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
벼락같은 큰 소리에 에드워드는 화들짝 놀랐다. 마침 책을 쥐고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혹시 뜨거운 찻잔이라도 들고 있었으면 아마 큰 사고가 났을 것이다. 그만큼 무섭고 흉흉한 기세로 문이 벌컥 열렸다.
"혀,형?!“
무례한 침입자는 바로 자신의 형인 프레드릭이었다. 성큼성큼,그는 긴 다리로 순식간에 에드워드를 향해 다가왔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지만 그대로 멱살이 붙잡혔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프레드릭이 이를 갈며 물었다. 사납다 못해 간담을 서늘케 하는 음성이었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엔 살기가 가득했다. 극도로 흥분할 때만 나타나는 붉은 기운이 일렁이듯 넘실거리고 있었다. 불시에 잡힌 멱살에 숨통이 조여들었다. 에드워드의 아름다운 얼굴이 삽시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젠장,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에드워드는 속으로 욕을 했다. 모두들 자신의 형을 다정한 신사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형이 가진 모습 중 일부분에 불과한 것뿐이었다. 그는 알파이다. 아무리 다정하고 배려가 넘친다고 한들 태생적으로 내재된 사납고 난폭한 본능이 존재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니,오히려 다정하다는 말이 이상하다. 프레드릭의 성품을 칭찬하는 사람은 백이면 백 베타,혹은 열성 알파들뿐 이었다. 조금만 능력 있는 알파라면 감히 최고의 우성알파에게 다정이나 자상이란 표현을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에드워드가 프레드릭을 무서워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같은 우성알파이기에 알 수 있다. 형의 본성은 아마 자신 속에 내재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평은 진실과 판이하게 달랐다. 그래서 에드워드는 억울했다. 저 모습이 다가 아닌데,왜 그걸 모르는 걸까. 심지어 몇 년을 형과 함께 지낸 벤자민조차도 그를 신사로 만 알고 있었다. 그러니 괴로워하면서도 떠나고 싶다는 말을 꺼낸 거겠지. 그 모습이 너무 처연하고 안쓰러워서 눈 딱 감고 보 내줬는데, 지금 생각하니 완전히 미친 짓이었다.
형의 분노는 예상보다 격렬했다. 눈에 보일 것처럼 넘실대는 살기에 치를 떨면서 에드워드는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이 조이는 탓에 온전한 소리가 나올 리가 없었다. 끅끅 바닥을 긁는 듯한 괴로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프레드릭은 그제야 밀치듯 에드워드의 몸을 놓아주었다.
성대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고통에 눈물이 찔끔 새어나왔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자신의 형은 자비 따윈 없었다.
“말해.”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진정해. 응?”
에드워드는 쩔쩔 매며 빌었다. 또 다시 날벼락이 떨어지기 전에 허둥지둥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래서 보내준 거야. 벤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 막힌 일이었겠어. 울 것 같은 얼굴로 더 이상 저택에는 있을 수 없다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말려.”
"그렇다고 진짜 보내줘? 이제 곧 오메가로 바뀔 텐데,아무 것도 모르고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는 애를?!”
분노 가득한 노성이 터져 나왔다. 프레드릭의 눈동자는 잡아먹을 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새장 속의 새처럼 애지중지 품 안에서만 키운 아이이다. 똑똑 하다고는 해도 세상 물정이라곤 모를 텐데,그런 아이가 아무런 안전장치나 보호도 없이 혼자 다니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한 게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흥분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후우- 심호흡으로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사실 가라앉을 리가 없지만,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성적 인 생각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았다.
"단서는.”
다행인 것은 에드워드가 그리 멍청하지만은 않다는 점이었다. 무턱대고 벤자민을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필시 뭔가 손을 써놓은 게 있을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목적지를 알고 있어.”
"목적지?”
눈썹을 올리며 되물었다. 에드워드는 고개가 떨어져라 끄덕여 댔다.
“리버풀에 있는 별장으로 보냈어. 지도를 줬으니까 아마 그대로 가고 있을 거야.”
불신의 눈초리에 에드워드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벤 성격 알고 있잖아. 얌전히 가고 있을 테니까 얼른 따라가면 돼."
"가서 아버지께 말씀드려.”
"응?”
"사병을 움직이겠다고.”
에드워드는 깜짝 놀라 그의 형을 보았다. 좀 전의 격정이 거짓말인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런던 내 모든 용병 길드에 접촉해. 가용 가능한 인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긁어모아.”
......진심이야?
순간 이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믿을 수가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이성적이고 영민하기로 소문난 형이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말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금방 뒤쫓아 갈 거란 예상은 했다. 그래서 내켜하지 않는 사람에게 부득불 리버풀의 별장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던 거고. 하지만 설마 사병을 움직이겠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
다시 생각해도 믿기 어려웠다. 물론 사병 자체가 놀라운 것은 아니다. 세상에 영원한 내 편은 없다. 어제까지 간과 쓸개를 다 내어줄 것처럼 돈독하게 굴다가도,수틀리면 백년의 원수로 돌변 하는 게 귀족이란 작자들이 일삼는 짓이었다. 지위와 계급이 높을수록 남을 믿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자신의 가문과 목숨을 지키는 일은 전적으로 스스로의 능력에 달렸기에,말단 귀족들조차도 사병을 보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사병이 존재하는 것과 그것을 움직이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아무리 사병이라지만 절대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다. 위협을 느낀 타 가문과 불필요한 전쟁이 일어날 수 있을뿐더러 자칫 반역으로 낙인이 찍히기라도 했다가는 하루아침에 패가망신을 하게 될 요지가 다분했다.
그런데,그걸 알면서도 사병을 움직이겠다고? 거기다 용병까지 긁어모아서?
에드워드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진짜 미친 짓을 했구나. 아니,미친 짓은 이제 곧 형이 할 것 같지만 말릴 수가 없다는 게 함정이었다.
"알았어. 그렇게 할,......!"
불시에 또 역살이 잡혔다. 자연히 인상이 구겨졌지만 불평 따윈 할 수 없었다. 프레드릭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분노가 가득했다.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가 나직이 흘러나왔다.
“만약에”
“.......”
"만약에라도 무슨 일이 있다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다.”
그 말을 끝으로 프레드릭은 뒤도 안 돌아보고 밖으로 나갔다. 쾅! 또 한 번 방을 뒤흔드는 굉음이 이어졌다. 어안이 벙벙한 채 서 있던 에드워드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형의 뒤를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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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이 되지 못해서 송구스럽습니다.”
중년의 신사가 안절부절 못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프레드릭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추적 이틀째. 에드워드에게서 전해들은 정보를 바탕으로,그는 벤자민이 타고 있는 마차의 대략적인 속도를 고려해 지금쯤 가장 있을 가능성이 높은 마을들을 중심으로 수색을 펼쳐나갔다. 협조를 구하기는 쉬웠다. 앤드류의 도움으로 왕실 협조요청 공문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었다. 우수한 사병들은 프레드릭의 지휘 하에 일사분란하게 수색에 들어갔다. 하지만 결과는 시원찮았다. 교외의 작은 여관에서 하룻밤 머물렀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 외엔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을에 들르지 않은 게 확실합니까?”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마을은 규모가 작아서 외부인이 들어오면 금세 눈에 띕니다. 그런데 성문 관리인이 본 적이 없다고 하고, 모든 여관에 물어봐도 그런 차림새의 의부인은 받은 적이 없다고 하니 여긴 오시지 않은 게 확실합니다.”
프레드릭은 말없이 사내의 눈을 보았다. 두려워하지만 시선을 피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왕실의 협조요청 공문을 보고서도 거짓을 고할 만큼 어리석어 보이진 않았기에,마지못해 그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협조해주셔서 간사합니다.”
“아이고,아닙니다. 도움이 되지 못해서 그저 송구스럽습니다."
"혹시라도 이 초상화와 닮은 사람을 보게 되면 반드시 붙들어 놓으십시오. 물론 머리카락 하나 상해서는 안 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꼭 그리 하겠습니다.”
영주가 깊게 허리를 숙였다.
프레드릭은 날렵하게 말에 올라탔다. 벤자민이 없는 게 확실하니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버릴 필요가 없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동이 틀 무렵이지만 하늘은 어두컴컴했다. 밤새 달무리가 자욱하더니 아무래도 머잖아 비가 내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대충 식사를 끝내고 프레드릭은 이동을 시작했다. 찬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가지만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는다.
첫 날만 해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목적지와 경로를 알고 있으니 서둘러 그 뒤를 쫓으면 금방 벤자민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덧 하루가 또 흘러갔다. 막연했던 기대가 불안과 초조함으로 바뀌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좋게 생각하다가도 어느 순간 불쑥 최악의 상황이 떠올랐다.
만약 이대로 아이를 평생 만나지 못하게 된다면... 히트 사이클이 와서 다른 알파를 만나기라도 한다면.... 아니,그래도 상관 없다. 한 번만 더 아이를 품에 안을 수만 있다면 그 외의 것들은 어떻게 돼도 좋았다.
프레드릭은 이를 악물었다. 평생 아이의 그림자를 찾아 헤매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오전 내내 달린 우거진 숲을 벗어나자 초입마을이 눈에 들어 왔다. 프레드릭은 망설임 없이 마을 입구로 말을 몰았다. 벤자민이 숲을 지났다면 틀림없이 여기로 향했을 것이 분명했다.
"어서 오십시오, 러셀 경."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영주의 거처였다. 감격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환영인사에 프레드릭은 일단 안도했다. 수도에서 꽤 먼 곳이라 염려했는데 괜한 기우였던 모양이다. 태도를 보아하니 이번 에도 순순히 협조를 해줄 것 같았다. 다만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은 그 뒤에 서 있는 젊은 귀족의 존재였다. 시선을 눈치 첸 영주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불초한 제 아들입니다. 뭐하는 게냐. 어서 인사드리지 않고.”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프레드릭의 눈이 가늘어졌다. 알파. 조금 혼탁하긴 해도 금발인 것을 보니 보통은 아닌 듯하다. 아비는 평범해 보이는데, 약하긴 해도 우성의 피가 흐르고 있는 집안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먼 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영주가 눈치를 보며 프레드릭에게 물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그는 자랑스러운 아들과 함께 마을을 순회하고 있었다. 일 년에 한 번뿐인 장미축제. 환호하는 마을 주민들과 올해도 미어터질 만큼 찾아온 손님들을 보며 그는 연신 흐뭇하게 웃었다.
큰 길을 따라 절반 정도 마을을 돌았을까. 저택에서 헐레벌떡 하인이 달려와서는 깜짝 놀랄 소식을 전해주었다.
‘나으리,런던에서 높은 계급의 귀족이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당장 나으리를 뵙고 싶다고 청하십니다.’
'높은 계급의 귀족?’
'예. 러틀랜드 가문의 차기 당주인 프레드릭 러셀 경이라고 합니다.’
'그, 그게 정말인가?‘
영주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왕실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는 유서 깊은 가문. 그 귀한 가문의 장자가 이런 외지까지 어쩐 일이란 말인가. 정말 그가 맞냐고 되묻자 하인은 그렇다며 더 깊이 고개를 숙였고,영주는 서둘러 방향을 돌려 부랴부랴 저택으로 돌아갔다.
실제로 그를 본 순간 영주는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아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아름다운 미청년이지만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위압감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경외의 감정을 자아내도록 만들었다.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사람......말입니까?"
프레드릭은 대답 대신 옆에 선 병사에게 눈짓을 했다. 이동에 사용된 마차와 벤자민의 초상화가 그려진 종이가 펼쳐졌다.
"이 사람을 찾는 중입니다. 만약 이곳에 있다면 여관에 머무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일단 그쪽부터 조사해볼 예정입니다. 협조를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만."
"아이고,당연히 그래야지요. 원하신다면 제 사병들도 풀도록 하겠습니다.”
안심한 프레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굳은 얼굴로 서 있던 영주의 아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그게 정말이냐?”
영주가 놀란 눈으로 보았다. 정작 그 아들의 시선은 프레드릭을 향한 채였다.
"바로 조금 전에 얼굴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맞을 것 같습니다.”
영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안절부절 못하며 프레드릭의 눈치를 보다가 잔뜩 소리 죽여 아들을 책망했다.
"확신할 수 없다니,만약 아니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응?"
"아니요,맞을 겁니다.”
아비와 달리들은 당당한 모습이었다. 이어진 그의 말에 프레드릭은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러셀 경께서 찾으시는 게 아니라면 아마 제가 찾았을 테니 말입니다.”
그제야 프레드릭은 깨달았다. 초상화를 보여주며 협조요청을 했을 때 저 젊은 알파의 표정이 왜 그렇게 굳었는지를. 만약 프레드릭이 조금만 더 신분이 낮거나 그저 그런 알파였다면 아마 저 남자는 절대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질투와 분노로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지만 지금 쓸데없이 일을 크게 만드는 것은 현명하지 못했다. 프레드릭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탈 듯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며 한 자 한 자 천천히 말을 꺼냈다.
"영주의 명으로 봉쇄령부터 내리십시오."
저택에서 나온 프레드릭은 마을 입구 근처의 여관부터 샅샅이 뒤졌다. 자신들이 할 테니 부디 편안히 기다리시라는 영주의 애원이 있었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벤자민은 틀림없이 이 마을 어딘가에 있다. 이제야 겨우 찾게 되었는데 한가하게 저택에서 기다리기나 하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말이 채 멈춰서기도 전에 프레드릭은 훌쩍 땅으로 뛰어내렸다. 나무문을 밀어젖히며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주인장은 싹싹한 인사로 프레드릭을 맞았다. 눈이 마주치자 놀란 듯 급하게 숨을 들이킨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기에 프레드릭은 서둘러 용건을 입에 담았다.
"실례지만 말씀 좀 묻겠습니다.”
"예? 예예. 뭐라도 물어보십시오."
주인장이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왁자지껄하던 식당은 어느 순간 침묵이 가득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동일했다. 감탄과 경외,놀라움. 말이 필요 없었다. 눈에 보이는 외양만으로 도 방금 여관에 들어온 사람의 지위는 쉽게 짐작이 가능했다. 예사릅지 않은 분위기에 모두들 쉬쉬 하면서도 곁눈질로 문 쪽을 살폈다. 하나같이 귀를 종긋 세운 채였다.
"혹시 이렇게 생긴 사람 보셨습니까. 역마차를 탔을 거고 일행이 한 명 있습니다."
주인장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내밀어진 종이에 누군가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엇!"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프레드릭은 성급하게 그에게 물었다.
"혹시 본적이 있습니까?”
"예. 바로 어제 저녁에 이곳에 왔,아니 오셨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네네. 이래 돼도 손님들 얼굴은 잘 외우는 편이라 확실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 있습니까?”
"그,그건 잘....... 아,잘하면 아내가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보!"
주인장이 서둘러 아내를 불렀다. 한 발 떨어진 곳에서 불안하게 두 사람을 지켜보던 중년의 부인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당신,이 분 기억하고 있지? 응?”
초상화를 보는 아내에게 주인장이 조바심 섞인 음성으로 물었다. 그의 아내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기억하고 있어요. 안색이 너무 창백해서 걱정스러웠거든요.“
그 말에 프레드릭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굴이 창백하다 니,아무래도 몸 상태가 엉망인 모양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가 싹 텄다. 두 사람 모두 기억하고 있다니,정말로 이곳에 있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 프레드릭은 다급하게 부인에게 물었다.
"지금 이곳에 있습니까?”
"아뇨,제 딸아이와 함께 약국에 가셨어요.”
"약국이요?“
“네. 이제 곧 있으면 돌아오실 텐데...”
부인이 목을 길게 빼며 열린 문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절부절 못하는 부인을 진정시키며 프레드릭은 주인장에게 부탁했다.
"안내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저를 따라 오십시오.”
허둥지둥 걸음을 옮기는 주인장을 따라 프레드릭은 여관 밖으로 나섰다.
급하게 말을 몰아 약국에 도착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벤자민이 좀 전에 돌아갔다는 약사의 말이었다. 하지만 프레드릭은 실망하지 않았다. 다녀간 게 확실하니 아마 금방 만날 수 있을 것 이다. 대기 중인 병사들에게 약국 주변을 샅샅이 뒤질 것을 명했다. 프레드릭 역시 올 때와는 다른 길로 벤자민을 찾기 시작했다.
쏴아아-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비가 어느새 거센 빗줄기가 되어 쏟아 졌다. 프레드릭은 아직 벤자민을 찾지 못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안타까움에 심장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잠시 주춤했던 초조함이 또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문득 이럴 게 아니라 돌아가서 기다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감았던 눈을 다시 뗬다. 조급하게 굴어봤자 해결되는 것은 없다. 이제 곧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곧.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긴 순간. 프레드릭의 심장이 멈추었다.
.....아이였다. 진갈색 머리칼에 약간 마른 익숙한 뒷모습. 비에 온몸이 흠뻑 젖은 채 서 있는 사람은 틀림없는 벤자민이었다. 잠시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토록 찾아 헤맸는데,막상 눈앞에 보이니 머릿속이 멍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툭,쓰고 있던 우산이 땅으로 떨어졌다. 프레드릭은 홀린 듯이 벤자민을 향해 다가갔다. 가녀린 어깨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토록 갈망하던 눈동자를 드디어 마주볼 수 있게 되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다. 설마 꿈은 아닐까. 두려움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없이 바라보고 서 있자 잠시 후 아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프,프레드?”
그대로 아이의 몸을 힘껏 껴안았다. 꿈이 아니었다. 드디어,드디어 아이와 다시 만났다.
쿵. 쿵. 심장이 터져버릴 것처럼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환희로 온몸이 떨렸다. 죽었다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지금처럼 기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이를 껴안았다. 마주 안아오는 애틋한 손길을 느끼면서 프레드릭은 오직 한 가지만을 생각했다.
두 번 다시는 절대로 놓지 않겠다고.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