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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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장에 머문 지도 어느덧 열흘이 지났다. 벤자민의 컨디션이 완전히 좋아졌음을 확인한 프레드릭은 아침 식사에 앞서 존에게 여행준비를 해줄 것을 명령했다. 다시 방으로 돌아오니 커다란 짐 가방이 문 앞에 놓여있었다. 굳이 존을 불러 안에 뭐가 들었는지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덩치와 다르게 아주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이니 필요한 물건들을 빠뜨리지 않고 잘 챙겼을 게 분명 했다.

현관 앞에 이르자 양옆으로 웅장하게 문이 열렸다. 이제 곧 떠나려는 두 사람을 보며 존은 연신 걱정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도련님,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프레드릭은 존을 보았다. 그의 마음은 잘 알고 있다. 며칠간 계속될 여행인데 달랑 마부 한 명에 시종 둘만 데리고 가겠다니 안절부절 못할 법도 하다. 하지만 그 이상의 하수인은 번잡하기만 했다. 체력 좋고 믿음직한 시종 두 명 정도면 충분했다.

"괜찮으니 걱정은 안 해도 돼. 그간 수고 많았어.” 

"수고라니요, 와주셔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오도록 하지.” 

"예,도련님. 부디 살펴 가십시오.”

하인들의 배웅인사를 뒤로 한 채 프레드릭은 마차에 올랐다. 별장은 한적한 곳에 있었기에 번화가로 가기 위해선 작은 숲길을 지나쳐야만 했다. 벤자민은 살짝 커튼을 걷었다. 푸르른 녹음이 우거진 숲길,나뭇잎 틈새로 비쳐드는 햇살이 더없이 평온 하고 아름다운 풍경으로 다가왔다. 가슴이 설레었다. 몇 년간 꿈 꿔왔던 리버풀을,그것도 프레드릭과 함께 여행하게 되다니. 심장이 두근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소박한 두근거림을 들킬 세라 벤자민이 먼저 프레드릭에게 말을 건넸다.

"어디로 먼저 가는 건가요?”

"어디부터 가고 싶은데? 생각해 놓은 곳 있어?” 

“......이뇨.”

벤자민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도망치듯 리버풀로 내려오면서도 어디로 갈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눈앞의 현실에 급급해서 이후의 일들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에드워드는 별장으로 가라고 했지만 벤자민은 그 또한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가 진심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도 자신은 더 이상 러틀랜드 가문과는 상관이 없었기에 괜한 폐를 끼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벤자민의 고개가 점점 숙여졌다.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들어 프레드릭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무릎 위에 올린 손에 따스한 온기가 겹쳐졌다. 그 포근함은 봄날의 따스한 바람처럼 잔잔히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목이 메여 간신히 마른침만 삼켰다. 잠시 후 벤자민은 손등을 감싸듯이 쥔 프레드릭의 손끝을 힘주어 잡았다. 말이 없어도 괜찮았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것이다.

"그럼 첫 여행지는 내가 정해도 괜찮을까?”

예상 밖의 말에 벤자민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어디냐고 눈으로 묻자 프레드릭이 웃으며 대답했다.

"오래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인데...... 좋아해 줄지는 잘 모르겠어."

"좋을 거예요.“

벤자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프레드릭과 함께 가는 곳이다. 그 어디라 한들 좋지 않을 리가 없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벤자민은 마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별장 주변의 풍경과는 사뭇 다른, 작고 소박해 보이는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한창 바쁘게 일하는 모양인지 거리는 한 적했다. 프레드릭이 벤자민의 손을 잡았다. 그가 향한 곳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파란색 지붕의 집이었다.

"여긴 어디인가요?"

“......네 어머니 생가야.”

벤자민은 깜짝 놀라 프레드릭을 보았다. 그는 어딘지 안쓰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어서 들어간다 해도 딱히 어머니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을 거야. 그래도 꼭 한 번은 와보고 싶었어. 음....... 멋대로 데려와서 화난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없잖아요......“

또 다시 울컥 목이 메여 와서 벤자민은 간신히 대답했다.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지막한 주황색 지붕,낡은 회갈색의 벽. 갈색 손잡이가 덧대어져 있는 나무문을 보니 금방이라도 어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이름을 불러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정작 다른 곳에서 문이 열렸다. 바로 옆집에서 들리는 문소리에 벤자민은 고개를 돌렸다. 늙은 노파가 밖으로 나오다가 깜짝 놀라는게 보였다. 곧 미심쩍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오셨나요? 거긴 베이커 씨 댁인데....... 혹시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요,그전에 살던 분 때문에 잠시 들른 겁니다. 곧 갈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중한 목소리에 노파는 금세 아아,하고 수긍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이내 안색이 좀 어둡게 변하며 조심스럽게 프레드릭에게 물었다.

"그전에 살던 분이라면... 혹시 폴 부인을 찾아오신 건가요?” 

꽈악,벤자민은 저도 모르게 프레드릭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제 기억이 맞다면 폴은 어머니가 결혼하시기 전에 썼던 패밀리 네임이다. 부인이라고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어머니의 어머니,즉 할머니를 말하는 것 같았다.

"아는 분입니까?"

"알다마다요. 제 언니인데 모를 리가 없지요.”

또 한 번 벤자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굳어버린 그를 대신해 다시 프레드릭이 물었다.

"그럼 혹시 그 딸도 알고 있습니까?”

"물론이죠. 아이가 태어났을 때 제가 직접 탯줄을 잘라준 걸요. 근데 이 일을 어쩌지요. 언니는 이미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딸인 안나는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에 제 남편과 함께 마을을 떠났고요. 아마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 을......“

문득 노파의 시선이 벤자민에게 닿았다. 그녀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이윽고 떨리는 목소리가 벤자민의 귀에 와 닿았다.

“....혹시 안나의 아들이니?” 

“......예.”

벤자민이 느리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 또한 잘게 떨렸다. 

"정말,정말 안나의 아들이니?”

다시 한 번 되묻는 말에 벤자민은 이번에도 간신히 대답할 수 있었다. 어느새 눈물이 차오르는 노파의 얼굴을 보며 프레드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면 잠깐 얘기 좀 들을 수 있겠습니까? 무슨일이 있었던 건지 알고 싶습니다.”

"물론이지요. 어서 들어오세요."

노파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길을 만들어주었다. 탁,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며 골목은 다시 잠잠해졌다.

“.......니.”

“........”

“........베니.”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벤자민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벌써 다 왔어. 저기 좀 앉자”

프레드릭이 가리킨 곳엔 작은 벤치가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그곳에 앉았다.

야트막한 언덕인줄 알았는데 올라와서 보니 의외로 마을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옅은 바람이 기분 좋게 땀을 식혀주었다. 벤자민은 말없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과의 만남. 설마 리버풀에서 어머니를 알고 있는 사람과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것은 노파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몇 번이고 말없이 벤자민을 바라보고,눈물을 홈치고. 한참이 지나서야 노파는 천천히 과거의 해 묵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안나는 언니의 유일한 여식이었어요. 느지막이 얻은 터라 그렇잖아도 귀한 아이인데다가,성품도 밝고 싹싹해서 마을 어른들 모두에게 예쁨을 받았답니다. ....안나는 일찌감치 결혼을 약속 한 사람이 있었어요. 근처에 살던 목수 청년이었는데,인연이란 게 있긴 한 모양인지 어릴 때부터 그렇게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 봤어요. 그 청년이 베타인 걸 알면서도 언니가 허락을 안 해줄 수가 없을 정도로 말이에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청년은 고아였고, 그렇게 두 사람은 큰 난관 없이 부부의 연을 맺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결혼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마을에 큰일이 일어나고 말았답니다.’

‘병세가 심한 영주를 대신해서 아들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는데, 하필이면 천하에 상종 못할 망나니라서 다들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새 영주로 부임하자마자 말도 안 되는 명령이 내려졌어요. 영지 내의 오메가들은 모두 혼전 첫날밤을 영주의 성에서 보내야지만 혼인이 가능하다는 것이었지요. 거부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마을의 모든 것이 영주의 손아귀에 있다 보니,혹시라도 눈 밖에 났다간 당장 살아갈 일이 막막했어요. ...그 와중에 결혼식 날짜는 점점 다가오고,성에서는 틈만 나면 하인들이 찾아와서 안나를 겁박하고,정말 하루하루가 끔찍했어요. 지켜보는 제 가슴이 타들어갈 정도로 말이에요. 그러다 마침내 언니는 결단을 내렸어요. 결혼식 전날 밤,언니는 안나의 남편이 될 청년을 불러서 둘이 함께 마을을 떠나기를 당부했어요. 새 영주가 안나를 몹시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에 자칫 하다간 그의 첩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겠지요. 물론 안나는 절대 안 된다고 했지만,누가 봐도 빤한 일이었기에 결국은 떠날 수밖에 없었어요. 그게 벌써 이십 년 전의 일입니다.’

‘그 후 언니는 영주에게 불려가 죽지 않을 만큼 매질을 당했어요. 다행히 인정 많은 이웃들 덕분에 간신히 목숨만은 건졌고, 삯바느질로 겨우 생계를 꾸려가면서 안나의 소식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안나가 연락을 줄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언니의 생각은 맞았습니다. 두 사람이 떠난 지 일 년이 좀 넘었을 때 마침내 안나에게서 편지가 왔어요. 그때 언니가 얼마나 기뻐했는지,떨리는 손으로 제게 편지를 보여주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그 후로 세 네 번 정도 더 편지가 왔는데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반년,일년,그리고또 일년. 그때서야 언니와 저는 직감했습니다. 안나의 신변에 뭔가 큰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고요. 그렇지 않고서야 홀어미가 저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잘 아는 아이가 그렇게 뚝 연락을 끊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래도 언니는 끝까지 안나를 기다렸고,결국 몇 해 전에 쓸쓸히 세상을 떠났어요.’

노파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벤자민은 가슴이 아파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셋이서 행복한 게 당연한 일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늙은 홀어머니를 놔두고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어머니,영주의 화를 살 것을 알면서도 내쫓듯이 딸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를 생각하니 가슴이 온통 먹먹했다. 

‘.....역시 언니의 생각이 맞았군요. 무슨 일이 있지 않고서야 절대 연락을 끊을 아이가 아닌데,벌써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거였군요. 평생 안나를 기다리던 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지지만..... 이렇게 예쁜 아이가 있고,또 잊지 않고 고향을 찾아와 주었으니 아주 기뻐할 거예요.’

정 많은 노파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차마 울지 못하는 벤 자민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그녀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으로 눈물을 홈치며 마지막 이야기를 해주었다.

‘여기서 조금만 걸어가면 뒷동산으로 향하는 작은 길이 있습니다. 두 모녀가 종종 함께 오르며 과일도 따고 허브 이파리도 따곤 했는데...... 괜찮다면 꼭 한 번 올라가 보세요. 많은 것이 변해버렸지만 동산만큼은 변함없이 두 사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 후 벤자민은 프레드릭과 함께 노파가 일러준 동산을 올랐다. 혼자였으면 오기 힘들었을 이 길을,프레드릭이 함께여서 오를 수가 있었다.

“베니.”

나직한 부름에 벤자민은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 평생 웃게만 해줄게.”

흔하디흔한 말이지만 그래서 더욱 프레드릭의 진심이 느껴졌다. 벤자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드릭이 함께여서,자신을 선택해준 사람이 프레드릭이어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다시 마을로 내려왔을 탠 타오르는 석양이 지평선을 수놓고 있었다. 마차는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시간동안 벤자민은 프레드릭의 눈을 마주보며 잔잔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래도록 슬픔에 잠겨있고 싶진 않았다. 단둘이 처음으로 하는 여행이기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 늘 함께이면서도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함께 하고 싶었다.

한참을 달린 끝에 다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뒤따라오던 시종 들에게 프레드릭이 무언가 명령을 내렸고, 이내 작은 마차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가자.”

프레드릭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천천히 길을 따라 걸었다. 마주쳐오는 사람들마다 시선을 보냈지만 프레드릭 은 아무렇지도 않게 벤자민의 손을 잡고 걸을 뿐이었다.

"베니,저기 봐.”

모퉁이를 돌자마자 프레드릭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벤자민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가 가리킨 곳엔 제방 너머로 넘실대는 푸른 바다가 보였다. 어릴 적 런던 근교에서 보았던 호수도 놀라웠는데,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아득 한 푸른 물결에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부둣가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큰소리를 내며 뚝딱뚝딱 배를 수리하는 조선소를 비롯해서,돛이나 특수 장비를 파는 상점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점점 형태를 갖춰가는 커다란 범선 옆에는 돛 만드는 직공들이 끼리끼리 모여앉아 막바지 작업이 한창이었다.

커다란 통에서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는 몇 사람이 빙 둘러앉아 각자의 무용담을 늘어놓기 바빴다. 검게 그을렸지만 그들 의 얼굴엔 하나같이 생기가 넘쳐흘렀다. 호탕한 웃음소리가 저물 어가는 푸른 하늘을 가득 채웠다.

벤자민은 좀처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택에 살게 되면서부터 언제나 엄숙한 분위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물론 하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데니스와 있을 땐 종종 수다를 떨며 활기찬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예절과 엄숙함을 겸비한 채 조용한 생활을 해왔다. 그런데 이곳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분위기는 물론이거니와 말투와 옷차림새도 너무나 자유분방하다.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채 작은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호탕하게 웃고 떠드는 뱃사람들의 모습은 놀라움을 넘어서 충격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그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아니,오히려 전신에서 생명력이 느껴져 조금 더 가까이서 그 활기찬 기운을 함께 느껴보고 싶었다.

"런던과는 사뭇 다르지?" 

"네.”

대답하면서도 벤자민은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녁을 먹어야 할 텐데. 좀 있다 호텔에서 먹을까, 아니면 여기서 먹고 갈까?"

"여기서 먹고 싶어요.”

프레드릭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저기 식당이 있어. 썩 좋아보이진 않는데,괜찮겠어?” 

"네.”

벤자민의 대답에 프레드릭은 한 번 더 웃으며 그리로 걷기 시작했다.

"어서 오세요.”

삐걱거리는 낡은 나무문을 열자 수더분한 인상의 주인이 웃으며 두 사람을 맞았다. 사람이 많기는 식당도 마찬가지였다. 삼삼오오 모여 앉은 손님들은 식사 겸 반주를 즐기며 느긋한 여유로움을 즐기고 있었다. 적당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얼떨떨한 눈으로 벤자민이 주변을 둘러보자 맞은편의 프레드릭이 물었다.

"먹고 싶은 거 있어?” 

"잘 모르겠어요.”

저택에 있을 팬 메리 아주머니가 해주시는 대로 음식을 먹었고,그조차도 빵이나 스프 혹은 가끔 고기가 들어간 스튜가 나오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공작님을 비롯한 일가족의 탄생일이나 명절에는 특별식이 제공될 때도 있었지만 그것이 어떤 메뉴인지는 자세하게 몰랐다. 귀족인 프레드릭의 발렛인 만큼 벤자민은 여느 하인들에 비해 예의범절도 많이 알고 그들의 생활패턴 또한 잘 알았다. 하지만 유일하게 취약한 부분이 바로 식사와 관련 된 것이었는데, 식사를 담당하는 시녀들이 따로 있었기에 벤자민은 그 부분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다.

“그럼 내가 골라줘도 될까?” 

"예.“

벤자민이 안심한 얼굴로 대답했다. 마침 다가온 여급을 보고 프레드릭은 메뉴를 주문했다.

"연어 되니에르와 청어 훈제 요리를 갖다 주십시오.” 

"예. 술은 어떤걸로 드릴까요?”

"술은 됐습니다.”

"어머,생선요리엔 맥주라도 한 잔 곁들이시면 훨씬 풍미가 좋아져요. 물론 더 좋은 술도 많이 있답니다.”

여급이 화사하게 웃으며 은근히 술을 주문하기를 권했다. 문득 주위가 조용해진 느낌에 벤자민은 흘끗 주변 테이블을 살렸다. 어쩐 일인지 대부분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영문을 몰라 프레드릭을 바라보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마지못해 술을 주문했다.

"적당한 걸로 한 잔 부탁합니다." 

"예,감사합니다.”

여급이 살랑거리는 나비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또 다시 나오려는 한숨을 눌러 참으며 프레드릭이 입을 열었다.

"베니.” 

“네.”

"술은 절대 마시면 안 돼. 나도 안 마실 테니까.” 

그 말에 벤자민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주문을 취소해야하지 않을까요?”

"아니,여급도 입장이 있는데 그럴 순 없지.”

성숙하고 섹시한, 그러면서도 노련미가 물씬 풍기는 자태를 보니 딱 봐도 베테랑 여급임이 분명하다. 일반 식당이라면 절대로 저런 여급을 고용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항구 바로 옆이니 뱃사람들이 주로 식당을 찾을 테고,거친 성정을 지닌 그들의 마음과 주머니를 흔들기 위해서 일부러 비싼 돈을 들여 색기 넘치는 오메가를 여급으로 고용했을 것이다. 비단 이곳뿐만이 아니라 근방 식당이라면 어느 곳이든 마찬가지일 테고.

술 한 잔 이래봤자 푼돈에 불과한데 그걸 굳이 거절해서 여급을 무안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꾸 이쪽을 향하는, 정확히는 벤자민을 향하는 시선이 불쾌했기에 프레드릭은 대충 술을 갖다 달라고 말하며 여급을 보냈다.

"근데....“

벤자민의 목소리에 프레드릭의 시선이 앞을 향했다.

"술과 함께 먹으면 더 맛있다고 하는데, 그렇게 드시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이미 주문도 했는데."

그 말에 프레드릭은 웃어야 할지 한숨을 쉬어야할지 난감했다. 저렇게 순진하고 세상물정이라곤 모르면서 어떻게 제 곁을 떠날 생각을 다 했을까.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일에 고개를 흔든 프레드릭은 뒤늦게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냥 술을 팔려고 하는 말이야. 음식만 주문받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 많이 남으니까.”

"그런 건가요?“

"그래. 그 때문에 일부러 저런 예쁜 오메가들을 여급이나 남급으로 고용하는 거고. 만약 네가 이 식당의 남급이었으면 난 아마 이 식당을 통째로 사들였을 거야. 그리곤 매일같이 와서 내 주문만 받게끔 손을 썼겠지.”

벤자민은 아무 말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프레드릭이 기분 좋게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여급이 트레이를 들고 테이블로 다 가왔다.

"맛있게 드세요.“

주문한 음식들이 테이블 위에 차례로 놓여졌다. 투박한 접시에 식기 또한 한 눈에도 낡고 오래되어 보인다. 하지만 그조차도 벤자민의 눈엔 놀라움과 동경으로 다가왔다.

"한 번 먹어봐.”

프레드릭의 권유에 벤자민은 기대를 품고 식사를 시작했다. 

"멀리서 오셨나 봐요.“

문득 머리맡에서 고운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조금 전 주문을 받고 음식을 가져다준 여급의 얼굴이 보였다.

"같이 동석해도 될까요?” 

"무슨 일입니까?”

프레드릭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든 말든 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띤 여급은 스스럼없이 다리를 꼬며 빈자리에 앉았다.

"처음 뵙는 분 같아서요. 어디 멀리서 오셨나요?” 

여급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프레드릭을 향했다.

그녀는 철이 들 무렵부터 이곳에 터를 잡았다. 그 후 줄곧 억센 뱃사람들이 드나드는 식당의 여급으로 일해 왔기에, 지금껏 산전수전 안 겪어본 일이 없고 귀족,노예,알파, 베타 할 것 없이 안 만나본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그 중에서도 단연 최고였다. 처음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그녀는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진짜다. 저 사람은 진짜야. 그는 부드럽게 웃는 얼굴이었지만, 오메가를 굴복하게 만드는 알파 특유의 위압감이 전신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심장이 찌릿찌릿,온 몸에 힘이 풀리려는 것을 그녀는 간신히 참아냈다.

당연하게도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조각 같은 출중한 외모는 물론이고,한 눈에도 고급스러운 의복에 일행을 대하는 자연스러운 매너까지. 무역으로 벼락부자가 된 주제에 온갖 거드름은 다 피우는 일개 알파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대체 무슨 일로 여길 온 것일까?

그녀는 몹시 궁금했다. 사람 마음은 다 똑같은 모양인지 카운터 근처의 손님은 물론이고 웬만해선 남의 일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 주인조차도 어서 가서 말을 붙여보라고 난리였다.

그에 여급은 자신 있는 태도로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자신의 외모를 잘 알았다. 알파들은 물론이고,오메가 페로몬을 못 느끼는 베타들도 외양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그녀에게 대시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 중 괜찮은 상대가 있으면 화대를 받고 잠자리를 같이 하기도 했는데,어떻게 잘해서 저 남자의 눈에 띄게 된다면 앞으로의 인생이 활짝 펴질 것은 안 봐도 자명한 일 이었다.

설령 안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살면서 평생 만나보기 힘든 우성알파와 대면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에겐 충분히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제가 술 한 잔 따라 드릴게요.”

긴장을 풀고 마음을 녹이기엔 술이 제격이다. 가장 비싼 술을 병째 가져온 여급은 우아한 손놀림으로 코르크 마개를 뽑아 술병을 기울이려고 했다. 그런데 프레드릭이 그녀의 행동을 만류했다.

"괜찮으니 다른 테이블로 가보십시오.” 

"어머,그러지 말고 한 잔 받으세......“

"아뇨. 제 아내가 실망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예? 아내요?”

여급이 순간적으로 멍하게 되물었다. 웃는 얼굴로 앞을 보는 프레드릭의 행동에 자연히 여급의 시선이 따라갔다.

그곳엔 프레드릭과 동행한 남성이 앉아 있었다. 하얀 피부에 오밀조밀 뚜렷한 이목구비. 남자처럼 한눈에 사람을 휘어잡는 화려함과 위압감은 없지만,부드러우면서도 단정해 보이는 얼굴은 또 다른 의미로 여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외모였다. 문제는 아무리 박도 오메가가 아닌 베타처럼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아내라고? 그냥 일행이 아니라?

속으로 생각하며 다시 프레드릭을 보자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일순 여급의 가슴이 설렘으로 요동쳤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도 녹여버릴 것 같은 따스한 미소에, 그게 자신을 향한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몸이 그 미소에 반응을 보였다.

한 번만,단 한 번만이라도 저런 알파와 밤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으로도 다리 사이가 촉촉이 젖어드는 기분 이었다. 황홀경에 잠겨 프레드릭을 보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앞을 향한 채였다. 여급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물었다.

"혹시 두 분이 부부......신가요?“

"네. 생각 같아선 같이 한 잔씩 하고 싶지만 제 아내가 홀몸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호, 홀몸이 아니라면....“

"생각하신 그대롭니다. 그러니 이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먼저 부르겠습니다.”

어느새 그의 미소는 사라진 채였다. 순식간에 가라앉은 눈동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 그녀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례했습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세요.”

허둥지둥 멀어지는 여급을 보며 프레드릭은 속으로 혀를 왔다. 

"베니,지금이라도 호텔로 돌아갈까?”

다시 생각해도 선택을 잘못한 것 같다. 마뜩찮은 기분으로 벤 자민에게 묻자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런던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인 걸요. 또.....“

“또?”

"아,아내라고 해주셔서 기뻤어요.”

살짝 숙여지는 고개. 하지만 숨길 수 없는 붉어진 귀 끝에 프레드릭은 당장이라도 벤자민을 데리고 나가 작은 몸을 껴안고 입맞춤을 퍼붓고 싶었다. 간신히 날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프레드릭은 벤자민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그럼 식사를 시작할까요?“

벤자민의 얼굴이 더 붉어진 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식당 밖으로 나오자 어둠이 좀 더 깊어졌다. 하지만 항구 근처는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오히려 저물어가는 오후 때보다 더 활달하고 쾌활한 분위기가 곳곳에 넘쳐나고 있었다.

제방을 따라서 각종 노점상들이 일렬로 쭉 늘어서 있었다. 싱싱한 해산물 같은 식료품을 비롯해서 선박 부품에 각종 잡화들 까지 온갖 것들이 즐비했다. 그 중엔 타로카드로 점을 봐주는 곳 도 있었다. 커다란 건물 모퉁이에 위치한 점집은 다른 노점상들 과 달리 온통 검은 천막으로 둘러져 있었다. [Tarat Predictions] 라는 글자가 새겨진 낡은 팻말이 달랑거리며 흔들렸다. 처음 보 는 점집에 벤자민의 발걸음이 자연히 느려졌다. 프레드릭이 웃으며 벤자민에게 물었다.

"해보고 싶어?”

"예? 아니요,그냥 신기해서요.”

"그러지 말고 한 번 들어가 보자.”

프레드릭이 가볍게 벤자민의 손을 이끌었다. 점 따윈 믿을 게 못 된다고 생각하지만 한 번쯤은 재미삼아 해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천막을 들추고 들어가자 생각보다 젊은 중년여성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마치 수녀의 베일 같은,혹은 아랍 여성의 차도르 같은 화려한 천이 눈에 띈다. 복장 때문인지 그녀는 신비하고도 묘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앉으세요,차분한 목소리에 프레드릭은 벤자민과 함께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녀와 마주앉았다.

"세상에 다시없을 천생연분이로군요.”

그녀가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벤자민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프레드릭이 알파인 건 누구든지 한 눈에 알아차릴 수 있지만, 자신은 아직 오메가로서의 성향이 완벽하게 드러나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식당의 여급도 아내란 말에 고개를 갸웃했을 테고. 괜한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자 그녀가 좀 더 부드럽게 웃으며 두 사람에게 물었다.

"어떤 운을 보러 오셨나요?” 

"애정운을 봐주셨으면 합니다.”

프레드릭의 대답에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 한쪽, 작은 화병 옆에 놓여있던 카드가 섬세하면서도 정교한 손동작으로 이리저리 뒤섞였다. 세 장씩 한 줄로,총 여 섯 장의 카드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프레드릭이 먼저 카드를 뽑았다. 내밀어진 카드를 확인한 그녀가 역시,하고 중얼거리듯 말 하더니 이윽고 설명을 시작했다.

"The Sim을 뽑으셨네요.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행복하다고 느끼며 무슨 일이든 다 잘되리라는 자신감이 있으시군요. 실제로도 좋은 소식이 연이어 들릴 수 있으며,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일이 있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주변에 당신을 도와주려는 이가 나타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새로운 목표 설정이 가능합니다. 한편으로는 컨디션이 좋고 몸의 기운이 충만 해서 각종 운동이나 여가를 즐기기에 어느 때보다 좋을 운입니다.”

빙긋이 웃으며 마무리하는 말에 프레드릭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녀의 말은 틀린 게 거의 없었다. 현재의 기분은 물론이 거니와,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일이 이루어진 것과 새로운 목표 설정까지, 거의 대부분이 들어맞았다.

이쯤 되니 프레드릭은 벤자민의 운세가 궁금했다. 점쟁이는 눈치도 빠른 모양인지 서둘러 카드를 회수해서 다시 이열 종대로 배열했다. 이번엔 벤자민이 신중하게 카드를 골랐다.

"어머나."

그녀의 입에서 작은 감탄사가 나왔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카드를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다시금 벤자민을 향했다.

"L‘ETOLIE. 희망의 카드를 뽑으셨네요. 반짝이는 별들은 방향을 가르쳐주는 나침반이자 편안함과 꿈을 제공하는 희망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잠시 말을 멈춘 그녀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연인 점에서 이 카드를 뽑는 경우엔 임신인 경우가 있답니다.”

벤자민 또한 깜짝 놀랐다. 놀라우면서도 두려운 마음으로 그녀를 보자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기,여인이 들고 있는 두 개의 물 항아리가 보이지요? 일반 적으론 다른 뜻으로 해석을 많이 하지만 손님의 경우엔 예외적인 해석을 적용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만약 임신을 하게 된다면 태속에 아마 두 생명체가 함께 자라게 될 것입니다.”

"두 생명체라면...... ”

"네. 점괘대로라면 쌍생아를 가지게 되실 거예요. 이건 점괘와는 관련 없지만 손님께서 들어오셨을 때 선하고 순수한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답니다. 아마 머잖아 기쁜 소식이 있을 거예요.”

"그렇군요.”

?

벤자민을 대신해 프레드릭이 대답했다. 

"다른 점도 봐드릴까요?”

“아니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프레드릭은 지갑을 열고 뭔가를 점쟁이에게 내밀었다. 그녀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프레드릭이 내민 것은 인출권으로,은행에 가면 바로 금으로 교환이 가능한 것이었다.

"중앙은행에서 바로 찾을 수 있습니다.”

"점괘 비용은 한 분당 주화 20폐니씩 받고 있어요. 이건 너무 과분합니다."

"감사의 의미로 드리는 거니 그냥 받으시면 됩니다.”

조심스럽게 자신 쪽으로 밀어지는 인출권을 프레드릭이 다시 그녀를 향해 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막을 펄럭이며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후론 평범한 데이트의 연속이었다. 물론 어딜 가든 흘끗흘끗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긴 했지만 노골적으로 관심을 두거나 귀찮게 구는 사람들은 없었기에 여느 연인들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슬슬 호텔로 돌아가려는데 어디선가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악사들이 있는지 흥겨운 음악소리도 어우러져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가볼래? 눈으로 묻는 프레드릭의 질문에 벤자민은 네,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젊은 남녀들이 원을 그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밝게 타오르는 커다란 유등 근처에는 네 명의 악사들이 흥에 겨워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고,그 맞은편에는 특별한 의상을 입은 한 쌍의 남녀가 밝게 웃고 있었다.

"이건......“

"결혼식을 한 모양이군.”

프레드릭이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중년의 아주머니가 푸근히 미소 지으며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음악소리를 듣고 오셨나 봐요. 시끌벅적하죠?”

"결혼식이 있었던 겁니까?”

“네. 신부 아버지가 교역소 주인인데,평소에 워낙 베풀기를 좋아하고 인정도 많아서 마을 사람들 축하가 계속 이어지고 있어요. 마침 이리로 오네요.”

아주머니가 웃음 띤 목소리로 어딘가를 보았다. 함께 시선을 돌리자 살짝 머리가 벗겨진 왜소한 아저씨가 이쪽으로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다. 푸근하니 인상 좋게 웃는 얼굴이 한 눈에도 신부 아버지처럼 보였다.

"어디,외지에서 오셨습니까?”

"네. 근처로 지나가다가 잠시 들렀습니다.“

“그러시군요,하하. 사실 오늘 제 딸이 결혼식을 했거든요.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제가 술 한 잔 대접 하겠습니다.”

말투며 외모에서 풍기는 범상치 않음에 신부 아버지는 깍듯이 말을 높이며 근처의 샴페인 병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프레드릭은 정중히 손을 내밀며 사양했다.

"죄송한데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한 잔 하시지요.”

"아뇨, 아내가 임신 중이라서 말입니다."

프레드릭의 시선이 바로 옆 벤자민에게로 향했다. 일순 신부 아버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성체의 매력이 가득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더해지니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뒤늦게 말뜻을 이해한 그는 환하게 웃으며 축하인사를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어떤 아기가 태어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한 눈에도 그림처럼 잘 어울리는 부부이니 아마 상상도 못할 만큼 예쁜 아기가 태어날 게 분명했다. 

"저희야말로 축하드립니다. 따님께 오래도록 행복을 바란다고 전해주십시오.”

"아이고,감사합니다 나으리! 축복의 말씀 꼭 전하겠습니다." 

허리 숙여 인사한 신부 아버지는 이내 다른 곳으로 가서 또 다시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점점 무르익어가는 분위기를 바라보며 프레드릭이 벤자민을 불렀다.

“베니.” 

"네.”

"우리도 피로연을 성대하게 하자” 

“......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벤자민이 프레드릭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진중한 표정으로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혼식에 아마 많은 사람들이 올 거야. 관례가 있으니 평민들을 초대할 수는 없겠지만 피로연은 크게 해도 나쁘지 않겠어. 선물을 나누어줘도 좋을 것 같고.”

결혼식.

벤자민은 속으로 조용히 말해보았다. 히트 사이클이 끝난 다음 날,런던으로 돌아가면 결혼식을 올리자고 프레드릭은 말했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그러겠다고 하긴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깊게 생각해보지 않은 탓에, 또 다시 결혼식이라는 말을 들어도 아직은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문득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프레드릭의 손이 자신의 손을 살며시 쥐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자 다정히 웃는 프레드릭과 눈이 마주쳤다.

“.....여보.”

“.......!”

"라고 부르는 걸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

벤자민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당황해서 잡힌 손을 빼내려고 하자 프레드릭의 웃음소리가 좀 더 커졌다. 그제야 그가 장난친 다는 것을 깨달은 벤자민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놀리지 마세요.“

"놀리다니. 난 진심인데?”

“......”

"진짜야. 널 내 아내라고 말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기쁜지,이제 곧 우리 두 사람의 성이 같아질 걸 생각하면 얼마나 행복한지 넌 모를 거야.”

프레드릭의 손에 한껏 힘이 들어갔다. 지난 8년 간,한결같이 한 사람만을 바라보았다. 그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불안 속에 하루하루를 인내하며,그렇게도 간절히 바랐던 사람을 마침내 손에 넣게 되었다. 거기다 이제 곧 아이도 태어날 것이다. 사실 피임을 하자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었다. 아무리 러트라 한들 단순한 엔조이로 오메가를 안을 때에는 아이를 배지 못하도록 컨트롤이 가능했다. 하지만 프레드릭은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내심 1,2년 정도는 신혼을 만끽하며 그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몸을 원 없이 품고 싶지만,문제는 불확실한 벤자민의 마음이었다.

속된 말로 이제는 몸도 마음도 다 저에게 줬으니 전처럼 멋대로 떠나거나 사라져버릴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프레드릭은 여전히 불안했다. 아직은 단둘뿐이니 괜찮겠지만 이제 곧 런던으로 돌아가면 많은 것들이 바뀌게 될 터였다. 결혼 발표만으로도 사교계의 귀추가 주목될 텐데,거기다 그 상대가 리빌드 오메가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허영심 가득한 귀부인들이 어떻게든 친분을 쌓고자 벌떼처럼 몰려들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래서 프레드릭은 염려스러웠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삶의 방식과 현실에 부딪혔을 때,벤자민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일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거기엔 벤자민의 성품이 미치는 영향이 컸다. 힘든 일이 있어도 내색하지 않는다. 괜찮다며 웃어 주는 미소에 안심했다가 하마터면 영영 그를 놓칠 뻔했는데,다음에 또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래서 프레드릭은 고심했다. 뭔가,뭔가 좀 더 확실히 벤자민을 붙잡을 강력한 수단이 필요했다.

거기에 두 사람의 아기만큼 완벽한 것은 없었다. 벤자민 혼자면 불안하지만 둘이라면 안심이다. 누가 뭐래도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니, 뱃속에 아기가 있는데,그것도 러틀랜드 가의 아기를 가진 채로 도망치는 무책임한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알기에 프레드릭은 아무런 조치 없이 그대로 벤자민을 안았다. 러트 기간 내내 그의 안에 사정한 것은 물론이고,심지어 벤자민이 잠깐 눈을 붙이거나 식사를 할 때조차도 끝없이 그의 몸을 탐했다. 그러니 임신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마 얼마 안 있어 배가 불러오며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프레드릭도 마냥 좋은 것만은 결코 아니었다. 벤자민은 아마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줄곧 베타로 살아오다가 하루아침에 오메가가 된 것만으로도 혼란스러울 텐데,그걸 뻔히 알면서도 제 욕심과 독점욕 때문에 첫 히트 사이클 때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 아이까지 가지도록 만들어버렸다.

과악,프레드릭은 다시 한 번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벤자민을 지킬 것이다. 앞으로 그 누구도 그를 힘들 게 하지 못하도록,어떤 일에도 상처받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지켜줄 것이다.

"베니.” 

‘'네.“

"우리도 나가서 춤출까?” 

"네?“

놀라서 되묻는 목소리에 웃으며 프레드릭은 벤자민의 손을 가볍게 이끌었다.

“프레드,전 한 번도 춤을 춰본 적이 없어요.” 

“괜찮아. 내가 잘 리드해줄 테니까.”

내밀어진 손에 벤자민은 곤란한 얼굴로 프레드릭을 바라보았다. 춤이라니,진짜 한 번도 춰본 적이 없는데. 조금 걱정이 되고 망설여졌지만 결국 벤자민은 그의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휘이익!”

그 모습을 본 마을 주민들이 휘파람을 불며 흥을 돋우었다. 새로운 커플의 합류에 분위기는 한껏 더 달아올랐다. 젊은 남녀들 은 물론이고 오래된 부부들도 옛 추억을 생각하며 함께 어울려 잔치를 즐겼다. 환한 달이 하늘 높게 뜰 때까지 즐거운 시간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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