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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벤지 가이드라인-44화 (44/126)

44.

이쪽을 빤히 보는 석주의 시선에 자신도 모르게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저 눈이 여러모로 큰 영향을 주기는 했다.

처음에는 S급 에스퍼라는 특성뿐만 아니라, 저 눈동자 때문에도 그를 누구보다 경계했으니까.

본래 다른 사람들에게도 되도록 최소한의 예의만 지키려 하고, 자신이 귀찮아질 상황을 피하려 할 뿐 기본적으로 남에게 관심이 없는 정원이었다. 사실 따지자면 오히려 석주에게는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나름 신경을 많이 썼던 축에 속하지만……. 뭐, 그가 그걸 모른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석주의 입장에서 저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는 됐다.

그렇긴 한데…….

자기가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해 놓고?

지금 서운해하는 건 좀 우습지 않나?

무슨 생각인지 어이가 없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화가 나지는 않는다는 게 꽤 신기했다. 영 관심 없는 척, 틱틱거리는 척만 하면서도 결정적인 타이밍에는 항상 자신을 도와주고 있기 때문일까. 물론 도와준 뒤 이런 식으로 이상한 트집을 잡기는 하지만.

정말로 서운한 건지 아니면 삐친 척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고개를 돌린 석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럴 상황이 아니기는 하지만… 어이없게도 조금 웃음이 나왔다.

강석주라는 사람은 정말로 알기가 어려웠다. 여유가 넘치고 속을 모를 미소만 짓는, 여우 같거나 구렁이 같은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의외로 곧고 솔직한 것 같기도 했고. 또 지금 보면 떼를 쓰는 어린이나 감정 표현이 서툰 야생동물 같기도 했다.

…너무 생각이 과한가. 지금 그런 걸 생각하며 웃고 있을 때가 아닌데. 표정을 가다듬은 정원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제가 말이죠. 파트너한테는 유독 친절한 편이에요.”

속이 뻔한 서두였다. 틀림없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을 석주는 냉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던데요?”

“이제부터 그러기로 했습니다.”

정원의 뻔뻔한 대답에, 석주가 고개를 돌려 정원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웃었다.

그 웃는 얼굴에는 방금 전까지의 떼쟁이 어린아이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전까지 보아 왔던 여유 있는 강석주다운 기색만이 남아 있었다. 살짝 움찔하는 사이 석주가 말했다.

“정말로 정원 씨가 남들한테만 잘해 준다고 이러는 건 아니에요.”

“그럼요. 그냥 장난이었나요?”

“그렇다고 백 퍼센트 장난도 아니긴 한데… 뭐.”

사람이 좀 알기 쉽게 말을 하면 안 되는 건가? 그러나 예전 같았으면 마냥 짜증만 났을 화법이 그리 짜증스럽지 않고, 그냥 궁금하기만 하다는 게 이상했다. 그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다 보니 정원 자신도 사고방식이 이상해진 모양이었다.

“본인 생각을 좀 더 하라는 거죠. 몸 그만 깎아먹고.”

석주가 덧붙인 말에 정원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이건 결국 자신을 생각해 주는 말이 아닌가.

“어떻게 된 게, 사람이 그렇게 쉴 줄을 몰라요.”

질책하는 말투이기는 했지만 확실히 유해진 반응이었다. 정원이 석주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지금 더 밀어붙여야 하나.

그러나 정원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 석주의 시선은 다시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슬슬 출발해요.』

손을 쫙 펴 입가에 가져간 석주가 소리 높여 건너편 사람들을 불렀다. 여태 뜸을 들이며 망설이던 제니가 마른침을 삼키며 이리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 또 파트너가 돼 달란 말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 묵묵히 그쪽으로 신경을 돌렸다. 사람이 쉴 줄을 모른다고? 그러는 강석주는 어떻게 된 게, 사람이 잠시도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겨우 끝까지 건너온 제니에게 선뜻 손을 뻗은 것은 석주였다. 그야말로 오히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잘만 친절하게 구는 것 같은데, 정말 뭘까.

제니가 한숨 돌리는 사이 건너편의 알렉스도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공하지 못하거나 한참 시간이 걸릴 거라고 예상했던 알렉스는 의외로 이번 과제는 그리 어렵지 않게 성공시켰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뒤 정원이 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속도로 협곡을 건너온 것이었다.

『제가 고소공포증은 없거든요.』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모습이 아무래도 칭찬을 바라는 것 같아서, ‘정말 대단하시네요.’ 하는 말을 해 주기는 했다.

모든 팀원이 건너왔으니 다시 이번 층의 문을 여는 버튼을 누를 차례였다. 별건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건너온 알렉스에게 누를 기회를 양보하자 그는 꽤 즐거워 보이는 기색으로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이제까지 지나왔던 다른 층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 펼쳐졌다. 테프트의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가, 그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박수를 쳐 주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최단기록인데요?』

자신들끼리 하는 말의 내용이 귀에 다 들어왔다. 이때까지 최단기록이라면 그래도 합격할 가능성이 높은 셈인데. 석주를 조금 더 부추기는 게 가능한 상황이었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1등을 차지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랬다가는 오히려 불필요한 의심을 샀을지도 모르니, 이 정도가 딱 적당한 듯했다.

이제 남은 건 다른 팀들이 자신들보다 늦게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인가.

『팀장님, 이렇게 되면 이 사람들이 합격인 거 맞죠?』

『그렇지? 이제 남은 팀이 없잖아.』

이번에도 그들끼리 숙덕거리는 소리가 모두 귀에 들어왔다.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요? 우리 말고 남은 팀이 없다는 것 같은데요.』

옆에서 알렉스가 다시 말을 붙여 왔다. 정원이 건성으로 대답하는 사이 아까 시험 내용을 안내해 줬던 시험관이 다시 제일 앞으로 나와 설명을 시작했다.

『축하드립니다! 최단 시간에 미션을 통과하셨네요. 어디 보자, 여러분보다 먼저 출발한 팀 중에… 도착한 팀은 딱 두 팀 있어요. 나머지는 다 중간에 포기했거든요.』

그 말도 납득은 갔다. 첫 번째 시험부터 안전을 장담하기 힘들었고, 특히 마지막 과제의 경우 석주가 없었더라면 결국 해결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해결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리고 뒤로 남아 있는 팀은… 총 세 팀인데, 한 팀은 이미 시험장 안에서 포기했고 다른 두 팀은 아예 도전 자체를 안 했습니다. 앞 팀한테 내용이 뭔지 전해 들은 것 같더라고요.』

『미리 들었으면 포기할 만도 하네요. 시험 내용이 너무 위험한 거 아닌가요? 분명히 시작하기 전에는 위험한 미션은 없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제니가 인상을 찡그린 채 따져 물었다. 오히려 알렉스는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었다. 입사시험 결과에 안 좋은 영향이 미칠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아, 시험장 장치 말씀이시군요. 오해하실 만도 하지만 저희 쪽에서도 그렇게 생각 없이 미션을 준비하지는 않았답니다. 시작할 때 보셨던 쇠공이나, 마지막에 보셨던 절벽 있죠? 그게 실은 다 저희 쪽 환각계 에스퍼가 준비한 장치거든요.』

이건 정원도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고개를 돌려 석주의 표정을 살피니 그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제니는 영 찝찝한 표정이었지만,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사전 고지도 없이 환각에 걸려들게 했다는 부분만 따지고 넘어간 뒤 미심쩍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정원은 아무 때나 동의 없이 에스퍼의 능력에 말려들게 하는 부당한 일터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딱히 생각이 없었다. 다만 궁금한 건 하나였다.

『잠시만요. 다른 지원자들 상태가 그렇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정원의 질문에 시험관은 깔끔하게 대답했다.

『자동으로 여러분이 이번 시험 우승! 이라는 뜻이죠~ 합격 축하드립니다!』

합격을 시켜 준다니 좋기는 한데…….

테프트, 운영을 이런 식으로 해도 되는 건가?

『설마 이런 식으로 입사가 결정될 줄이야……. 살면서 이런 회사는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원래 에스퍼 회사는 다 이런 식인 걸까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어쨌든 합격했다니까 좋기는 한데……. 거 참. 그게 다 환각이었다고 하니까 거기서 난리 쳤던 건 다 뭔가 싶기도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제니와 알렉스는 계속해서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출근을 하면 되는지는 개별적으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그런 말만 들었을 뿐 다른 어떤 안내도 없이 돌아가는 중이었으니 얼떨떨하고 미심쩍은 것도 당연했다.

『우리 팀이 4명이었던 게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다른 팀은 5명이라 오히려 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마음 맞추기 힘들지 않았을까요?』

『뭐, 다른 팀이 우리보다 시간이 두 배 이상 걸렸다는 걸 보면 꼭 인원의 문제는 아니지 않겠어요? 팀을 잘 만난 덕분이죠~』

두런두런 떠들다 말고 그 이야기를 꺼낸 알렉스가 슬쩍 석주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주춤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아까는 여러모로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말이 없길래 영 무뚝뚝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꼭 그렇지만도……. 아, 우리 이렇게 된 김에 다같이 식사라도 하는 게 어떨까요?』

그 말에 제니는 나쁘지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석주는 대놓고 거절의 뜻을 보였다. 심지어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도 없이 대뜸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리가 길어 보폭도 큰 탓에 멀어지는 걸음에도 가차가 없었다.

『아니, 기껏 잘해 보자고 했는데 무슨 사람이 저래? 존. 당신은 갈 거죠?』

황당한 표정으로 묻는 알렉스를 돌아보며 정원 역시 슬쩍 걸음을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미안합니다. 오늘 급한 일이 있어서요. 다음에 뵙죠.』

말을 마친 뒤 곧장 발을 옮겼다. 당연하게도, 석주를 따라잡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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