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석주는 정원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걸 눈치챘는지 슬쩍 입술을 휘어 웃었다. 밋밋한 대답 끝에 뒤늦은 말이 덧붙여졌다.
“다행이네요. 먹고 가라고 잡아놓고 형편없는 걸 대접했으면 미안할 뻔했는데.”
이 이상할 만큼 상식적인 반응과 어이없는 장난 모두 적응하기 힘들었다. 어느 쪽이든 무조건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가는 게 최선일 것 같았다.
정원은 밥을 다 먹자마자 이 집에서 나가려 했다. 강석주가 잡지만 않았어도.
“과일 먹고 가세요.”
밥도 충분히 먹었는데, 과일이라니. 오랜만에 만난 손자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려 애쓰는 할머니 같은 말이었다. 그것까지 받아들여 버리면 어색하게 과일까지 얻어먹어야 할 테니, 정원은 거절할 이유를 찾았다.
“본부에 제대로 보고서를 올리지 않으면 곤란해서요. 최대한 빨리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본부요?”
석주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이런 식으로 외박하는 일, 그것도 다른 에스퍼나 가이드와 함께 외박하는 일이 생기면 본부에서는 제대로 된 보고서를 요구했다. 잠들어버린 자신을 집에 데려올 때 본부에 이미 연락도 했을 텐데, 왜 모르는 일처럼 구는 걸까.
“네? 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알아서 집 잘 들어간 줄 알겠죠.”
석주가 심드렁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정원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본부에 연락을 안 하셨습니까?”
당연히 그와 자신의 외박 소식이 소속된 본부에 닿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심 정원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부분이었다. 기관은 소속 인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는 편이었다. 심지어 호텔이나 병원 같은 공간에 들어가면 직접 보고하지 않아도 그 내용이 기록된다.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국가 소속 에스퍼와 가이드들은 변수가 생길 경우 대부분 기관에 보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어질 본부의 추궁 등 후폭풍을 감당하기 싫으니까.
강석주 정도 되는 에스퍼라면 본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정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흘러나왔다.
“안 했죠. 개인적으로 술 한잔했을 뿐인데 그걸 보고까지 해야 하나요?”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마음이 복잡했다. 얼굴이 찌푸려진 탓에 기분이 나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정원은 간신히 입을 움직였다.
“본부에 연락했으면 제 집 주소 정도는 알려줬을 텐데. 그럼 이렇게 수고하실 이유도 없었을 테고요.”
“그건 실례잖아요? 정원 씨도 집 주소 노출되는 건 불편해하시면서.”
집 주소에 예민하게 반응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걸 기억했다는 건 믿기지 않았다. 이제껏 수많은 진상 에스퍼를 상대해 온 경력과, 그를 처음 만난 순간 느꼈던 첫인상 탓일까.
“제 쪽에서도 떠나기 전까지 웬만하면 본부하고는 커넥션 없이 지내고 싶고요.”
그 말에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여 공감할 뻔했다. 본부와 엮인 귀찮은 일을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와 닿은 탓이다.
그의 집에서 깨어났고,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이게 더 신경 쓰였다. 깊은 안도감이 느껴졌다. 겨우 ‘본부에 연락을 하지 않았다’ 이 간단한 한 문장을 들었을 뿐인데. 이건 꼭, 어제 술에 취해 혼자 긴장이 풀려 기관에서 일하는 이유 따위를 술술 늘어놓던 것과 비슷한 느낌 아닌가.
“그 부분은…….”
순순히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머뭇대던 정원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요. 진심입니다.”
“뭐, 별말씀을.”
강석주는 정원의 감사 인사에 의외라는 것처럼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러더니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건지 가볍게 웃었다.
고마우니 그의 말에 붙들릴 수도 있었겠지만, 정원은 고마워서 오히려 돌아갈 것을 서둘렀다. 석주는 더 이상 과일을 권하지는 않았고, 그저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출국 날 보자는 인사만을 남겼다.
* * *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문자함에 들어찬 메시지들을 쭉 둘러보았다.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대화에 눈길이 멈췄다.
[정원 씨 ^^
외국 물은 ^^
잘 맞는 편이에요? ^^]
[글쎄요. 국외 임무는 처음이라서요.]
[정원 씨 ^^
그거 ^^
아시나요? ^^]
[뭘 말씀하시는 건가요.]
[비행기에 탈 때는 ^^
신발을 벗어야 ^^
한다는 거 ^^]
이 문자를 받았을 때 정원은 강석주의 정신 연령이 초등학생 수준쯤 되는 것이 아닌지 진심으로 고민했다. 무슨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한단 말인가.
당연히 장난일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외국행 비행기를 단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는 정원이었기에 확신은 할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에 검색까지 해 본 것은 그래서였다.
석주같이 쓸데없는 장난을 치려고 하는 유치한 사람들이 올린 글들 때문에 다소 난항을 겪기는 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의 말이 헛소리가 맞았다는 것을 알아낸 뒤 답장했었다.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누가 속을까 보냐. ‘거짓말인 거 다 압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 이상 이어질 대화를 방지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이상했던 첫 만남 이후로, 정원이 내린 결론은 한 가지였다. 이 남자와는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
그가 진심으로 싫었던 것은 아니다. 얄미워서 대화조차 하고 싶지 않을 정도였던 것도 아니다.
에스퍼라는 이유로 그를 경계하기는 했지만 현시점에서 정원은 강석주를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보인 모습은 아마 대부분이 거짓 없는 진실일 것이다. 그는 꽤나 매너 있었고, 제법 상식적이었다. 에스퍼이기 때문인지 다소 제멋대로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유머 감각까지 겸비했다. 그에 관해 제법 길게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결정적인 이유는 역시 ‘본부에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겨우 그런 이유로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결론을 내렸다는 게 스스로도 신기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강석주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는 실제로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로는 정원의 예상이 틀린 것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알고 보니 석주가 쓰레기 같은 에스퍼라고 해도 뭐 어떻다는 말인가. 오히려 좋은 사람이면 좋은 사람일수록 곤란했다. 정원은 그와 가까워질 마음이 없었으니까. 강석주만이 아니라 다른 누구라고 해도.
그래서 그날 이후 철저하게 같은 태도로 거리를 두었다. 몇 차례 도착한 석주의 요상한 문자에도 냉랭할 만큼 사무적인 단답으로 일관했다.
그럼에도 강석주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다시 만나자는 말을 먼저 꺼내지도 않았고, 정원의 사무적인 답장에 화를 내지도 않았고, 대화를 이어 나가기 위해 애를 쓰지도 않았다. 대체 무슨 마음으로 연락을 남기는지가 궁금할 정도였다. 갑자기 유치한 농담을 걸어오질 않나.
어쨌든, 그런 상태에서 출국 날이 찾아왔다. 워낙 촉박하게 잡힌 일정이었기에 급하게 준비해야 했지만, 한시라도 빨리 임무를 시작하고 싶었던 정원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뒤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머릿속에 생긴 것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석주의 ‘^^’ 이모티콘이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원은 괜히 혼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타이밍이 절묘했다. 마침 저편에서 강석주가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공항은 오가는 사람들로 혼잡했는데, 그 틈에서도 그의 존재는 유난히 눈에 띄어서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그처럼 유별나게 눈에 띄는 것도 아닐 텐데, 석주는 어떻게 알았는지 멀리서부터 정원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잘 지냈어요?”
자연스러운 인사 때문에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정원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어서 가자며 눈짓으로 그를 재촉했다.
생에 첫 국제선 탑승 절차는 정신없이 흘러갔다. 솔직히 말해서 강석주가 없었더라면 꽤나 시간을 잡아먹고 버벅거렸을 것 같았다. 수하물을 부칠 때도 그의 도움을 받았고, 심지어는 기내에 들어선 뒤 들고 탄 가방을 싣는 것조차 그가 도맡았다. 마음 같아서는 도움을 거절하고 모든 걸 혼자 처리하고 싶었지만, 석주가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를 대는 바람에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먼저 자리에 앉은 정원은 짐을 싣는 석주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정원은 만반의 준비를 위해 캐리어와 큰 가방을 모두 챙겼다. 반면 석주의 짐은 단출했다. 손에 들고 탄 적당한 크기의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역시 출국 경험이 많기 때문일까.
“신발 안 벗었네요?”
짐을 올린 석주가 옆자리에 앉았다.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또 이 얘기를 꺼낼 줄이야. 정원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걸 속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긴 정원 씨는 똑 부러지는 느낌이 있죠.”
석주가 씩 웃어 보였다. 역시 자신을 놀리고 싶었던 걸까. 정원은 그의 웃는 얼굴로부터 눈을 돌렸다.
문자를 할 때의 강석주는 영문 모를 이모티콘을 남발하고 이상한 장난을 쳐서인지 실제의 강석주와 같은 사람이라는 실감이 잘 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 또 그 유치한 장난을 들먹이며 웃는 모습을 보니 그 사람이 그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또 금세 담담하게 표정을 바꾸었다.
“외국은 처음이라고요?”
“…네. 처음입니다.”
침착한 질문에 한 박자 틈을 두고 대답했다.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 타이밍이었지만 깊이 생각하면 안 됐다. 신경을 쓰지 말자던 결심을 되새겼다. 석주의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국외 임무라는 게 드문 일도 아니고, 더군다나 정원 씨 정도 되는 가이드면 불려 다닐 일이 많았을 텐데. 여태 경험이 없다는 건 일부러 피했다는 뜻이에요?”
이 질문은 곤란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신발을 벗고 비행기에 타라는 농담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할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