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2)

[박하사탕 ]리빌드 오메가 

리빌드 오메가(Revealed Omega) : 출생과 동시에 오메가로 판별이 되는 대부분의 오메가와 달리, 유전적 특수성 혹은 환경의 영향에 의해 뒤늦게 오메가로서의 성향이 드러나는 개체. 대부분은 성인이 되기 이전에 발현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성인식이 지난 후에 발현될 때도 있고 평생 자신이 오메가인 것을 모르고 베타처럼 살다가 죽는 경우도 있다. 유사한 개념으로는 리빌드 알파(Revealed Alpha), 즉 뒤늦게 알파로서의 성향이 드러나는 개체가 있다.

- 리빌드 오메가 -

영국에서, 아니 유럽 전역에서 가장 큰 신식병원으로 널리 알려진 The Royal London Hospital. 그 대단한 병원의 원장인 죠셉 박사와 대면한 채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에게 되물었다.

“정말로…… 정말로 제가 오, 오…….”

차마 내뱉기 힘든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한 마디라도 더했다간 그 말이 폭탄이 되어 눈앞에서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죠셉 박사의 안쓰러운 시선이 나를 향했다.

“자네가 얼마나 혼란스러울지는 잘 아네. 하지만 어쩌겠는가. 백 퍼센트 확정판결이 나왔으니, 그저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자네 몸의 변화를 보아하니 얼마 안 있어 히트 사이클이 찾아올 걸세. 처방전을 써줄 테니 접수처에서 억제제를 받아가게나. 혹시 모르니 피임약도 같이 챙겨주겠네.”

차분한 설명이 이어졌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백치처럼 넋이 나간 채 하염없이 죠셉 박사의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만 보았다. 뒤늦게 곤란한 얼굴로 들어온 간호사의 재촉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하루 종일이라도 그러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

병원 문을 나선 후에도 곧바로 저택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애초의 계획대로 장을 보러 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금의 나로서는, 그저 눈앞에 있는 벤치를 인식하고 거기에 앉는 것만으로도 다행일 지경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러다 문득 무릎 위로 시선을 내렸다. 최고급 사슴가죽으로 만들어진 작은 가방은 올 때와 달리 불룩하게 부풀어있다. 무엇이 그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지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억제제, 그리고 피임약. 평생 가까이 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들이기에, 지금 이렇게 손에 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내 것이라는 실감이 들지 않았다. 동정심 가득하던 간호사의 얼굴도 함께 떠올랐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리빌드 오메가(Revealed Omega). 내가 처음 이 말을 듣게 된 것은 학교 역사수업 시간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는 알파, 베타, 오메가라고 일컬어지는 세 집단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인간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간다.’는 진리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역사이자 현상이었다. 그 중에 나는 베타로 태어났다. 베타는 같은 베타와 결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매우 특이하게도 나는 베타인 아버지와 오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부모의 간절한 바람대로 출생 직후 베타로 판명이 났다.

베타인 내 삶은 그럭저럭 평탄하고 무난한 편이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긴 했지만 그만큼 아버지와의 사이가 각별했고, 크게 욕심이 있는 성격도 아니라서 나라를 좌지우지할 능력이 있는 알파를 부러워한 적도, 또 일부 베타들처럼 알파의 노리개라며 겉으로는 손가락질하고 욕하지만 내심으로는 알파를 뒤흔들 수 있는 존재인 오메가를 질투한 적도 없었다. 그저 집에서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아버지와 함께 나누어가며, 또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며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나의 삶이자 내 나름의 최선이었다.

처음 리빌드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약간 충격이기는 했다. 태어나자마자 계층이 확정되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는데, 베타로 태어나서, 아니 베타처럼 태어나서 뒤늦게 알파 혹은 오메가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이제껏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어쨌든 역사 선생님의 입을 통해 알려진 그 정보는 한동안 핫이슈로 온 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다녔던 공립학교(primary school)는 오직 베타들만 다닐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신데렐라가 되는 꿈에 젖어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리빌드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웠다. 하지만 그 확률이 정말로, 매우, 지극히 희박하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그에 대한 관심은 점점 사그라지는 불씨처럼 식어갔고, 나 역시 얼마 안 있어 금세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 확률이 절대 제로가 아니라는 것과, 리빌드는 반드시 베타와 오메가, 혹은 베타와 알파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에게만 해당한다는 전제조건 역시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린 채.

“벤!”

저택 문을 열자마자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거주하고 있는 동관 전체의 식사를 담당하는 메리 아주머니였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그녀는 걱정스런 눈길로 내 얼굴을 살폈다. 

“병원은 잘 다녀왔니? 늦어서 걱정하고 있었어.”

대부분의 시간을 부엌에서 보내는 그녀인데, 내가 문을 열자마자 다가온 것을 보니 정말로 나를 걱정하며 서성였던 모양이다. 늦어서 죄송하다는 내 말에 그녀는 대답 대신 이마에 손을 올려왔다.

“아직도 열이 있네.”

갑작스런 접촉에 몸이 움찔했다. 잠시 머물러 있던 손은 다행히 금방 멀어져갔다. 

열이라는 말에 또 한 번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목을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며칠 전부터 느껴지던 미열은, 비단 이마뿐만이 아니라 온몸의 피부 표면에서 방출되고 있는 미적지근한 열기는, 내 몸이 오메가로서의 준비를 하기 위한 전조에 해당되는 증상이라고 죠셉 박사는 이야기했었다.

“병원에서는 뭐래? 어디 많이 안 좋은 건 아니지? 응?”

걱정 가득한 그녀의 눈망울에 대놓고 차마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호탕하면서도 푸근한, 내게 있어선 어머니와도 같은 사람이지만, 그녀 역시 베타 여성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에 오메가를 볼 때마다 ‘알파나 홀려대는 천한 것’이라며 혀를 차곤 했다. 그런데 내가 그 오메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의 눈빛이 어떻게 변할지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내가 택한 방법은 거짓을 고하는 것이었다.

“조금 피곤해서 그렇대요.”

“그래? 약은 받아왔고?”

“……네.”

그녀가 투시력을 지니고 있을 리가 없는데, 제 풀에 찔린 나는 옆으로 매고 있던 가방을 은근슬쩍 골반 뒤쪽으로 돌렸다. 그 속엔 조금 전에 받아온 약을 비롯해서, 죠셉 박사의 권유에 따라 서점에서 사온 오메가 관련 서적도 한 권 들어있었다. 

“아직 점심 안 먹었지? 얼른 가서 옷 갈아입고 식당으로 와. 응?”

채 대답을 하기도 전에 메리 아주머니는 종종걸음으로 식당을 향했다.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두며 나는 힘없이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걸어갔다.

방문을 열자 눅눅하고 습한 공기가 나를 맞이한다. 며칠째 계속 되던 비는 그쳤지만 날씨는 변함없이 우중충하고 흐렸다. 

가방을 벗어 침대 위에 올려두고 옷부터 갈아입었다. 대충 정돈을 끝내고 나가려는데 무언가가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

복잡한 심정으로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외면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긴 한숨을 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가방을 열어 책부터 먼저 꺼냈다. 투박한 표지와 그보다 더 투박한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되도록 빨리 읽어보는 게 좋겠지만 아직 근무 시간 중이라 그럴 만한 상황이 되질 못했다. 

눈에 보이는 곳을 대신해 침대 밑 깊숙한 곳에 책을 밀어 넣었다. 사실 내 방을 찾아올 만한 사람은 거의 없다. 아주 가끔 동관 청소를 담당하는 하녀들이 방으로 들어와 빗질이며 물걸레질을 해주는 것이 전부이지만, 미리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뒤이어 차례로 약통을 꺼냈다. 언뜻 보니 모양이 서로 비슷하다. 둘 다 주먹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갈색 유리병인데, 단지 하나는 뚜껑에 S가, 또 하나는 the Pill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자연히 한숨이 흘러나왔다. 냉철하게 현실을 일깨워주는 것들에 짓눌리듯 마음이 무거워졌다. 

‘리빌드들은 반드시 과도기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네. 그렇다고 크게 거창한 무언가가 일어나는 건 아닐세. 단지 히트 사이클이나 러트가 아닌데도 체향, 그러니까 페로몬이 조금씩 흘러나오게 된다네. 몸이 리빌드로 변하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지. 그러다가 일순 증상이 아주 약해지는데, 그 직후 며칠 상관 내로 발정기를 맞게 된다네. 자네는 리빌드 오메가이니 아마 머지않아 히트 사이클이 찾아올 걸세.’

‘……그럼 전 지금 체향이 나오고 있는 중인 겁니까?’

‘베타인 나로서는 알 수가 없네. 오메가의 페로몬은 오직 알파들만이 맡을 수가 있으니 말일세. 몸 상태로 추측해볼 땐 아직 알파들이 감지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되네만……. 미리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 불안하다고 생각되면 꼭 억제제를 먹도록 하게나.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자기 전에 한 번. 워낙 좋은 약이니 한 번에 한 알씩만 먹어도 효능은 충분할 걸세.’

‘억제제를 먹으면 변화를 막는 게 가능합니까?’

‘아니. 약은 일시적인 처방일 뿐일세. 히트 사이클 때 먹는 억제제는 이름 그대로의 역할을 다해주지만, 리빌드의 경우엔 얘기가 다르다네. 발현시기를 조금 늦춰줄 뿐이지 변화 자체를 막을 수는 없어. 아무리 의약품이 좋다고 해도 자연의 근원적인 섭리를 거스를 수는 없으니 말일세.’

근심이 좀 더 깊어졌다. 계속 미열이 나고 있으니 약을 먹는 게 맞겠지만, 막상 손에 쥔 약통을 보고 있으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나중에.

결국 약은 다시 가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째로 서랍 속에 밀어 넣고서는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느 하인들의 일과가 그러하듯이 내 일상도 대부분 비슷하게 흘러간다. 다만 저택 밖을 나갔다 온 날에는 잠시 짬을 내어 마구간에 들릴 때가 있다.

“데니스.”

“오, 벤!”

갈색 말 앞에 서 있던 데니스와 눈이 마주쳤다. 갈기를 손질하던 커다란 브러시를 내려놓고 녀석은 뛰듯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의아한 물음에 나는 대답 대신 내 바지 주머니를 슬쩍 가리켰다. 보기 좋게 그을린 녀석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매튜 아저씨는?’

마구간 안을 대충 둘러본 후에 눈으로 데니스에게 묻자 녀석은 찰떡같이 알아듣고 속삭이듯 대답했다.

“없어 없어. 편자 때문에 좀 전에 대장간에 갔어.”

말을 하면서도 시선은 내 주머니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나는 픽 웃으며 안에 든 것을 꺼냈다.

“자. 받아.”

“고마워 벤!”

데니스의 얼굴에 숫제 꽃이 피었다. 장난스럽게 입술을 내밀며 들이대는 녀석을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만류했다. 

우리 둘은 같은 공립학교 출신으로, 언젠가 한 번 같은 반이 된 적이 있다. 나란히 앉는 짝이 되었을 때 녀석은 밝고 쾌활한 성격으로 곧잘 나를 챙겨주곤 했다. 그 후엔 계속 다른 반이 되어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는 정도가 전부였는데, 어느 날 저택에서 데니스와 딱 마주쳤을 때 얼마나 놀라고 또 반가웠는지 모른다.

가끔 심부름으로 시장에 갈 수 있는 나와 달리 마구간지기인 데니스는 근무시간에 외출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때문에 볼일을 마치고 간혹 시간이 남으면 나는 녀석이 좋아하는 쿠키며 빵을 사와서 몰래 안겨다주곤 했다.

“저기 앉아서 좀 쉬자.”

데니스가 가리킨 곳은 켜켜이 쌓여있는 푹신한 짚더미였다. 권유는 고맙지만 나는 가볍게 사양했다.

“미안. 오늘은 얼른 가봐야 돼.”

“응? 왜? 큰 도련님 아직 안 돌아오신 거 아냐?”

“맞아.”

“근데 왜. 좀 더 있다 가지.”

못내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에 괜히 마음이 약해진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쾌활한 녀석인데, 하루 종일 보는 거라곤 엄격한 매튜 아저씨와 마구간의 말들뿐이니 답답하기도 할 것이다. 평소라면 1, 2분이라도 앉아서 녀석의 말동무가 되어주었겠지만 오늘은 곤란했다. 내 몸은 여전히 뜨뜻미지근한 상태였다. 이젠 피부에 닿는 바람마저도 예민하게 느껴져서, 도저히 밖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데니스에게도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가슴을 쿡 찌르는 껄끄러움을 외면하며 나는 주섬주섬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직 서재 정리를 다 못했어.”

“서재 정리?”

“응. 오전에 병원에 갔다 오느라…….”

말을 꺼내고 나서 아차 싶었다. 병원이란 말에 데니스의 얼굴이 금방 심각하게 변했다.

“어디 안 좋은 거야? 그러고 보니 얼굴도 좀 빨간 것 같은,”

“아….”

이마로 다가오는 손을 쳐낸 것은 절대 고의가 아니었다. 내 행동에 내가 놀라 잠시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안절부절못하며 데니스를 보았다. 할 말을 찾지 못해 입만 벙긋거렸다. 녀석이 곧 피식 웃으며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였다.

“와, 내 손 깨끗한데 너무하네.”

그 말에 나는 더욱 사색이 되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뒤늦게 되는대로 말을 꺼냈다.

“미안해. 놀라서 그랬어. 절대 네 손이 더러워서 그런 게 아냐.”

“알고 있어. 농담한 건데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

다행히 녀석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실려 있었다. 그대로 팔을 뻗어 내 머리를 슥슥 헝클어온다. 타인의 체온이 몸에 닿자 소름이 쫙 돋았지만 간신히 참아낼 수가 있었다.

“그나저나 큰 도련님은? 아직도 부재중이셔?”

“응.”

“잘 됐네. 아플 땐 너무 무리하지 마. 적당히 쉬면서 해도 아무도 뭐라 안 해.”

마치 중대한 비밀을 알려주는 듯 속삭이는 목소리에 나는 그제야 조금이나마 웃을 수가 있었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데니스는 살짝 숙였던 상체를 떼며 내가 준 쿠키 주머니를 흔들어 보였다.

“고마워. 잘 먹을게.”

“……또 보자.”

언제가 될지 모를 약속을 뒤로 한 채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본관으로 향했다.

영국에서도 알아주는 명문 귀족가인 러틀랜드 공작가. 그 위엄 있고 웅장한 저택에서 나는 현재 당주인 앵거스 러셀 공작의 후계자인 프레드릭 러셀의 발렛(valet)으로 8년째 일해오고 있다. 아무런 연줄도 없는 평범한 베타인 내가 러셀 공작가에서 일을 하게 된 것에는 약간의 사정이 있는데, 그건 바로 아버지의 사고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마을에서 알아주는 목수였다. 또 건물보수나 수리에도 일가견이 있는 분이셨는데, 어느 날 공작가의 하인이 헐레벌떡 아버지를 찾아왔다. 며칠 간 계속된 폭우 때문에 저택 꼭대기 층에서 물이 새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인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아버지는 연장통을 챙겨들고 목공소를 나섰다. 다녀오마. 착하게 있으렴.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무릎을 굽혀 가까워진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아버지 역시 내 볼에 입을 맞추고서는 문 앞에 대기 중인 마차에 몸을 실으셨다.

아버지가 저택에서 추락사 하셨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그 날 오후였다. 내부 균열을 막는 것으로는 역부족이라서 첨탑 모양의 지붕에 나 있는 창을 통해 외벽 보수부터 하게 되었는데, 일순 균형을 놓치면서 그대로 떨어지셨다고 한다. 비보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나는 하인의 손에 이끌려 난생 처음 공작가로 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오두막 같은 별관에 누워계셨다.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하얗게 질린 채 극구 말리는 사람들 때문에 아버지를 감싸고 있는 흰 천은 끝끝내 들춰볼 수 없었다. 다만 밖으로 나와 있는 손을 통해서 지금 누워있는 사람이 정말로 내 아버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보상은 컸다. 저택에서 사고가 난 것을 매우 유감스러워 하셨다는 앵거스 공작님은 집사에게 직접 아버지의 장례식에 대한 지시를 내리셨고, 어머니 무덤 주변의 땅을 사들여서 그 옆에 나란히 아버지의 무덤을 만들고 정교한 비석에 십자가까지 세워주셨다. 반면 공작부인의 관심은 나에게로 향했다.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린 내 신세를 가엾게 여긴 부인은, 저택에서 거주하며 일을 해보는 건 어떨지 시녀를 통해 의견을 물어오셨다. 내 대답은 당연히 예스였다. 당시 나는 공립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게다가 스쿨을 졸업하고 나서부터 아버지의 기술을 배우기로 예정되어 있었기에, 자급자족을 위한 어떠한 능력도 갖추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물론 공작가에서는 금전적 보상도 넉넉히 해주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했을 때, 저택으로 오라는 부인의 제안이 나에게는 더욱 고마운 것이었다.

공작가에서의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새벽같이 일어나는 것이 조금 힘들긴 했지만 얼마 안 있어 금방 익숙해졌다. 게다가 놀랍게도 나는 하인으로서 저택에 들어선 첫 날에 공작의 후계자인 프레드릭의 선택을 받았다. 당시 그는 중등과정으로의 진학을 앞두고 있는 상태였다. 매일 아침 그의 복장과 용모, 그리고 건강상태를 체크해줄 발렛이 필요한 시기였는데, 대체 무슨 생각에서인지 나에게 그 발렛이 되어주는 건 어떠냐고 정중히 제안해왔다. 또래 여자아이들의 말을 빌리자면, 마치 햇살이 부서지는 것 같은 환한 미소와 함께. 

거절은 불가능했다. 당황한 내가 엉겁결에 ‘안……’이라는 말을 내뱉은 순간, 한 걸음 뒤에 있던 늙은 집사가 굉장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네가 감히, 라는 무언의 질책이 담긴 매서운 눈빛이었다. 더군다나 당시의 나는 매우 무지했다. 발렛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일을 하는지, 또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직책인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에, 집사의 기백에 눌려서, 또 프레드릭의 다정한 미소에 홀려서 그의 제안을 수락해버리고 말았다.

다음날부터 나는 프레드릭의 발렛으로서 일들을 하나둘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정신없이 바빴다. 주인인 프레드릭의 성향을 파악하는 것을 비롯해서, 간추려서 수십 가지라는 예법들 또한 쉼 없이 익혀야만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직책 덕분에 상상 이상의 대우와 보수를 받을 수 있었다. 발렛은 말 그대로 아침의 시작과 밤의 끝을 주인과 함께 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기다 프레드릭은 소문보다 훨씬 멋진 남자였다. 순수 귀족 혈통임을 증명해주는 블론드 헤어에, 마치 신이 조각해서 빚어낸 듯한 완벽한 이목구비. 거기다 북해를 연상케 하는 짙푸른 색의 눈동자는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대로 빨려들 것 같은 매력이 있었다. 

멋지다는 형용사는 외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프레드릭은 내면도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그를 보좌하는 하인들은 물론이고, 깐깐하기로 소문난 가정교사 할아범을 비롯해서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프레드릭의 인품을 칭송했다. 

그의 다정함과 신사다움은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무 것도 몰라서 틈만 나면 집사에게 꾸지람을 들었던 초기에, 프레드릭은 대체 어떻게 알고 다가와서는 미안하다고 웃으며 슬쩍 내 손을 잡아주곤 했다. 마음까지 녹여주는 그런 따스함이었다. 앞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 할 사이이니 가족들만이 부르는 애칭을 허락해준 것도 그였고, 둘이 있을 땐 친구처럼 편하게 말을 하자는 황송한 제안을 해준 사람 역시 프레드릭이었다. 가끔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잠길 때에도 내 옆엔 언제나 그가 있었다. 

그 후로 벌써 8년의 세월이 흘렀다. 시간의 힘은 대단해서 이제는 눈을 감고도 모든 것을 프레드릭에게 맞출 수 있을 만큼 익숙해졌지만, 나는 평생을 공작가에서 일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종종 고향인 리버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곤 하셨다. 새소리보다 고운 목소리, 그 시절을 회상하는 듯 살며시 눈을 감은 소녀 같은 얼굴. 그때의 기억이 환상처럼 마음에 남아있기에, 언젠가는 런던을 떠나 리버풀에 정착하는 것이 나의 소박한 바람이자 희망이었다.

하지만 감히 단언하건대 나는 그 시기를 적어도 몇 년 후쯤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돈을 좀 더 모아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만, 갈수록 더욱 멋진 남자로 성장해가는 프레드릭의 모습을 조금 더 곁에서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성인이 된 프레드릭은 이제 명실상부한 공작가의 차기 당주로 여기저기 얼굴을 내미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대부분은 결혼 후에, 혹은 다음 후계자를 생산한 후에 정식으로 그 지위와 사업을 물려받게 되지만, 러셀 공작님은 장남인 프레드릭이 성인이 되자마자 하나 둘 당주로서의 업무를 맡기기 시작하셨다. 더군다나 최근의 영국은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잘 모르지만, 간혹 프레드릭이 공작님 또는 작은 도련님과 대화를 나눌 때면 획기적인 변화라는 말이 종종 귀에 들려오곤 했다. 그 탓인지 프레드릭은 해가 갈수록 점점 바빠졌다. 집을 비우는 횟수도 자연히 많아지게 되었다. 이번에도 국책사업 때문에 그가 저택을 떠난 지 어언 일주일째. 하루하루가 바쁠 프레드릭과 달리, 오후에 잠시 데니스를 만난 것을 제외하면 내 일정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변한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나 자신이었다.

파자마로 갈아입은 지 오래지만 도통 잠이 오질 않는다. 며칠 째 몸을 달뜨게 만들고 있는 미열은 밤이 되면 더욱 끈덕지게 나를 괴롭혔다. 거기다 오늘은 세상이 뒤집어지는 듯한 정신적 충격까지 더해져서 도저히 잠을 청할 만한 상황이 되지 못했다. 내쉬는 한숨에서조차 열기가 느껴진다. 왈칵 샘솟는 답답함과 두려움에, 결국 나는 이불을 걷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근처의 촛대에 불을 붙였다. 세 개의 불빛이 일렁이며 벽에 긴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바닥에 엎드려 침대 밑 깊숙한 곳으로 팔을 뻗었다. 찾는 것은 금방 손에 잡혔다. 아까 방에 들어오자마자 숨겨둔, 리빌드 오메가에 대해 적혀 있는 책이었다.

약한 빛이지만 제목을 읽기엔 충분했다. Revealed Omega. 이처럼 책 내용을 잘 대변해주는 제목이 또 있나 싶을 만큼 지나치게 정직한 타이틀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책을 사올 걸 그랬나. 쓸데없는 뒤늦은 후회를 하면서 나는 떨리는 손으로 표지를 넘겼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봐 벤자민. 벌써 자나?”

둔탁한 노크소리. 곧이어 들려오는 허스키한 목소리에, 내 심장은 일순 발치로 떨어져 내렸다. 선득한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잠시나마 열기조차 식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빌리 아저씨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는 허둥지둥 책을 베개 아래로 숨겼다. 그는 저택 후문 출입을 관리하는 담당자인데, 6피트가 넘는 거구인 것과 더불어 불같이 급한 성격으로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불식간에 방문이 열렸다. 아마도 어색한 표정으로 나는 뒤늦게 빌리 아저씨에게 나를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다행히 안 자는군. 지금 막 큰 도련님이 오셨어.”

“……예?”

걸걸한 음성에 나는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프레드릭이 왔다고? 지금 이 시간에? 아마도 표정에서 나타날 의아함에 빌리 아저씨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자네를 불러오라고 하시던데. 어서 가봐.”

“예. 고맙습니다.”

용건을 끝낸 아저씨는 미련 없이 등을 돌리셨다. 나는 얼른 침대에서 일어나 파자마를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방문을 나서기 직전, 습관처럼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밝은 달빛에 좁은 방이 훤히 눈에 들어온다. 베개에 시선이 닿자 괜히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 밑에 숨겨놓은 책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이내 시선을 거두며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기품 있게 움직이던 걸음은 본관 3층 계단까지만 통용되었다. 복도를 걷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다가, 급기야 프레드릭의 방문 앞에 이르러서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우아하게 휘어진 금빛 손잡이에 시선이 닿자 괜히 긴장된다. 예전엔 밤낮으로 열었던 문이지만, 방의 주인이 장기간 자리를 비우면서 이곳에 오는 것도 참 오랜만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더 깊은 상념에 빠져들기 전에 천천히 문을 두드렸다. 

“접니다, 큰 도련님.”

“어서 들어와.”

기다렸다는 듯이 들려오는 허락에 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쉬며 손잡이를 돌렸다.

러틀랜드가(家) 장자의 침실답게 프레드릭의 방은 몹시도 크고 넓었다. 그는 중앙에 놓인 의자에 편하게 몸을 기댄 채였다. 눈이 마주친 순간 프레드릭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삼켜졌다. 웬일인지 방문을 열 때부터 희미하게 느껴지던 향이, 프레드릭이 다가오자 조금 더 강하게 느껴졌다.

“오랜만이야 베니.”

낮은 목소리가 숨처럼 귓가에 내려앉았다. 살짝 미소 짓는 얼굴도, 나를 내려다보는 다정한 눈빛도, 무엇 하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잠시 멍하니 프레드릭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뒤늦게 결례를 깨닫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셨습니까.”

“역시, 널 보니까 이제야 집에 돌아온 게 실감이 나. 그리고…….”

“…….”

“오래도록 기다렸던 기쁜 일이 날 기다리고 있는 것 같고.”

그렇게 말하며 프레드릭은 조금 더 환하게 웃었다. 네?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물었지만 그는 말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금방 화제를 전환했다.

“자고 있는데 내가 깨운 건 아닌지 모르겠네.”

“아뇨, 아직 안자고 있었습니다.”

“여기. 머리 눌렸는데?”

프레드릭이 긴 손가락으로 나를, 정확히는 내 옆머리께를 가리켰다. 아차. 부리나케 옷만 갈아입고 거울은 미처 보지 못했다. 서둘러 머리칼을 정돈했다. 명색이 발렛인데, 게다가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칠칠치 못한 모습으로 서있다고 생각하니 혀를 깨물고 싶은 기분이었다. 허둥지둥하는 내 모습에 급기야 프레드릭은 쿡쿡 소리 내며 웃었다. 양손을 뒷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그가 내게 물었다.

“번거롭게 다 갖춰 입고 온 거야? 셔츠랑 바지만 입고 와도 되는데.”

“보는 눈이 있습니다.”

“밤중인데 누가 본다고.”

모르는 소리. 동관에서 본관으로 건너오는 동안 하인을 넷이나 만났다. 

“뭐, 이런 점도 너다워서 좋긴 해.”

유쾌하게 말한 그가 내 손을 이끌며 침대로 걸어갔다. 하지만 채 두어 걸음도 가지 못하고 나는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향기. 아까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은은히 느껴지던 향기가 순간 어지러울 만큼 강하게 느껴졌다. 프레드릭이 의아한 듯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베니?”

“예? 아뇨. 아무 것도 아닙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어느새 손바닥에선 진땀이 베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왜지, 왜 이러는 거지. 일순 머릿속이 엉망이 되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에 극심한 혼란을 느끼면서 일단은 잡힌 손부터 조심스럽게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목표를 이룰 수는 없었다. 손을 빼내기는커녕, 그대로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프레드릭이 갑자기 상체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해왔다.

“베니?”

“아…….”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멍청한 신음을 흘리는 것뿐이었다. 얼굴에서 후끈후끈 열이 올랐다. 마치 전력질주를 한 것처럼 숨이 가쁘고, 온몸이 심장이 되어 아플 만큼 요란하게 뛰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이미 패닉상태에 가까운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리며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냥 좀 갑자기 어지러워서…….”

“흠.”

낮은 한숨과도 같은 프레드릭의 목소리가 귀에 와 닿았다. 움찔, 또 한 번 몸이 떨렸다. 그 소리조차 알 수 없는 자극으로 느껴져서 나는 울고만 싶어졌다.

“피곤하실 텐데 그만 쉬십시오.”

“그러려고 널 부른 거야. 알고 있잖아.”

“아…….”

또 한 번 바보 같은 신음을 흘리는 사이에 프레드릭은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엔 여전히 내 손이 붙들려 있는 상태였다.

“자, 도착.”

개구쟁이처럼 웃는 그의 얼굴에 겨우 입 끝만 올려 마주 웃어줄 수가 있었다. 툭툭. 곧이어 단정한 손이 베개 위를 두드리는 것이 보였다. 그 손짓의 의미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쏟아지려는 한숨을 겨우 참으며 나는 엉거주춤 슬리퍼를 벗고 침대 상단에 등을 기댔다. 프레드릭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 다리를 베고 침대에 누웠다.

“역시, 이래야 집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이 말의 의미 또한 잘 알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각종 스케줄이 가득했던 프레드릭은 아주 가끔 휴식시간이 주어질 때면 곧잘 나를 불러 내 무릎을 빌렸다. 어쩔 땐 가볍게 낮잠을 자기도 하고, 어쩔 땐 책을 읽어달라는 부탁을 할 때도 있었다. 웬일인지 그는 내 목소리를 마음에 들어 해서, 나는 그가 나를 부를 때면 종종 영국의 신화나 유명한 시 모음집을 챙겨들고 그의 방을 찾곤 했다.

그때마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어리광을 받아주었지만, 사실 나는 누구보다도 그 시간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었다. 늘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프레드릭이다. 그런 사람이 무방비하다 싶을 정도로 나에게 기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나의 사소한 즐거움이자 큰 자랑거리였다.

언젠가는 없어질 거라는 생각과 달리 그 시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프레드릭은 피곤하거나 힘들 때면 어김없이 나를 찾았다. 오늘 그가 나를 부른 이유도 그것의 연장선이었다.

“베니.”

“네.”

“혹시 내가 없는 동안 외부 손님과 마주친 적이 있나?”

“손님……이요?”

“그래. 아버님을 찾아온 손님이라든가, 아니면 에드의 친구라든가.”

나직하게 묻는 질문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내 작게 고개를 내저으며 프레드릭을 내려다보았다.

“아니요. 한 번도 없었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프레드릭의 발렛이기 때문에 그가 없는 동안엔 상류층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전무했다.

“그랬군.”

짧게 응대한 프레드릭이 다시금 웃어보였다. 살짝 입술만 올라가는 게 전부였지만 나에게는 그 어떤 풍경보다 아름답고 고결하게 보이는 미소였다.

“몸은 어때? 어디 아픈 곳은 없고?”

걱정스런 음성에 일순 심장이 꾸욱 조여 들었다. 잠시 잊고 있던 죄책감 비슷한 감정이 또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이 느껴졌다. 

오늘 내가 다녀온 병원은 러틀랜드 가문의 소유 하에 있는 곳이었다. 리빌드 오메가 판정을 받고서, 일단 나는 죠셉 박사에게 사정을 했다. 제발 아무에게도 사실을 말하지 말아 달라고. 그는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지만, 그 비밀이 공작가 사람들에게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다행히 오늘은 프레드릭의 귀가시간이 늦어서 당장 알려지진 않겠지만, 얼마 안 있어 소식을 듣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나는 프레드릭에게만큼은 진실을 말해야만 했다. 굳이 그의 발렛이어서가 아니더라도, 그간 프레드릭이 나에게 보여준 신의와 호의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 나는 너무나 겁쟁이였다. 내 몸이고 내 일이지만 아직은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불안정한 몸 상태가 그저 두렵기만 했다.

하물며 타인에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상대가 프레드릭인 것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 8년 전. 그가 나를 믿고 선택해준 것은 내 인생에 다시없을 행운이자 행복인 것을 알기에, 나는 그의 앞에서만큼은 언제나 완벽하게 준비된 모습으로 있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알고 보니 오메가였다고, 그래서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는 등의 말을 결코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생각하는 동안에도 입 안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한낮에 땡볕 아래서나 느낄 법한 극심한 갈증이었다. 거기다 몸의 열은 자꾸 오르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향기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억지로 침을 끌어 모아 삼키며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전 괜찮습니다. 도련님이야말로 많이 바쁘셨지요? 이제 일은 다 끝나신 겁니까?”

“아직. 하트퍼드까지 내려온 김에 잠시 집에 들른 거야.”

“잠시……말입니까?”

“어. 이제 막 수로공사가 시작돼서 며칠간은 진행과정을 지켜봐야 돼. 중요한 일은 거의 다 마무리되어서 집으로 오긴 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

“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참았다가 며칠 후에 완전히 내려오는 건데 말이지.”

마지막은 한숨에 가까운 음성이었다. 그것을 감지한 순간 나는 빠르게 프레드릭의 얼굴을 살폈다. 발렛은 눈에 보이는 외적인 부분만 체크하는 것이 아니다. 주인의 내면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것을 잘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려는데, 프레드릭이 말을 꺼낸 것이 먼저였다.

“그나저나, 그 딱딱한 말투는 언제까지 쓸 생각인데?”

“예?”

“내 이름. 알고 있잖아. 거기다 내 침실에서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도.”

물론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름 꽤 오래 떨어져 지내서 그런지 좀처럼 그의 요구대로 할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며 입술만 달싹이고 있으니 그가 픽 웃으며 한 번 더 나를 재촉했다.

“어서 불러줘, 베니.”

나직한 재촉이 귀에 닿는 순간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또 한 번 온몸에 열이 일었다.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가 어떠한 고문보다도 가혹하게만 느껴졌다. 어느새 등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가 볼 수 없게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나는 가빠지려는 호흡을 필사적으로 컨트롤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프, 레드.”

“한 번 더.”

“……프레드.”

“역시, 그렇게 부르는 게 훨씬 듣기 좋아. 나만이 너를 베니라고 부르는 것만큼이나.”

꽤 길게 자란 앞머리를 어루만지며 프레드릭은 살짝 웃어보였다. 사심 없는 푸른 눈동자에 괴로움은 더욱 커져만 갔다. 가까스로 웃는 얼굴을 만들어 그를 마주볼 수 있었다. 

“……베니.”

“네.”

“베니.”

“네.”

“……벤자민.”

“――!”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간 줄곧 애칭으로만 나를 불러왔기에, 오랜만에 그의 입을 통해 듣는 기븐네임은 낯설 만큼 생소하게 느껴졌다. 술렁이는 마음을 애써 모른 척 하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를 올려다보는 벽안은 고요한 바다처럼 잠잠했다.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될까?”

“예. 말씀하세요.”

“내가 돌아올 때까지 되도록 외출은 자제해줘. 저택 바깥 출입은 물론이고, 가능하면 본관에도 오지 않았으면 해.”

공작님과 대면할 때에나 볼 수 있는 진중한 표정이었다. 갑작스런 요구에 의문이 들었지만 내색 없이 알겠다는 대답을 했다. 어느덧 웃음 띤 얼굴로 돌아온 프레드릭이 이번에는 다른 것을 물었다. 

“어디 가보고 싶은 곳은 없어?”

“가보고 싶은 곳……이요?”

“그래. 어디라도 좋아. 영국의 끝이든, 프랑스든, 네덜란드든. 원한다면 동유럽도 좋고.”

구체적인 예시가 뒤따랐지만 나는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걸까? 내 몸의 변화만큼이나 생소한 질문이라 생각하며 나는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속으로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으니 프레드릭이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참. 그러고 보니 리버풀에 가보고 싶단 말을 했던 적이 있었군.”

“……제가요?”

“어. 나랑 만난 지 얼마 안 돼서였지 아마.”

그 말에 나는 조금 아연해졌다. 프레드릭과 만난 지 얼마 안 됐던 때라면 못해도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란 뜻인데. 나조차도 잊고 있던 걸 타인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론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5일 정도면 급한 일은 다 마무리될 거야. 그때 같이 리버풀에 다녀오자.”

“저도 데리고 가주시는 건가요?”

손가락을 꼼질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프레드릭이 이내 픽 웃으며 긍정의 대답을 들려주었다.

“물론이지. 가서 뭘 하고 싶은지 미리 생각해둬.”

“……감사합니다.”

어렵게 입술을 달싹여 꺼낸 말에, 프레드릭은 또 한 번 빙긋이 웃어주었다.

“참, 그 친구는 어때? 프러포즈는 잘 했어?”

“네.”

프레드릭이 말하는 ‘그 친구’는 바로 데니스이다. 녀석은 대장간 아저씨의 외동딸인 엠마를 몇 년째 짝사랑하고 있는데, 엠마 또한 자신을 좋아하고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다 사건이 터졌다. 빵집 아저씨의 아들인 알렉스가 생각지도 못하게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한 것이다. 데니스는 큰 실의에 빠졌다. 걱정이 돼 마구간을 찾아가니 녀석은 반쯤 영혼이 나간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런 데니스를 달래기 위해서 없는 말주변으로 애를 썼다. 다행히 녀석은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자책 겸 하소연을 한참동안 쏟아냈고,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프레드릭의 티타임에 늦고 말았다.

막 방문을 열었을 때 프레드릭은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그는 다급히 내게 다가와서 이유를 물었다. 너무도 걱정스런 표정이었기에 나는 서둘러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내 이야기를 다 듣고서야 그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행히 엠마는 알렉스의 프러포즈를 거절했다. 그에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론 같은 짝이 될까봐 불안해하던 데니스는, 며칠 전 큰 맘 먹고 엠마에게 청혼을 했다. 결과는 대성공. 왜 이제야 왔냐며 밉지 않게 눈을 흘기던 엠마는 금세 기쁨의 눈물을 글썽였고, 그 후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어 곧 있으면 두 사람은 식을 올리게 될 터였다.

“결혼이라. 부러운데.”

낮은 목소리에 나는 좀 놀란 눈으로 프레드릭을 보았다.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그가 내게 부탁했다.

“베니. 오랜만에 그 시가 듣고 싶어.”

“시라면…….”

“그래. Shakespeare의 단편 시. 들려줄 수 있어?”

“네.”

어느덧 눈을 감는 프레드릭을 보며 나는 천천히 시를 읊기 시작했다.

All days are nights to see till I see thee, 

And nights bright days when dreams do show thee me.

“한번만 더.”

나직이 울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 살짝 흐트러진 금빛 머리카락에 이끌리듯 시선이 사로잡힌다. 살며시 손을 올렸지만 차마 닿을 수는 없었다. 서글픈 미소가 지어졌다. 누구보다 가깝지만 결코 쉽게 닿을 수 없는 거리. 이조차도 이제 곧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짓누르듯 가슴이 아파왔다. 

“……베니?”

“죄송해요. 금방 할게요.”

눈이 마주칠세라 얼른 고개를 들었다. 살짝 숨을 들이쉬었다. 평온함을 가장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천천히 시를 낭송했다.

All days are nights to see till I see thee, 

And nights bright days when dreams do show thee me.

당신을 만나지 못하면 모든 낮은 나에게 밤일뿐이고,

꿈속에서 당신을 만날 때 나에게 밤은 환한 낮이 됩니다.

계단을 내려와 본관 앞에 이르렀다. 다시 하트퍼드로 떠나야 하는 프레드릭을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문을 열자 주변은 어두컴컴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은 밤 시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대리석 계단 아래에는 벌써 Footman이 말을 끌고 와서 대기 중이었다. 프레드릭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다녀올게.”

“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평소처럼 정중히 고개 숙여 그의 인사에 답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프레드릭은 곧바로 등을 돌리지 않았다. 어딘지 근심이 느껴지는 목소리와 눈동자로, 그는 나직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베니.”

“예 도련님.”

“금방 돌아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예.”

“내가 한 말 기억하고 있지? 되도록 절대 밖으로 나가지 마. 집사에게 일러놨으니 심부름 때문에 외출할 일도 없을 거야.”

“잘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런데도 프레드릭의 얼굴은 쉬이 밝아지지 않았다. 낮은 한숨을 내쉰 그는 금실 같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다시금 내 눈을 마주보았다.

“오늘처럼 발이 안 떨어지긴 처음이야. 어디 안 갈 거 알고 있는데, 이상하게 불안함을 감출 수가 없어. 꼭…….”

“앗!”

오늘의 프레드릭은 확실히 이상했다. 늘 부드럽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에 근심이 가득 깃들어 있어서 의아한 눈으로 보고 있었는데, 그가 갑자기 팔을 뻗어서는 내 허리를 감싸듯이 안았다. 불시의 스킨십에 절로 새된 소리가 흘러나왔다.

“도, 도련님?”

당황해서 프레드릭을 불렀지만 그는 꿈쩍도 하질 않았다. 오히려 그 상태로 몇 초간 가만히 있더니, 이내 내 몸을 돌려서는 허리에 다시 팔을 감아왔다. 

등 뒤로 단단한 몸이 맞닿았다. 그의 나직한 호흡이 내 머리칼을 간질였다. 두근, 두근, 피가 일시에 분주하게 내달리는 긴장감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어젯밤 어지러울 만큼 느꼈던 은은한 향기 또한 어느덧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허둥지둥 뒤늦게 벗어나려는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대로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쉿. 가만히.”

“도, 도련님, 저기…….”

“괜찮으니까 잠시만 이대로 있어.”

낮은 울림이 담긴 목소리가 내게 명령했다. 거기엔 거역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이 담겨 있었다. 온몸의 신경세포가 일제히 곤두섰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을 전신으로 느끼며 나는 긴장감 속에서 겨우 숨만 내쉬었다.

“베니. 고개 좀 숙여봐.”

살짝 망설였지만 그 시간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프레드릭이 하는 모든 말들은 나에게 있어 절대적인 것이었다. 발끝이 보일 만큼 고개를 숙였다. 곧이어 크고 따뜻한 손이 열을 재는 것처럼 이마에 올려졌다. 거의 동시에, 목덜미에 뭔가 뜨거운 것이 꾸욱 하고 눌려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프, 프레드?!”

낯선 감각에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버둥거렸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프레드릭의 두 손이 철저히 움직임을 봉쇄했기에, 나는 단 한치도 그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읏…!”

곧이어 따끔거리는 작은 통증이 이어졌다. 잘근잘근 살이 깨물리는 느낌이 소름끼칠 정도로 선연했다. 참을 수 없는 감각에 몸서리를 치며 프레드릭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아무리 힘을 주어도 그의 몸은 꿈쩍도 하질 않았다. 평소엔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체격차이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일단 임시방편으로.”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마침내 프레드릭의 입술이 떨어졌다. 안심하기엔 아직 일렀다. 아마도 붉은 흔적이 남았을, 어쩌면 상처가 났을지도 모르는 부분 위에, 프레드릭은 마치 버드키스를 하는 것처럼 두어 번 가벼운 입맞춤을 남겼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다시금 그를 마주볼 수가 있었다. 

좀 전과 달리 뭔가 홀가분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준수한 얼굴엔 어느새 작은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 순간적으로 안도감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나는 그만 좀 전의 묘한 행동에 대한 이유를 물을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다녀올게. 착하게 잘 기다리고 있어.”

“도련님, 전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당황해서 프레드라고 부른 게 누군데.”

놀리는 말투에 얼굴에 열이 치달았다. 어렸을 때 나는 프레드릭을 곧잘 도련님이라고 부르다가도, 당황스럽거나 무서운 일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이름을 불러버리곤 했다.

“참, 한 가지 더 알려줄 게 있어.”

“네. 말씀하세요.”

“어제 보니까 열이 좀 있는 것 같던데……. 병원에 사람을 보내서 약을 가져오게 할 테니까, 몸이 많이 안 좋을 때 먹도록 해. 단, 너무 자주 먹지는 말고.”

“도련님.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근처에서 대기하던 집사가 근엄한 목소리로 프레드릭을 재촉했다. 살짝 시선을 준 프레드릭이 다시금 나를 바라보았다.

“금방 올게.”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진심이 담긴 인사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긴 손가락이 스치듯 뺨을 어루만지고 지나갈 뿐이었다. 곧이어 프레드릭은 능숙하게 말에 올랐다. 고삐를 당기자 긴 다리의 백마가 다각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움을 닮은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나는 한참을 못이 박힌 듯이 제자리에 서 있었다.

동이 막 터오를 무렵의 아침, 여느 때처럼 이른 식사를 끝내고 식당 문을 나섰다. 그런데 누군가가 급하게 나를 불렀다. 뒤돌아보니 데니스가 서 있었고, 한 순간 코앞까지 다가온 녀석은 다짜고짜 구석진 곳으로 내 등을 떠밀었다. 

“……데니스?”

“미안. 갑자기 끌고 와서. 문 앞에서 미적거리면 금방 매튜 아저씨한테 잡힐 것 같았거든.”

“데니스! 어디로 사라진 거야?”

그 말과 동시에 데니스를 찾는 굵직한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녀석도 나도 얼굴이 굳어졌다. 숨죽인 채 소리의 근원에 청신경을 집중했다. 잠시 후, 두어 번 더 녀석의 이름이 불린 후에 묵직한 발자국 소리가 반대편으로 점점 멀어져갔다. 휴우―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데니스와 눈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휴, 하여튼 잠시도 쉬는 꼴을 못 봐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데니스가 이윽고 나를 보며 물었다.

“몸은 좀 어때?”

“많이 좋아졌어.”

사실 많이 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제에 비해선 확실히 몸이 가벼워졌다. 

대답을 하면서도 조금 신기했다. 죠셉 박사는 갈수록 증상이 심해질 거라고 얘기했고, 실제로도 온몸의 감각이 고조되는 느낌이 며칠 째 아슬아슬하게 쭉 이어졌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몸이 좀 나아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열도 살짝 내리고, 찬 공기를 쐬어도 살갗도 아프지 않고.

“다행이네. 걱정 많이 했거든.”

안도가 담긴 미소에 코끝이 찡해졌다. 사소한 부분도 놓치지 않고 챙겨주는 마음 씀씀이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고마웠다.

“참. 근데 있잖아, 벤.”

“응?”

“그거 사실이야?”

창 너머 비치는 햇살에 녀석의 얼굴이 좀 더 밝게 보였다. 볼이 살짝 상기된 게, 무슨 이유에선지 녀석은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어젯밤 늦게 큰 도련님이 오셨다던데.”

아아, 난 또 무슨 일이라고. 뭔가 중요한 일이라도 있나 했더니, 프레드릭 때문인가 보다.

명망 높은 귀족가의 후계자. 거기다 대륙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강력한 우성알파인 프레드릭의 인기는 실로 굉장한 것이어서, 마을 어디를 가도 어렵잖게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소문의 발상지는 러틀랜드가(家)의 하인들인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공작가에서 일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며,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마을 주민들에게 종종 프레드릭에 대한 이야기들을 늘어놓곤 했다. 

저택에 들어오기 전만 해도 나는 그 말들이 전부 사실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프레드릭의 발렛으로 일하면서 진실을 알게 되었는데, 비록 공작가에서 일을 한다고는 하나 실제로 프레드릭을 볼 수 있는 고용인은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그의 시중을 드는 사람의 수는 더더욱 적었다. 하인들 중에서도 본관에서 일을 하는 높은 계급의 사람들만 그와 대면하는 것이 가능했기에, 대부분은 한 다리 건너 한 다리 식으로 프레드릭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고작이었다.

데니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아직 수습 마구간지기에 불과한 녀석이 공작의 후계자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길은 요원했기에, 녀석은 가끔 프레드릭과 관련된 소문을 들으면 나에게 진위를 물어보곤 했다. 

어쨌거나 프레드릭이 온 것은 사실이었다. 머물렀던 시간이 채 몇 시간도 되질 않았는데, 그새 그가 다녀갔다는 소문이 하인들 사이에 퍼진 모양이었다. 여전히 들뜬 기색인 데니스를 보며 나는 뒤늦게 대답했다.

“응. 밤에 잠시 다녀가셨어.”

“오, 이런.”

데니스가 갑자기 어두워진 얼굴로 탄식을 흘렸다. 이유를 물어보자, 가히 녀석 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오늘 새벽에 아이작이 멀리서 큰 도련님을 봤다고 벅벅 우기는 거야. 그래서 진짜인지 아닌지 내기를 했는데, 설마 진짜 오셨을 줄이야…….”

“그러게 그런 내기는 왜 해.”

작게 웃으며 타박하자 데니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고개가 들렸다. 웬일인지 좀 전보다 더 활력이 느껴지는 얼굴로 녀석은 또 다시 내게 질문을 했다. 소리는 한껏 낮춘 채였다.

“있잖아, 그럼 그 이야기도 진짜야?”

“무슨 이야기?”

이번엔 또 뭘까 싶어 슬쩍 웃으며 데니스를 보았다. 휙휙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더니 녀석은 고개 숙여 얼굴을 가까이했다. 한 손으로는 귓속말을 하는 것처럼 입 모양을 가린 채였다.

“큰 도련님, 혼처가 정해진 모양이던데.”

“――!”

웃던 얼굴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표정에서 답을 찾은 모양인지 데니스는 잠시 내 눈치를 살피는 듯 했다. 그러더니 좀 더 소리를 낮춰 나직하게 물었다.

“뭐 들은 거 없어?”

“……전혀.”

간신히 입술을 움직여 대답했다. 숙였던 허리를 편 탓에 데니스의 얼굴이 멀어졌다. 미간에 주름을 만든 채 녀석은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분명 사라 부인의 입에서 혼처 어쩌고 하는 얘기가 들려왔다는데……. 그 부인이 어디 다른 가문 이야기를 할 사람은 아니니까 틀림없이 우리 도련님이 맞을 거거든. 그럼 두 분 중 한 분이란 말이 되는데, 답은 뻔하잖아. 안 그래?”

동의를 구하는 녀석의 말에 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도련님인 에드워드는 올해 생일이 지나야 성인이 된다. 그럼 남는 사람은 한 명, 프레드릭뿐이었다.

프레드릭의 결혼설은 지금껏 몇 번이고 있어왔다. 특히 몇 년 전 그가 막 성인식을 치른 직후에는 온 마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문이 크게 난 적도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공작님이 프레드릭에게 ‘어서 좋은 소식이 들리면 좋겠다.’고 하신 말씀이 와전되어 그런 소문이 퍼진 거였는데, 그때 프레드릭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그저 빙긋이 웃기만 했다. 언젠가는 결혼을 하게 될 테니 꼭 잘못된 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어쨌든 이미 전례가 있는 일이었기에 이번에도 그의 결혼설은 추측이나 소문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나는 몹시 불안했다. 프레드릭이 아직 특정한 상대가 없다는 사실은 상류층 인사들 중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다. 때문에 그와 비슷한 막강한 배경을 가진 귀족들은 물론이고, 타국의 왕족이나 귀족들에게서조차 혼인관련 서신이 날아드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거기다 프레드릭은 어느덧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나이가 되었다. 곧 좋은 상대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미련하게도 가슴이 지끈거렸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진 모양이었다. 데니스가 걱정스런 눈으로 나를 살피며 물었다.

“벤. 몸이 또 안 좋은 거야? 방까지 데려다 줄까?”

“아니 괜찮아. 그보다 슬슬 가봐야 되지 않을까? 더 늦으면 매튜 아저씨 정말 화내실 것 같은데.”

“……그건 그렇지.”

녀석이 턱을 문지르며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더 늦기 전에 나는 데니스가 마음이 상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재촉했다.

“어서 가 봐. 나중에 시간되면 마구간에 들릴게.”

“그래. 정 안 좋으면 집사 할아범한테 말해서 좀 더 쉬도록 해. 절대 무리하지 말고. 응?”

끝까지 이어지는 걱정에 나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 일이 없다. 갑자기 찾아온 자유에 나는 안절부절 못하며 방을 서성거렸다.

보통은 아침 식사가 끝나면 프레드릭이 티타임을 가지는 동안 옆에서 기다리거나 아니면 잔심부름을 한다. 그가 저택에 없는 날에는 집사가 시키는 일을 할 때가 많은데, 이번에는 프레드릭이 서재 겸 서고정리를 맡기고 가서 오전 시간 대부분을 그곳에서 할애했다. 그런데 어제부로 그 명령이 철회됐다. 서재가 본관에 있으니 일을 하려면 당연히 본관으로 가야하는데, 프레드릭은 되도록 본관에도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두 번이나 했었다. 그렇다고 딱 발걸음을 끊기도 애매했다. 아직 정리를 못한 부분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선뜻 갈피를 잡지 못하고, 나는 출입문 근처를 맴돌며 생각에 잠겼다. 

어떡할까 싶던 고민은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직접 동관까지 찾아온 노 집사는 나를 보더니 대뜸 더 이상 서재정리를 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돌아갔다. 덕분에 한 순간에 할 일이 없어져버렸다. 다른 하인들의 일을 도와주려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병원을 다녀온 게 소문이 난 건지 아니면 며칠 째 열이 난다는 게 소문이 난 건지, 도와주겠다고 말을 건네는 사람마다 괜찮으니 몸조리나 잘하라며 호의를 거절했다. 다들 바쁘게 움직이는데 혼자 복도에 서 있기도 뭣해서 일단은 할 수 없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 후로는 불안한 빈둥거림의 연속이었다. 데니스를 보러 갈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포기했다. 한창 바쁠 시간인데, 말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찾아가봤자 방해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 분명했다. 

한참을 좁은 방을 서성였다. 열심히 일을 해야 할 시간에 혼자 방에 있으니 왠지 모를 초조함이 느껴졌다. 이것은 프레드릭과 함께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휴식시간이 길어질 때면 안도보다는 불안함이 더 컸다. 그럴 때마다 프레드릭은 좀 더 요령 있게 살아도 된다며 작게 웃거나 손가락으로 이마를 살짝 튕기곤 했는데, 희한하게도 그 말만큼은 따르기가 힘들었다. 타당하게 얻은 것이 아닌 자유는 결코 편안함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할 일은 눈에 보이지 않았고, 결국 한숨을 내쉬며 침대 모서리에 가볍게 걸터앉았다.

몸이 편해지니 자연히 머릿속이 대신 바빠졌다.

‘큰 도련님, 혼처가 정해진 모양이던데.’

정말 사실인 걸까. 어젯밤 그에게선 아무런 얘기도 없었는데.

가슴이 지끈거리며 아팠다. 그의 곁에 함께 설 누군가가 시시각각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하니 발끝부터 내가 있는 곳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애써 현실을 외면하며 다른 것들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그 순간 어떤 것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Revealed Omega. 어젯밤 자기 전에 읽어보려 했던 바로 그 책이었다. 생각과 동시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괜히 한 번 슬쩍 문을 바라본 후에 천천히 팔을 뻗어 베개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표지에 닿은 손끝에 긴장이 감돌았다. 

비록 사회가 세 계층으로 나뉘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구성을 살펴보면 마름모꼴에 가까웠다. 어느 나라를 가도 전체 인구 중에 베타가 차지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알파와 오메가는 인구가 적을뿐더러 몸 자체가 베타와는 확연히 달랐기에, 그들은 유년기 때부터 별도의 특별한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그 교육대상에 베타는 포함되지 않았다. 페로몬으로 서로를 끌어당긴다든가, 번식 욕구가 강해지는 시기가 따로 있다든가 하는 것은 베타에겐 전혀 해당 사항이 없었기에, 이해하지 못할 것을 굳이 가르쳐줄 필요도, 또 배울 필요도 없다는 것이 국가의 방침이었다. 그 탓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 아니, 아예 없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때문에 마치 처음 보는 어려운 수학공식을 배우는 것처럼, 혹은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것처럼, 긴장된 마음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책을 읽어내려 갔다.

1장을 볼 때만 해도 괜찮았다. 리빌드 오메가가 무엇인지, 그렇게 태어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등이 적혀 있었기에, 나는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용을 수긍했다. 문제는 2장부터였다. 이어지는 내용은 오메가의 신체적 특징에 대한 것이었다. 출생 시 다른 개체에 비해 훨씬 작게 태어나는 점, 오메가들 중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이가 많다는 점, 어느 정도 자라서 성숙기에 접어들면 자연발생적으로 페로몬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점, 그리고……. 

히트 사이클이란 단어가 눈에 들어온 순간 심장이 크게 술렁였다. 

‘얼마 안 있어 히트 사이클이 찾아올 걸세.’

죠셉 박사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히트 사이클. 속된 말로 발정기라고 칭해지는 시기. 물론 기본상식이라는 것이 있기에 나도 히트 사이클이나 러트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지식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게 뻔했기에, 내 몸을 생각해서라도 끝까지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었다. 읽어야만 한다는 생각, 한편으론 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치열한 갈등을 일으켰다. 하지만 선택의 길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후에 떨리는 눈동자로 마저 책을 읽어 내려갔다.

탁― 소리 나게 책을 덮음과 동시에 팔로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태풍이 분 것처럼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충격이다. 히트 사이클 기간에는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할 정도로 성욕에 시달린다는 점, 자연적으로는 도저히 억제할 수 없다는 점, 거기다 특유의 페로몬이 흘러나와 알파들이 곧바로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는 등의 책 내용은, 줄곧 평범한 베타로 살아왔던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나 벅찬 것들이었다. 

몸을 웅크리며 무릎을 감싸 안았다. 베타들은 페로몬을 전혀 느낄 수 없다 하고, 다행히 내 주변의 사람들은 99퍼센트가 베타였지만, 나머지 1퍼센트가 나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프레드릭 러셀. 

아름다운 나의 주인. 그리고, 모두가 우러러보고 선망하는 고귀한 핏줄의 우성알파. 

만약 내 몸에서 페로몬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면 프레드릭이 결코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다. 다행히 어제는 무사히 넘어갔지만, 얼마 안 있어 덜컥 히트 사이클 기간이 찾아오기라도 한다면 곧바로 눈치 채고 나를 추궁할 것이 분명했다. 더 무서운 사실은 오메가 역시 알파 페로몬에 반응한다는 구절이었다. 알파라도 다 똑같은 알파인 것은 절대 아니다. 베타들의 외모나 성격이 서로 다 다르듯이 알파 역시 그 능력이 천차만별이다. 프레드릭의 인기가 대단한 것도, 그가 알파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우성알파인 데다가 그에 걸맞은 능력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맹세컨대 나는 프레드릭이 알파이기 때문에 그를 자랑스러워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프레드릭이기 때문에, 부족한 나를 선택해주고 지금까지 옆에 있을 수 있도록 해준 사람이었기에, 내면의 다정함이 늘 고맙고 감사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베타였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오메가가 되면 모든 게 바뀔 것이다. 그를 생각하는 내 마음도. 그리고, 나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도.

다시 방문을 여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점심도 거른 채 괴로운 마음으로 두 번의 정독을 끝낸 나는, 더 오랜 망설임이 발목을 붙잡기 전에 복도로 나섰다.

“저…….”

주저하며 꺼낸 한 마디에 눈앞의 사람이 일순 행동을 멈추었다. 뒤돌아본 그녀와 금방 눈이 마주쳤다. 내 얼굴을 확인한 메리 아주머니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벤. 갑자기 웬일이니?”

그녀의 손에는 하얀 밀가루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등 뒤의 커다란 반죽 덩어리를 보니, 뒤늦게 내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홀로 한가한 나와 달리, 다른 사람들은 한창 바쁘게 일을 할 시간이었다.

“바쁘신데 죄송해요. 좀 있다 다시 올게요.”

“아냐 아냐. 안 그래도 이것만 하고 좀 쉴 생각이었어. 반죽 치대는 게 좀 힘들어야 말이지.”

보란 듯이 허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메리 아주머니는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도와줄 요량으로 얼른 소매를 걷어 올렸지만 그녀의 만류가 조금 더 빨랐다.

“이게 쉬워보여도 기술이 필요한 거야. 잘못하면 맛이라곤 없는 빵이 만들어지거든.”

“그럼 뒷정리라도 도와드릴게요.”

“정리할 것도 없어. 금방 끝나니까 쪽문 앞에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그리고 나서는 곧바로 으차, 하며 다시금 퍽퍽 반죽을 치대기 시작한다. 다른 하녀들도 분주히 오가며 일하는 모습이 보였기에, 할 수 없이 아주머니의 말대로 뒤쪽 작은 문으로 향했다. 

끼익― 낡은 나무문이 내는 소리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앉아. 웃으며 손짓한 메리 아주머니는 좀 전까지 내가 앉아있던 돌계단 옆에 엉덩이를 붙이셨다. 거듭된 재촉에 나도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몸은 좀 괜찮아?”

“네. 많이 좋아졌어요.”

대답하면서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어머니를 닮은 것 같다고 하면 펄쩍 뛰는 데니스지만, 쾌활하면서도 배려 깊은 녀석의 성격은 모친인 메리 아주머니의 작품임이 틀림없다. 

“다행이네. 그나저나 부엌까진 웬일로 온 거야? 혹시 데니스가 속 썩이는 짓이라도 했어?”

“아뇨.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애꿎은 불똥이 데니스에게 튄 것에 놀라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메리 아주머니의 웃음이 짙어졌다. 

……아, 농담이셨구나. 그제야 그녀가 내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 한 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 역시 작게 웃었다.

“자, 이제 말해봐.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부드러운 목소리. 어떤 얘기라도 다 들어줄 것 같은 다정한 얼굴. 하지만 선뜻 열 수 없었다. 방문을 열기 전까지 했던 고민이 또 한 번 불쑥 차올랐다. 

말을 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지만 결국 부엌까지 내려온 것은 정처 없이 흔들리는 불안한 마음을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어서였다.

이대로 방으로 돌아가면 안 된다. 자괴감에 가까운 괴로운 감정 속에서 허우적거릴 게 틀림없으니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메리 아주머니.”

“그래, 벤.”

“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거든요.”

“어서 말해 봐.”

“그게…… 오…….”

뒷말을 잇는 데는 약간의 용기가 더 필요했다. 가볍게 숨을 몰아쉰 뒤에 내뱉듯이 말을 쏟아내었다.

“오메가는 저택에서 일하는 게 힘들까요?”

“응? 오메가?”

메리 아주머니가 의아한 듯이 되물었다. 쿵, 쿵, 불안하게 뛰는 심장박동을 외면하며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게 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궁금해서요.”

오해를 사지 않도록 말을 덧붙이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다. 다행히 메리 아주머니는 의심 없이 내 질문에 대답을 해주셨다. 하지만 그 내용은 절대 다행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오메가는 절대 무리지.”

“절대……요?”

“그럼. 오메가는 저택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 있는 걸. 다른 알파 가문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곳에서는 오메가는 하인으로 받지 않는 걸로 알고 있어.” 

“히트 사이클 때문인가요?”

“잘 알고 있네. 뭐, 나도 풍문으로 들은 거긴 한데, 오래 전에 한 번 여성 오메가를 하녀로 고용했다가 온 저택이 발칵 뒤집어진 적이 있었다네. 약 먹는 시기를 놓쳐서 발작에 가까운 난동을 부렸다나 봐.”

어휴, 생각만 해도 추하지.

마치 실제로 본 것처럼 메리 아주머니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모습에 숨이 턱 막혔다. 나란히 앉아 있는 거리가 지독히도 멀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추웠다. 조금 좋아졌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던 모양인지 온몸이 비에 젖은 것처럼 으슬으슬 추웠다. 잠시 멈췄던 메리 아주머니의 이야기가 또 다시 이어졌다.

“뭣보다 오메가가 이 저택에서 버틸 수 있겠어? 대륙 최고의 알파가 두 분, 아니지, 공작님을 포함하면 세 분이나 되는데 맨 정신으로 있는 건 절대 불가능할 거야. 베타에 산전수전 다 겪은 아줌마인 나도 그 분들을 보면 심장이 벌렁벌렁거리는데, 오메가들은 오죽하겠어?”

한 마디, 한 마디가 상처로 가슴에 박혔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벌이었다. 나 자신을 속이고, 메리 아주머니를 속이고, 프레드릭을 속인 벌. 그 후로도 많은 이야기가 이어졌다. 내가 오메가에 대해 묻는 걸 신기해하면서도 메리 아주머니는 결코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평온함을 가장해 그 모든 말을 듣는 시간은 지옥처럼 끔찍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엔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러틀랜드 저택에서 일할 수 없다는 것을. 

“오랜만에 보는구나.”

완벽한 영국식 표준발음은 정중하면서도 어딘지 딱딱한 느낌이 들었다. 긴장된 얼굴로 눈앞의 사람을 마주보았다. 잠시 내 얼굴을 주시하던 그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래, 저택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예.”

조금 늦어도 단호한 내 대답에 파커 씨의 입에서 흠, 하는 낮은 신음이 흘렀다. 부리부리한 눈에 우뚝 솟은 콧대, 근엄하게 일자로 다물어져 있는 입술. 살짝 벗겨진 이마와 굵직한 잔주름들이 피할 수 없는 세월의 무게를 자아내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삶의 연륜과 깊이가 묻어나는 모습이었다. 

그래, 저런 카리스마가 있으니 이백여 명이 넘는 하인들을 무탈하게 통솔하는 것이 가능하겠지. 

잠시 딴 생각을 하는 동안 파커 씨가 다시 나에게 물었다. 

“자네가 큰 도련님의 발렛으로 일한지 얼마나 되었지?”

“올해로 8년째입니다.”

“……벌써 세월이 그렇게 되었군.”

잠시 먼 곳을 보는 그의 눈이 옛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그럴 만도 하다. 처음 저택에 들어섰던 날, 나를 동관까지 안내해준 사람이 바로 당시 부시종장이었던 파커 씨였으니까. 

고요한 침묵에 괜히 목이 말라왔다. 진한 홍차 향기가 퍼지는 찻잔에 시선이 갔지만 손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어느새 식은땀이 가득한 양손은 가볍게 쥐어진 채 무릎에 놓여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기라도 한 건가?”

“몸이 안 좋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보게.”

이어진 말에 나는 좀 당황하고 말았다. 사직의 이유를 물을 것은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지만 그 이면의 또 다른 것을 물어올 줄은 몰랐다. 

파커 씨는 날카로운 눈으로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일을 그만두는 게 생각처럼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잠시 망설인 끝에 진실 중 일부를 입에 담았다.

“며칠 째 계속 열이 납니다. 병원을 다녀와도 효과가 없습니다.”

“의사는 뭐라던가.”

“……저택에서 일하는 게 어려울 거라고 했습니다.”

의사가 아니라 메리 아주머니가 한 말이었지만, 만약 내가 죠셉박사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면 그 역시 저택에서 일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을 것이다.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파커 씨의 얼굴에서 수심이 느껴졌다. 그 못지않을 초조한 얼굴로 그를 마주보았다. 하지만, 다시 들려온 말은 내가 예상하던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사정은 알겠네만, 아무래도 내 선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닌 것 같네.”

“어째서입니까?”

시종장. 말 그대로 모든 하인들의 전반적인 사항을 총괄하는 직책을 지닌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해결가능하단 말인가? 어이가 없어 묻자 파커 씨는 난감한 표정으로 턱수염 근처를 문질렀다.

“일반 하인이라면 당장이라도 가능하지. 하지만 자네는 큰 도련님의 발렛이야. 그렇게 쉽게 그만둘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네.”

“전 급합니다!”

절박한 목소리에도 파커 씨는 고개를 내저었다.

“우선은 큰 도련님께 알리는 게 먼저일 듯하네. 모든 일엔 순서가 있는 법이니까.”

“…….”

“그만 나가보게.”

근엄한 표정이 순식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을 쌓았다.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십시오. 거듭된 내 부탁에 급기야 파커 씨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악. 닫히는 문소리에 절망감이 엄습해왔다. 참았던 한숨이 허공으로 흩어져나갔다. 

돌아가는 발걸음은 지독히도 무거웠다. 터덜터덜.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걸음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었다. 막 모퉁이를 도는 순간, 반대편에서 오던 사람과 몸이 부딪히고 말았다.

“엇…!”

“이런. 괜찮…… 어라? ……벤?”

“작은 도련님.”

맙소사. 나와 부딪힌 사람은 에드워드였다. 프레드릭보다 살짝 더 긴 금발에 푸른 눈동자. 거기다 익숙한 목소리가 틀림없이 그였다. 

여긴 어쩐 일로? 아니지, 그보다 좀 전의 결례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 먼저였다. 꾸벅 고개를 숙이려는데 에드워드의 입이 열린 것이 먼저였다.

“너였어?”

“예?”

다짜고짜 ‘너였어?’라고 묻는데 알아듣는 게 이상할 일이다. 눈만 깜빡거리고 서 있자 에드워드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고개 숙여 깊이 숨을 들이쉰다. 마치 냄새를 맡는 것 같은 행동이었기에 얼굴이 살짝 붉어지고 말았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이번엔 탄식과도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알 수 없는 행동에 괜히 마음이 불안해졌다. 에드워드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붉고 아름다운 입술이 열리며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잠시 얘기 좀 하자.”

본관 출입금지 명령을 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에드워드를 뒤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눈앞에 웅장한 본관 건물이 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계단을 오르기도 전에 보초병들이 에드워드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기품 있게 걷는 그와 달리 나는 잠시 주저하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러지?”

에드워드가 뒤돌아보며 물었다. 일순 말문이 막혔다. 떠도는 생각들은 많은데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어려웠다. 곧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저택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주제에 이제 와서 프레드릭의 부탁을 떠올리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에 스스로가 한심할 뿐이었다.

“……아뇨. 아무 것도 아닙니다.”

미련을 떨치듯 작게 고개를 흔들고서 나는 천천히 계단 위로 발을 내딛었다. 

에드워드가 나를 데려간 곳은 그의 방이었다. 몇 년을 저택에 있었지만 에드워드의 방에 들어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오후의 햇살이 고즈넉이 비치는 방은 프레드릭의 방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곳곳에 놓여있는 화려한 장식품과 미술품들이, 평소 에드워드의 취향이 어떠한지 간접적으로 알려주었다.

테이블로 걸어갔지만 에드워드는 의자에 앉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듯한 눈이 나를 향했다. 부드러움과 긴장이 공존하는 목소리가 뒤따랐다.

“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말씀하십시오.”

“……네 몸, 어떻게 된 거야?”

“――!”

일순 심장이 크게 뛰었다. 이어진 말엔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너한테서 오메가 냄새가 나.”

묻는다는 표현과 달리 그의 얼굴은 확신에 차있었다. 모든 생각이 일시에 중단되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버린 나는, 한참 후에야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그게…… 그러니까 그게…….”

“벤. 진정해. 너를 나무라거나 탓하는 게 아니야.”

잔잔한 음성에도 충격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이런, 하고 중얼거린 에드워드가 좀 더 부드러운 눈으로 나를 보며 달래듯이 말했다.

“볼일이 있어 동관 근처를 지나는데 페로몬 냄새가 감지됐어.”

“……!” 

“알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은 기본적으로 오메가의 출입이 금지되어있어. 그런데 난데없이 오메가의 페로몬이 느껴지니까 이상하잖아. 반신반의하며 냄새에 이끌려서 동관으로 들어갔는데……. 그 자리에 네가 있었어.”

잠시 말을 멈춘 에드워드가 다시 내 눈을 보며 물었다. 더욱 낮아지고,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혹시 리빌드인 거야?”

또 한 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맞다라는 대답도, 아니라는 대답도, 그 어떤 대답도 쉽게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프레드릭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에드워드에게 제일 처음 털어놓는 것이 되어버린다. 아니라는 대답도 불가능하다. 오메가의 페로몬에 반응해서 생전 와볼 일이 없을 동관까지 찾아온 사람이다. 이 상태에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알파를 기만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입술만 깨물었다.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또 한 번 귓가에 와 닿았다. 

“정말 리빌드야?”

“…….”

“와우. 보석이 눈앞에 있었구나.”

보……석?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나는 불안한 눈으로 에드워드를 쳐다보았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리빌드 오메가가 태어날 확률은 그야말로 제로에 가까워. 알파에게 끌리는 게 당연한 본능적인 욕구를 이겨내고 베타를 선택한 오메가에게서만 태어날 수 있는 존재니까. 그렇게 태어난다고 해도 대부분은 오메가 또는 베타로 확정이 되는데, 그 모든 확률을 뛰어넘고 태어나는 게 바로 리빌드 오메가야. 그러니 알파들 사이에서 보석이라고 불리는 게 당연하지. 게다가 리빌드는……. 아냐. 뒷이야기는 다음에 하자.”

팔짱을 풀며 에드워드는 테이블 위의 차 주전자를 들어올렸다. 컵에 물을 따르는 작은 행동에서도 우아함이 넘쳐흘렀다.

“그래, 형님은 뭐라고 하셨어?”

“……예?”

눈치가 귀신같이 빠르진 않지만 그렇다고 느리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오늘은 자꾸 바보처럼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젯밤에 다녀가셨잖아. 밤새 같이 있었지?”

“아뇨. 얼굴만 잠시 뵙고, 곧바로 제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사실 나도 계속 프레드릭의 옆에 있을 줄 알았다. 짧은 시간 함께 있을 때는 종종 그의 방에서 같이 잔 적도 있으니까. 하지만 여행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프레드릭은 방에 돌아가서 잘 것을 권유했다.

“진짜야? 진짜 따로 잤어?”

“네.”

“이상하네. 분명히 형님 냄새가 나는데.”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에드워드가 중얼거렸다. 그의 표정은 꽤 심각해보였다.

“혹시 형님하고 닿은 적은 없어?”

“시중들 때 잠깐…….”

“아니, 그런 것 말고. 서로 피부가 닿거나, 아니면 그…… 타액이 닿거나 그런 거 말야.”

문득 새벽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잠시 고민하다가 주춤주춤 말을 꺼냈다.

“출발하시기 전에 가볍게 안아주셨습니다.”

목덜미를 깨물렸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 위에 입맞춤을 당했다는 소리는 더더욱.

“다른 이야기는 없었어?”

“돌아오실 때까지 되도록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셨어요.”

“밖이면, 저택을 말하는 건가?”

“예. 그리고 본관에도 오지 말라고…….”

“응? 본관에도 오지 말라고 했다고?”

“네.”

에드워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대체 어디까지 경계하는 거야. 참고 돌아간 게 대단하군.”

경계하다니? 대체 뭘?

물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에드워드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벤.”

“예, 작은 도련님.”

“일단은 형님 말씀처럼 당분간은 계속 동관에서만 지내는 게 좋겠어.”

“저…… 그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에드워드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일순 그의 얼굴에서 프레드릭의 모습이 보였다. 이 와중에도 그를 생각하는 내 자신이 한심해 쓴웃음이 지어졌다.

“이곳을 떠나고 싶습니다.”

갑자기 말을 꺼낸 것은 갑작스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미 에드워드에게는 내가 오메가란 사실을 들켜버렸다. 그거면 충분했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에드워드는 예상 밖의 반응을 보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곳을 떠나다니.”

“예전부터 언젠가는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 시기가 좀 앞당겨진 것뿐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살짝 놀란 목소리로 묻는 말에 나는 솔직하게 네, 라고 대답했다. 그의 표정이 좀 더 심각하게 변했다.

“지금 어딘가로 이동하는 건 너무 위험해. 아직 첫 히트 사이클도 안 왔지?”

“……네.”

담담하게 묻는 에드워드의 질문에 괜히 귀 끝이 뜨거워졌다. 태연하고 싶지만 아직은 그런 용어들이 생소하면서도 부끄러웠다.

“그럼 여러모로 걱정인데.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고, 몸이 어느 정도로 반응할지도 미지수고. 내 생각엔 다른 어떤 곳보다 여기가 가장 안전할 것 같아. 뭣보다 형님이 바로 옆에 있어줄 테니.”

“아뇨, 그 전에 가고 싶습니다.”

“그 전이라니……. 잠깐, 벤.”

“…….” 

“혹시 떠나고 싶은 이유가 형님 때문인 거야?”

망설이지 않고 아니요, 라는 대답을 했어야만 했다. 내가 저택을 떠나는 이유는 이곳에서 일을 할 수 없는 오메가이기 때문이고, 또 그래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갑작스러운 에드워드의 질문은 나를 무척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누구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던 비밀이 한순간 밑바닥까지 다 드러나 버린 듯한 비참함이 느껴졌다. 차마 눈을 볼 수 없어 시선을 피해버렸다. 에드워드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메가가 알파한테 반응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그래서 안 됩니다.”

책을 읽은 후에야 깨달았다. 어제 오늘 내가 맡았던 향기는 아마 프레드릭의 페로몬이었다는 것을. 아직 초기 단계인데도 정신이 혼미할 만큼 어지러움을 느꼈었다. 앞으로 시간이 더 지나면, 책의 한 구절처럼 완전히 미쳐버릴 게 분명했다.

“그 말인 즉, 형님을 대상으로 발정할까봐 무섭다는 거야? 알파 페로몬 때문에?”

적나라한 단어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칫, 이거 완전 자존심 상하네.”

컵을 내려놓은 에드워드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벤. 나한테서는 냄새 안 나? 아니지, 향기라고 하자 향기.”

말과 동시에 에드워드의 팔이 가볍게 나를 끌어안았다. 단단한 가슴에 얼굴이 닿았다. 새삼 에드워드 역시 알파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나보다 훨씬 작았는데, 어느 순간 비슷해지더니 금세 내 키를 추월해버렸다. 

“어때? 뭔가 좀 느껴져?”

장난스럽게 묻는 질문에 나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네.”

“어라? 진짜?”

“네. 옷에서 좋은 향기가 납니다.”

“…….”

에드워드는 잠시 침묵했다. 무거운 한숨이 머리칼에 닿는다고 느낀 순간, 그는 곧 두 팔을 가볍게 들며 기브업 자세를 취해보였다.

“대체 어디까지 힘을 쓴 건지, 원.”

어딘지 분한 말투가 이어졌지만 그 역시 단번에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떠날 생각 하고 있는 거, 형님은 알고 계셔?”

“아뇨. 말씀드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하긴, 안다면 벌써 사달이 나고도 남았겠지.”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일순 씁쓸함이 번지는 것이 보였다. 

“정말 떠날 생각인 거야?”

“네.”

“형님이 기다리라고 했는데도?”

“……네.”

“아마 불같이 화를 낼 거야. 감당할 수 있겠어?”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세상의 그 누구보다 온화하고 자상한 사람이니까. 설령 그가 분노한다고 해도, 제멋대로 결정을 내린 나에게 실망한다고 해도, 더 이상 프레드릭의 곁에 머물 수는 없었다. 

“다시 한 번만 더 생각해봐.”

“이미 결정한 일입니다.”

어떤 말을 듣는다고 해도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남은 시간은 이제 4일 여. 프레드릭이 돌아오기 전에 나는 반드시 이 저택을 떠나야만 했다. 그것이 그와의 추억을 아름답게 남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다행히 더 이상의 만류는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한숨 섞인 다른 질문이 날아들었다. 

“갈 곳은 정했어?”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정했습니다.”

“어딘지 물어봐도 괜찮을까?”

“……리버풀로 갈 생각입니다.” 

입에 담는 순간 가슴이 욱신거렸다. 

‘같이 리버풀에 다녀오자.’

아마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을, 그와의 마지막 약속.

혼자 떠난 것을 알게 되면 프레드릭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서운해 할까, 정말 화를 낼까. 아니면…….

기쁜 듯이 웃던 얼굴을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조여들었다. 저도 모르게 심장께로 향하던 손이 멈춘 것은 다시금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였다. 

“그나마 거기로 간다니 다행이네. 리버풀 외곽에 러틀랜드 소유의 별장이 있어. 연락해 놓을 테니까 그곳에서 지내도록 해.”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고용인으로 저택에 들어온 것은 맞지만 엄밀히 따지면 나는 속박된 하인은 아니었다. 계약을 하기 직전, 손수 나를 만나러 오신 공작부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저택에 머물러도 좋다고. 하지만 만약 떠나고 싶다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자유의 몸이라고.

내 발로 이 저택을 나가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러틀랜드 가문과는 인연이 없게 된다. 거기다 이미 과분할 정도의 대우와 배려를 쭉 받아왔다.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데, 떳떳하지 못하게 일을 그만 두는 주제에 이 이상 폐를 끼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에드워드는 단호했다.

“평생 머물라는 소리가 아냐. 터를 잡을 때까지만 있어도 좋으니까, 일단은 그리로 가줘.”

“하지만…….”

“벤. 나에게도 입장이라는 게 있어. 형이 돌아올 며칠 뒤를 생각하면 나도 널 따라가고 싶은 심정이라고.”

젠장,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군.

에드워드는 다소 격양된 표정으로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는 조금 놀란 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장난기 많은 평소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서였다.

“내 한 몸 평안을 위해서라면 저택 문을 걸어 잠그는 게 정답이지만, 네가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아서 허락해주는 거야. 그러니 너도 한 번쯤은 내 말을 들어줘. 나도 살긴 살아야 할 거…… 아니, 이건 못 들은 걸로 해줘.”

살짝 얼굴을 일그러뜨린 에드워드가 급하게 말을 멈추었다.

“어쨌든, 정말 떠날 생각인 거면 일단은 별장으로 가. 며칠만이라도 괜찮으니까. 아니면 나도 못 보내줘.”

그저 리버풀로 가고 싶다고 했을 뿐인데, 어째서 협상 아닌 협상을 해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벼운 말로 넘기기에 에드워드의 표정은 너무나 진지했다. 나는 할 수 없이 그러겠다고 대답을 했다. 

“좋아. 그럼 언제 떠날 생각인데?”

“가능하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가고 싶습니다.”

“지금 당장이라…….”

“…….”

“알았어. 시간은 얼마나 필요할 것 같아?”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럼 정리가 되는대로 저택 후문으로 나와. 마차를 준비해둘 테니까.”

“그…….”

“거절하지 마. 내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해줘.”

단호한 목소리에 거절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한 발 늦은 감사의 인사를 끝으로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짐을 정리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거의 십 년 가까이 머물렀던 방이지만, 내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물건은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았다. 

낡은 가방에 차례로 필요한 것들을 챙겨 넣었다. 옷가지 몇 벌, 작은 회중시계, 어머니 유품인 펜던트 목걸이, 어제 서점에서 사온 책. 끝으로, 그동안 일을 하면서 모아둔 돈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안쪽 깊숙이 밀어 넣고 끈을 묶었다.

가장 중요한 약은 따로 챙겼다. 아니, 챙겼다기보다는 어제 병원에서 받아온 그대로 작은 가방 안에 들어있는 상태였다. 침대 옆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보드라운 가죽에 손이 닿는 순간 또 한 번 가슴이 욱신거렸다. 밖으로 나갈 일이 있을 때마다 언제나 들고 다녔던 이 작은 가방은, 내가 저택에 와서 처음 맞았던 생일에 프레드릭이 선물로 준 것이었다. 그때 프레드릭은 빙긋이 웃으며 생일 축하한다는 말만을 해주었었다. 덕분에 아주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저 예쁘다고만 생각했던 가방이, 알고 보니 프레드릭이 왕실 사냥대회에서 직접 잡은 사슴으로 만든,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귀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잠시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오랫동안 추억에 잠겨있을 시간은 없었다. 내 것이었지만 이제는 내 것이 아닌 많은 것들을 뒤로 한 채, 천천히 방문을 닫았다. 작고 소박한 방도 이젠 안녕이었다.

약속대로 저택 후문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멀리서 보아도 찬란한 금발이 빛나는 에드워드와, 그 옆에 서 있는 역마차 한 대가 보였다. 근처에 이르자 에드워드가 한 걸음 가까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준비는 다 됐어?”

“네.”

“맘 같아선 가장 좋은 마차를 내주고 싶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일부러 허름한 걸로 준비했어. 혹시 노려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허름하다는 말과 달리 짙은 브라운색의 마차는 충분히 좋아보였다. 다시 에드워드를 바라보자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정말 후회 안 하겠어?”

……안할 리가 없다. 아마 저택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괴로울 만큼 후회하게 될 테지만,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최선인 것을 알기에 그저 예,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참. 널 리버풀까지 데려다 줄 사람이 있어. 잠깐 이리로 와봐.”

에드워드의 손짓에 나는 들고 있던 짐 가방을 내려놓고 마차 앞 쪽으로 다가갔다. 누군가가 고삐를 틀어쥔 채 마부석에 앉아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왜, 왜 여기에……?”

놀란 내 표정에 아랑곳없이 그는 가볍게 풀쩍 땅으로 뛰어 내렸다. 등이 보일만큼 고개를 숙인 그가 이내 씩 웃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잘 부탁드립니다.”

마차는 곧바로 런던을 벗어나지 않았다. 떠나기 전에 반드시 들러야할 곳이 있어서였다. 저택을 출발하기 전, 에드워드는 나에게 반드시 병원부터 들를 것을 부탁했다. 혹시 모르니 약을 좀 더 챙기는 게 좋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고, 나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나에겐 병원보다 더 중요한 곳이 있었다. 내가 태어난 근원이자, 앞으로 나의 마지막이 되기를 바라는 장소. 나를 태운 마차는 그곳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덜컹덜컹. 익숙지 않은 흔들림이 쓸데없는 긴장감을 자아낸다. 희미하게 들리던 창밖의 웅성거림도 언제부턴가 들리지 않는다. 시끌벅적한 시장을 지나서 한적한 교외로 접어든 모양이었다. 잠시 후, 몸이 살짝 쏠리는 느낌과 함께 마차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걸로 봐서 목적지에 도착한 것 같았다.

“휴우…….”

줄곧 상승곡선을 타던 긴장감을 한숨과 함께 밖으로 내보냈다. 막 일어서려는 순간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왔습니다. 내리십시오.”

고개 숙여 열린 문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리 오래 있었던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어깨며 허리가 뻐근했다.

“괜찮습니까?” 

이어진 질문에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마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안 돼.”

“……역시 좀 그런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겸연쩍어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정중한 목소리와 예의바른 태도. 객관적으로 봤을 땐 완벽한 에스코트였지만 주관적인 하나의 미스가 존재했는데, 그건 바로 나를 리버풀까지 데려다줄 마부가 데니스라는 사실이었다.

처음 마차 앞에서 데니스를 봤을 땐 정말로 놀랐었다. 눈만 깜빡이며 서 있으니 녀석은 넉살 좋게 웃으며 내 짐을 마차에 실었다. 어찌된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상황이 썩 여의치가 못했다. 걱정스러운 듯 이것저것 일러주는 에드워드를 앞에 두고 감히 한 눈을 팔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에드워드는 직접 마차의 문을 열어주기까지 했다. 엉거주춤 안으로 들어가니 밖에서 문이 닫혔다. 다녀오겠다는 데니스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천천히 마차가 움직였다. 그 탓에 나는 끝끝내 데니스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인지 이유를 물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의문이 해결된 것은 커튼 너머로 더 이상 러틀랜드 저택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무렵이었다. 히이잉- 말 울음소리와 함께 움직임이 멈추었다. 잠시 문을 열어도 되겠냐는 데니스의 질문에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예스라고 대답했다. 그 후 뒤늦게 자초지종을 듣는 것이 가능했다. 마구간을 찾아온 에드워드가 지금 당장 리버풀까지 마차를 몰 수 있는 마부가 있는지 매튜 아저씨께 물었고, 마침 근처에 있던 데니스가 냉큼 자신이 가겠다며 자원했다고 한다. 나를 보고 놀라지 않은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후문에서 기다리는 동안 이미 에드워드를 통해서 누구를 모셔야하는지 듣게 되었다고 데니스는 말했다.

어쨌든, 내 입장에서는 나와 함께 동행할 마부가 데니스여서 천만다행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안다는 사실은 더할 수 없는 심적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게다가 데니스는 베타였다. 베타인 아저씨와 메리 아주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게 확실하니 내 몸의 변화를 알게 될 염려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어색한 것은, 녀석이 부디 예를 갖춰 모시라는 작은 도련님의 명령 때문에 자꾸만 격식을 갖춰 말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막역한 친구 사이에 그 말투는 너무나 어색했다. 앞으로 며칠을 함께 해야 하는데 이런 사소한 걸로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싫었다. 걸음을 옮기기 전에 잠시 뒤돌아 데니스를 보았다.

“데니스.”

“응? 아니 아니, 왜 그러십니까?”

서둘러 정정하는 녀석의 말투에 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데니스가 난감한 듯 턱을 긁적인다. 그러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칼을 벅벅 헝클인다. 

“……미치겠네. 얼굴만 보면 나도 모르게 자꾸 말이 짧아져.”

안 그러는 게 이상한 일이다. 나 같아도 그럴 테니까.

“당연한 일이잖아. 그냥 편하게 얘기해.”

“나도 그러고 싶긴 한데…….”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사실 손님도 아닌데 이런 대접받는 거 나도 엄청 민망해.”

이 말은 진심이다. 에드워드의 호의로 마차를 타게 된 것만 해도 과분한데, 귀족들이나 받을 법한 대우까지 이어지니 더 혼란스럽고 정신이 없다. 하물며 그 상대가 친구인 데니스이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정말 괜찮겠어?”

이렇게나 조심스러운 데니스라니. 오늘 참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본다. 망설이는 녀석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이번에도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당연하지.”

흘러가는 구름. 잔잔한 바람. 평일 오후라 그런지 동산을 찾은 사람은 나 하나뿐인 듯하다. 울창한 나무가 드리워진 오솔길을 홀로 천천히 걸었다. 

살짝 숨이 가빠지려는 무렵, 대리석 묘비와 함께 작고 둥근 언덕이 보인다. 저택을 떠나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바로 부모님의 무덤이었다.

‘꽃이라도 사오는 건데.’

『Anna Smith』

『John Smith』

묘비에 새겨진 이름에 뒤늦게 빈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붉은 장미를 사오려면 먼 길을 다시 돌아가 시장까지 가야만 했다. 찰나의 망설임을 접고서, 나는 무릎을 굽혀 어머니의 무덤 앞에 앉았다. 

“……앞으론 자주 오기 힘들 것 같아요.”

고요함을 흩트린 작은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내 귓가로 돌아온다. 어차피 나 혼자뿐이니 속엣말을 하나 혼잣말을 하나 그것을 들을 사람은 없었다.

“어제 병원에 갔었는데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걱정이지만…….”

잠시 말을 멈추며 긴 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숨을 들이쉬며, 오늘 이곳을 찾아온 이유를 읊조리듯 말했다. 

“그래도 고맙습니다.”

굳이 에드워드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알파를 향한 오메가의 본능이 얼마나 강한지를. 그리고, 그것이 얼마만큼 잔인한 것인지도.

한동안 잊고 지냈던 사실이 못처럼 뾰족이 튀어나왔다. 아직 어렸던 나에게 아버지는 어머니가 몸이 많이 약해서 우리 곁을 빨리 떠났다고 말씀하셨고, 나는 슬퍼하면서도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가끔 한 번씩 어머니가 몹시도 괴로운 얼굴로 한 움큼의 약을 드시는 것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었다. 발렛으로 일을 하기 전에 건강상태를 체크하기 위해서 갔던 병원. 그곳에서 나는 끔찍한 진실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병으로 돌아가신 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부재중이신 틈을 타 알파에게 겁간을 당하고, 그 충격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 그간의 진찰기록으로 봤을 때 당시의 정황을 유추하는 것은 쉬웠다. 그때 어머니는 바로 히트 사이클 기간이었다.

만약 내가 줄곧 베타였다면 나는 아마 평생 어머니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분이 서로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셨는지, 내가 태어난 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그래서 나는 꼭 이 말을 전해야만 했다. 베타든 오메가든 상관없이, 그저 나를 낳아주셔서 감사하다고.

“왔어?”

날 보자마자 데니스는 마차에 기대고 있던 몸을 얼른 일으켰다. 짙은 갈색 머리칼이 오렌지 빛처럼 붉게 보인다. 석양이 드리워질 무렵에만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것만 봐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을 알 수 있었기에, 나는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래 기다렸지?”

“아니.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뭘. 인사는 다 한 거야?”

“응.”

내 대답에 데니스의 얼굴이 살짝 어둡게 변한다. 답지 않게 말을 아낀 녀석이 곧 잔잔한 목소리로 나를 위로했다.

“요양 때문에 가는 거니까…… 아마 너희 부모님도 이해해 주실 거야. 관리는 전혀 걱정하지 마. 한 번씩 내가 와서 챙길 테니까.”

런던에서 리버풀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약 5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올 수 있는 거리이다. 하지만 표면상 나는 장기요양을 가는 것이었고, 이후 언제 다시 런던으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데니스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어떻게든 걱정을 덜어주려는 마음 씀씀이에, 나는 그저 고맙다는 말만 반복했다.

“이제 병원에만 들르면 되지?”

“응.”

“얼른 타. 안전하게 모셔줄 테니까.”

말이 끝남과 동시에 또 다시 문을 열어주며 들어가라는 손짓을 한다. 이번에도 내 입에서 나온 말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고마워 데니스.”

늦진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병원은 아직 문이 열려 있었다. 약만 받으면 됐기에 곧바로 데스크로 향했다. 메리 아주머니처럼 푸근한 미소가 돋보이는 간호사가 웃으며 내게 물었다.

“어떻게 오셨나요?”

“약을 좀 사고 싶습니다.”

“어떤 약을 찾으세요?”

“그게…….” 

생각은 훤한데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런데 노련한 간호사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망설이는 내 행동에서 뭔가를 감지했는지 살짝 몸을 앞으로 하며 소리 낮춰 물었다.

“혹시 억제제가 필요하세요?”

“……예.”

“어떤 걸로 드릴까요? C타입? 아니면 D타입?”

C? D? 

예상에 없던 질문에 머릿속에 물음표가 생겨났다. 선뜻 대답을 못하고 곤란한 눈으로 간호사를 보자 그녀는 뭔가를 눈치 챘다는 듯이 다시 나에게 물었다.

“아, 혹시 B타입을 복용하시나요.”

덧붙여진 선택의 폭에 그제야 감이 왔다. 지금 간호사가 묻는 건 아무래도 억제제의 종류인 듯 했다. 

차이점이 뭔지 알고 싶지만, 지금 이 곳에서 그런 걸 물을 정도로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다. 내가 억제제를 찾는다는 걸 알자마자 이어진 질문이다. 즉, 일반 오메가라면 반드시 알고 있어야만 하는 사항이라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아무 타입이나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가방 안에서 약통을 꺼냈다. 어제 죠셉 박사의 처방전과 교환해서 받은 억제제가 들어있는 것이었다.

“이거랑 같은 걸로 주세요.”

“어머.”

통을 확인한 간호사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이번에야말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뭔가 잘못된 게 있나요.”

설마 피임약을 꺼낸 건가. 그럼 큰일인데. 

일순 입 안이 바싹 말랐다. 혹시 실수를 했나 싶어 다른 통도 꺼내려는데 간호사가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 약을 찾으시는 분은 거의 보지를 못해서 제가 큰 실례를 저질렀어요.”

급작스러운 사과에 당황했지만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실수를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얼마나 드릴까요?”

“최대한 많이 주세요.”

내 대답에 간호사는 또 눈을 크게 떴다. 눈이 마주치자 앗, 하는 신음을 흘린 그녀는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간호사의 손에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약통과 똑같이 생긴 통 두 개가 들려있었다.

한 손에 두 개를 든 걸 보니 왠지 저게 전부 다일 것 같았다. 자연히 불안함을 담아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다인가요?”

“네. 아시다시피 워낙 귀한 약이다보니 수량이 그렇게 많지가 않아요. 그래도 저희 병원이니까 이 정도라도 있지, 다른 병원에서는 구할 수도 없어요.”

덧붙여진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맘 같아선 조금만 더 있었으면 싶지만, 없는 것을 달라고 억지를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짧은 한숨을 내쉰 후에 나는 다시 간호사에게 물었다.

“약값은 얼마입니까?”

“금화 2페니입니다.”

가방에서 돈을 꺼내려던 손이 멈칫했다. 뭐? 금화 2페니라고?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간호사를 보자 그녀가 왜 그러냐는 듯 가만히 내 얼굴을 마주본다. 북방 출신인지 짙은 잿빛의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너무 비싼 가격에 잠시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한 자신이 부끄러워서 나는 얼른 주머니를 열고 금화 2개를 꺼냈다.

어찌 됐든 조금이라도 약을 더 살 수 있어서 다행이긴 했다. 잘은 모르지만 세 통이면 어느 정도는 견딜 수 있을 테고, 이 약을 다 먹어갈 때쯤엔 아마 새로운 삶에 충분히 잘 적응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문을 열고나오니 어느덧 해가 완전히 사라지고 푸르스름하게 변한 하늘이 보였다. 

‘이렇게 맑은 런던 하늘이라니. 마지막 선물인 건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데니스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이제는 정말 런던을 떠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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