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출발은 순조로웠다. 평평한 흙길이라 도로의 상태도 좋았고 이튿날까지는 근처 작은 여관에서 머무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다음날 정오에 마차는 인적 드문 길로 접어들었고, 오후부터는 줄곧 울퉁불퉁한 숲길을 달려야만 했다. 숙소는 당연히 없었다. 달려도 달려도 보이는 것이라곤 울창한 나무와 흙길이 전부였다. 결국 오늘밤은 숲에서 보내기로 했다. 데니스가 모닥불을 지피는 사이에 나는 줄곧 내가 앉아왔던 두툼한 진녹색 쿠션을 젖히고 안에서 모포를 꺼냈다. 앉는 용도만 가진 줄 알았던 의자는 그 밑에 수납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공기가 찬데.”
하늘을 올려다보며 데니스가 중얼거렸다. 나 역시 그 말에 동의했다. 낮에는 잘 몰랐는데, 밤이 되니 해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그렇다고 마차 안에서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거의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잘 때도 그렇게 잤다간 온몸이 그 상태로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 누워서 자기엔 공간이 너무 협소하고.
어느 쪽이든 예상보다 열악한 환경이었기에 밤이 되어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쏴아아아- 무성한 잎들이 서로 맞부딪치며 스산한 소리를 자아낸다. 찬바람에 몸이 잔뜩 웅크려졌다. 도저히 땅바닥에 누워 잠을 잘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모포로 몸을 둘둘 감싼 뒤에 적당한 나무에 기대앉았다.
“괜찮아?”
“응.”
“이럴 줄 알았으면 모포를 좀 더 많이 챙겨오는 건데.”
후회인지 안타까움인지 모를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면의 의도는 전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내 준비는 그야말로 엉성함 그 자체였다는 것을 숲에 들어오고 나서야 알았다. 어딘가로 멀리 떠난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세세한 준비가 필요했다. 우리가 먹을 음식도, 말들에게 먹일 식량도. 성냥과 짚더미, 그리고 지금 둘이서 하나씩 덮고 있는 모포도. 그 어느 것도 내 손길이 닿은 것은 없다. 전부 데니스가 준비해온 것들이었다.
“미안해.”
입 밖으로 말을 꺼내니 더욱 미안해졌다. “뭐가 미안한데?” 이어진 질문에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데니스는 씩 웃고 있었다.
“으음……. 네가 불안해할까 봐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말이지. 사실 리버풀로 가는 건 나도 이번이 처음이야.”
“…….”
“엇, 갑자기 그렇게 굳어지면 곤란한데.”
“응? 아냐 아냐.”
절대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흔들자 데니스는 좀 더 깊어진 웃음을 보였다.
“요양 차 가는 걸음이라 마음이 무겁지만……. 너랑 같이 여행한다고 생각하면서 최대한 지금 이 시간을 즐겁게 보내고 싶어. 그러니까 미안하다거나 그런 말 하지 마. 물론 걱정할 필요도 전혀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별장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응. 고마워.”
“춥다. 얼른 자자.”
부르르 몸을 떤 데니스가 곧 나무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숨소리가 들려온 것은 금방이었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다가 나 역시 어느 순간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데니스는 벌써부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을 도왔다. 말들에게 먹이를 주는 동안 나는 모포를 정리해 제자리에 넣고 바구니에서 빵과 말린 과일을 꺼냈다.
“괜찮아?”
빵을 먹다 말고 데니스가 물어왔다. 염려 섞인 질문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실상은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온몸이 으슬으슬 춥고 머리가 아프다. 몸의 변화로 인한 증상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살짝 코가 막힌 느낌도 드는 게 아무래도 감기기운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래저래 큰일이었다. 억지로 먹던 빵을 내려놓으며 나는 데니스에게 물었다.
“언제쯤이면 숲에서 나갈 수 있을까?”
인적 없는 숲이라 마음이 더욱 불안했다. 리버풀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일단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만 들어가도 훨씬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으음……. 어디 보자.”
데니스가 빵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반듯하게 접힌 종이를 펴자 지도가 나타났다.
“지금 우리가 지나고 있는 곳이 옥스퍼드 근처에 있는 숲이거든. 근데 지도상에 표시가 굉장히 크게 되어 있어. 대충 짐작하면 적어도 오늘 밤에나 숲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적어도 오늘밤. 생각보다 긴 시간에 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몸이 많이 안 좋아?”
“……아니, 버틸 만 해.”
“그런 것 치곤 안색이 영 안 좋은데…….”
“정말 괜찮아.”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는 건 사양이었다. 하지만 영 내가 못 미더웠는지 데니스는 좀처럼 걱정 어린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마차를 좀 더 빨리 몰아도 괜찮겠어?”
“가능해?”
“어. 혹시 네 몸에 부담 갈까봐 적당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거든. 너만 괜찮으면 좀 더 빨리 가는 것도 가능해.”
“그럼 부탁 좀 할게.”
데니스의 말마따나 장기간 마차를 타는 것은 예상 외로 힘들었다. 미적거리며 느리게 가나 속도를 내 빠르게 가나 힘든 게 마찬가지라면, 1분이라도 빨리 숲을 벗어나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더 안 먹어?”
“응. 배불러.”
“갈수록 식사량도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 진짜 걱정인데.”
“입맛이 없어서 그래. 나중에 점심 때 많이 먹을게.”
물병의 물로 간단히 목을 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이랴!” 하는 힘찬 구령소리와 함께 다시 마차가 출발했다. 커튼을 열었지만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창밖을 보는 건 어제 하루로 충분했다. 한동안 같은 풍경이 반복될 것을 알기에 나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덜컹덜컹, 규칙적인 흔들림 속에서 기절하듯 다시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뜬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쿵! 갑자기 심장이 철렁하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눈이 번쩍 뜨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제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있었는데 갑자기 온몸의 피가 급격히 돌며 현기증이 일었다. 내뱉는 숨은 뜨겁기 그지없었다. 동반된 지독한 갈증을 느낀 순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잠시 주춤했던 변화가 또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을.
떨리는 손으로 허겁지겁 가방을 열었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에드워드로 인해서 이제 내 몸에서 오메가 페로몬이 방출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적이 드문 산길이긴 하지만, 행여 지나가는 알파라도 있어 내 냄새를 맡기라도 했다간 큰일이었다.
한 알을 꺼내 입에 넣고 급하게 물을 들이켰다. 덜컹거리는 흔들림에 입가며 옷이 물로 축축하게 젖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가라앉아라. 제발 가라앉아.
정신없이 한 가지 생각만을 반복했다. 거의 주문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이렇게 길 줄은 몰랐다. 좀 더 먹어야 하나.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 심장박동에 참지 못하고 또 한 번 약통을 열었다. 이번엔 두 알을 동시에 삼켰다. 낱개로 치면 하루 일당을 훨씬 웃도는 가격의 약이었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한 통을 다 먹으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휘몰아치는 긴장 속에서 다시 한 번 기다림의 시간이 이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맥이 탁 풀리는 느낌과 함께 온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침내 약이 효과를 발휘한 모양이었다.
“하아…….”
긴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몸은 진정됐지만 정신적 혼란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히트 사이클이 찾아오기 전까진 계속 이런 일이 반복될 텐……. 아니, 생각하지 말자.
언제 또 있을지 모를 일로 끝없는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사양이었다. 선득한 느낌을 떨쳐내려 일부러 힘주어 두 눈을 떴다. 촤악- 줄곧 빛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열어젖혔다. 창밖엔 한낮의 밝은 햇살이 가득했다.
식사를 위해 잠시 멈춰선 때를 제외하면 마차는 그야말로 쉼 없이 달렸다. 나중엔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지만 불평을 할 순 없었다. 잠이 들고 깨어나고를 반복하는데 문득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깜빡깜빡, 정신을 차리려 눈꺼풀을 깜빡였다. 아직 숲인지 밖을 내다보려는데 데니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벤, 자?”
“아니.”
“그럼 문 좀 열게.”
열린 문틈 사이로 저물어가는 오후의 햇살이 비쳐 들어왔다. 붉은 해무리와 한데 어우러진 노을을 보니 얼마 안 있어 저녁이 될 것 같았다.
“곧 갈림길이 시작되는데 좁은 길로 둘러가도 될까?”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쪽에 개울이 있어서 말에게 물을 먹일 수가 있거든.”
“그래?”
“어. 근데 둘러간다곤 해도 금방 길이 하나로 합쳐져서 원래 가던 방향으로 쭉 갈 수 있어.”
“그럼 그쪽으로 가자. 나도 좀 쉬고 싶었거든.”
“질됐네. 그럼 다시 출발할게.”
문이 닫히며 금방 힘찬 구령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다시 멈춰 섰다. 내려도 돼? 큰 목소리로 묻자 데니스가 그렇다고 대답했고, 나는 수통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갔다.
데니스는 마차에 이어진 매듭을 푼 말들을 데리고 개울가로 다가갔다. 말들이 물을 마시는 동안 데니스는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짙은 이끼가 깔린 땅을 지나서 나도 녀석의 근처에 쭈그리고 앉았다. 물길을 따라 작은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물살에 수통을 대고 깨끗한 물을 한가득 받았다.
“어으, 시원하다.”
목까지 구석구석 닦은 데니스가 손을 탈탈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엇. 그러다 문득 녀석의 시선이 어딘가에 박혔다. 녀석의 눈길을 따라 나도 고개를 돌렸다. 작고 빨간, 잘 익은 산딸기 열매가 지천에 널린 게 보였다. 벌떡,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열매 두어 개를 따더니 씻지도 않고 냉큼 입에 넣어버렸다.
“괜찮아?”
울리는 목울대를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데니스의 얼굴엔 화색이 만연했다.
“완전 잘 익었어. 담을 수 있는 통 좀 가지고 와야겠다.”
삐딱하니 기울어진 채 세워져있는 마차로 다가간 녀석이 문을 열고 주섬주섬 안을 뒤적였다. 다시 산딸기로 시선을 옮겼다. 이미 통까지 가지러 간 마당에 그냥 빈손으로 갈 리가 없었기에, 먼저 열매를 따기 시작했다.
“으차, 다 됐다.”
굵은 쇠고리가 말의 목에 다시 채워졌다. 준비가 끝난 것을 확인하고 다시 마차에 몸을 실었다. 이윽고 물이 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몸이 심하게 덜컹거렸다. 무사히 개울을 가로지른 마차는 좁은 숲길을 따라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적당한 속도로 달리던 마차가 갑자기 급격히 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일 있나?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에 급기야는 완전히 멈춰서 버렸다. 심상찮음을 느끼고 데니스를 부르려는 순간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벤 어떡하지?”
데니스의 얼굴엔 초조함이 가득했다. 조금 전 산딸기를 따며 기뻐했던 모습은 한 톨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
“땅이 울리는 소리?”
되묻는 내 말에 녀석이 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 두두두두 하고 땅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 이건 내 예상이긴 한데, 또 다른 갈림길로 큰 무리가 다가오는 것 같아.”
“그런…….”
아연한 표정으로 녀석을 보았다. 이내 우리 둘 사이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숨죽인 채 촉각을 곤두세웠다. 얼마 안 있어 녀석의 말대로 뭔가 땅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희미한 그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하고 커지기 시작했다.
대체 누구지. 혹시 도적이기라도 하면…….
안절부절 못하다가 데니스와 눈이 딱 마주쳤다.
“벤, 가방 챙겨.”
“응?”
“얼른 가방 챙기라고.”
다급히 속삭이는 목소리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짐가방을 챙겨들었다. 녀석의 손이 곧장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데니스 또한 마부석 옆에 있던 자신의 가방을 낚아채듯이 들고서는 근방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일단 몸부터 숨기자.”
납작 엎드리는 녀석을 따라서 나도 최대한 몸을 땅에 바짝 붙였다. 그러다 문득 뭔가가 떠올라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차는?”
“괜찮아. 이쪽 길이 지형이 낮은데다가 나무가 많이 우거져서 저쪽에선 아마 안 보일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일단 좀 숨어있자.”
마지막은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였다. 그 사이 말발굽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전신을 사로잡는 긴장감 속에서 간신히 숨만 내쉬었다.
마치 거대한 북을 치는 것 같은 소리가 조용한 숲을 뒤흔들었다. 땅에 맞닿아있는 전신이 울릴 정도였다.
왔다!
잠시 후, 빽빽한 수풀 너머로 길쭉한 말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뿌옇게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때부턴 숨도 쉴 수 없었다. 더는 앞을 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거의 흙에 파묻다시피 고개를 숙였다. 등 뒤가 식은땀으로 젖어들었다.
“이랴!”
머리 바로 위, 지척에서 굵직한 구령소리가 들려왔다. 긴장에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말발굽 소리는 한참동안 계속 이어졌고, 그 소리가 아련해질 때쯤에야 줄곧 참았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아…….’
심장이 뻐근하니 아팠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이마도 온통 식은땀 투성인 걸 스스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질끈 감았던 두 눈을 떴다. 그리고 옆을 보는데, 뭔가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녀석은 멍한 표정으로 방금 전 무리가 사라져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데니스?”
의아함에 이름을 불렀다. 그럼에도 반응이 없어서 손을 얼굴 앞에 대고 흔들며 다시 한 번 녀석을 불렀다. 그제야 녀석이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벤.”
“응?”
“좀 전에 도련님이 지나가셨어.”
“뭐?”
나도 모르게 녀석에게 되물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한 번 얼굴을 쳐다보자 그제야 갑자기 혈색을 되찾은 사람처럼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녀석이 흥분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누군지 궁금해서 계속 수풀 사이로 주시하고 있었거든. 선두에 백마가 서 있고 그 뒤로 꽤 많은 일행이 있었는데……. 그 선두에 있던 사람이 바로 큰 도련님이셨어.”
잠시 말없이 녀석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말도 안 돼. 네가 잘못 본 거겠지.”
“아냐! 진짜야. 그 키에 그 몸에. 거기다 그 금발! 멀리서 봐도 머리카락이 금색이라서 뚫어져라 얼굴을 봤는데 진짜 우리 도련님이셨어. 뭣보다 말도 백마였고. 더 확실한 증거는, 병사들 의복에 있는 문양이 러틀랜드 가문의 상징하고 똑같았어.”
“……!”
이번에야말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말 그대로 각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은 절대 비슷하거나 겹칠 수가 없다. 나보다 더 오래 저택에서 근무한 녀석이 설마 문양을 착각했을 리는 없을 텐데. 그렇다면 정말로…….
나도 모르게 숲길로 시선이 향했다.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가버린 텅 빈 길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잠잠하기만 했다.
“아고고 허리야. 개구리처럼 바짝 엎드려 있었더니 온몸이 다 아프네.”
벌떡 일어선 데니스가 허리를 뒤로 젖히며 굳어있던 몸을 풀었다. 나 역시 뒤늦게 몸을 일으켜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었다. 하지만 시선은 당연한 듯이 숲길로 다시 향했다.
정말, 정말 프레드릭이었던 걸까.
뒤늦은 아쉬움에 미련이 자꾸만 생겨났다. 나도 눈을 뜨고 있을 걸. 그랬다면, 어쩌면 정말로 프레드릭의 얼굴을 잠시나마 한 번 더 볼 수 있었을 텐데.
“런던으로 돌아가시는 길인가 봐.”
“응?”
“도련님 말이야. 곧장 가다가 왼쪽 방향으로 틀면 런던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오거든.”
“……그래?”
“어. 근데 나 사실 깜짝 놀라서 고갤 치켜들었는데 수풀에 가려져서 못 보셨나봐. 쩝, 괜히 아쉽네.”
데니스는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그런데 그때 뒤쪽 저만치에서 푸르륵, 푹, 하는 투레질 소리가 들렸다. 아차, 우리 마차. 뒤돌아본 녀석이 외치며 황급히 짐 가방을 들고 뛰어갔다.
“벤, 어서 와!”
재촉하는 목소리에 나 역시 가방을 챙겨들고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미련은 좀처럼 사라지질 않아서, 걷다가도 두어 번 뒤를 돌아보고 나서야 마차에 이를 수가 있었다.
숲을 빠져나온 것은 막 어둠이 깔리며 밤이 시작되려는 무렵이었다. 해가 지자 몸 상태는 다시 급격히 나빠졌다. 다행히 저 멀리 희미하게 반짝이는 밝은 빛들이 보였다. 마을인 걸까? 생각하는 사이에 마차가 멈춰 섰고, 금방 문이 열렸다.
“워릭에 도착했는데……. 마을로 들어갈 거야?”
“당연하지.”
노숙 경험은 어제 하루로 충분하다. 게다가 나는 여전히 정상인 컨디션이 아니었다. 만약 오늘 또 길에서 잠을 청하게 된다면 내일은 정말 앓아눕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직 이동 중인데 절대 그래서는 안 됐다. 가능하다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후에 편안하게 푹 잤으면 싶은데, 웬일인지 데니스는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어딘지 염려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괜찮을까?”
“뭐가.”
“아니, 실은 작은 도련님께서 부탁하신 게 있거든.”
“작은 도련님이?”
그게 뭐냐는 눈빛으로 보자 데니스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되도록 인적이 뜸한 길로 가라고 하시더라고. 정 마을에 들러야 할 일이 있으면 최대한 작은 마을로 들어가고.”
“아.”
듣는 순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을이 크면 클수록 우성알파를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넓은 영지를 소유하고 사람들을 다스린다는 것은 그만큼 능력이 뛰어나다는 말과 동일하니까. 갑자기 불안감이 차올랐다. 조용해진 나를 보며 데니스가 물었다.
“어떡할까? 좀 더 달려서 숲으로 들어갈까?”
“……아니.”
고민 끝에 고개를 내저었다. 에드워드의 염려를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밖에서 자기엔 정말로 몸이 안 좋았다. 꽈악. 가방끈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약이 있으니까…… 아마 괜찮을 거다. 아마.
마을로 이어지는 길은 확실히 숲에 비해 흔들림이 덜했다. 적당한 속도로 달리던 마차가 곧 멈춰 섰다. 데니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혹시 하룻밤 머물만한 숙소가 있을까요?”
“있고말고요. 어디 보자……. 이 길로 쭉 따라 들어가면 시장이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면 바로 보일 거요. 어디, 외부에서 온 손님이요?”
“네. 말씀 고맙습니다.”
어딘지 호기심이 담긴 질문에 데니스는 짧게 대답했다. 이윽고 마차가 다시 움직였다.
숙소는 생각보다 괜찮은 곳이었다. 1층은 식당이고 2층에 객실이 있는 구조였는데, 작긴 해도 마구간도 있어서 안심하고 마차를 세워놓을 수가 있었다. 주인 아저씨가 말을 묶는 동안 아주머니는 2층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 방을 쓰시면 되세요. 식사 준비를 해드릴까요?”
“벤, 어떡할래?”
데니스의 질문에 나는 괜찮다며 사양했다. 배가 고픈 줄도 잘 모르겠고, 뭣보다 너무 피곤해서 당장이라도 눕고만 싶었다. 마차에서 내릴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눈앞에 안락한 침대가 보이니 불시에 피로감이 몰려드는 것 같았다.
“난 뭣 좀 먹을까 싶은데…….”
살짝 미간을 구기며 중얼거리는 말에 아차, 싶은 생각이 든다. 나와 마찬가지로 데니스 역시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곤 퍽퍽한 빵과 약간의 말린 과일, 그리고 물이 전부이다. 어서 가서 저녁을 먹으라고 입을 떼려는데, 데니스가 주인 아주머니에게 묻는 것이 먼저였다.
“혹시 객실로도 갖다 줍니까?”
“갖다 드리고말고요. 근데 방에서 드시면 약간의 추가료가 붙어요.”
“괜찮습니다. 적당히 고기가 들어간 메뉴로 알아서 갖다 주세요.”
“스프는요?”
“그것도 고기가 들어간 걸로요. 참, 벤.”
갑자기 이름이 불려서 나는 “응?” 하며 녀석을 쳐다보았다.
“씻고 잘 거지? 뜨거운 물 준비해달라고 할까?”
“응.”
“그럼 식사는 방으로 갖다 주시고, 뜨거운 물은 좀 많이 필요하니까 따로 준비해주세요.”
“네. 다 되면 부르겠습니다.”
상냥한 목소리와 함께 주인 아주머니는 밖으로 나갔다. 타악- 방문이 닫히는 소리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흠, 생각보다 괜찮은데?”
“그러게.”
데니스의 말에 동의하며 나는 고개를 움직여 방안을 쭈욱 둘러보았다. 호사스럽지는 않지만 하룻밤 머물기엔 충분히 괜찮았다. 뭣보다 앉아있는 침대가 정말 푹신푹신했다. 머리가 닿으면 금방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꿈을 꾸었다. 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이유는 몇 년 전 아직 어린 내 모습이 눈에 보여서였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그 후 곧바로 저택으로 거처를 옮기느라 며칠이 흘러서야 다시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많은 친구들이 내 소식에 슬퍼하며 나를 위로해주었다. 하지만 모두가 다 똑같은 마음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딜 가든 심술궂은 녀석이 한 명쯤은 꼭 있었고, 우리 반에서는 잡화점 아저씨의 아들인 피터가 그 역할을 담당했다.
피터는 키도 덩치도 또래에 비해 굉장히 컸다. 우람한 체구가 아버지를 쏙 빼닮은 게 고약한 성미마저도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았다. 고전시간이 끝난 후에 쉬는 시간. 어째 내가 교실에 들어설 때부터 날 보며 음흉하게 웃더니, 아니나 다를까 피터는 건들거리며 다가와서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어이, 너희 아버지 죽었다며?”
일순 반 전체가 조용해졌다. 다가와서 걱정스럽게 말을 걸던 여자아이들이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섰다. 피터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그제야 왜 녀석이 내게 시비를 거는지 이유를 알아차렸다. 조금 전 나와 얘길 하던 소녀들 중에는 애니가 있었는데, 피터가 일방적으로 그 애를 좋아한다는 건 이미 널리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한숨이 차올랐지만 꾹 참았다. 상대해봤자 좋을 게 없었기에 말없이 녀석이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아빠가 그러시던데? 너 공작님 댁으로 들어갔다고. 고아라 저택에 빌붙어 사는 거야?”
녀석이 킬킬거리며 나를 비웃었다.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지만 단지 그뿐 그 이상의 행동을 할 순 없었다. 내 주먹으로 우람한 체구의 피터를 이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게다가 녀석의 집은 꽤나 부자였다. 만에 하나라도 녀석이 아버지에게 일러바쳐 학교를 찾아오기라도 한다면 소란을 일으킨 대가로 저택에서 쫓겨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피터. 그만두지 못해?”
다행히 누가 선생님을 모시러 갔는지 헐레벌떡 달려온 선생님이 녀석을 제지했다. 네, 네. 어깨를 으쓱인 녀석이 알겠다는 듯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피터의 얼굴에 여전히 비웃음이 가득한 것을. 왠지 당분간 괴롭힘이 이어질 것 같다는 우울한 생각이 들었고, 아니나 다를까 내 예상은 맞아 들어갔다.
그 후로 피터는 틈틈이 나를 괴롭혔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긴 하는 모양인지 대놓고 폭언을 퍼붓거나 해코지를 가하진 않았지만, 오며가며 내 몸을 툭 밀치거나 내 귀에만 들릴 정도로 ‘고아 새끼’라고 중얼거리고선 큰소리로 웃으며 지나쳐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맑은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잔뜩 끼더니 수업이 끝나갈 무렵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나에게는 우산이 있었다. 아침에 동관 문을 열고 나서려는 순간, 바람이 심상찮은 게 아무래도 비가 올 것 같다며 메리 아주머니께서 챙겨주신 덕분이었다.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막 교실 문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손에 든 우산을 휙─ 하고 빼앗겼다. 당황해서 쳐다보니 피터가 서 있었다. 늘 그렇듯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이었다.
“하인 주제에 우산이 가당키나 해? 너한텐 비에 홀딱 젖은 생쥐 꼴이 어울려.”
입술을 비틀며 웃은 녀석이 그대로 나를 밀치고 나가버렸다. 뭐라고 붙잡을 틈도 없었다. 열린 문 너머를 잠시 보다가 나는 긴 한숨을 쉬고 말았다. 안 그래도 비오는 날엔 기운이 없는데. 거기다 비까지 맞으며 저택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 우울해진다. 복도를 걷는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예법을 익히느라 이제는 평소에도 발뒤꿈치부터 소리 나지 않게 걸으려고 노력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럴 기운이 나질 않았다. 그런데 문득 소란스러운 소리가 귀에 잡혔다. 뭔가 싶어 발끝을 보고 있던 고개를 드는데, 저만치 보이는 누군가의 모습에 나는 그만 둥그렇게 눈을 뜨고 말았다.
“베니.”
프레드릭이었다. 깜빡, 깜빡. 믿을 수가 없어 눈만 깜빡이며 서 있자 그가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오늘 아침에 본 모습 그대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완벽한 외모였다. 홀린 듯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바로 앞까지 프레드릭이 다가왔다. 스윽, 얼굴이 가까워졌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이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데리러 왔어.”
주위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분명 많은 학생들이 입구에 서 있었는데 오직 그와 나 단둘뿐인 것처럼 고요했다. 믿을 수 없는 일에 나는 바보처럼 그에게 물었다.
“저……를요?”
“그럼. 길이 엇갈리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야.”
프레드릭이 내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넘겨주었다. 이윽고 따스한 손이 살며시 내 손을 붙잡았다. 현관 앞엔 그의 전담 마부가 우산을 든 채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데리고 가. 프레드릭의 명령에 마부는 재깍 고개를 숙이며 나에게로 우산을 내밀었다.
“먼저 가 있어.”
프레드릭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도련님은요? 불안하게 묻자 그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우산이 하나뿐이야. 먼저 가서 타면 나도 금방 따라갈게.”
그 말에 나는 망설이면서도 마부와 함께 먼저 마차에 올랐다. 타악. 닫힌 문 안에서 얼른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다시 문이 열리며 프레드릭의 모습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선 그가 자리에 앉자 곧 있어 마차가 저택을 향해 출발했다.
그 다음날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뭔가 동경의 빛을 띤 친구들의 얼굴은 물론이고, 피터의 괴롭힘 또한 거짓말처럼 딱 그쳤다. 내가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피터는 ‘왜 도련님의 발렛으로 일한다고 말 안 해준 거야?!’라고 버럭 화를 내더니, 이내 갑자기 자세를 바꿔서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내게 싹싹 빌기 시작했다. 듣자하니 녀석은 어제 프레드릭과 눈이 딱 마주쳤고, 한참동안 말없이 쳐다봐서 무서워죽는 줄 알았다고 했다. 도, 도련님께 이른 건 아니지? 겁에 질려 묻는 질문에 나는 쓰게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제야 녀석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언제 저자세였냐는 듯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들고선 나를 지나쳐갔다. 물론 그것은 그때뿐이었고 이후로는 내 주변에 얼씬도 하질 않았다.
변화는 또 있었다. 그 후로도 가끔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프레드릭은 직접 나를 데리러오거나 아니면 학교로 마차를 보내주곤 했다. 그때마다 너무나 황송해서 나는 몇 번이고 프레드릭에게 괜찮다며 혼자 올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프레드릭은 단호했다. 결국 그 호의는 내가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먼 훗날 우연히 에드워드를 통해서였다.
‘몰랐어? 그 왜…… 비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잖아. 그래서 비오는 날이면 형이 네 걱정을 많이 해. 덩달아 예민해질 때도 종종 있고.’
그 말에 그간의 일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비가 오는 날 아침이면 평소보다 훨씬 더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괜찮냐고 묻던 것, 휴식시간에 무릎베개를 하고선 어리광을 부리듯이 내게 기댄 것, 말없이 손을 잡아주거나, 유독 늦은 시간까지 그의 방에서 함께 머물도록 해준 것.
그의 자상함 중에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알고 보니 보이지 않는 걱정과 배려였다는 것을 나는 그때서야 깨닫게 되었다. 내 마음을 나보다 더 잘 알고 배려해준 프레드릭의 속 깊음에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프레드릭을 향한 내 마음이 단순히 나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커져버리게 된 것이.
마음을 깨닫는 순간 절망이 찾아왔다. 프레드릭이 나를 소중히 여겨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상황과 처지를 불쌍히 여겨서일 뿐이었다. 아버지의 일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평생 그의 그림자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나, 모든 것을 다 가진 프레드릭. 게다가 그는 러틀랜드 가의 차기 당주이자 최상위의 우성알파였다. 그 피를 이을 아이를 낳아줄 사람은 당연히 그에 걸맞은 최고의 오메가일 것이다. 그런데 감히 베타인 내가, 그것도 하인 주제에 그를 연모하는 마음이라니, 있을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걸 알기에 필사적으로 마음을 억눌렀다. 반역보다도 무서운 이 씨앗은 죽을 때까지 가슴 속에 파묻어야 할 죄악이었다. 하지만 눈을 감고 외면할수록 오히려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변함없이 다정한 그를 볼 때마다 기쁘면서도 아팠다. 제발 나와 같은 마음으로 나를 봐달라고 매달리고 싶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눈시울이 뜨끈하게 젖어들었다. 아직도 꿈인 걸까, 현실인 걸까. 손을 들어 눈가를 만지니 물기가 느껴졌고, 그제야 나는 오래된 꿈에서 깬 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슴푸레한 새벽의 푸른 기운을 보니 날이 밝으려면 아직 먼 것 같다. 다시 눕는 것 대신에 무릎을 감싸 안으며 고개를 묻었다. 얼른 시간이 흘러가길 바라며 두 눈을 꾹 감았다.
“실례합니다. 일어나셨어요?”
나도 모르게 깜빡 다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노크소리에 번쩍 눈이 뜨였다.
“잠시만요.”
서둘러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급한 대로 신발을 신고 문을 여니 주인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간밤에 편히 주무셨나요?”
“네. 그런데 무슨 일로…….”
“어제 일행분께서 동이 트면 깨워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아까 한 번 왔었는데 기척이 없어서 다시 올라왔어요.”
내가 먼저 잠든 사이에 데니스가 부탁을 한 모양이다.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어지간히 피곤했는지 녀석은 온통 시트를 걷어찬 채 코를 골며 숙면 중이었다.
“감사합니다.”
다시 앞을 보며 말하자 아주머니는 웃으며 물었다.
“아침식사 준비해드릴까요?”
“네. 부탁드립니다.”
“방으로 갖다 드릴까요, 아니면 밑에 차려놓을까요?”
“내려가서 먹겠습니다.”
용케 노크소리를 듣고 눈을 뜨긴 했지만 아직도 몸은 무거웠다. 만약 방에서 식사를 하면 틀림없이 다시 눕고 싶어질 것이다. 쉴 때 쉬더라도 일단은 몸을 좀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네. 그럼 준비해 놓을게요. 세안은 어제 거기서 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문을 닫고 돌아와 데니스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깨울 요량으로 팔을 뻗었지만 녀석의 어깨를 흔들 수는 없었다. 가까이서 들으니 코고는 소리가 더욱 굉장하다. 그동안 틈틈이 마차에서 잠을 잔 나와 달리, 데니스는 거의 쉬지 않고 계속 마차를 몰았다. 거기다 길도 초행길이고 아픈 나를 태우고 달리느라 이래저래 고단한 여정이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도저히 녀석을 깨울 수 없었다. 다행히 오늘은 침대에서 눈을 떴지만 내일은 또 어느 곳에서 밤을 보내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반쯤 아래로 흘러내린 시트를 들어 녀석의 몸을 덮어주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니 조금 더 휴식을 취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데니스가 눈을 뜬 건 정오가 훨씬 지나고 나서였다. 벌떡. 그야말로 스프링처럼 벌떡 몸을 일으킨 녀석은 뒤늦게 시간을 확인하고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냉큼 무릎을 꿇은 녀석이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가만히 놔두면 벽에 머리라도 박을 기세였기에, 나는 배가 고프단 말로 데니스의 등을 떠밀며 1층으로 내려갔다.
“응?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아?”
먼저 내려가던 녀석이 놀란 듯 잠시 발을 멈췄다. 아래를 본 순간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분명 오후에 가까운 시간인데 1층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앳된 얼굴의 소녀가 다가와서 주문을 받았다. 아직 성인은 아니고, 13~14세 정도로 보이는 아이였다. 키가 작고 통통한 게 딱 봐도 주인 아주머니의 딸인 듯 했다. 적당히 메뉴를 고른 데니스가 넌지시 아이에게 물었다.
“이쁜 아가씨. 여긴 원래 점심이 이렇게 늦어?”
“네?”
깜빡깜빡. 무슨 말이냐는 듯 데니스를 쳐다보던 아이가 이내 보조개를 만들며 꺄르르 웃었다.
“오늘부터 축제가 시작돼서 그래요.”
“축제? 무슨 축제?”
“무슨 축제긴요! 당연히 장미축제죠. 혹시 모르고 오신 거예요?”
그렇다고 대답하자 아이는 눈을 빛내며 제법 당찬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저희 마을은 영국의 어떤 곳보다 장미나무가 많아요. 영주님의 아내이신 웨일즈 백작부인께서 장미를 무척 좋아하시거든요.”
“그래? 근데 마을에 장미가 많은 거랑 백작부인이 장미를 좋아하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당연히 상관이 있죠. 원래는 백작 저택에서만 장미나무를 키웠는데, 첫 아드님을 순산하신 후에 부인께서 마을 사람들에게 골고루 묘목을 나누어주셨거든요. 왜냐하면…….”
한창 야무지게 설명하던 아이가 갑자기 말꼬리를 늘였다. 퍽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말투였다. 왜, 왜 나눠줬는데. 그새를 못 참고 데니스가 묻자 아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시 말을 이어갔다. 어딘지 자랑스러움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왜냐하면, 그 아드님께서 알파로 태어나셨거든요.”
“……!”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알파? 알파라고? 차마 되묻지는 못하고 불안함에 마른침만 삼켰다. 갑자기 초조해진 나와 달리 데니스의 눈동자엔 흥미가 가득했다.
“오, 정말이야?”
“네. 그 전에 백작 부인께선 딸만 세 명을 출산하셨거든요. 그러다 뒤늦게 아드님을 낳으셨는데, 그 아드님께서 우성에 가까운 알파였으니 얼마나 기쁘셨겠어요. 백작님도 크게 기뻐하시면서 백작가문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장미를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셨어요. 덕분에 저희 마을은 어딜 가도 장미나무, 장미꽃 천지예요.”
그러고 보니 우리가 앉은 테이블 위에도 장미가 담긴 화병이 놓여있었다. 절로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 동안 아이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처음엔 옆 마을 사람들만 장미를 구경하러 왔는데, 언제부턴가 외부 사람들도 오기 시작했어요. 그게 점점 규모가 커져서, 몇 년 전부터는 아예 축제를 열고 있어요.”
“그래서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거구나.”
“네. 근데 사람이 많은 데는 따로 이유가 있어요.”
“응? 그게 뭔데?”
“있죠, 축제기간에는 보라색 장미를 볼 수가 있어요.”
“보라색?!”
데니스가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예상대로의 반응이었는지 아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께서 보라색 장미를 피게 하실 수가 있대요.”
“피게 하다니……. 혹시 알파의 힘이라든가, 뭐 그런 거야?”
“네. 진짜 신기하죠?”
“그러네. 보라색 장미라니 처음 들어 봐.”
“원래는 보는 것만 가능했는데, 작년부턴 말린 꽃잎이 든 목걸이랑 팔찌를 팔고 있어요. 근데 그걸 연인에게 선물하면 평생 헤어지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가 있대요.”
“에이, 그런 게 어딨어?”
“진짜예요! 보라색 장미 꽃말이 괜히 영원한 사랑인 줄…….”
“이봐 에일리! 자꾸 거기 서 있을래?”
아까부터 주인 아저씨가 이쪽을 보더라니 결국 불호령이 떨어졌다. 칫. 하여튼 아버진 나만 가지고 그래. 입술을 삐죽이며 하는 말에 슬핏 웃음이 나왔다. 주인 부부의 딸이라는 내 예상은 정확한 것 같았다.
“여기서 십 분 정도만 걸어가면 보라색 장미를 볼 수 있어요. 그 잎으로 만든 목걸이도 거기서 파니까, 혹시 여자친구 있으면 꼭 사서 선물해주세요. 알았죠?”
속삭이듯 빠른 말을 남긴 채 아이는 종종걸음으로 멀어져갔다. 데니스가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보통 알파 힘을 그런데 쓰나?”
“……글쎄.”
“그래도 뭐, 낭만적이긴 하네.”
가벼운 말투와 달리 녀석은 금방 생각에 잠겼다. 이번엔 내가 웃을 차례였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안 봐도 훤하다. 틀림없이 엠마를 떠올리고 있겠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즐거운 눈으로 데니스를 보았다. 잠시 후 녀석이 비장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벤. 미안한데 밥 먹고 잠시만 갔다 오면 안 될까?”
“당연히 되지.”
충분히 예상했던 말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 눈 감추듯 식사를 끝낸 데니스는 그 길로 곧장 보라색 장미를 보러 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엠마에게 줄 목걸이와 팔찌를 사러 갔다. 나는 다시 방으로 올라왔다. 눈치로 봐서 데니스는 내가 같이 가줬으면 하는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나는 보라색 장미꽃이나 그 액세서리를 선물할만한 상대가 없었다. 게다가 데니스가 돌아오면 곧 마을을 떠나야한다. 긴 시간은 아닐 테지만 조금이라도 더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어.’
그 생각이 깨진 것은 우연히 데니스의 침대를 보았을 때였다. 침대 바로 옆 창가에 익숙한 전대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하는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 주머니를 열었다. 하아. 옅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짐작이 사실로 바뀌는 것은 금방이었다.
주머니 안에는 돈이 들어있었다. 녀석의 성격상 아마 여기저기 돈을 나눠서 들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혹시 모를 비상금쯤은 챙겨 다니겠지만, 그조차도 마차 어딘가에 들어있을 것이 뻔했다. 즉, 녀석은 지금 수중에 돈 한 푼 없이 물건을 사러 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게 천천히 다녀오래도. 계산할 때 녀석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안 봐도 뻔하다. 아니, 어쩌면 도중에 깨닫고 부랴부랴 되돌아올지도.
첫 날, 그것도 서두르지 않으면 못 살 수도 있다는 주인집 딸아이의 말이 떠올랐다. 데니스가 낙심하는 것은 싫었다. 잠깐의 고민 끝에 전대를 챙겨 들었다. 큰 길로 이어지는 골목길은 하나밖에 없으니 일단 거기까지라도 나가볼 생각이었다.
하늘엔 구름이 가득했다. 안개 자욱한 런던의 아침처럼 흐린 날씨였다. 비가 오면 안 되는데. 속으로 생각하며 사람들 틈에 섞여 걸음을 옮겼다. 다들 나와 비슷한 생각인지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날씨가 궂네.’ ‘얼른 꽃만 보고 가요.’라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퉁이 근처에서 데니스를 기다렸다. 행여나 녀석을 놓칠세라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신중하게 살폈다. 손은 물론 전대를 야무지게 꽉 쥐고 있었다.
엇, 저기 있다. 키가 제법 큰 탓에 어렵잖게 녀석을 찾을 수 있었다. 다들 한 방향으로 걷는데 혼자서 역방향으로 걸어오느라 쩔쩔 매는 모습이다. 손을 크게 흔들며 이름을 불렀다.
“데니스! 여기야.”
금방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은 녀석이 금방 방향을 틀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왜 여기 있어?”
말 대신 주머니를 들어보였다. 데니스는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어째 뭔가 허전하더라고. 하하.”
“빨리 만나서 다행이야. 얼른 다녀와.”
내 말에도 녀석은 곧장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할 말이 있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음……. 그러지 말고 같이 갔다 오자.”
“같이?”
“어.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면 아쉽잖아. 이왕 나왔으니까 꽃만 보고 오자.”
데니스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1년에 한번뿐인 축제이고, 오늘 이 마을을 떠나면 앞으로 언제 또 와보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약으로 억누르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내 몸은 흔들리는 컵 속의 물처럼 불안정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가지 않는 게 좋을 듯했다. 그냥 혼자 갔다 오라고 입을 떼려는데, 데니스가 먼저 선수를 쳤다.
“다들 쌍쌍이 걷고 있는데 혼자 삐죽삐죽 가려니까 민망해. 친구 돕는 셈치고 이번 한 번만 같이 가자. 응? 네 꺼도 한 개 사줄게.”
절절함이 잔뜩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내가 망설인다는 것을 알고 녀석은 가까우니까 얼른 갔다 오자며 나를 회유했다. 한숨을 삼키며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니스의 손에 이끌려 또 다시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어갔다. 멀지 않다는 건 빈말이 아니었다. 얼마 걷지 않아서 벽돌 색깔의 큰 저택이 보였다. 양 옆의 뾰족한 첨탑들을 보니 아무래도 영주의 성인 듯 했다. 잠시 저택에 시선을 뺏긴 사이 데니스는 이리저리 요령 좋게 길을 만들며 앞으로 걸어갔다. 곧 커다란 장미정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붉은 장미, 노란 장미, 흰 장미, 분홍색 장미. 그리고, 그 모든 꽃들 사이에 화려하게 피어있는 보라색 장미. 탐스러운 꽃들의 향연에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와, 진짜 장난 아니네.”
데니스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아이가 왜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는지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벤, 저쪽으로 가자.”
데니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유독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느낌상 아무래도 그 액세서리를 파는 곳 같았다. 잠시 멈췄던 걸음을 움직이려는데, 갑자기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큰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데니스를 보았다. 녀석 역시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유를 알게 된 것은 근처 사람들의 말이 귀에 들린 이후였다.
“지금 이쪽으로 영주님과 그 아드님이 오고 계시대요.”
“첫 날에 와보길 잘했군.”
“알파 나으리를 눈앞에서 보게 되다니. 정말 오길 잘했어.”
다들 기대와 흥분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오직 나만이 예외였다. 영주님이 이리로 오고 있다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져갔다.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끼며 나는 서둘러 데니스를 불렀다.
“데니스. 얼른 저쪽으로 가자.”
“응? 갑자기 왜 그래?”
“그냥…… 좀 어지러워. 가서 목걸이만 사고 돌아가자. 부탁이야.”
얼굴은 데니스를 보고 있지만 청신경은 온통 등 뒤를 향해 있었다. 이봐. 어서어서 길을 비키게. 자자, 뒤로 좀 물러나요.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쿵쿵,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내 얼굴에서 뭔가 심상찮음을 느꼈는지 데니스는 지금 바로 숙소로 돌아가자며 내 손을 이끌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영주님 만세!”
“영주님 만세!”
엄청난 환호소리와 함께 일순 몸이 뒤로 밀렸다. 데니스를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땅에 처박힐 뻔했다.
“괜찮아?”
“응.”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옅은 금발, 푸른 눈동자. 그리고, 말을 타고 있는 그의 주변을 호위하듯 둘러싼 많은 병사들. 누구인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는 영주의 아들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서둘러 고개를 푹 숙였다.
눈이 마주친 건 우연일까? 아니면…… 아니면 혹시 뭔가 눈치 채기라도 한 걸까?
두근두근. 걷잡을 수 없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단 몇 초에 불과할 시간이 한없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도련님, 왜 그러십니까?”
“……아무 것도 아니야.”
잠시 멈췄던 말발굽 소리가 다시 다각거리며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다행히 행렬은 저만치 멀어져가고 있었다. 하아.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한 시라도 빨리 마을을 떠나야할 것 같았다.
결국 목걸이는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내 옆에는 데니스가 걷고 있었다. 괜찮으니 혼자라도 가서 사오라고 했지만, 절대 그렇게는 못한다며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론 안심이 됐다. 의지할 사람이 녀석밖에 없었기에, 혼자 있으면 불안한 게 사실이었다.
“……어?”
방문 손잡이에 열쇠를 넣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달칵, 하고 잠금이 풀리는 소리 대신 열쇠가 헐겁게 돌아가는 느낌이 났다.
“왜 그래?”
“문이 열려있는 것 같아.”
“뭐?”
“열쇠가 너무 쉽게 돌아가. 아까 잠긴 거 확인했을 땐 안 이랬는데.”
“설마.”
데니스가 서둘러 방문을 열어젖혔다. 빠르게 안을 쭉 훑어보았다.
우려와 달리 크게 달라진 점은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착각한 건가? 눈을 깜빡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무언가 빠르게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나는 서둘러 침대 옆 협탁 서랍을 잡아당겼다.
“……!”
안은 텅 비어있었다. 망연히 주저앉는 나를 보고 데니스가 놀라서 달려왔다.
“벤, 왜 그래?”
“없어.”
“뭐?”
“가방… 가방이 없어졌어.”
입을 떡 벌린 데니스가 곧장 서랍 안을 살펴보았다. 두 번째, 세 번째. 급한 손길로 나머지 서랍들을 빼냈지만 마찬가지로 안은 텅 비어있었다. 녀석이 나를 보며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 다른데 놔둔 거 아냐?”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방을 나서기 전, 침대 밑에 숨겨놓으려다가 생각을 바꿔 첫 번째 서랍 안에 넣어 놓았었다. 가지고 가지 않았던 것은, 오래전 다른 마을 축제에 갔을 때 허리께의 주머니를 도둑맞은 적이 있어서였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방에 들어왔던 게 틀림없다. 분명 문을 잠갔었는데, 대체 누가. 어떻게.
“젠장. 어떤 놈이 훔쳐간 거야.”
녀석이 거칠게 머리를 헝클었다. 잔뜩 인상을 구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안에 돈 많이 들어있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말 그대로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약. 가방 안에는 억제제가 들어있다. 따로 챙겨놓은 여분은 없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함에 항상 세 통을 모두 가지고 다녔었다.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아침에 두 알을 먹긴 했지만 약효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나 자신조차도 장담할 수 없었다.
“데니스. 당장 출발하자.”
영주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떠올랐다. 프레드릭과 달리 온기라곤 없는 서늘하고 차가운 눈동자였다. 1분 1초가 급했다. 일단 아무 약국에나 가서 억제제를 사고 최대한 빨리 마을을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어리둥절한 데니스를 이끌고 곧장 복도로 나갔다.
“가방 찾아야 되지 않아?”
“……무슨 수로 찾을 건데.”
마을 전체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일어난 사건이다. 맘먹고 훔쳐간 게 분명한데 자력으로 범인을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괜찮겠어?”
걱정스런 목소리에 뒤돌아보았다. 어딘지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그 가방… 큰 도련님이 주신 거잖아.”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아주 살짝 데니스가 원망스러웠다.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가 걱정돼서 한 말이겠지만 오히려 마음을 아프게 했다. 코끝이 절로 시큰거렸다. 애꿎은 데니스에게 화를 낼까봐 얼른 눈을 피하며 뒤돌아섰다.
“……괜찮으니까 가자.”
“……그래.”
녀석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1층 출입문 근처엔 아까 보았던 소녀가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우리를 보더니 꽤나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축제 보러 가신 거 아니에요? 어라… 근데 왜 가방을…….”
아이의 시선이 커다란 짐 가방으로 향했다. 시선이 다시 위로 올라오는데,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주인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에일리. 가서 아버지 좀 도와드리렴.”
“에, 언제는 여기 앉아있으라 했,”
“어서.”
부드럽지만 단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잠시 눈치를 보던 아이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걸음을 옮겼다.
“죄송합니다. 그러지 말라고 하는데, 워낙 애가 철부지라서…….”
“괜찮습니다. 숙박비를 계산하고 싶은데 얼마입니까?”
“어머, 벌써 가시게요?”
“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출발하려고요.”
아주머니는 아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데니스가 전대를 열어 방값을 지불하려는데 갑자기 바로 옆의 문이 큰 소리로 열렸다.
식당 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나 역시 고개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완전무장한 병사들 몇몇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잔뜩 굳은 얼굴이 아무래도 심상찮게 느껴졌다. 앞에 선 병사가 굵직한 목소리로 입을 떼었다.
“다들 잘 들으시오. 영주님의 명령으로 당분간 마을에서 나가실 수 없습니다.”
뭐?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절로 얼굴이 굳어졌다. 아무리 영주라 해도, 완전히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 아닌 이상 마을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일은 드물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닌 듯 했다. 모두들 궁금하다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선뜻 용기 있게 묻는 자는 없었다. 전언을 끝낸 병사들은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문밖으로 나서기 전, 익숙하다면 익숙한 목소리가 조용한 공기를 흩트렸다. 바로 주인 아저씨였다.
“나으리!”
“왜 그러시오?”
병사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귀찮음이 역력한 표정에 주인 아저씨의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몇 십 년을 여기서 살고 있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영주님의 명령이오. 그리만 알고 계시오. 가자!”
무성의한 대답과 함께 병사들이 사라졌다. 다들 잘 들으시오! 당분간 마을에서 나가실 수 없습니다. 똑같은 말, 똑같은 목소리가 큰 길 가득 울려 퍼졌다. 서로 눈치만 살피던 사람들은 그들의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제각기 얼굴을 보며 수군거렸다.
“그럼 축제 구경도 못하는 건가요?”
“그건 아니지 싶은데. 마을 밖으로만 안 나가면 되는 거 아냐?”
불확실한 전언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여전히 서 있는 우리를 보고 주인 아주머니가 말을 건넸다.
“저런, 아무래도 당분간은 여기서 머물러야 할 것 같아요.”
“여기 영주님은 원래 이렇게 마을 전체를 통제합니까?”
나도 모르게 격양된 목소리로 물었다. 한시라도 빨리 떠나야 하는데 왜 하필 지금인 걸까. 이유조차 알 수 없으니 너무나 답답했다.
“절대 아니에요. 우리 그이 말처럼 이제껏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던 걸요.”
근데 대체 왜, 무엇 때문에…….
긴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쉬지 않고 숲으로 들어가 버리는 건데.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후회를 하고 있으니 데니스가 은밀한 목소리로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혹시 몰래 빠져나가는 방법은 없어요?”
“에구머니나, 그랬다간 경을 치게요. 거기다 마차는 또 어쩌시려구요.”
“아. 마차.”
젠장, 중얼거리듯 말을 짓씹으며 데니스는 혀를 찼다.
“할 수 없겠는데. 괜찮아 벤?”
이번만은 쉬이 괜찮다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발이 묶인 것도 큰일이지만 여전히 가장 큰 문제는 약이 없다는 것이었다.
“데니스. 미안한데 한 가지만 부탁…….”
어렵게 꺼낸 말을 급히 입 안으로 삼켰다. 응? 되묻는 표정에 나는 서둘러 말을 바꿨다.
“잠시만 나갔다 올게.”
“어딜 가려고?”
“……약국에.”
“맞다. 약도 없어졌다고 했지. 내가 가서 사올까?”
“괜찮아. 내가 갈게.”
솔직히 나보다는 데니스가 가는 게 훨씬 미더웠다. 좀 전에도 그럴 요량으로 녀석을 불렀던 거고. 하지만, 녀석을 보낸다는 것은 지금 나에게 필요한 약이 무엇인지 알려줘야 한다는 말과 똑같았다. 데니스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베타이든 오메가이든 변함없이 친구로 대해줄 녀석을 잘 알고 있지만, 문제는 이미 꽤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얼마든지 말을 꺼낼 기회가 있었지만 끝끝내 말하지 못했었다. 이런 상황이 되어서야 얘기를 꺼내는 것은 내 성격상 도저히 무리였다.
“그럼 같이 가자.”
“진짜 괜찮아. 빨리 갔다 올 테니까 방에서 좀 쉬고 있어.”
“……알았어 그럼.”
허리춤을 매만지던 데니스가 전대를 풀어 내게 건네주었다. 마차 안에 숨겨둔 비상금이 있으니 괜찮다고 했지만 녀석은 한사코 주머니를 안겨주었다. 다시 돌려줄 틈도 없었다. 좀 더 머물겠다고 주인아주머니에게 말한 녀석은 두 사람분의 짐가방을 들고 2층으로 향했다. 마찬가지로 자리를 옮기려는 아주머니를 보고 다급한 목소리로 붙잡았다.
“혹시 이 근처에 약국이 있습니까?”
“그럼요. 근데 이 마을 사람이 아니면 찾기 힘들 거예요. 구석진 곳에 있는 데다가 여기서 꽤 멀거든요.”
“괜찮습니다. 어디 있는지만 알려주세요.”
“음… 아니면 저희 딸아이하고 같이 갔다 오실래요? 천방지축이긴 해도 길은 훤하거든요.”
“그래도 됩니까?”
“물론이죠. 에일리! 잠시만 이리 와보렴.”
크지 않은 목소리에도 아이는 금방 달려왔다.
“이 손님을 약국까지 안내해드리고 와. 절대 버릇없게 굴지 말고.”
이어지는 아주머니의 부탁에 아이는 알았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이쪽이에요.”
에일리가 가리키는 방향은 아까 데니스를 찾으러 갔던 방향과 정반대였다. 그새 하늘은 좀 더 흐려졌다. 먹구름이 드리운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니 아이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얼른 다녀와요. 약국 주인이 할아버지인데, 해만 졌다하면 문을 닫아버리거든요.”
굳은 날씨 탓인지, 아니면 갑작스런 출입금지령 탓인지 골목을 걷는 사람은 눈에 띄게 줄어있었다. 먼저 걷는 아이를 따라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있죠.”
“응?”
“오빠는 몇 살이에요?”
예상 밖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옆을 보았다. 덕분에 걷는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갑자기 그건 왜?”
“사실은 아침부터 되게 궁금했거든요. 제가 이래 봬도 눈치가 엄청 빨라서 대부분은 얼굴만 봐도 감이 오거든요? 근데 오빠는 도통 모르겠어요.”
으음, 하고 미간에 작은 주름이 생기는 걸 보니 웃음이 나왔다. 별 것도 아닌데 알려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거기다 약국까지 친절히 길 안내도 해주고.
“열여덟 살이야.”
“에엑?!”
아이가 눈을 크게 뜨며 소리를 질렀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에 오히려 영문을 알 수 없는 것은 나였다.
“거짓말! 그 얼굴로 열여덟이라니, 거짓말이죠?”
“진짠데.”
“헐…….”
아이의 얼굴에 다른 누군가의 얼굴이 겹치며 떠올랐다. 올해 1월. 데니스를 비롯해 함께 열여덟 살이 된 마을 소년들과 성인식을 치를 때, 메리 아주머니도 꼭 저런 표정을 지었었다. 뭔가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대견함과 자랑스러움, 그리고 안쓰러움이 한데 어우러졌던 표정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나를 정말 친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해 주었으니까.
“칫. 진짜 부러워요.”
언제는 충격 받은 얼굴이더니 금세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민다. 저 또래 여자아이들은 원래 저렇게 감정변화가 풍부한가. 웃으며 뭐가 부럽냐고 묻자 입술이 좀 더 삐죽거리는 게 보였다.
“오빠 어머니 진짜 미인이시죠? 딱 봐도 알 것 같아. 난 엄마 닮아서 머리카락도 붉은 색이고 주근깨도 있는데.”
하아- 급기야 긴 한숨을 내쉬는 행동에 내 웃음은 좀 더 깊어졌다. 툭툭, 애꿎은 돌멩이를 차며 걷던 에일리가 갑자기 어, 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할아버지가 문을 닫을 건가 봐요!”
“뭐?”
깜짝 놀라 에일리를 봤다가 얼른 다시 앞을 보았다. 한눈에도 할아버지처럼 보이는 분이 웬 커다란 통을 손에 든 채 문을 닫으려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아이가 큰 목소리로 외치며 곧장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나 역시 서둘러 뛰어갔고, 닫히기 직전인 문을 가까스로 붙잡을 수 있었다.
“음? 무슨 일이요?”
눈썹을 올리며 묻는 질문에 나는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약을 사러 왔습니다.”
“흠……. 들어오시오.”
다행히 떨어진 허락에 나는 아이에게 잠시 밖에서 기다리라고 말하고서는 안으로 들어갔다.
약국은 생각보다 허름했다. 쭈뼛거리며 서있으니 노인이 외알 안경을 치켜 올리며 나에게 물었다.
“그래, 무슨 약을 사러 온 거요.”
“억제제를 사고 싶습니다.”
“음? 오메가였소?”
노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덧붙여진 말에 어색한 웃음만 짓고 있으니 이내 심드렁한 표정으로 돌아온 노인이 나에게 물었다.
“그래, 어떤 타입으로 드리면 되는 거요. B? C?"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여전히 약의 타입에 대해선 무지했다. 순간 번뜩이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약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B타입이랑 C타입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습니까?”
“응?”
노인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순간 말문이 막혀 굳어있는데 다행히 대수롭지 않게 여긴 듯 설명을 시작했다.
“약 분류는 단순하오. 페로몬을 억제시키는 정도에 따라서 A에서 E까지 분류가 되는데, A에 가까울수록 효능이 더 좋소.”
“그렇군요.”
뭔가 생각보다 간단한 분류법이었다. 그래도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은 의문에 다시 한 번 노인에게 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흠, A타입 같은 경우엔 페로몬 분비가 거의 완벽하게 차단되고 지속시간도 긴 편이오. 그래서 주로 귀족이나 부호인 오메가들이 찾곤 한다오. 하지만 그만큼 비싸서 평민들은 주로 B나 C를 많이 복용하고, E타입 같은 경우는 나온 지도 오래되고 효과도 미미해서 요즘엔 찾는 사람이 거의 없소.”
“그럼 A타입은 가격이 얼마나 합니까?”
“한 통에 은화 1페니요.”
은화 1페니. 약치곤 비싼 가격이지만 죠셉 박사의 병원에서 샀던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이었다. 생각나는 하나의 가설을 품고 조심스럽게 노인에게 물었다.
“혹시 그보다 더 좋은 약도 있습니까?”
“그보다 더 좋은 거? 당연히 없…… 아니, 아니지. 새로 나온 억제제가 있긴 하오. 수도의 높으신 귀족 나으리께서 엄청난 거금을 투자해서 만들었다 하더라고.”
“그렇습니까.”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가지고 있었던 약이 아무래도 그거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혹시 지금 살 수 있습니까?”
“있어야 사지. 이런 시골까지 내려오려면 몇 달은 기다려야 할 거요.”
기대가 자리도 잡기 전에 사라져버렸다. 실망한 내 모습에 아랑곳없이 노인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나저나 런던에서 왔나 보오. 그런 약이 있다는 것도 알고.”
“……네.”
“그래, 약은 어떤 걸로 주면 되는 거요? 날도 흐리고 오늘은 이만 들어갈까 싶은데.”
“A타입으로 주세요.”
“허허. 이를 어쩌나. A타입은 지금…….”
“안녕하세요.”
갑작스런 문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들려왔다. 뒤돌아보자 푸근한 몸매의 중년 여성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무릎까지 오는 연한 갈색 치마, 그 위에 단정하고 깔끔한 앞치마를 하고 있는데, 왠지 메리 아주머니의 복장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말린 센나를 좀 사러 왔어요.”
“오, 마침 잘 왔소. 이 청년이 아니었으면 오늘 헛걸음할 뻔 했어.”
넉살좋게 응수한 노인은 겹겹이 쌓여있는 하얀 천 조각 중에 하나를 손바닥에 올리고서는 근처의 약초상자 뚜껑을 열고 컵으로 퍼 담았다.
“자, 확인해 보시오.”
노인이 나무탁자 위에 천을 놓으며 말하자 아주머니는 곧장 소량을 집어 손가락 사이로 비비기 시작했다.
“참, A타입으로 달라고 했었나?”
그제야 노인의 시선이 다시금 나를 향했다. 네, 하고 대답하자 어쩐지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이걸 어쩌나. 지금 A타입은 없는데.”
“예?”
“얼마 전에 다 팔렸는데 의약상인이 왔을 때 말한다는 게 그만 깜빡해 버렸소.”
“여분이 없습니까?”
“하나도 없소.”
“그런…….”
예상치 못한 일에 무척 당황스러웠다. 닫히려는 문을 붙잡을 때만 해도 모든 것이 잘 해결될 줄 알았는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참담한 표정으로 서 있자 커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넌지시 묻는다.
“B타입이라도 사가겠소?”
“…….”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지못해 그거라도 달라고 하려는데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억제제가 없어서 그래요?”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이 향했다. 분명 센나를 살펴보던 아주머니가 어느 샌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아하니 외지 사람 같은데……. 오메가라면 비상용으로 몇 알이라도 가지고 다닐 텐데, 갖고 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예. 사정이 좀 있어서요.”
“저런, 그럼 그전에는 어떤 타입을 복용했어요? 계속 A타입을 복용했다면 B로는 힘들 텐데.”
아주머니의 얼굴엔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딱한 눈으로 나를 보던 그녀는 이내 결심했다는 듯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 내가 좀 나눠줄게요.”
“예?”
나도 모르게 되묻는 말이 나왔다. 딱 봐도 베타처럼 보이는데, 설마 오메가이신 건가? 표정에서 의아함을 읽었는지 아주머니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베타가 맞아요. 내가 모시고 있는 아가씨가 오메가인데, 사정을 이야기하면 딱한 마음에 약을 좀 나눠줄지도 몰라요. 어때요, 같이 한 번 가볼래요?”
“오, 그것 참 잘 됐소. 로즈 아가씨라면 주고도 남을 분이시지. 암.”
확신에 찬 노인의 목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잠시 노인을 보았다가 다시 아주머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때요? 눈으로 묻는 물음에 나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죄송하지만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평소라면 괜찮다면 사양했겠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내 머릿속엔 아직도 영주의 아들이 잔상처럼 남아있다. 언제 마을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전에 약효가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단은 억제제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센나 값을 지불하고 돌아서는 아주머니를 따라서 약국 밖으로 나왔다.
“샀어요?”
밖에서 기다리던 에일리가 나를 보자마자 물었다. 못 샀다는 내 말에 금세 걱정하나 싶었지만, 잘하면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하니 다행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에일리. 잠깐만 아주머니 댁에 들렀다 가도 될까?”
“물론이죠! 이 동네 길은 제가 환히 알고 있으니까 어디든 걱정 안 해도 돼요.”
“그럼 날 따라와요.”
친절히 웃는 아주머니를 따라서 에일리와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길을 걷는 동안 에일리는 잠시도 조용하지 않았다. 아이의 친화력은 굉장해서, 마치 잘 아는 이웃집 아주머니를 만난 것처럼 종알종알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가끔 뒤돌아보며 나에게 동의를 구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주머니 댁은 어디세요?”
“거의 다 왔어. 저기 뾰족한 지붕 보이지?”
“어디요?”
“저기. 사실 난 영주님 댁에서 일하고 있거든.”
“……!”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뭐, 뭐라고? 날벼락 같은 아주머니의 말에 붙잡힌 듯 발이 멈추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에일리는 계속해서 수다를 떨며 아주머니와 함께 걸어갔다. 얼어붙은 입술을 달싹여 간신히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일리.”
“…….”
“에일리!”
“어?”
연달아 부르자 그제야 아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뭔가 심상찮음을 느꼈는지 금세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뛰어왔다.
“오빠 왜 그래요?”
“그게…….”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아주머니 또한 종종걸음으로 다가와서는 염려스런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지. 생각지도 못하게 부딪힌 상황에 나는 걱정 가득한 시선을 앞에 두고도 좀처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안전을 위해서라면 여기서 아주머니께 양해를 구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그랬다간 약을 구해지 못해서 더 위험해질 수도 있다. 다시 약국으로 돌아가 B타입이라도 사려고 해도 어쩌면 이미 문을 닫아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혼란스런 눈으로 아주머니를 보았다. 오래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이래도 저래도 최악인 상황 속에서 나는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혹시 정문으로 가시는 겁니까?”
“아뇨, 하인들은 저택 뒤편에 있는 전용 후문을 이용해요. 지금은 축제기간이라 더더욱 정문 쪽으로는 못 가고요.”
“그렇군요.”
다행히 예상대로였다. 내 경험대로라면 저택의 주인인 영주나 그 가족들이 후문으로 드나들 일은 전무했기에, 그나마 불안함을 조금 덜 수 있었다.
“그럼 후문 근처에서 기다릴 테니 약을 좀 가져다주시면 안 될까요?”
“안될 건 없지만……. 그래도 손님인데 안에서 차나 한 잔 하고 갔으면 싶은데.”
“아뇨 괜찮습니다. 몸이 좀 안 좋아서 얼른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죠.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얼른 가서 아가씨께 말씀드리고 약을 좀 받아올게요.”
“고맙습니다.”
아주머니는 곧장 바쁜 걸음으로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 그 사이 하늘은 좀 더 어두워졌고, 나는 여전한 불안감을 지우지 못한 채 맞은편 벽 근처에서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주머니가 많이 늦으시네요.”
에일리가 고개를 쭉 빼며 저택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아이와 같은 생각이었다. 아주머니가 가신지 족히 10분은 된 것 같은데 아직까지도 후문 쪽은 잠잠했다. 혹시 아가씨란 사람이 안 계신 건가. 아니면 약을 줄 수 없다고 거절이라도 한 것일까. 갖가지 상상을 하며 초조함 속에 그녀를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기분으로 저택을 주시하는데 마침내 문이 열리며 아주머니가 나왔다.
“아주머니!”
반가움에 절로 큰소리가 나왔다. 뛰다시피 다가가자 아주머니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오래 기다렸죠? 저택에 중요한 손님이 찾아와서 곧바로 아가씨를 뵐 수가 없었어요.”
“괜찮습니다.”
“여기 약이 있어요.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하니까, 얼른 다른 마을로 가서라도 사도록 해요.”
내밀어지는 하얀 천에 만감이 교차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것을 건네받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약을 주신 건 아가씬걸요. 자자, 그럼 어서 가서 푹 쉬어요. 이러다 길에서 쓰러질라.”
끝까지 걱정 가득한 모습에 가슴 한 구석이 찡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인사를 하고서 에일리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어.”
부지런히 걷던 아이가 갑자기 멈춰 서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 오나 봐요.”
그 말과 동시에 차가운 빗방울이 이마에 툭 떨어졌다. 굳이 고개를 들 필요도 없이 먹구름이 잔뜩 낀 게 보였다.
“금방 쏟아질 것 같은데 빨리 가요.”
“그래.”
아이의 말대로 좀 더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채 얼마 가지도 않아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도저히 숙소까지 가는 건 무리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아이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오빠, 이리로 와요!”
모퉁이를 돌자 지붕 밑의 차양이 보였다. 그리 크진 않아도 두 사람이 몸을 피하기엔 충분했다.
“에잉, 다 젖어버렸네.”
에일리가 자기 몸을 내려다보며 투덜거렸다. 괜히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것 같아 미안해졌다.
“미안해.”
“에, 오빠가 왜 미안해요. 갑자기 내린 비가 나쁜 거지. 아마 금방 그칠 거예요.”
“……그럴까?”
“그럼요!”
하지만 비는 쉬이 그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잦아들었으면 하는 바람과 달리 오히려 갈수록 더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으니 몸이 점점 떨려왔다. 홀딱 젖은 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제발 좀 멈춰라. 제발. 코를 훌쩍이며 싸늘한 양 팔을 문지르는데 갑자기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도련님이시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번쩍 들렸다. 에일리의 시선을 따라간 곳엔 정말로 영주의 아들이 있었다. 우산을 든 시종을 대동한 채 그는 어딘가로 걷고 있었다.
우뚝. 갑자기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생각할 것도 없이 아이의 손을 잡고 바로 옆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오빠?”
“쉿!”
소리 내면 안 돼. 눈짓으로 전한 말에 에일리는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근두근.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갔는지 안 갔는지 확인하고 싶지만 행여나 시선이 마주칠까봐 도저히 얼굴을 내밀 수가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장면 또한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 한 무리의 병사들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아마도 집주인인 듯한 사내와 대면하고 있었는데, 마치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찾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쾅. 문이 닫히는 순간 서둘러 좀 더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숫제 온몸이 덜덜 떨렸다. 단순히 추위 때문인 것이 아닌, 공포와 초조함이 뒤섞인 떨림에 이가 절로 딱딱 부딪혔다.
……갔을까?
귀를 기울여보지만 빗소리에 묻혀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제발, 제발 갔기를. 속으로 간절히 빌며, 나는 내 옆에 서 있는 아이에게 거의 입모양만 움직여 말을 했다.
“에일리. 도련님이 갔는지 좀 봐줄 수 있어?”
“네.”
고개를 끄덕인 아이가 나와 자리를 바꾸었다. 스윽, 작은 얼굴이 모퉁이 너머로 살짝 내밀어졌다. 그 순간.
탁!
누군가가 뒤에서 거센 손길로 내 어깨를 잡아챘다.
“……!”
그대로 벽에 등이 부딪혔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마치 영혼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프……레드?”
내 것이 아닌 듯한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이름을 입에 담아보지만 현실감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여긴 대체 어떻게? 무슨 수로?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아니지, 혹시 지금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서없는 생각들이 제멋대로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이었다.
‘다시 하트퍼드로 올라가야 돼. 며칠 후에나 돌아올 수 있어.’
분명 프레드릭은 그렇게 말했었다. 아직 일이 시작단계라서 조금 더 경과를 지켜본 후에야 집으로 올 수 있다고. 그 말대로라면 프레드릭은 어제쯤 런던의 자택에 도착했어야만 한다. 그래야 할 사람이 지금 이렇게 내 눈앞에 있다니,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여기에…….”
좀 더 빨리 물었어야 할 질문이 이제야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또 다른 질문들도 많았지만, 정신이 멍해서 띄엄띄엄 두어 마디의 말을 내뱉는 것이 고작이었다. 프레드릭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긴 손끝이 살며시 볼에 닿았다. 그 순간 든 생각은 ‘아아, 정말로 프레드가 맞구나.’하는 것이었다. 꿈이 아니었다. 이토록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나를 대해주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프레드릭 한 사람뿐이었다. 늘 따스하던 손이 빗물에 차갑게 얼어있다. 지붕 아래 몸을 피하고 있는 나와 달리 프레드릭은 퍼붓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는 중이었다.
“일단 이리…… 앗!”
어렵게 꺼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프레드릭이 내 팔을 잡아당기며 힘껏 껴안아왔다. 꽈악. 마치 그런 소리가 들릴 것 같은 포옹이었다. 당황해서 몸을 버둥거렸지만 오히려 더욱 강한 힘이 온몸을 속박하듯이 껴안았다.
쿵. 쿵. 맞닿은 가슴으로 엄청난 심장박동이 전해져왔다. 그래서였다. 입술까지 차오른 말을 끝내 하지 못한 것은. 왠지.. 그냥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프레드릭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나를 안고 있는 것인지. 절대 놓지 않겠다는 마음이 절절히 느껴졌기에, 단단한 품에 갇혀 숨이 막히면서도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주춤주춤 손을 올려 그의 등을 마주 안아주었다.
잠시 후 프레드릭이 팔을 풀며 나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두 손만큼은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은 채 노여움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내가…….”
마침내 프레드릭이 입을 열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마치 무언가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음성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기다리라고. 금방 올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낮게 이어지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숨조차 내 맘대로 내쉴 수가 없었다. 겁이 나고 무서웠다. 그의 화난 목소리를 처음 듣는 것처럼, 저렇게 차가운 표정과 눈동자를 보는 것 또한 오늘이 처음이었다. 내가 겁먹고 있다는 것을 알 텐데도 프레드릭은 좀처럼 화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그는 온몸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넌 분명 기다리겠다고 했어.”
“…….”
“그런데… 그런데 내가 가자마자 떠났다는 말을 듣고 내가 얼마나…!”
프레드릭이 이를 악무는 것이 보였다. 늘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던 푸른 눈동자는 분노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붙잡힌 어깨가 부서질 것처럼 아팠지만 아프다는 말 따윈 할 수 없었다. 분노, 절망, 충격. 일그러진 얼굴에서 느껴지는 갖가지 감정들.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끝까지 나만을 생각했고, 그로 인해 프레드릭에게 큰 상처를 주었음을.
“대체 왜 그랬어. 내가 미치는 꼴이 보고 싶었던 거야? 아니면, 그냥 나 안심시키려고 거짓말한 거였어?”
가차 없는 질책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눈시울이 뜨겁게 변했다. 빗물에 축축이 젖은 신발이 어느덧 흐릿하게 번져보였다. 울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멋대로 차오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뭐가. 뭐가 죄송한데.”
낮게 가라앉은 감정 없는 목소리. 그 못지않은 차가운 시선이 나를 보고 있을 것 같다는 두려움에,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약속했는데…… 못 지켜서 미안해요.”
“미안할 거 알면서 대체 왜 그랬던 거야.”
용기를 내 말을 꺼냈지만, 되묻는 음성을 들으니 덜컥 겁이 났다.
말해야만 한다. 약속을 못 지키고 혼자 떠난 것에는 이유가 있다고. 병원에서 오메가라는 판정을 받았고, 그때부터, 또 지금도 조금씩 몸이 변해가고 있는 중이라고. 그로 인해 저택에서 내쳐지게 될까봐 두려웠고,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을 들키게 될까봐 너무나 무서웠다고. 그래서... 그래서 당신을 떠난 거라고.
어깨에 머물러있던 프레드릭의 손이 좀 더 위로 올라왔다. 손끝만 닿았던 조금 전과 달리 뺨 전체를 감싸는 손길이었다. 그대로 두 눈이 마주쳤다. 깜빡, 눈을 감았다 뜨자 맺혀있던 눈물이 흘러내리며 프레드릭의 모습이 온전히 비쳐졌다.
“……잘못했어요.”
결국 해야만 하는 말은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함에 그저 바보처럼 잘못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또 다시 차오르는 눈물을 닦아내려는데, 일순 얼굴이 위로 휘익 들렸다. 무슨 일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갑자기 프레드릭의 얼굴이 가까워지며 입술에 무언가가 거칠게 와 닿았다.
“……!”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소리를 지르려는 입술 사이로 물컹하고 뜨거운 것이 다짜고짜 밀고 들어왔다. 한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뭐지? 무슨 일이지? 생각을 해보려하지만 사고능력이 완전히 멈춰버렸다. 정신없이 입 안을 헤집는 뜨거운 열기, 난폭한 움직임, 점점 차오르는 숨. 그걸 느끼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멍했다. 맺힌 눈물 사이로 프레드릭의 감은 눈과 그 아래로 쭉 뻗은 긴 속눈썹이 보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 프레드릭이 나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우, 우읍…!”
괴로움에 이름을 불러보지만 온전한 소리가 되어주지 못했다. 힘없는 팔을 들어 간신히 등을 두드렸다. 그럼에도 한참을 내 입안에서 움직이던 프레드릭의 혀는, 내가 정말로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천천히 멀어져갔다.
“하아, 하아…!”
막혔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갔다. 온몸에 힘이 빠져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다리 사이로 들어온 프레드릭의 긴 다리가 그것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아읏!”
순간 찌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어느덧 목줄기로 입술을 미끄러뜨린 프레드릭이 이를 세워 내 목을 깨물었다. 그 언젠가와는 차원이 달랐다. 사정 봐주지 않고 깨무는 힘에 절로 눈물이 새어나왔다. 고통에 그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오히려 순식간에 양손을 결박당한 채 벽에 밀어붙여졌다.
눈가에 다시금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두려움 때문인지 고통 때문인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소리 내어 울 수 없어 입술을 깨물었다. 주륵,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서야 프레드릭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울지 마. 뭘 잘 했다고 울어.”
말과 달리 다시금 뺨에 닿은 손길은 더없이 다정했다. 그대로 프레드릭이 나를 안았다. 맞닿은 가슴으로 나직한 울림이 전해져왔다.
“네가 떠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정말로 미쳐버리는 줄만 알았어. 내가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그 사이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두려움에 떨었던 걸 생각하면… 하아…….”
긴 한숨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지은 죄가 있기에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는데, 프레드릭이 천천히 팔을 풀어 다시금 내 눈을 마주보았다.
“두 번 다시 멋대로 떠나지 마.”
“…….”
“대답.”
“……네. 절대 안 그럴게요.”
“약속한 거야.”
촉- 가벼운 소리와 함께 프레드릭의 입술이 다시 한 번 내 입술에 닿았다. 놀라서 눈을 깜빡거리는데 옆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
깜짝 놀라 옆을 보자 에일리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참. 그러고 보니 에일리가 있었구나. 생각지도 못한 재회에 너무 놀라서 줄곧 아이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조차 깜빡 잊고 있었다.
프레드릭이 곧 아이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안녕.”
“아, 안녕하세요.”
에일리의 얼굴에 홍조가 작게 피어났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살짝 살짝 프레드릭을 바라보는 그 모습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백마 탄 왕자님을 보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눈물 사이로 살며시 웃음이 새어나왔다. 처음 프레드릭을 만나는 여성들은 백이면 백 전부 저런 표정을 짓곤 했다.
“이름이 뭐야?”
“에, 에일리. 에일리 반스예요.”
“예쁜 이름이네. 베니를 약국까지 안내해줘서 고마워.”
“……!”
나는 깜짝 놀라 프레드릭을 바라보았다. 약국에 갔다 온 걸 대체 어떻게…….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 잠시 잊고 있던 원초적인 궁금증이 또 다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혼란스런 눈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으니, 프레드릭은 아마도 나를 발견하기 전까지 쓰고 있었을, 바닥에 내팽개쳐진 우산을 들어 에일리의 손에 들려주었다. 쉼 없이 내리던 비는 어느덧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에일리.”
“네, 네?”
“이거 쓰고 집으로 먼저 돌아갈래?”
“어… 그럼 오빠는요?”
에일리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당황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얼른 프레드릭을 바라보니 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에 다시 에일리에게 말을 건넸다.
“오빤 잠깐 나랑 같이 갈 데가 있어. 걱정 안 해도 돼.”
“그치만…….”
“괜찮아. 그렇지 베니?”
“네? 네.”
갑자기 나를 향한 질문에 얼떨떨했지만 일단을 그렇다고 대답해주었다. 에일리는 그제야 안도한 얼굴로 밝게 웃었다.
“거기, 아무도 없나.”
프레드릭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를 높였다. 눈에 익은 복장을 한 병사들이 순식간에 우르르 달려왔다. 나도 모르게 프레드릭의 뒤에 몸을 숨기다시피 했다. 조금 전 누구를 찾는 듯한 그들을 보았을 때의 긴장감이 아직도 생생했다.
“찾았으니 전군 철수시켜도 된다고 전해. 그리고, 당장 마차를 이쪽으로 보내줘. 두 대면 더 좋고.”
“네. 알겠습니다!”
일사분란하게 흩어지는 발소리. 나는 놀란 목소리로 프레드릭에게 물었다.
“도련님.”
“도련님이 아니라 프레드.”
“……프레드.”
“응. 말해.”
“어째서 저들이 당신 말을 듣는 건가요?”
영주가 따로 있는 걸로 봐서 여긴 러셀 공작님의 영지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대단한 가문이라 해도 타 귀족의 소유지에서는 함부로 행동할 수 없을 텐데, 마치 당연한 것처럼 명령을 내리고, 또 당연한 것처럼 그 명령을 받드는 병사들을 보니 의문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