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화 (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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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조금은 더운 바람이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 거의 마지막까지 넘겼던 괘도를 첫 장으로 되돌리는 것으로 철학수업이 끝났다.

"질문은 없습니까,러셀 군?” 

"네,없습니다.”

"그럼 제가 물어보도록 하지요”

버릇처럼 허연 수염을 아래로 쓸어내리며 크라더스 경은 생각에 잠겼다. 그것도 잠시,얼굴에 주름이 가득하지만 눈빛만큼은 매처럼 날선 그의 시선이 맞은편에 앉은 유일한 제자에게로 향했다.

"오늘 러셸 군은 철학자 Thomas Hobbes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는 자연 상태를 야만으로 규정하면서,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자연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 방법이 무엇이었지요?”

"자연법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말해보세요.”

"자연법은 쉽게 말해서 이성이 발견한 원리입니다. 이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을 행하거나,또는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수단을 제거하는 것을 금지 당하게 됩니다. 제일의 자연법은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고,제 이의 자연법은 자연권을 포기하고 계약을 맺는 것,그리고 제 삼의 자연법은 그 규약을 준수하는 것입니다.”

막힘없이 이어지는 대답에 크라더스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차분하면서도 또박또박한 목소리,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바른 수업자세,거기다 중등과정의 학생들도 어려워하는 철학을 저토록 명료하게 정리해서 말할 수 있는 영특한 두뇌까지. 지금껏 수많은 학생들의 가정교사로서 그들을 지도 해왔지민.,러셸 경의 장남만큼 우수한 학생은 본 적이 없었다. 크라더스는 연신 흐뭇한 얼굴로 제자를 바라보았다. 올해로 겨우 열네 살. 내년이 되어야 중등학교 입학이 가능한 나이이지만 도저히 열네 살로는 보이지 않는다. 어딘지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 소년은,그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과 많은 부분 에서 달랐다. 완벽한 블론드 헤어에 호수보다 맑고 깨끗한 푸른 눈동자. 소년의 외모는 전형적인 영국 귀족의 특색을 빠짐없이 지니고 있었고,실제로도 엄청난 명망과 세력을 지닌 러틀랜드가의 장남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보다 소년을 가장 빛나게 만 들어주는 사실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눈앞의 소년이 대륙 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강력한 우성알파라는 사실이었다. 알파는 태생부터가 남다르다. 모든 영역에서 베타를 뛰어넘는 월등한 기량과 능력을 갖고 태어나게 된다. 그 중에서도 정점을 이루는 우성알파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그들은 국가적으로 주목을 받는 신의 선물이라 여겨졌다.

일반 평민들에 비해서 귀족의 혼인은 이른 편이었다. 그렇다보니 벌써부터 소년에게는 오메가인 자녀를 둔 자국 내 귀족들의 컨택은 물론이고,바로 며칠 전에는 프로이센의 국왕이 친히 그의 가문에 혼인서신을 보내왔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크라더스는 왠지 그 소문이 사실일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만큼 소년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아직 어린 지금도 이 정도인 데, 앞으로 성인이 된다면 얼마나 더 대단하게 변할지는 예측조차 어려웠다.

"잘 대답했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는 국가와 통치자에 대해서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미리 책을 읽어오는 것 잊지 마세요.”

"네. 훌륭하신 가르침 감사합니다.”

정중하게 고개 숙여 하는 인사에 크라더스는 또 한 번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도련님! 도련님!”

정원 사이로 난 길을 걷던 프레드릭은 등 뒤의 부름을 듣고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섰다. 늙은 집사가 헐레벌떡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도련님, 조금 전에 막내 왕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래?”

프레드릭의 얼굴에 반가움의 미소가 번졌다. 지겨운 철학수업 후에 찾아온 꿀 같은 휴식시간이지만 왕자의 방문은 그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것이었다.

"알려줘서 고마워. 사라 부인에게 오늘 티타임은 됐다고 전해줘.“

"네,도련님."

프레드릭은 다시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조금 더 빨라진 걸음이었지만 역시 흐트러짐은 보이지 않았다.

"여어,프레드."

응접실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가 손을 흔들었다. 현 국왕의 넷째 아들이자 먼 친척뻘 되는 앤드류 튜더였다. 프레드릭은 그의 앞에 한 쪽 무릎을 세워 꿇어앉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왕자님.” 

“어서 일어나."

앤드류가 직접 포트를 들고 홍차를 따라주었다.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다른 한 손으로는 뚜껑을 가벼이 누르며 차를 따르는 모습에서 왕족 특유의 기품이 느껴진다. 형제들 중에서 유달리 장난기가 많은 편이지만,예를 갖춰야 하는 곳에서는 그 품위를 잃지 않는 사람다웠다.

"감사합니다.”

예의바른 인사에 앤드류는 웃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진한 홍차 특유의 향이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그 꼬장꼬장한 할아범 수업을 다 듣고 오다니, 너도 참 대단해. 난 매번 도망치기에 급급했는데 말이지.”

어깨를 으쓱이며 하는 앤드류의 말에 프레드릭은 살짝 미소 지었다. 지금 프레드릭의 가정교사를 역임하고 있는 크라더스 경은 이년 전만 해도 왕실의 막내 왕자인 앤드류를 가르쳤었다.

"축하드릴 소식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벌써 여기까지 소문이 난 거야?”

앤드류는 쑥스러운 듯 손바닥으로 턱을 문질렀다. 하지만 입가엔 어느새 작은 미소가 맴돌고 있었다.

현 국왕의 자녀들 중에서 막내, 거기다 바로 위인 셋째 왕자와 나이 터울이 꽤 있는 탓에, 앤드류는 여느 왕족들에 비해 자유분방한 성향이 강했다. 그것은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쾌활하고 장난기 많은 성격을 지닌 앤드류는 또래의 왕족과 귀족 소년들 사이에서 아주 인기가 좋았다. 마찬가지로 숙녀들에게 서도 그는 언제나 선망의 대상이었다. 간 혹 파티가 있을 때면 수줍어하는 그녀들에게 다가가서 먼저 춤을 청한다거나,왕궁에서 마주치는 일이 있으면 항상 웃으며 그녀들의 이름을 불러주곤 했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친절하고, 누구에게나 상냥하다. 이것이 바로 앤드류에 대한 세간의 평가였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의 해석이 가능했다. 모두에게 친절하기에 예외나 특별함은 없다. 수많은 오메가들이 알파인 그에게 간택받기를 원했지만,앤드류는 변함없이 모두에게 공평하고 모두에게 상냥했다. 국왕부부도 처음엔 그런 앤드류의 성품을 기특하게 여겼다. 예를 갖추어 상대방을 대하는 것은,영국의 귀족 남성이라면 반드시 지녀야 할 덕목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나자 이야기는 달라졌다. 일찌감치 제 짝을 찾은 형제들과 달리 앤드류는 소년기를 지날 무렵이 되어도 혼인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모습이었다. 날마다 서신이 날아들었지만 아직은 이르다는 말로 피해가기를 수차례.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인연은 존재했다. 올해 초,열일곱 번째 생일을 맞이한 앤드류를 위해서 왕궁에서는 큰 파티가 열렸다. 일차적인 목표는 탄생 축하연이지만,그 이면에는 아끼는 막내아들의 짝을 찾기 위헌. 왕비의 계산이 숨어있다는 사실은 귀족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었다.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성대한 파티 이후에 이어진 무도회. 그곳에서 앤드류는 마침내 자신의 짝을 찾았다. 상대는 다소 의외였다. 모두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생각하고 있던,몇 년 전부터 암암리에 압력을 가하던 베른 경의 여동생도,막대한 부로 영국 왕실을 받쳐주 는 월리엄 경의 아들도 아니었다. 그날 앤드류의 선택을 받은 아가씨는 바로 애니 프린스턴 양이었다.

그녀의 집안은 빈말로라도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수도에 서도 한참을 떨어진 한적한 시골마을. 비록 작위가 있긴 해도 실 생활은 농민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늙은 남작의 외동딸을,앤드류는 자신의 평생 배필로 선택했다. 처음 그녀에게 춤을 요청 했을 때 동석한 귀족들의 생각은 하나같이 동일했다. 제 버릇 남 못주고 또 저러는구나. 하지만 한 번의 춤이 끝나고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손을 내민 순간 무도회장 곳곳에서 술렁거림이 새어나왔다. 연속된 두 번의 춤 요청.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뿐 이었다. 당신에게 제 마음을 드리고 싶습니다. 일반 무도회였다면 그냥 왕자의 변덕이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그날의 무도회는 달랐다. 생일 축하연이자,왕자비를 간택하는 중요한 파티의 무도회. 그곳에서 앤드류는 한 아가씨에게 두 번 무릎을 꿇으며 함께 춤을 출 것을 요청했고,음악이 끝나는 순간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술렁임이 소란으로 바뀌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기대로 들떠있던 많은 숙녀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본 사람처럼 넣을 잃었다. 자신의 가문에서 왕자비가 나올 것을 기대하던 일부 귀족들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두 사람이 모이면 없던 소문을 만들어내는 것도 어렵지 않다. 혼인에 관심이 없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아마 엄청난 저울질을 하고 있을 거라며 앤드류를 험담 하던 사람들은 특히나 더 분노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비천 한 가문,별 볼일 없는 평범한 아가씨. 그녀의 어떤 부분이 앤드류의 마음을 움직였는지,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날의 여운은 길었다. 왕의 공식선언으로 결국 그 아가씨는 앤드류의 약혼녀로 인정받았지만,아직도 곱지 못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원로 귀족들이 많이 있었다.

프레드릭 역시 그 소문을 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막내 왕자와 사이가 돈독했기에 프레드릭은 앤드류의 자유분방한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연애나 결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늘 바람처럼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사람이었는데,갑작스런 프러포즈와 결혼식은 프레드릭이 생각하기에도 다소 의외였다.

"너도 얼른 짝을 정해야지.”

부드러운 시선이 프레드릭을 향했다. 온화한 미소와 분위기. 지금 앤드류가 누굴 생각하며 하는 말인지는 알기 쉬웠다. 문득 프레드릭은 궁금해졌다.

"왕자님.”

“음?”

"외람되지만 한 가지만 여쭤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지."

앤드류가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프레드릭은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 그에게 물었다.

"그 분을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하아?”

앤드류는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설마 프레드릭에게서 듣게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해본 질문이었다.

소년의 표정은 진중했다.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인지,감빠른 앤드류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다시 웃음 띤 얼굴로 대답했다.

"흠....... 네가 뭘 말하는지는 알겠어. 누구보다 영특하니까." 

왕족이나 귀족들의 혼인은 단순한 개인 간의 결합이 아니다. 왕실을 생각한다면 충성된 귀족의 자제들 혹은 우호관계에 있는 타국의 자제들과 결혼을 하는 것이 왕자로서의 암묵적인 의무였다. 그런데 어째서 그 모든 것들을 져버리고 지금의 약혼녀를 선택했는지,프레드릭은 묻고 있었다.

"그런데 프레드.”

시종일관 짓던 미소를 거두며 앤드류는 진지한 눈으로 프레드릭을 보았다. “

"나는 절대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

“......”

"첫인상은 영원하다는 말이 있지. 그리고 첫사랑도 영원하다는 말도. 내게 있어 그녀는 그 두 가지 의미의 처음을 다 가져간 사람이야. 그 짧은 순간에 나는 그녀에게 반했고,눈이 마주쳤을 때 심장이 멎는 것 같았어. .....흠,이 이상은 어떻게 말로 설명 할 방법이 없네.”

실컷 이야기해놓고 뒤늦게 찾아오는 쑥스러움에 앤드류는 괜한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자신의 행운에 대해 자랑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너도 얼마 안 있어 오메가를 반려로 맞이해야겠지. 좋은 가문,아름다운 외모, 나긋하고 순종격인 성격. 하지만 그 모든 조건을 포기하는 일이 있더라도,한 눈에 네 마음을 빼앗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어. 바로 나처럼.”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에 프레드릭은 가만히 웃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충분히 이해했디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성 적이지는 못해서,전심으로 동조하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며칠째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야외수업은 물론이고, 의욕 충만한 튜터(tutor)의 발을 묶어버릴 정도로 퍼붓는 폭우였다. 그동안 프레드릭은 줄곧 서고에서 시간을 보냈다. 눈길 가는 역사서를 골라 천천히 정독을 시작했고,오래된 책 내음을 맡으며 홈뻑 빠지는 동안 비는 점점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 날 오후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였다. 간단히 티타임을 가지고 2층 서고로 향하는데 늘 조용하던 저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모르는 척 지나치기엔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하인들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마침 아버지의 방에서 나오는 노련한 집사를 보고 프레드릭은 그를 불렀다.

"아,큰 도련님.”

프레드릭을 알아본 노 집사가 서둘러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안색은 역시나 썩 좋지를 못했다. 

"아래층이 소란스러운데.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그게... 별관에서 추락사고가 났다고 합니다.” 

"추락?“

프레드릭이 살짝 눈썹을 올리며 되물었다. 노 집사는 예, 하고 설명을 이어갔다.

"폭우로 꼭대기 층 방에 물이 새어서 오늘 수리공을 불러왔습니다. 비가 많이 잦아들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순간 미끄러져서 떨어졌다고 합니다.”

"상태는 어떤데.” 

"그게......“

잠시 말을 멈춘 노 집사가 침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서둘러 옮기고 공작님께 말씀드렸지만,도착하시기도 전에 이미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프레드릭의 안색 또한 굳어겼다. 우성 알파들에게서 나타나는 다양한 능력들. 그 중 러틀랜드 가문의 알파들은 대대로 강력한 치유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사람의 회복이나 치유를 도와주는 작용을 할뿐,제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이미 죽은 자를 다시 되살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금만 빨랐더라도......‘

무고한 자의 죽음에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저택에서 사고가 일어난 것도 유감스러운데,하필이면 목숨까지 잃게 되다니. 한숨을 삼키며 프레드릭은 다시 집사에게 물었다.

"가족에게 연락은 닿았어?”

"예,도련님. 지금 아이가 저택에 와 있습니다." 

"아이?”

"네. 부인과는 일찍 사별했고,슬하에 아들이 한 명 있다고 합니다. 언뜻 보니까 아직 어린 아이던데... 가여워서 큰일입니다.”

“......그렇군.”

"혹시 더 필요하신 것 있으십니까?" 

"아니,괜찮아. 그만 가 봐도 좋아.” 

"네,도련님.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두 손을 모으며 인사한 집사는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왠지 맥이 빠져서 더 이상은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프레드릭 역시 발걸음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도련님,얼른 서두르셔야 합니다.”

노 집사가 안달 난 얼굴로 재촉했다. 받침대에 놓인 붉은색 타이를 보며 프레드릭은 쓰게 웃었다.

갓난아기 때부터 프레드릭을 보살펴준 늙은 집사는 이제 곧 있으면 정년퇴임을 하고 저택을 떠날 예정이었다. 자유를 얻게 되면 기뻐할 줄 알았건만,프레드릭의 생각과 달리 집사는 오히려 여느 때보다 의욕이 충만했다. 이제 마지막임을 알기 때문인지,그렇잖아도 깐깐하던 안목이 한층 더 높아져서는 눈에 불을 켜고 마지막 소임에 집중했다.

평소엔 주인의 취향을 존중해서 단정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의복을 잘만 골라서 가지고 오더니,언제부턴가 색감과 장식이 화려한 의복에 장신구까지 착용할 것을 권유하는 바람에 프레드릭은 꽤나 난감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어디서 났는지 최고급 생사를 염색해 만든 타이를 꼭 묶어야한다는 집사의 강력한 주장에,프레드릭은 할 수 없이 팔짱을 낀 채 목을 살짝 들어 주었다.

"역시 제 눈은 틀리지 않습니다.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꼼꼼히 매듭을 묶은 집사가 천천히 손을 떼었다. 늘 근엄하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아름답고 출중한 외모로 소문이 자자했던 자신의 주인은 크면 클수록 더욱더 얼굴에서 빛이 났다. 아직은 모친처럼 아름답다는 인상이 강하지만,이제 곧 그 아름다움에 고귀함과 강인함,그리고 알파 특유의 성적인 매력까지 더해져서 최고의 남성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 자명했다. 

"가시지요.“

프레드릭은 군말 없이 뒤돌아섰다. 여성의 치마폭 같은 화려한 상의가 지금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노 집사의 마지막 즐거움을 빼앗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어디로 가십니까?”

딱 붙어 따라오던 집사가 당황한 목소리로 프레드릭에게 물었다. 늘 가던 방향이 아닌 반대편으로 걷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집사의 행동에 프레드릭은 태연히 웃으며 대답 했다.

"이쪽이 더 빠르니까. 가서 후문에 마차를 대 달라고 전해줘." 

"아이고 도련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요. 거긴 하인들이 드나드는 문인데 어찌 그리로 가시는 겁니까.”

"괜찮으니까 어서."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명령했다. 결국 집사는 한숨을 쉬면서도 재빠르게 방향을 틀어 마구간으로 향했다.

프레드릭은 작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하늘이 참 맑았다.

내리쬐는 햇빛을 보니 며칠간 쉽 없이 내린 비가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정원의 흙냄새와 짙은 장미 향기가 어우러져 날씨만큼이나 상쾌함을 자아냈다.

"기다리고 계셨군요.”

집사가 반색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좁은 흙길을 따라 걷기 시작하는데 문득 프레드릭의 눈에 누군가가 비쳤다.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집사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도련님?”

"저기. 아무래도 부시종장 같은데”

집사의 시선이 프레드릭과 같은 곳을 향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대답했다.

"네,도련님. 맞는 것 같습니다.” 

"뒤에 따라가는 저 아이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프레드릭이 물었다. 그의 발을 멈추게 한 것은 부시종장이 아니었다. 조금은 커다란 짐 보따리를 안아든,종종걸음으로 부시종장 뒤를 따라가는 작은 아이의 존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아, 아마 그 아이인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저택에서 추락사한 수리공의 들이 오늘부터 저택에서 일하기로 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집사가 말을 하는 동안에도 프레드릭의 시선은 계속 한 곳만을 향했다. 조금 짙은 갈색머리. 하얀색의 상의와 평민 아이들이 즐겨 입는 편안한 반바지. 특별함은 없었다.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저 또래 아이들의 복장이었지만,희한하게도 그는 아이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발을 움직인 건 자의가 아니었다. 얼굴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순간,프레드릭은 이미 그 아이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집사가 당황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지만 움직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 때,부지런히 움직이던 아이의 발걸음 또한 멈추었다. 쏴아. 여름을 닮은 바람이 두 사람을 스치며 지나갔다. 남아있던 장미꽃잎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아이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프레드릭은 세상이 멈추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말갛고 선한 눈망울,그것으로 충분했다. 마주친 시선만으로 프레드릭의 시간은 멈추었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그녀에게 반했고,눈이 마주쳤을 때 심장이 멎는 것 같았어.’

어디선가 앤드류의 목소리가 어지럽게 날아들었다. 바로 이 순간이었을까. 약혼녀를 처음 보았을 때 앤드류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프레드릭의 발이 몇 걸음 더 움직였다.

아이의 얼굴이 조금 더 가까이 눈에 들어왔다. 깜빡이는 커다란 회색 눈망울, 작고 앙증맞은 코,놀란 듯 살짝 벌어져있는진 분홍색 입술. 허리 숙여 얼굴을 가까이 하며 프레드릭은 모두가 입을 모아 칭송하는 미소를 지은 채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반가워.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 

"베,벤자민. 벤자민 스미스입니다.”

“좋은 이름이네. 괜찮다면 앞으로 내 발렛으로 일해보지 않을래?”

"큰 도련님!"

어느새 다가온 노 집사가 경악스럽게 외쳤다. 말없이 뒤를 돌아보자 흐읍, 하며 서둘러 입을 다문다. 아이의 표정 역시 집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말갛고 순진한 얼굴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프레드릭을 올려다본다.

“어, 그, 그게......”

망설이는 음성에 애가 타들어갔다. 생전 처음 느끼는 초조함과 긴장감에 입이 바싹 말랐지만, 용케도 프레드릭은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 아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흘끗,아이의 시선이 프례드릭의 뒤편을 향했다. 집사가 방해하는 건가. 언짢은 얼굴로 뒤돌아보려는 순간, 작은 미성이 가느다랗게 흘러나왔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인가요?” 

"물론이지.”

대답을 하면서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동그랗고 사랑스러운 눈망울을 바라보며 프레드릭은 아이를 향해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저,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가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내민 손이 살짝 민망해졌다, 귀여움에 웃으며 손을 거두려는 찰나,뒤늦게 그 손을 본 아이가 서둘러 손을 맞잡았다. 이번에야말로 프레드릭은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분명 열 살 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한 살 어린 에드워드보다 작아 보이는 두 손을 내밀어 덥석 프레드릭의 손을 붙잡았다. 아이답게 뜨거운 체온에 심장이 간질간질하다.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준 후에 프레드릭은 뒤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모임은못 간다고 전해줘.”

"예?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친구 분들께서 다들 기다리고 계실 텐데요.”

"다음에 맛있는 차를 대접하겠다고 해줘. 사라 부인 특제 쿠키도 함께.”

"하지만 도련님......”

집사의 볼멘소리를 뒤로 한 채 프레드릭은 다시 앞을 보았다. 깜빡깜빡. 눈꺼풀을 깜짝이는 모습조차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당장 손을 내밀어 생크림처럼 하얀 볼을 쓰다듬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프레드릭은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안내해줄게.”

아이는 망설이는 얼굴로 프레드릭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따스한 체온이 프레드릭의 손을 꼭 붙잡아왔다. 함께 걷기 시작한 두 사람 주위로 또 한 번 산들거리는 바람이 스치듯 불며  지나갔다. 여름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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