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프 컷 4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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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방을 일주일 앞둔 시점에서 모든 촬영이 끝났다. 마지막 촬영 다음날 선우는 오랜만에 부족했던 잠을 채우고 느지막이 일어났다. 바로 전 날 한재희가 마지막으로 바뀐 세상에서 눈을 떴을 때처럼 선우는 잠시 이 일상의 아침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침에 눈 뜨면 무조건 내 생각부터 해요.'
해경은 웃으며 농담처럼 그런 당부를 건넸었다. 마치 무언가를 예견한 사람처럼. 선우는 착실히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서해경의 얼굴과 듣기 좋은 목소리와 세심한 말들을 떠올렸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을 기분 좋게 낭비한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시차'가 끝나고 나서의 첫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비교적 여유롭게 낮 시간을 보낸 후에 선우는 외출 준비를 했다. 모레부터는 ‘시차’를 찍는 동안 새롭게 계약한 광고 촬영이 이어질 예정이었다. 어젯밤엔 해경이 후반 작업들과 관련해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긴 만남을 이어가지는 못했다. 대신 오늘 저녁 그의 오피스텔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선우는 모자와 가벼운 머플러를 챙겨 집을 나섰다.
타고 온 버스에서 내려 10분 정도 걸었을 때 해경의 오피스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재킷 주머니에는 해경이 건네준 카드키가 들어있었다. 반질한 플라스틱 면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건물 로비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 숫자가 해경이 거주하는 최상층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혹시 그가 방금 전에 도착한 건 아닐까 싶었다. 오랜만에 해경과 마음 놓고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문득 가슴이 떨렸다. 선우는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 버튼을 눌렀다.
* * *
서재에 있던 해경은 초인종 소리에 혹시 선우가 카드키를 안 갖고 왔나 싶어 거실로 향했다. 인터폰 화면 안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작은 화면 속에는 검은색 모자를 눌러 쓴 최경원이 서 있었다.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 잠시 고민하던 해경은 현관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해경이 나오자 남자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이렇게 집으로 찾아오는 거 안 좋아합니다.”
그 말에 남자가 어깨를 움츠리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할 말이 뭐죠.”
해경은 아예 집 밖으로 빠져나와 현관문을 닫았다. 남자가 해경이 등지고 선 문을 힐끔거렸다.
“여기서 말하긴 좀... 안에 들어가서 했으면 하는데요.”
그 말에 해경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그리 살가운 미소는 아니었다.
“말했잖아요. 집으로 찾아오는 거 싫어한다고. 별로 안으로 들이고 싶지 않은 손님이라.”
그 말에 최경원의 표정이 경직됐다. 그는 입술을 깨문 채 잠시 고민했다. 그나마 해경이 오피스텔 한 층을 통째로 사용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남자는 입을 열었다.
“제게도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해경은 잠시 침묵하다 뒤늦게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죠.”
눈치를 보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남자가 결심을 한 듯 말했다.
“이번 드라마 주연...피디님이 추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해경은 문가에 비스듬히 기댄 채 팔짱을 끼었다. 계속 말하라는 듯 말없이 보내는 시선에 그가 말을 이었다.
“연선우는 이태형과 사귀었었고 지금은 피디님과 만나고 있죠. 그리고 주연이 되었고요.”
하. 해경이 어이없는 웃음을 흘려보냈다.
“재밌네.”
입꼬리는 올라가 있지만 해경의 시선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외모나 연기 쪽으론 저도 꿇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그렇게 생각해요?"
서해경이 의미 모를 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 마치 비웃는 듯해 최경원은 입술을 꾹 물었다. 불현듯 해경의 눈길이 남자의 어깨너머로 향했다. 그에 경원이 덩달아 뒤를 돌아봤지만 굳게 닫혀있는 엘리베이터 문만 보일 뿐이었다. 희미하게 엘리베이터가 작동하는 소리가 났다. 경원은 다시 해경에게로 시선을 돌리면서 초조한 듯 말을 덧붙였다.
“이런 쪽으로 경험도 몇 번 있습니다. 남자도 되시는 거라면...”
“남자도 되는 게 아니라."
해경이 말을 끊으며 느른하게 웃었다.
“연선우라서 되는 건데.”
해경은 문가에 기댔던 몸을 바로 세우고 웃음기를 거둔 채 말을 이었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연선우는 과거에 봤던 오디션 때문에 캐스팅된 거야. 네가 믿고 안 믿고는 관심 없어. 사실이 그러니까. 그리고 날 그런 인간으로 보는 건 상관없지만 연선우는 안 돼.”
차가운 해경의 반응에 남자의 눈빛이 불안한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에 상관치 않고 해경의 추궁이 이어졌다.
“우리 관계는 어떻게 알았지?”
남자는 묵묵부답이었다.
“아, 이태형이랑 친했던가?”
남자의 어깨가 움찔했다.
“비슷한 놈들끼리 어울려 다니니 사고가 그쪽으로 튈 수밖에.”
해경이 혀를 찼다.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좀 하지 그래. 뭔가를 부탁할 만큼 내가 가진 게 많은 사람이라면 반대로 누굴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그, 그러시면 저도 두 사람 관계 폭로할 겁니다.”
“해.”
“네?”
“해 봐. 아마 그러는 동안 너도 무사하지는 못하겠지만. 아, 내가 뭘 하기도 전에 뉴스에 먼저 나오려나.”
“제가 왜...”
“방금 전에 네가 직접 입으로 말했잖아. 몸으로 로비한 적 있다고.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블러핑'에 나왔던 것 같은데.”
해경은 윤비서가 건넨 자료를 떠올렸다. 이태형이 돈이나 성접대를 제공한다면 최경원은 몸으로 직접 영업을 뛰는 스타일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거기엔 몇몇 의심되는 감독들의 이름 역시 함께 언급되긴 했지만 100프로 확정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해경은 경원이 비중 있게 나온 몇 안 되는 작품 중에 성벽과 함께 확실히 뒤가 구린 감독 한 명을 알고 있었다. 그에 어느 정도의 확률을 가지고 찔러 봤다. 최경원은 필요 이상으로 눈을 크게 뜨며 무척이나 놀란 듯이 반응했다.
“그, 그건... 김감독님이 먼저...”
“내가 당신 사정까지 알아줘야 하나. 앞으로 내 눈앞에 띄는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는 해경은 자신의 오피스텔이 아닌 그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며 남자를 지나쳤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걸어가던 해경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걸음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봤다.
“아, 그리고 앞으로 우리 선우 괴롭히지 말고.”
해경은 빙긋이 웃어 보이면서 마치 철없는 아이에게나 할 법한 충고를 남기고는 다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가 대기해 있는 층의 숫자는 1로 바뀌어 있었다. 차마 누군가를 뱉어내지 못한 채 다시 아래로 향한 엘리베이터에 해경이 뒤늦게 몸을 실었다.
* * *
저처럼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지만 단번에 최경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살짝 튼 그의 옆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선우는 빠르게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눌렀다. 그 짧은 순간에도 혹여 최경원이 돌아볼까 마음을 졸였었다.
설마 해경의 집 앞에서 남자를 마주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솔직히 촬영이 모두 끝났을 때 안심했다. 도대체 왜 그의 집까지 찾아온 건지, 혹시 해경과 저와의 사이를 아는 건지 이래저래 혼란스럽고 불안하기만 했다.
막연히 해경의 집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걷고 또 걷던 선우의 걸음이 불현듯 우뚝 멈췄다.
설마...사적인 감정인 걸까.
언젠가 촬영장에서 해경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남자의 눈빛이 떠올랐다. 선우가 보기에 서해경은 완벽한 사람에 가까웠다. 누구라도 그에게 관심을 갖고 지켜보다 보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때 재킷 안에 있던 휴대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전화를 받자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만 도망가요.]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해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도망...안 갔는데요."
건너편에서 웃음인 듯 아닌 듯 짧은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나 버리고 가는 것 같던데.]
"제가 서피디님을 어떻게 버려요."
서피디님이 버리면 모를까. 아, 뒤의 말은 안 하길 잘했다고, 선우는 속으로 스스로를 칭찬했다.
[지금 어디예요.]
"여기가..."
선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눈에 보이는 것을 설명했다.
[어딘지 알겠네요. 거기서 조금만 기다려요.]
계속 걷는 것 같은데도 해경에게서 전혀 숨소리가 흐트러지는 기색이 없는 것이 신기했다. 귓가에 닿은 휴대폰에 조금씩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선우는 무의식적으로 발장난을 쳤다. 최경원은 갔을까.
[무슨 생각해요.]
최경원이 왜 당신의 집까지 찾아온 건지, 찾아와서 뭐라고 한 건지, 얘기한 게 무엇이든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선우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내 애인 인기 많구나, 하는 생각이요."
어쩌면 지금 얼굴을 맞대고 있지 않아서 농담처럼 꺼낼 수 있는 말이었다. 남자가 옅게 웃는 소리가 귓가로 전해져 왔다. 그게 좋았고 한편으론 다시 또 초조해졌다.
[오해는 안 했으면 좋겠는데...]
해경은 단어를 찾듯 말을 흐리다가 뒤늦게 덧붙였다.
[질투는 했으면 좋겠어요.]
잠시의 틈을 두고 조용한 대답이 흘러 나왔다.
"오해는 안 했는데 질투는 조금 한 것 같아요."
선우는 쑥스럽게 콧등을 긁으며 말했다. 어색하게 성난 마음이 사실은 그것이었던 것 같다. 단지 누군가가 그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것만으로도 분주하게 소란스럽던 마음이.
[해피엔딩이네요.]
해경이 나직한 웃음소리를 흘리는 것에 선우도 덩달아 입가가 편안하게 풀어졌다.
[궁금할 테니까 간단히 말할게요. 드라마 출연과 관련해서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하기에 그냥 돌려보냈어요. 가끔 혹시나 해서 그런 식으로 찾아오는 친구들이 있거든요.]
아... 그런 거였구나. 해경의 말에 다소 안도감이 들었다. 그럼 자신에게 적의를 가지고 대했던 것도 주연이라는 비중과 관련이 있었던 걸까. 경원이 자신을 경계하고 도발했던 날들을 곰곰이 되짚고 있을 때 전화기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혹시 내가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 아니라도 연선우는 계속 날 좋아할까.]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해코지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거든요.]
웃음기 밴 목소리로 건네는 남자의 말은 농담인 듯 진담인 듯 의중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고개를 갸웃할 만큼 뜬금없는 말처럼 다가오긴 했지만 대답만큼은 분명하게 할 수 있었다.
"좋아해요. 서피디님이 어떤 사람이든, 무슨 일을 하든.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
"서피디님은 어떠세요."
[뭐가요.]
"제가 생각보다 마음이 좁고, 질투도 심하고, 가끔 연기하다 감정에 휘둘리는... 배우로서도 부족한 그런 사람이라도 저를 계속 좋아해 주실래요?"
[어떨 것 같아.]
해경은 선우에게 물어놓곤 그 답도 바로 스스로 했다.
[당연히. 어쩔 수 없이 널 좋아하고 사랑하겠지.]
“......”
[네가 계속 너라면.]
"......"
[연선우라면.]
어느새 선우의 발장난은 멎어 있었다. 귓가로 넘어온 그의 말들을 수집하듯 하나하나 곱씹었다. 근처 가로등 불빛을 빌어 선우의 앞쪽에 불쑥 긴 그림자가 졌다. 어느 순간부터 제 등 뒤로 불어오던 바람이 멎어 있었다. 설사 영영 돌아보지 못한대도, 선우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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