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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54화 (54/281)

◈54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48)

그도 그럴 것이 2황자의 거처에 도착하자마자 래빗의 타박과 잔소리가 다시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요기 안자 바라.”

“윽.”

도대체 왜 몸을 그리 소중히 여기지 않느냐는 것부터 해서, 그 몸이 얼마나 잘 부러지는지 아느냐는 둥. 무슨 사람을 갓 태어난 기린처럼 보는 말들뿐이었다.

“동의한다.”

“구래! 오뺘, 너도 동의하지?”

문제는 여기에 왜 2황자까지 가세한 건지 모르겠단 거다. 왜죠? 대체 왜!

그렇게 나는 치료받는 건지, 정신적 공격을 받는 건지 모를 시간이 끝나기만을 빌었다.

이 두 사람, 합쳐지면 일당백이었어!

마치 명절에 언제 취직하냐, 결혼은 언제 하냐 지치지도 않고 묻는 친척을 백 명쯤 만난 기분이다.

덕분에 치료가 끝날쯤 몸은 편안해졌지만, 정신은 급격히 피로해졌다.

[적절한 치료를 받았어요! ˚✧₊⁎( ˘ω˘ )⁎⁺˳✧༚]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1 오릅니다! 현재 건강 수치: 40]

아니, 정신은 이렇게 피로해졌는데 건강 수치가 올라도 되는 거야?

치료를 끝낸 후, 다시 래빗의 거처로 돌아갔다.

이상한 건 넓은 황실 복도를 걷는데, 희한하게도 기사와 보초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다 같이 소풍이라도 갔나.

그러고 보니, 소풍이라. 이쪽도 한 번 가기로 했는데 말이지.

“저 2황자님.”

“뭐지?”

갈 때와 마찬가지로 래빗을 품 안에 안은 2황자는 몹시 만족스러워 보였다. 좋아, 기분 좋아 보일 때 한번 물어봐야겠다.

“혹시 래빗 황녀님께서는 궁 밖으로 나가시는 것이 금지되어 있을까요?”

“금지? 이 황성에서 황제 폐하의 허가 아래 내 여동생이 할 수 없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누구도 막을 수 없어.”

살벌한 시선에 잠시 쫄았다. 아니, 모르면 물어볼 수도 있잖아요?

내 억울한 시선에 2황자가 잠시 멈칫하더니, 미간을 누그러뜨렸다.

“영애에게 화를 낸 게 아니다.”

“……네? 아뇨, 화내도 되세요!”

“화를 내란 건가? 아무튼 난 화났다는 오해를 자주 사는 얼굴이니, 오해 없길 바라지.”

“아, 그건 그렇지만.”

“뭐?”

“아주 잘생긴 얼굴이신 것 같아 늘 감탄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 취향이긴 하지만, 사실 가끔은 좀 진심으로 무섭기도 했다.

“말했듯 영애에게 화를 낸 게 아니야. 그저, 그 말을 듣는 순간 유엘을 신전에 보내거나 탑 안에만 모셔야 한다는 머저리들이 생각났을 뿐이지.”

“아하, 그 멍쳥이둘 마리더냐?”

무슨 소리인가 싶었건만 옆에서 래빗은 처음 듣는 소리가 아니라는 듯 심드렁하게 끄덕였다.

2황자가 부연 설명을 붙였는데 사정은 이러했다.

래빗이 대단한 힘을 가진 것이 알음알음 알려진 탓에, 귀족원 쪽에서는 래빗이 아직 어리다는 핑계를 대며 힘의 폭주를 대비하기 위해 어디 탑 같은 곳에 모시자는 말이 나온 모양이다.

말이 모신다지, 가둬 두겠다는 소리였다.

거기다 신성한 힘을 유독 강하게 가지고 태어난 래빗이니, 신전으로 보내자는 말은 아마 그쪽에 매수된 귀족들이 하는 말일 테고.

성녀를 잃었다고는 해도 신전은 여전히 강력한 치유의 힘을 붙잡고 있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병과 아픔, 죽음을 두려워할 테니 그들의 무기는 건재한 셈이다.

“시험의 날 때 욜심히 뭔가 외치던 것둘 생각운 난다. 얼굴까진 기옥나지 않찌만.”

“기억할 필요 없다. 모두 쓸데없는 것들이니. 반은 이미 나와 형님의 손에 사라지기도 했지.”

래빗이 눈을 깜빡거리다가 그건 조금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그러자 2황자가 까칠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가 얼른 지워 냈다.

‘메인 퀘스트에서 남은 인물은 둘.’

‘폭군 황제’와 조금 전에 봤던 ‘황태자’.

이 중에서는 좀 더 쉬워 보이는 황태자부터 공략해야겠지. 그러려면 황태자에 대해 조금 더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내가 아는 거라곤 황태자는 부드러운 흑막이라는 것뿐인데, 실제로 만나 본 그는 래빗 앞에서 ‘푼수’가 되지 않았던가.

거기다 ‘다신 보지 말자’는, 과거의 수상한 발언까지.

현상을 좀 더 파악할 필요가 있어.

“저, 2황자님 말씀 나누시는 중에 죄송하지만 뭐 좀 여쭤볼 수 있을까요?”

“좋다. 나에 대한 얘기인가?”

어, 그건 아닌데. 당연하다는 듯한 그의 태도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개인적인 얘기는 삼가는 편이다만 오늘은 대답해 주도록 하지.”

“어, 음.”

“무엇이 궁금하지?”

래빗도 이 대화가 흥미롭다는 듯 동그란 눈을 굴려 나를 보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분위기를 만들려고 꺼낸 말이 아니었는데?

“그, 저.”

“어려워 말고 편히 말해도 좋다. 나에 대한 질문이라면…….”

“황태자 전하께서는 어떤 분이실까요?”

“특별히…… 뭐?”

2황자의 표정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슬쩍 겁먹은 기색을 뒤로 숨기며 살짝 웃었다.

“그, 처음 뵌 건 아니지만 대화를 나눠본 건 처음이라서요. 어떤 분이신지 궁금해요.”

“…….”

“호오, 롤린. 궁굼한 이유가 있나?”

“음, 그냥 황태자 전하께서도 황녀님의 가족이시잖아요. 저는 황녀님의 유모이구요. 그래서 어떤 분이신지 미리 알아 두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아, 황녀님께서도 알고 계세요?”

“그고야…….”

“황족에 대한 정보는 기밀 사항이다.”

2황자의 딱 자르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가 무슨 구정물이라도 마신 사람처럼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아니 내가 무슨 나쁜 질문을 했다고…….

“황족에, 대한, 정보는. 기밀, 사항이다.”

더욱 딱딱한 투로 재차 못을 박는 2황자의 말에 나는 눈을 데굴 굴렸다. 래빗도 ‘저놈 왜 저래?’ 하는 시선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눈빛으로 묻자, 래빗이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는 뜻이다.

“음, 네……. 그럼 나중에 물어…….”

“누구에게 묻는다고?”

“어, 그, 어.”

“그자도 입단속을 철저히 시킬 것이다.”

……우리 오빤데요. 얼른 파올로의 이름을 뒤로 삼켰다. 괜히 오빠의 직장 생활을 고단하게 만들지 말자.

“그럼 노아 황자님에 대한 건 여쭤봐도 되나요?”

“노아?”

왜 또! 왜 또 노려보는 건데!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가 발동 중입니다.]

헉, 잠깐만 왜 이 알림이 떠?

설마 이거 지금 히든 피스에 다가가는 질문이었던 건가?

갑작스레 뜬 요정의 창을 쳐다보다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럼 여기서 답을 들어야 히든 피스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걸까?

“언제부터 셋째의 중간이름을 부르게 된 거지?”

“……감사하게도 3황자님께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부루기 시르면 언제둔 그만둬도 돼, 랄린.”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노아 황자 정도면 귀엽지.

“3황자님 귀여우셔서 좋아해요. 크면 아주 미남이 되실걸요? 거기다 황녀님을 너무너무 좋아하는 모습이 귀여우시잖아요.”

“그골 귀욥다고 하나? 심심하면 마법우로 뭐둔 파괴한댜는 놈인데.”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걸어서 래빗의 거처에 도착했다.

나는 얘기하는 틈틈이 2황자에게 황태자에 대해서 말할 틈을 찾았지만.

‘뚱하네…….’

어찌 된 영문인지 2황자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서 잘못 말을 걸었다간 그대로 히든 피스가 아니라 데스 노트를 찍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거기다 2황자는 래빗의 거처에 도착해서도 돌아가지 않았다.

아까 황태자가 2황자도 같이 가자고 한 걸 봐서 그도 할 일이 있는 것 같았는데, 아니었나?

의아했지만 딱히 토를 달지는 않았다.

대신 열심히 2황자의 주변을 알짱거리면서 조심스럽게 기회를 엿본 끝에 황태자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선 첫 번째. 그는 아주 확고한 차기 황위 후계자다.

그리고 두 번째, 대단한 기사이다.

황제가 젊었을 때보다 더 뛰어난 성취를 거뒀으니, 나이가 들었을 땐 더 대단한 인물이 될 거라나.

“흐음, 이것보다 좀 더 개인적인 걸 알고 싶은데 말이죠.”

“개인적인 고?”

“네. 음, 좋아하시는 거라거나, 싫어하시는 거? 성격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도 좋구요.”

래빗의 호불호와 한번 맞춰 보고 두 사람을 친하게 만들 방법을 찾아봐야지.

왜, 사람은 공통 관심사나 좋아하는 일을 같이하면 더 가까워지잖아.

래빗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눈을 굴렸는데 아마 저기 저 멀리 기둥 쪽에 기대고 있는 2황자를 본 것 같았다.

……저 양반은 왜 저러고 있는 거야?

돌아갈 거면 얼른 돌아가던지, 아니면 이쪽으로 가까이 오던지!

“혹디 롤린…….”

“네.”

왜 이렇게 가까이서 말씀하시는 걸까. 의아하긴 했지만 나도 덩달아 같이 고개를 숙였다.

“황태쟈 그놈이 마움에 둔 거냐?”

귀로 간지러운 숨이 느껴졌다.

“예?”

“너눈 처움 봤눈데 그론 놈이 좋운 건가? 취향이 초큼, 아니, 아니지. 얼굴이 취향일 수 있찌.”

“아뇨, 잠시만요.”

“으움, 하지만 헷갈리눈구나. 어누 쪽을 맘에 둔 거냐? 2황자랑 황태자 두 놈 듕에 어누 쪽인지 조굼 헷갈린다. 직뎝 먈해 다오.”

이게 뭔 소리야.

래빗이 고민하더니 고개를 휙 들었다.

“설마, 둘 다냐?”

“그럴 리가요! 둘 다 아니에요!”

“부꾸러워 할 피료 업따. 원래 다 그 나이때눈 그론 고 아니겠누냐.”

황녀의 눈이 거사 성사를 앞둔 중매쟁이처럼 음흉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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