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정원 본인이 비각성자가 아니라서 타격이 없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설령 비각성자였다고 해도 저런 노골적이고 유치한 발언에는 화가 나지 않았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는 성격 문제인지라 정원 개인의 생각이 그렇다해도, 노란 가면과 그 옆에 서 있던 검정 가면이 화를 내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뭐,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저희보고 한 소리 맞죠?』
띠링!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 준 덕분에, 정원은 그 말에 대한 대답을 들을 필요 없이 우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러나 모욕적인 말에 분노한 비각성자 두 명은 내리면서도 항의를 멈추지 않았다.
『각성자가 아니라고 무슨 버러지라도 되는 줄 알아요?』
『나 참, 에스퍼 중에 저런 사람이 있다곤 들었지만 설마 이런 데에서 볼 줄이야.』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막말로 당신들 같은 건 내가 여기서 손가락만 한 번 까딱해도 죽은 목숨인데, 그런 사람들 뭘 믿고 같은 직장에서 일을 하겠어?』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벌써 이 회사 직원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는 건 좀 우습긴 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걸 지적하기도 이상한 상황이고, 또 무엇보다 엮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정원은 슬쩍 그들 틈을 빠져나왔다.
『선생님도 뭐라고 한마디… 어?』
정원에게 말을 걸던 노란 가면이 빈자리를 보고 머쓱해했지만 무시했다. 일부러 존재감을 지우고 있었던 것인지 다툼에 끼지도, 끌려 들어가지도 않았던 석주를 향해 정원이 말을 붙였다.
“혼자 가면 어떡해요?”
“새 친구들 생긴 줄 알았더니, 아니었어요?”
황당한 농담이었다. 정말로 일부러 놓고 가기는 했다는 건가. 정원이 한숨을 푹 쉬었다.
“곤란하다 싶으면 좀 도와주시죠.”
“정원 씨가 도움을 다 청하시네요?”
그럼 이런 상황에서 혼자 이겨내겠다고 우길 줄 알았나. 이제 와 새삼스럽게 그의 도움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팀이니까요.”
“…….”
석주는 웬일로 대꾸 없이 입을 다물었다. 정원은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구분 없이 사람들을 불러 놓으니까 이런 상황이 생기네요.”
아마 테프트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걸 막기 위해 가면을 씌워 정체를 숨기는 척이라도 한 거겠지만.
설명회장이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는 강당 앞에 팸플릿이 놓여 있었다. 정원은 한 장을 챙겼지만 석주는 당연하다는 듯 그 앞을 스쳐 지나갔다. 대체, 구직자인 척할 생각이 있기는 있는 걸까?
안으로 들어가니 자리마다 번호표가 붙어 있었다. 초대장에 적힌 번호대로 좌석을 지정해 둔 모양이었다. 석주와 정원의 자리는 꽤나 앞쪽이었고, 나란히 붙어 있었다.
가면을 쓴 사람들이 대강당에 우르르 들어와 앉는 광경은 영화나 만화를 눈앞에서 직접 보는 듯한 느낌이라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찝찝했다. 게다가 더 이상한 것은 강연을 하러 나온 테프트 소속 에스퍼조차 화려한 가면을 썼다는 점이었다.
석주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인 정원이 귓속말을 했다.
“아무래도 강석주 씨가 보던 쇼핑몰에서 산 모양인데요. 저 가면.”
“내가 사려던 게 어딜 봐도 더 나은데?”
정원 답지 않게 건넨 농담에 석주도 농담으로 받아쳐 왔다.
농담 맞겠지? 설마 진심으로 그 우스꽝스러운 가면이 마음에 들었던 건 아닐 테고.
정원은 그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본론을 꺼냈다.
“저 에스퍼, 누군지 알 것 같습니까?”
석주의 말을 무시하고 강연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테프트 소속의 에스퍼일 테고, 강연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것은 미디어에 노출된 적이 많다는 뜻일 것이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 이 강당에서 무슨 사건이 일어날 경우에 대비해 저 에스퍼가 누구인지, 어떤 능력을 가진 이인지 알아 두고 싶었다. 석주는 잠시 고민하는 듯 제 턱을 매만졌다.
“본 적 없는 사람 같네요.”
그 말을 들으니 문득 궁금해졌다. 석주는 본 적 있는 에스퍼의 능력이라면 다 알아볼 수 있다고 했는데, 그건 직접 본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유튜브 같은 걸로 본 건 구별 못 해요?”
“할 수는 있는데, 유튜브 같은 걸 잘 안 봐요.”
영상으로도 구별할 수 있다는 건 놀라웠지만, 당장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듯했다. 돌아가는 대로 유튜브를 켜 놓고 테프트 소속 에스퍼 중 영상이 남은 모든 이의 능력을 보게 만들어야 하나.
당장은 그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 속마음을 들켰는지, 석주가 정원 쪽을 뚫어져라 보는 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석주가 정원 쪽으로 몸을 숙여 귓속말을 했다.
“누군지가 궁금한 거예요? 아니면 능력이 뭔지 궁금한 거예요.”
“둘 중에서는 능력 쪽이죠.”
“소리 관련 에스퍼예요. 아마 소리 증폭 같은 게 아닐까 싶은데.”
반신반의하며 돌아보자 석주는 정말로 능력에 관한 추측을 전해 주었다. 빠르게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테프트 소속 에스퍼 중 소리와 관련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박규혁일 수도 있겠네요.”
“그런 사람도 있나요?”
정원의 심각한 추측에 석주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박규혁이라면 소리를 자유자재로 증폭하거나 줄일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얼핏 듣기에는 대단할 게 없지만, 박규혁은 그 간단한 능력을 다양하게 운용해 실적을 쌓았다고 했다. 사실 그의 인기는 대개 대중 매체에서 보여준 위트 있는 모습과 번지르르한 외관 덕분이라,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미션을 수행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고민하는 사이 강연이 시작되었다. 강연자는 마이크도 들지 않은 상태로 설명회를 시작했는데, 그럼에도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예상한 대로 박규혁이거나, 적어도 그와 같은 능력을 가진 에스퍼인 모양이었다.
가면을 쓰기는 했지만 저 정도라면 예의상 썼을 뿐 정체를 숨길 생각은 없는 게 아닐까.
『오늘 이 자리에 와 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 테프트의 설명회라서 뭔가 특별한 내용이 있을까 내심 기대했는데, 강연 내용은 특별할 게 없었다. 테프트라는 회사가 얼마나 역사가 깊은지부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에스퍼와 가이드를 키워 냈는지, 또 얼마나 많은 테러 사건으로부터 시민들을 구해냈는지 자랑하는 내용이었다.
『무엇보다 저희 테프트의 자랑거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장님의 경영 철학입니다. ‘모두에게 이롭게’!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을 모시게 된 것도 바로 이 철학을 실천하기 위해서랍니다.』
그리고 회사를 자랑하는 데에는 역시 이 이야기가 빠질 수 없을 터였다. 사장 이야기. 대외적으로 그는 에스퍼든 가이드든 비능력자 일반인이든 가릴 것 없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겠다 주장하는 이였다.
테프트의 사장. 그는 초기에 푸대접받던 에스퍼와 가이드의 입지를 끌어 올린 장본인이었다. 그에 관해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아 사람마다 부르는 호칭이 달랐다.
모두가 아는 사실은 성별은 남성이라는 것, 경이로울 정도로 강한 에스퍼라는 것, 혼자만의 힘으로 테프트라는 기업을 국내에서 손에 꼽히는 위치에 올려놓았다는 것 정도일까.
그 강력하다는 능력에 관해서조차 알려진 바가 극히 적었다. 덕분에 온갖 소문만 떠돌았다. 한 가지 능력만을 가지고 태어나는 대부분의 에스퍼와 달리 무려 20가지의 능력을 가졌다거나, 옛이야기처럼 하룻밤 만에 태산을 옮길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거나, 심지어는 눈만 마주쳐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거나 하는 식의 근거 없는 루머가 대부분이었다.
소문 중에는 흉흉한 것이 많았지만, 그만큼이나 미담도 많았다. 자신들의 사장을 위대한 신처럼 보는 테프트에서 퍼뜨린 것이 대부분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공식 석상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된 지 십여 년이 되었음에도 그의 위상은 여전히 높았다.
정원에게는 그 남자의 모든 것이 그저 가증스러운 위선에 불과했지만.
생각만 해도 오한이 드는 것 같았다. 눈앞에서 느리게 깜빡거리는 노란 눈동자를 떠올리며 정원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저희 테프트는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사는 사회를 지향하는 회사입니다. 그렇기에 이번 공개 모집에서는 특별한 능력이 없는 비각성자에게도 기회를 제공하려 합니다. 비각성자 여러분을 위해 이제껏 시도한 적 없던 새로운 방식의 채용 시험을 치를 예정이고요.』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원은 힐끗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중 비각성자가 얼마나 되는지를 알아보고 싶었지만, 워낙 사람이 많은 탓에 가려내기가 힘들어 당장은 포기해야 할 듯했다.
『어쨌거나,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저희 테프트 측에서 엄격한 절차를 거쳐 선발한 1차 합격자입니다. 축하와 감사의 박수를 드리고 싶습니다.』
박규혁이 손바닥을 부딪치자 강당 전체에 그 박수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직접 보니 의외로 분위기를 이끄는 위압감이 있는 능력이었다.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봐 가며 적당히 박수를 따라 치던 정원은 어느 순간 석주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지?
석주는 정원의 얼굴을 향해 자세를 낮춰 왔다.
“좀 전부터 표정이 말이 아니에요, 정원 씨.”
“…그랬나요?”
자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간파당했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웠다. 가면을 쓰고 있는데 그는 대체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어떻게 알아본 것일까.
“사장 얘기 나왔을 때부터 그렇던데.”
“…….”
입을 다물었다.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건만. 정원은 여전히 떠들고 있는 사회자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느지막이 대답했다.
“네. 듣기 싫은 이름이라서요.”
솔직하게 말할 줄은 몰랐다는 듯, 가면 너머 제대로 보이지 않는 석주의 눈이 묘한 기색을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