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50)
그 영애는 오늘도 다쳤고, 또 한 번 그가 직접 다친 손을 치료해줘야 했다.
이렇게 같은 자리에 치료를 거듭하다간 피부가 남아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그저 손을 한 번 쳐다본 것뿐이다.
하필 그 손이 꺾여 추락한 백합처럼 금방 사라질 듯 가녀려 보여서, 그저 정말 잠시 눈을 뗄 수 없었던 것뿐이라고.
하지만 곧이곧대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저 다른 생각을 했을 따름이다!”
“무순 생각?”
“그…… 오늘 습격했던 신관에 대해서다.”
막 떠올린 생각은 적절한 변명이 되어주었다. 래빗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귀 기울이는 기색을 보였으니까.
“만약 그 신관이 정말 신전의 명을 받아 이곳에 몰래 침입해서 네 앞에 나타난 거라면, 그 과정이 너무 쉽게 진행된 듯하다.”
그랬다. 그 신관은 삼엄한 경비를 뚫고 이 깊숙한 곳에 너무 쉽게 침투했다.
“너는 신관이 나타날 때까지 기척을 알아차렸나?”
“아니.”
“그 점이 이상하다는 거다.”
래빗의 감각이 얼마나 뛰어난 지는 황족 모두 알고 있었다.
물론 이들은 이것이 모두 래빗이 타고난 ‘신성한 힘’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정작 래빗은 아직 태어나서 그 신성한 힘을 한 번도 사용한 적 없었지만.
“그자는 너무 쉽게 여기까지 들어왔다. 이건 내부에서 도와준 이가 있지 않은 한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더군.”
그리고 현재 래빗의 시선까지 속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
래빗의 표정이 사납게 굳었다.
“설마, 지굼 달린이 앞짭이 역할이라두 했다눈 고냐!”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얘기다.”
말을 뱉고 보니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다 싶었을 따름이지, 라이칸은 그 내통자가 달린일 거라는 식의 의심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오해한 래빗은 몸에서 새파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라이칸은 얌전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싸움이 되고 말고를 떠나서 여동생과는 결단코 싸우고 싶지 않았다.
“에스테 영애가 그렇다고는 하지 않았어.”
그럴 리가 없다고 확실히 말해 주고 나서야 래빗은 힘을 거둬들였다.
그러나 분노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는지 여전히 이를 갈았다.
“역시 이 ……센 놈둘이란, 믿울 쑤 없어!”
“그런 게 아니다. 나는 가능성의 문제라고 했다, 유엘. 내가 떠올린 가정을 다른 이들이라고 떠올리지 못할까?”
“…….”
밖에서 보기에 달린은 갑자기 나타나 래빗의 마음을 사로잡은 기묘한 영애였다.
라이칸이야 어떤 사람인지 옆에서 지켜봐 왔지만, 이야기만 전해 들은 이들은 어떨 것인가.
“나는, 네가 믿는 영애를 믿는다. 네 오빠이니까.”
만약 달린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였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래빗은 라이칸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롬 의심하느라 달린울 본 건 아니란 말이자나. 그롬 왜 그로케 찐하게 바라본 곤데?”
달린에게는 해 볼 건 다 해 봤다고 큰소리 떵떵 친 래빗이었지만 사실 그 내용물은 과거의 정복황제 로아타가 아닌가.
한평생 전장에서만 살았던 그녀는 남녀 간의 상열지사에 대해 머리로는 알았으나 마음으로 체감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애석하게도 달린이 생존을 위한 눈치를 얻고 히든 피스 발견 확률을 높이는 대신 잃어버린 건 ‘연애’ 눈치였다.
그랬다!
그녀는 이제 그 자신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독자들이 ‘주인공이 원작병에 걸려서 슬프네요.’라며 한탄하게 하거나 ‘고구마에 사이다가 필요합니다, 작가님!’ 하고 외치게 만들었던 답답이 로판 여주인공과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불행히도 달린 본인은 이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달린도, 래빗도, 연애에 있어서 너무도 둔감한 두 사람이다 보니 누구 하나 제대로 된 대응책을 내놓을 리 없었다.
“달린이 예뽀서 본 고 아니냐?”
“……아니래도. 그저 생각이 복잡했을 따름이다.”
“모, 그렇다묜야.”
따라서 입덕부정기를 한창 겪고 있는 라이칸의 상태를 세심하게 헤아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네 뜻운 잘 알게따. 확실히 상황만 놓고 보묜 달린에게 불리하게 작뇽할 쑤 이께꾼.”
래빗은 어느새 라이칸을 달린과 엮는 것을 멈추고 고민에 빠졌다.
라이칸이 이야기해 준 사항은 생각해 볼 만한 문제였다. 라이칸이야 달린을 믿는다고 했지만, 이 이야기가 전해졌을 때 저 밖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예상이 갔으니까.
이미 래빗은 전생에서 귀족을 지겹도록 겪어서 그 생리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야 이 거처에서 은거하며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다지만, 달린은?
래빗이 한창 생각에 잠겨있을 때, 라이칸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큰일 났군.”
“으움? 모가 말이냐?”
“잠시 다녀오겠다!”
라이칸은 그 어떤 때보다 무섭게 굳은 얼굴이었다.
젠장맞게도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 이제야 떠오른 탓이었다!
그래, 그가 변명처럼 주워 뱉은 달린에 대한 의심은 사실 누구든 떠올릴 수 있는 문제였다.
그렇다는 건 그 누군가가…….
‘형님!’
황태자가 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제 형이 누구던가.
어째서인지 여동생 앞에서는 이빨이고 발톱이고 모조리 뽑아 버린 흑표범처럼 굴고는 있지만, 사실 웃고 있는 낯으로 몇이든 팔과 다리를 베어버릴 수 있는 인간.
형제들 셋 다 제정신이 아니라 할 수 있었지만 단언컨대 정상의 범주에서 가장 벗어난 쪽은 첫째인 황태자였다.
“부친께서 살려두더라도 형님께서 살려두지 않을 것이고, 내가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사실 래빗의 앞에서는 순화해서 이야기했지만, 실상 시험의 날, 그리고 시험의 날 이후로 래빗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주장했던 자들은 잔인한 응징을 당했다.
반은 부친의 손에, 나머지 반은 황태자의 손에 말이다.
달린 에스테 영애가 신전과 관련 있다면?
황태자가 여동생의 새 유모에 대해 그런 의심을 품었을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마차는 어디 갔지?”
“아, 창공의…….”
“인사는 집어치우고 대답하라!”
“그, 마차는 이미 20분 전에 떠났습니다!”
라이칸은 입술을 사리물며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물었다.
“마차는 어느 문을 통과했지?”
대답에 따라 안심하거나 최악의 결과를 생각할 수 있다.
“부, 북쪽의 상테스 문입니다!”
이를 듣는 순간, 라이칸은 직감했다.
그가 바라지 않았던 최악의 결과다.
상테스 문은 황성 밖으로 이어지는 문이 아니다.
‘젠장, 형님!’
달린 에스테 영애가 위험했다.
* * *
다각다각.
나는 마차 바퀴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숨을 죽였다. 손이 저절로 꼼지락 움직였다.
아, 좀이 쑤셔 죽겠다. 집엔 언제 도착하는 거지?
집까지는 마차로 30분 남짓한 거리, 오늘따라 이 시간이 무지 길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는 매우 불편한 상사가 앉아 있었다. 아니, 상사가 아니라 상전이라고 해야 맞으려나.
창문을 쳐다보고 있는 황태자를 흘끔 곁눈질한 나는 속으로 눈물을 찔끔 흘렸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이야기는 약 20분 전으로 거슬러간다.
래빗의 궁에서 나와 늘 마차를 타던 곳으로 가서 언제나처럼 마차를 탔다. 그런데 마차가 출발을 안 하는 거다.
“뭐지?”
이상한 기분에 내려서 무슨 일인지 살펴보려는 찰나 똑똑,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밖에 서 있는 건 한 마리의 흑표범같이 날렵한 실루엣을 가진 남자, 황태자였다.
“반갑습니다, 에스테 영애. 백작가로 가려 하는데 혹시 함께 탑승해도 되겠습니까?”
정식으로 인사를 올리려는 나를 조금 전에 봤으니 됐다며 만류한 뒤 정중히 물었다.
나로서는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황태자는 오늘 백작저의 온실을 둘러볼 예정이라고 했다. 부친인 백작에게 이맘때쯤 보러 갈 거라고 미리 이야기도 했다고.
내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황태자가 마차에 탔고, 마차는 기다렸다는 듯이 출발했다.
황태자는 어째서인지 그 후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지금에 이른 것이다.
‘아, 숨 막혀.’
마차에 드리워진 커튼을 걷고 싶었지만 황태자가 창문을 빤히 응시하는 중이라 그리하지도 못했다. 아니, 커튼 때문에 밖이 보이지도 않는데 왜 저기만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야? 무늬라도 세고 있나.
그간 황태자가 계속 침묵을 유지한 탓에 마차 내의 분위기는 불 꺼진 영화관처럼 고요하고 적막했다.
‘그나마 스킬 ‘몸에 좋은 각성제’의 레벨이 올라서 다행이었지.’
상태 이상까지 남은 시간이 아슬아슬하던 찰나에 마침 스킬 레벨이 올라 쿨타임이 새로 차고 지속시간도 좀 더 늘었다. 다행이었다.
“영애.”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황태자는 오래된 흑백 영화에 나오는 고전 미남처럼 그윽한 외양이었지만, 나를 보는 시선은 래빗과 있을 때와는 판이했다. 가장된 부드러움 속에 홍채가 차갑고 날카로운 빛을 발한다.
뭐, 익히 예상했던 일. 원래 육아물 오빠들은 여동생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원수 대하듯 하는 법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난 저 매서운 눈을 태연히 마주할 수 있었다.
“하명하십시오, 전하.”
“하명이라.”
황태자가 살짝 웃었다.
“명을 내릴 건 아니고요. 그저 궁금한 것이 있어서.”
[서브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퀘스트(서브) - ‘뭐야, 돌려줘요, 내 목숨!’
황태자가 당신을 의심합니다! 아주 위험한 상황! 의심의 정도에 따라 당신은 죽을지도 모릅니다!
내용: 황태자의 의심을 풀고 신뢰를 얻어 생존하세요.
실패 시: 사망
보상: 건강 수치 9, 주요 인물(주연) ‘황태자(첫째 오빠)’의 호감, ‘주인공(아기 황녀)’와 관련한 새로운 영혼에 대한 단서
기한: 없음
※본 퀘스트는 ‘엑스트라 악역의 계획을 저지하자!’와 연계되는 퀘스트입니다! ]
뭐, 뭐야, 이게!
“영애,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
입술이 떨렸다. 눈앞에 떠오른 창의 내용이 믿기지 않았지만 분명한 현실이었다.
“당신은 신전과 관련된 인물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