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내색하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척 핸드폰을 집어넣기는 했지만, 메시지 내용이 도무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머리가 어지러웠다.
자신이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 걸까. 정말로 사장을 만나게 해 주겠다는 뜻일까. 하지만 이렇게 쉽게? 평생을 그의 흔적만 쫓아다녔지만 한 번도 이렇게까지 가까워진 적은 없었다.
행사장에서 사장을 만나게 된다 해도 당장 뭔가를 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 정도 규모의 행사라면 주위에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있을 테니까. 그런 자리에서 세계 최강이라 불리는 에스퍼에게 복수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만약 전무의 말대로, 행사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사장을 먼저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다면…….
정말 그렇게 된다면, 대체 그 남자를 만났을 때 뭐부터 해야 하는 걸까. 곧바로 동귀어진을 시도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주위에 그를 보호할 다른 에스퍼가 있다면? 일반인이 휘말린다면? 한 번 실패했다가 자신의 정체와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텐데. 강석주에게 빌어서라도 도움을 청해야 하나? 그가 있으면 할 수 있을까?
아니, 만에 하나 그때 무너지던 건물에서 본 사람이 정원의 형이 맞는다면, 형이 사장에게 인질로 잡혀 있기라도 한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형에 관한 것을 물어봐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두서없게, 정신없이 이어지던 생각을 겨우 멈췄다.
‘진정하자. 아직 만날 수 있다고 정해진 것도 아닌데…….’
그랬다. 예의상 한 말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설마 그런 사람이 일개 비각성자 사원 하나를 미리 만나겠다고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정원은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 생각은 많았지만 모두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이었기에, 석주가 이상하다고 느낄 만큼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일단 있는 짐은 다 챙겨 왔는데, 혹시 빠진 거 없는지 확인해 봐요. 만약에 이 방이 불편하면 다른 데로 옮겨줄 수도 있으니까……. 정원 씨?”
하지만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석주는 의아함을 느낀 것 같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정원이 퍼뜩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려 차분하게 대답했다.
“네, 강석주 씨. 감사합니다. 언뜻 봐도 빠진 건…….”
“괜찮은 거예요? 얼굴이 창백한데.”
애써 침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그는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 정원을 살폈다. 석주의 굳은 얼굴을 보니 기분이 오묘해져서, 정원은 느린 말투로 대답했다.
“네……. 괜찮습니다.”
분명히 표정에 흐트러짐은 없었을 터였다. 정원은 원래 필요 이상으로 생각이 많은 편이었지만, 그만큼 표정 관리에도 뛰어나 원한다면 얼마든지 복잡한 생각을 숨길 수 있었다. 석주를 제외하면 이제껏 정원이 숨기고자 했을 때 그 속내를 읽어 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번번이 들키고 만다.
그가 유독 예민한 걸까. 아니면 그만큼 정원에게 신경을 많이 쓴다는 뜻일까…….
곧바로 괜찮다고 대답하지 못하자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물어 왔다.
“이상한 말이라도 들은 거예요?”
그렇다고 하면 당장 무슨 일을 벌일 것 같은 표정이었다. 석주 역시 자신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속을 알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속이 투명하게 비친다는 것이 신기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다만 저렇게 일그러진 표정을 보니… 어쩐지 석주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복잡한 심정이었다. 단순히 자신을 향한 그의 걱정과 배려 때문에 느끼는 오묘한 감정이라기에는… 그 이상의 묘한 거북함이 함께 들었다.
어쩌면 방금 사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익숙해졌던 석주의 눈을 보며 다시 나쁜 기억을 떠올리게 됐다.
정원은 슬쩍 시선을 돌리며 짐짓 태연한 척 말을 꺼냈다.
“제가 걱정된다면 각인이라도 해 주고 걱정하시죠.”
농담처럼 던진 말에 석주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는 한참 정원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혼잣말처럼 ‘정말 모르겠네.’ 하고 한마디 중얼거리고는 내뱉었다.
“그건 별개죠.”
* * *
전무실 앞에 선 정원은 긴장을 숨기며 심호흡을 했다. 다행히 그날 석주의 추궁은 더 이어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가 전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를 만나러 간다는 말을 하면 석주가 어떻게 반응할지 뻔했기 때문에, 오늘 석주 몰래 전무실에 찾아오는 것도 적잖이 힘이 들었다.
비서가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바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들어오세요.』
느릿느릿 문을 열자 전무가 책상 앞에 앉아 턱을 괸 채 정원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원은 짐짓 차분하게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 없이 딱 전무 혼자뿐이었다.
『나 혼자라 실망했어요?』
전무가 실없는 말을 던져 왔다. 물론 사장을 만나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문자 때문에 조금 기대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그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실망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럴 리가요. 오늘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차분히 대답하며 전무가 가리키는 의자에 앉았다. 전무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지만 눈빛이 싸늘했다.
전화를 통해 했던 ‘관심이 있다.’ 따위의 말을 진심일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 눈빛을 보니 더욱 확신이 들었다. 설령 관심이 있다는 말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그 관심이 결코 좋은 방향은 아닐 거라는 확신.
『그냥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눠 보고 싶기도 했고, 여러 가지로.』
이쯤 되니 이질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저번엔 분명 정원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는데. 대체 그사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석주가 아닌 정원을 불러낸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앉은 의자를 장난치듯 양옆으로 돌리면서 첫 질문을 던졌다.
『여기 오기 전에는 무슨 일을 하셨죠?』
산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지만 그가 에스퍼라는 걸 생각하면 딱히 이상하지는 않았다. 에스퍼 중에는 남아도는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항상 몸을 움직여야 하는 사람이 많았으니까.
『그냥……. 작은 회사에서 일했습니다.』
대한민국 국가 기관에서 가이드로 일했습니다, 하고 대답할 수는 없으니 적당히 대꾸했다. 석주가 ‘존 데논’은 테프트에 입사하기 전까지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는 설정이라고 했으니 적당한 대답일 터였다.
전무는 웃으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계속 불편한 표정인데, 내가 불편합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업무 시간에 자리를 비우는 게 어색해서요.』
완곡한 부정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날 만나는 것도 일종의 업무죠.』
정원에게는 확실히 그렇기는 했다. 이왕 이 자리에 온 거, 사장은 없더라도 그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캐낼 생각이었으니 업무라고 봐도 될 터였다.
『정원 씨는 비각성자고,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 익숙하지 않아서 이상하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낯설게 생각할 거 없습니다. 회사 자체가 빡빡하지 않고 느슨한 편이거든요. 아무래도 에스퍼 중에는 그런 성향이 많으니까.』
각성자가 다니는 회사는 보통 규율 없이 프리한 분위기라는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실제로는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설득하듯 꺼낸 말에 감화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독특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라 좋은 것 같습니다.』
『독특하다, 라……. 확실히 존은 그렇겠네요. 입사하기 전부터 험한 꼴을 봤으니 말입니다.』
『…….』
『그런 사고가 있었으니……. 혹시 입사할 때 무섭지는 않았나요?』
면접 때 발생한 사고를 말하는 것이다.
단순히 걱정스러운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전무의 날카로운 눈빛 때문에 이 물음에도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정원은 고개를 내저었다.
『사고일 뿐이었고,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지 않습니까. 테프트 쪽에서 잘 대처해 주셨으니까요.』
『흠……. 내가 보고만 들어서 그때 상황을 구체적으로는 모르는데, 겪어 본 입장에서 어땠는지 말해 주겠습니까?』
태연한 말투였지만, 정원의 신경은 바짝 곤두섰다. 떠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정원을 조금이라도 의심하고 있는 걸까?
『글쎄요……. 사실 그때 꽤 충격을 받긴 했던 건지, 당시 일이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정원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당시 비각성자는 모두 세뇌당해 꼼짝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제니와 알렉스가 공통적으로 했던 말이었다.
정원의 차분한 대답에 전무가 느릿느릿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죠.』
‘다 알면서, 뻔뻔스럽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