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실례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서늘한 공기가 반겨 주었다. 사무실에는 서너 명의 직원이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들어왔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얼굴을 찡그린 정원이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실례합니다, 등록 절차 때문에 왔는데요.”
직원 중 한 사람이 그제야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동태처럼 죽어 있던 눈은 정원의 뒤에 서 있는 석주의 모습을 발견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크게 뜨였다.
“어어, 석주 씨!”
아는 사이인가? 오랜만에 만난 절친을 보듯 확 펴지는 얼굴을 보고 석주를 돌아보았다. 정작 강석주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게 딴청을 피웠지만, 직원들의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그 말 한마디에 지루해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던 직원들이 모두 반색하며 석주를 반긴 것이었다. 이 나라에 오래 있었던 사람을 대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몇몇은 석주에게로 다가와 그를 에워싸고 말을 붙이기도 했다. 정원은 도움을 청하는 것 같은 강석주의 표정을 가볍게 무시한 뒤, 그들 사이에 석주를 내버려두고 데스크 쪽으로 향했다.
“국립기관 소속 가이드 정원입니다. 허가증을 수령하고 싶은데요.”
“무슨 일로 파견되신 건가요?”
“공문이 왔을 텐데요?”
“왔죠, 왔죠. 그러니까… 태프트 쪽 일 맞나요?”
직원이 알쏭달쏭한 얼굴로 던진 질문에 정원은 대놓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제야 부랴부랴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며 묻는 모습이 영 못 미더웠다. 어쩐지 강석주가 여기 들르는 데 왜 그렇게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 그 정원 님이시구나~ 소문 많이 들었는데.”
계속 모니터에 얼굴을 박고 있던 직원이 고개를 끄떡이며 혼잣말을 했다. 말을 마치고 정원을 쭉 한번 훑어보는 눈길이 불쾌했다. 무슨 소문을 떠올리고 저런 표정을 짓는지는 뻔했다. 나라의 노예라거나 관장의 개 따위의 말이겠지. 저런 의미심장한 눈길을 한두 번 받는 것도 아니라 새삼스럽지 않았다.
“네, 확인되셨고요. 사용 허가를 받으시려면 재검을 하셔야 되세요. 이쪽으로 오실게요.”
그러나 그 말에는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정원이 팍 얼굴을 구겼다.
“검사 절차 생략하고 허가증을 받을 수 있도록 얘기가 됐을 텐데요? 확인 부탁합니다.”
“네? 이 검사 얼마 안 걸려요. 그냥 형식적인 거라 약식이고, 잠깐만 들어갔다 나오시면…….”
“그러니까 그 형식적인 절차, 생략하도록 얘기가 됐을 텐데요.”
어이없어하는 것 같은 직원의 모습을 보며 정원은 더욱 어이가 없어졌다. 이건 정원을 설득하며 관장이 호언장담을 한 부분이었다. 검사를 받지 않고도 허가증을 발급받게 해 주겠다는 것.
정원처럼 국립기관에 소속된 가이드는 타국에 자리한 자국 지부에서 허가증을 받을 수 있었고, 다른 경우에는 해당 국가 기관을 찾아가야 했다. 원칙적으로 간단한 능력 검사를 거쳐 허가증을 발급하지만, 정원은 이 검사를 극도로 꺼렸다. 외국 임무를 맡지 않으려는 이유에 이 부분도 포함이 되었다.
다행히 국립기관 소속일 경우 기관 측에서 타국에 직접 신원을 보장하는 확인증을 제출하는 등 절차를 거치면 검사 없이도 허가증을 받을 수 있었다. 관장은 그걸 받아 주겠다고 한 것이었다.
그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니 분명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직원은 일처리를 똑바로 할 마음이 없는 듯했다. 계속 매뉴얼대로라면 검사를 해야 된다고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처럼 굴었다.
정원은 드물게도 머리가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단순한 당황 이상의 감정이었다. 그런데 정원이 이마를 짚은 채 입을 다물고 있을 때, 다른 이들의 스몰토크를 대충 받아주던 석주가 그들을 밀어내고 정원의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정원 씨. 문제 있어요?”
그는 자연스럽게 정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순식간에 공기가 무거워졌다.
정원은 원칙주의자이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뻣뻣하게 굴 만큼 융통성이 전무하지는 않았다. 친근하게 어깨를 감싼 석주의 손을 밀어내지 않고 설명했다. 어차피 석주도 뒤편에서 대화 내용을 다 들어 놓고 하는 말일 테니 굳이 하나부터 열까지 구체적으로 늘어놓지는 않았다. 역시 예상대로 석주는 간단한 설명에도 즉각 반응했다.
“똑바로 확인해 주시죠. 얘기가 된 부분이라는데 왜 답답하게 굽니까?”
웃으며 한 말이었지만 예의 그 위압감이 있었다. 어깨를 잡힌 탓에 그 기운이 선명하게 전해져 왔다. 정원은 살짝 몸을 떨었다. 평소 정원을 껄끄럽게 만들었던 특유의 위압감은 놀랍게도 그가 일부러 조절하고 있었던 결과라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정원의 사정이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더했다. 기에 눌렸는지 티 나게 몸을 움츠린 직원이 허겁지겁 컴퓨터로 뭔가를 확인했다.
“아… 그러네요. 그러시면 그냥 바로 허가증을 발급해 드릴게요…….”
이렇게 쉽게 해결될 상황이었다니.
순식간에 나온 따끈한 허가증을 쥐고, 정원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정원과 석주의 눈치를 살피던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현장부터 쭉 돌아봐야죠. 우선은 제일 최근에 기현상이 일어났던 곳부터 갈 겁니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인가 쪽이라고 하던데요.”
짜증스러운 것은 짜증스러운 것이고 일은 일이었다. 사무적으로 대답하자 직원이 손사래를 쳤다.
“아, 그걸 아직 못 들으셨나 보네요. 그저께 근처에서 비슷한 기현상이 또 일어났거든요. 테프트가 철수한 뒤라 다들 그거랑 연관이 있는 현상이라고 말은 못 하고 있지만 사건이 되게 비슷해요. 요 근처 건설 현장에서 일어났는데, 가 보실 거면 거기부터 가는 게 좋을 거예요.”
“그 현장은 지금 누가 맡고 있나요?”
“티엑스요. 이쪽 현지 회사인데, 사실상 테프트 산하나 다름없는 곳이죠.”
방금 일로 눈치가 보였는지, 그래도 이번에는 쓸모가 있는 정보를 전해 주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정원은 곧 고개를 숙여 묵례한 뒤 먼저 문을 열고 나왔다. 석주에게 쭈뼛쭈뼛 인사를 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몸을 돌린 탓에 그가 마주 인사를 해 주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건물 밖으로 나온 정원의 표정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여러 가지로 마음이 불편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안절부절못했던 자신의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강석주에게 불편한 실랑이를 그대로 보여주었다는 점도 껄끄러웠고, 결국 그의 도움을 받아 상황을 해결했다는 것도 못마땅했다. 중요한 정보를 마지막에야 겨우 전해들을 수 있는 일처리 방식도 기분을 망치는 데에 한몫을 했다.
죽상인 정원의 얼굴을 보고 석주는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그러게 뭐랬어요. 안 오는 편이 나을 거라니까.”
뾰족하게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석주의 말을 듣고 지부 사람들이 그다지 도움이 안 될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정원이 굳이 여기까지 올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지만, 그걸 늘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강석주 씨 말이 맞았네요. 하지만 전 까라면 까는 게 익숙해서요.”
농담을 농담으로 받지 않는 모습에 석주가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신중하게 고르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은 꽤 긴 시간 후에 흘러나왔다.
“당분간은 그럴 필요 없어요.”
“무슨 뜻인가요?”
“나한테는 까라면 까지 않아도 된다고요.”
“…….”
“그렇게 되면 오히려 효율이 떨어지니까. 할 말이 있으면 하고 아니다 싶으면 그것도 말해요.”
그는 정원이 딱딱하게 토를 달 상황에 대해서도 예상했는지, 해명인지 설명인지 모를 말을 덧붙였다. 그런 이야기까지 들었는데 그럴 수는 없다는 둥 날카롭게 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색하게 알았다고 대답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 * *
지부에서 말한 현장은 근처라는 말에 걸맞게 택시를 타고 십 분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현장의 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가관이었다. 땅이 완전히 두 쪽이 난 것처럼 갈라져 있는 것을 보면 상황이 꽤 심각했다는 뜻인데, 현장 주위에 허술하게 생긴 줄이 둘러져 있고 접근 금지 팻말이 하나 세워진 것 외에는 변변한 관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주위를 감독하는 것도 지루한 표정의 에스퍼 둘뿐이었다. B급에서 C급 정도는 되는 것 같았지만, 옆에 서 있는 강석주에 비교하면 일반인 수준의 아우라였다. 그나마 에스퍼의 기운에 민감한 정원이라 겨우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빈둥거리는 에스퍼 둘뿐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보는 눈이 있으니 당장 대놓고 현장을 살피기는 힘들 듯했다.
저 둘을 회유해야 하나?
정원이 고민하던 때 석주가 말했다.
“정원 씨.”
“네.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신가요.”
“저 사람 재울 수 있겠어요?”
석주가 마침 하품을 하고 있는 에스퍼 쪽을 가리켰다.
“주의를 끌 건데, 아마 무슨 일이 생겨도 둘 다 그쪽을 보러 가지는 않을 테니까요. 하나 보내고, 하나는 정원 씨가 재우는 걸로 해요.”
어떤 방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석주가 주의를 끌어 한 명을 유인하면 다른 한 명을 가이딩을 통해 재우자는 작전인 듯했다.
가이딩을 임무 도중 그런 식으로 써먹어 본 적은 없었다. 석주처럼 유연하게 사고하는 사람이 없었던 탓이다. 소매치기를 잡았던 걸로 거기까지 생각하다니.
성공할 자신은 충분했기에, 짧은 고민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석주는 곧장 행동에 들어갔다. 손가락을 까딱이길래 준비를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준비가 아니라 바로 실전이었다.
쾅! 그가 손을 움직이자마자 무언가 터지는 것 같은 굉음이 들렸다. 한두 블록 건너편에서 들린 소리 같았다.
정원은 당황스러움에 찌푸려진 얼굴로 석주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