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69화 (69/281)

◈69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63)

시종을 두는 것까지는 어찌저찌 허락했다 해도 여전히 거처에 사람이 늘어나는 걸 꺼리는 래빗은 궁에 기사를 두지 못하게 했다.

신관 론도의 습격이 있었다지만 래빗의 기억에서 그건 습격으로 쳐주지도 않는 모양이었고, 사실 그 뒤론 별다른 일이 없기도 했다.

무엇보다 황실 측에서 래빗의 거처 경계선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기사를 깔아 두었으니, 조금만 더 가면 그 무시무시한 인력들을 보게 될 터였다.

그 뜻은, 조금만 더 걸어가면 나는 해방이라는 거……!

“영애.”

그러나 이 바람은 2황자가 말을 걸면서 산산조각 나 버렸다.

“예…….”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러려고 애를 썼다.

그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는 몰라도 제법 자연스럽게 2황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영애. 보통 대화를 할 때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예의 아닌가.”

“감히 제가 황자님과 시선을 마주할 수 있겠습니까.”

“아아, 오늘부터 내가 무서워지기라도 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마주한다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감히 똑바로 마주하는 영광을 허락해 주세요.”

“허락하지.”

엄마야. 눈앞에서 시퍼런 안광을 마주하려니 오금이 저렸다.

사실 2황자는 생각보다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데, 도둑이 제 발 저린 꼴인 것 같다.

차라리 여기서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도 될까? 오히려 꺼내서 더 나빠지는 거 아니야?

“저, 황자님…….”

“오늘은 멀쩡해 보이는군.”

“네?”

“영애는 늘 부상을 달고 다니지 않았던가.”

눈을 깜빡였다. 그간 내 착각이었던 걸까?

무섭게만 느껴지던 눈빛이 사실은 이전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도 다시 마주한 2황자의 시선은 평소처럼 무심한 느낌이었다.

오늘따라 나는 ‘네게 단 1의 관심도 없다’는 이 시선이 너무나 반가웠다.

“그래, 오늘은 정말 멀쩡해 보이는군.”

“네? 네! 다행스럽게도 다칠 뻔한 일은 있었지만 감사하게도 황태자 전하께서 막아 주셔서…….”

“그래서 형님이 나보다 나았다?”

“예?”

“아니, 계속해 보도록. 막아 줘서?”

“음, 어, 막아 주셔서 무사히 돌아왔고…… 그게 끝입니다…….”

나는 2황자의 눈치를 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에잇, 못 참겠다. 자수해서 광명 찾자!

“황자님, 조금 전 무례를 사과 드리고 싶어요. 알현실에서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

2황자는 대답이 없었지만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 황제 폐하께서 농을 하시던 중이다 보니, 가벼이 물으신 데에 제가 과민반응했습니다. 심기를 불편하게 해 드린 것에 사과를…….”

“불편하지 않았다.”

2황자가 툭 내뱉었다. 자연히 조잘거리던 내 입이 멈췄다.

“신경 쓰지 마라.”

아, 정말? 정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건가? 내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대에게 내가 취향도 아니고. 혹은 더 최악일 수도 있지.”

“…….”

……어째 더 울고 싶어졌다.

2황자는 그대로 내 얼굴을 빤히 보았는데, 이게 ‘네 죄를 알렸다’ 하고 쳐다보는 건지, 아니면 더 할 말이 있어서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어느 쪽이든 사과도 받지 않을 거면 그냥 얼른 집에나 보내 주면 좋겠다.

“내 여동생이 영애를 위한 보약을 짓고 싶다고 한 것, 그대도 옆에서 들었겠지.”

다행히도 무슨 영문인지 화제가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나는 뭔지 몰라도 반가워하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예, 들었습니다.”

“그래. 들었겠지만 그 재료들을 준비하려면 조금 애를 써야 한다.”

“……저런. 저 때문에 괜한 고생을 하시게 되었군요.”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지만, 퀘스트가 걸려 있어서 말은 못 하겠다.

거기다 재료를 바꿔치기해 볼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설마하니 저 로아타 황제가 눈앞의 재료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못 알아보진 않을 것 같았다.

“그렇지, 정정하겠다. 애를 조금만 쓸 게 아니라 퍽 노력해야겠지. 꽤 많이.”

“앗, 네……!”

“내가 직접 다녀오려 한다.”

“그렇군요, 2황자 전하께서 직접…… 네?”

상사의 쓸데없는 잡담을 듣는 심정으로 대충 맞장구치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그 애가 말하는 재료를 한 번에 구해 올 만한 실력을 지닌 사람은 없을뿐더러 몇몇 괴수의 서식지는 아직 국경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곳이다.”

“아, 그럼 황녀님께 그 말씀을…….”

“지금 그 애에게 실망을 안기라는 건가?”

“아니죠, 그럼 안 되죠!”

2황자의 기분을 필사적으로 살피며 얼른 맞장구쳤다.

“그래, 그래서 내가 직접 가려 한다.”

음, 정리하자면 결국 보약 재료의 서식지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지역에 위치한다.

무력도 되고 국경지대에서의 분쟁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권한을 이미 가졌거나 쉽게 획득할 수 있는 2황자가 몸소 나서기로 했는데, 이건 다 래빗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다.

즉, 래빗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서 위험도 감수하겠다는 건가.

이 눈물겨운 여동생 사랑을 어쩌면 좋담.

나는 2황자에게 가지고 있던 경계가 살짝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대단한 오빠잖아?’

지금까지는 그저 내가 좋아하는 얼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지만…… 여동생을 위해 쭉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 데다, 형제 중에 제일 스스럼없이 다가오기도 했고.

이 정도로 헌신적이기까지 하니 조금 달리 보였다고나 할까.

“……멋있으세요, 황자님.”

나는 끄덕이면서 눈을 초롱초롱하게 반짝거렸다.

“저희 오빠가 황자님을 반만이라도 닮았다면 좋았을 텐데요.”

면을 세워 주기 위해 기꺼이 파올로를 팔았다.

2황자에게 괜히 ‘내 오빠인 파올로는 맨날 놀리기만 하는데 님은 여동생도 챙기고 짱짱 멋져.’ 외쳐 주면서.

미안하다, 파올로야.

그러다 문득 다른 의문이 들었다.

황태자와 황제는 신전에 의해 세뇌되었을 거란 이유로 래빗을 꺼렸고, 3황자는 래빗이 저를 미워한다고 확신했기에 꺼렸다.

그렇다면 2황자는 그간 무엇 때문에 래빗을 꺼렸을까?

그 역시 황태자와 마찬가지로 신전의 세뇌를 우려했던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그동안 그가 보여 주었던 태도가 조금 석연치 않았어.’

연회 날 만났을 때, 스스럼없이 래빗에게 다가가기도 했잖아?

그리고 황태자처럼 래빗을 의심하는 기색을 보였던 것도 아니었다.

“저, 2황자님.”

2황자는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다. 후, 덥기라도 하다는 듯 작게 숨을 내쉬기도 하였다. 손으로 가려지지 않아 드러난 곳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외람되지만 조심스럽게 한 가지만 여쭙고 싶습니다만, 그.”

“질문하도록.”

“황자 전하께서도 황녀님께서 금지된 신성력에 세뇌당했다고 생각하시나요?”

2황자가 멈칫했다. 눈이 살짝 커지다 못해 작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이내 얼굴로 자못 사나운 기색이 스쳤다.

“형님께서 그런 사실까지 알려 주시던가?”

“네? 네…….”

“언제부터 그리 친밀하게 지냈는지 모를 일이군. ”

아니, 황제랑 황태자랑 제 앞에서 싸웠는데요. 그래서 알게 된 건데요.

“저기, 그리 말씀하시면 상당히 억울합니다, 황제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와 조금 다투셨거든요.”

다른 건 몰라도 황태자랑 친하다는 말은 내게 모욕이나 다름 없었다. 걘 나를 죽이려 했다고.

황급히 해명하자, 2황자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그에 대해 나는 아버지와 형님과 생각이 다르다. 그 애가 세뇌되지 않았다고 생각해.”

진지한 목소리에 나는 황태자에 대한 생각을 멈췄다.

“물론 확신하는 건 아니다. 그저 감일 뿐이니까. 아니, 내가 직접 이상한 것을 보고서도 절대 아니라고 믿는 걸지도 모르겠다만은.”

“저, 이상한 것이라니요?”

그러자 2황자가 잠시지만 부루퉁한…… 아니, 이 남자와 어울리는 단어긴 한가? 하지만 정말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는 얼굴로 나를 향했다.

“……형님께서 외부인에게 거기까지 털어놓으셨으니, 나 역시 이 정도는 얘기해도 되겠지.”

“어, 그렇죠. 맞습니다.”

일단 맞장구부터 치고 보자.

2황자는 잠시 더 고민하더니 미간을 찡그리면서 툭 말했다.

“나는 유엘 그 애를 처음 보았을 때 그 애의 뒤에서 이상한 것을 보았다. 아니, 최근까지도 보았으니 보고 있다가 맞겠지. 그건…… 유령 같은 존재였다.”

“유령요?”

갑자기요? 육아물에 갑자기 웬 호러 오컬트야?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라 얼떨떨하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그 유령은 유엘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질 않더군. 거기다 황제가 입을 법한…… 관을 쓰고 제복을 걸친지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난 멈칫했다. 잠깐만, 이거…….

“남자였나요?”

“아니, 여성이었다.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더군. 검을 차고 있었고, 머리색은 은발이었다. 특이하게도 얼굴에 커다란 상처가 있어 퍽 인상 싶었다.”

그거, 로아타 황제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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