 이 순간 그에게 저질렀던 실수도 잊고 경계도 잊은 채 2황자를 바라봤다.

스스로 미친 건가 느끼면서도 꾸준히 래빗의 주변을 멤돌고 말을 걸 타이밍을 노리고, 래빗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언제든 나타날 준비를 했겠지.

지금까지 가족들 중에서 가장 많이 노력해 온 사람은 2황자겠구나 싶었다.

“……그래. 그럼 됐다.”

어쨌거나 2황자에게도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알게 된 셈이었다. 2황자가 눈썹을 내렸다.

“……미친 사람처럼 보지 않아서 고맙군.”

“처음부터 믿었으니까 고맙다고 말씀하실 일은 아니죠.”

그러자 2황자는 고개를 살짝 돌린 채 시선마저 돌려 버렸다.

“가지, 밤이 늦었으니.”

아직 밤이라고 하기엔 조금 이른 저녁이었지만 나는 군말 없이 2황자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몇 걸음이나 더 걸었을까.

2황자가 우뚝 자리에서 멈춰 그대로 휙 돌았다.

그가 한 걸음씩 다가옴에 따라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멀어진 만큼 2황자가 다가왔다.

“그리고 영애, 잊은 것 같은데, 보약 재료를 구하는 건 내 여동생을 위한 일이지만.”

달빛이 청명한 얼굴을 비췄다. 늘 까칠하고 차갑던 얼굴 위로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목숨을 걸고 구해 오는 건 나고.”

우리의 시선이 교차하고 2황자가 툭 뱉었다.

“마시는 건 그대다.”

나는 끄덕였다. 속으로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가 발동 중입니다.]

* * *

사흘이 지났다.

“그러니까 황녀님, 여기서는 이렇게 접으셔야 해요.”

“이러케 말이더냐?”

아무런 일 없이 무탈하게 흘러간 사흘이었다.

특이점이 있다면 황태자를 향한 호감도마저 달성했으니 이제 남은 건 황제 하나뿐, 이라며 결의를 다지는 나의 비장한 마음이랄까.

“제가 전에 말씀 드렸죠? 지난번에 접은 종이꽃요, 황제 폐하께 드린 이야기요.”

막 종이를 접던 래빗의 표정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우리는 오늘 튤립을 접고 있었다. 그저께는 종이칼을 접었으니, 오늘은 좀 더 아기자기한 걸 접는 중이었는데.

래빗의 손에 와그작 구겨진 종이를 보며 산뜻하게 생각했다. 음, 망했군.

“그래소?”

래빗의 표정은 ‘알겠는데, 그걸 지금 왜 말해?’ 내지는 ‘왜 또 말해?’ 쯤으로 해석되는 표정이었다.

왜긴요, 황녀님이 황제와 조금이라도 친해지길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렇다고 원하지 않는데 억지로 끌어당겨서 황제 옆에 둘 생각은 없었다.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원하지 않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롤린, 우리 진지한 얘기룰 좀 하쟈.”

죄송한데, 진지한 얘기를 하시려거든 제 이름은 똑바로 불러 주시면 안 될까요?

오늘은 모처럼 황태자가 방문하지 않은 날이었다. 그저께 오랜만에 얼굴을 비췄던 3황자도 수업을 받느라 바쁘고, 2황자도 오지 않았다.

“경청하고 있습니다, 황녀님.”

래빗은 자못 근엄하게 다리를 꼬고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댔다. 그래 봐야 짧은 팔다리라 귀엽기만 할 뿐 위엄은 살지 않았다.

“롤린, 나와 가죡들과 가까워지게 만둘고 싶어 하눈 네 마움은 잘 알고 있댜.”

나는 놀라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토록 노골적으로 행동했는데 눈치채지 못했으면 오히려 이상한 거지.

무엇보다 지금까지 오빠들과 가까워진 데 있어 내 공로가 제일 크긴 하지만 래빗이 정말 싫어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싫지 않아따. 오히려 조아써. 마음에 든다.”

커다란 눈이 나를 향했다.

오랜만에 로아타 황제의 단단한 눈을 본 기분이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하디만 여기까지야. 황뎨와 나룰 가까이 엮지는 말아라.”

래빗이 단호하게 선언했다.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목소리였다.

“구래, 그놈에게 몬가룰 주는 거…… 네가 원하면 할 수 이따. 하지만 거기가 마지노션이라눈 고다.”

“황녀님.”

“그놈이 내 부친이라눈 거 잘 안댜. 근데, 그게 왜?”

나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까지 퀘스트가 순조로웠지. 그래, 너무 순조롭다 싶었다.

“나에게 그놈운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운 얼굴이댜. 이유는 이미 설명했었지.”

“네……. 같은 얼굴이라고요.”

“맞아, 롤린. 내가 아무리 래빗으로 살더라도 잊지 못할 기억이 있댜. 이 또한 말하지 않아도 너눈 알 테지.”

아마도 본인이 세운 제국이 멸망하던 순간이 아닐까. 그것도 이곳 비센 제국 황제의 손에 의해 말이다.

“너와 함께 해소 즐겁고 행복하댜. 오빠란 놈둘도 머 조아. 나쁘지 않아.”

래빗이 선을 그었다.

“그로나 난 황제 놈의 얼굴울 다시 보았울 때 검을 뽑지 않울 자신이 없어. 부탁이자 명이댜.”

이 이상은 선을 넘지 말라고.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지만, 밖으로 표출하지 않은 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명을 받듭니다.”

……어떡하지. 망했다.

래빗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오히려 래빗이 원한다면 그렇게 해 주고도 싶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죽어요, 죽는다고요!

나는 최대한 불안을 드러내지 않으며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방법, 방법이 없을까.

그때였다.

[요정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고 빙의자 님은 이미 ‘단서’를 알고 있다고 속삭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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