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프 컷 44편
<-- --> 촬영은 어느덧 후반부로 접어들고 있었다. 오늘 선우는 최경원과 직접 대면하는 씬이 있었다. 선우가 먼저 대기하고 있던 촬영장에 경원이 밝게 웃는 얼굴로 들어섰다.
“와, 드디어 선우형이랑 맞붙는 씬이네요.”
“잘 부탁해요.”
“에이, 형이 저한테 부탁할 게 뭐 있어요. 저만 잘하면 될 것 같은데.”
남자는 천진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뒤쪽을 힐긋 돌아봤다. 해경이 한 손에 대본을 쥐고 두 사람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번 씬은 리허설 좀 충분히 하고 들어가죠.”
경원은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해경에게 인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독님. 이렇게 같이 작품 하게 돼서 영광입니다. 제가 감독님 팬이거든요.”
경원의 촬영은 이전에도 이미 몇 차례 있었으나 설정 상 단역에 가까운 비중이었기에 그는 마치 오늘이 처음인 것처럼 자신을 소개했다. 해경은 잠시 침묵하다 한 박자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래요. 나도 잘 부탁해요.”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해맑게 웃으며 싹싹하게 받아치는 경원의 모습에 선우는 속이 조금 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그러자고 한 것인데도 막상 해경의 시선이 제게 잘 닿지 않는 것에 왠지 모르게 초조함을 느꼈다. 최경원의 존재 자체가 불안하고 꺼림칙하기도 했다. 선우는 어수선한 마음을 재빨리 정리하고 머릿속으로 찍을 장면들을 불러들였다.
원룸으로 꾸며진 세트장 내부 몇 곳에서 세 사람은 카메라의 각도를 확인하고 동선을 체크했다. 몇 번의 리허설 끝에 다들 본격적인 촬영 준비에 들어갔다. 스태프에게서 촬영용 소품을 건네받으며 주의사항을 듣고 있는 경원을 보던 선우는 제 위치로 이동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연선우씨.”
조용한 부름에 선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무심한 표정을 한 해경이 서 있었다.
“마지막에 넘어질 때 조심해요.”
“...네.”
선우가 대답하는 것을 확인하곤 해경은 바로 몸을 돌려 모니터 쪽으로 향했다. 경원이 그들을 힐긋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촬영장에서 충분히 오갈만한 대화 내용이었기에 불안해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만큼 감독으로서 보낼 수 있는 평범한 주의였다. 그러나 자리로 돌아가는 선우의 얼굴은 묘하게 허물어졌다. 그의 걱정이 좋았다. 이런 순간에조차 반갑고 안도감이 일만큼.
* * *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나기 이틀 전에서야 재희들은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그 남자의 행적이 며칠 전부터 묘연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젯밤, 꼬맹이가 겁도 없이 폭탄 발언을 던진 후에 접속을 끊고 사라졌다.
[형, 나 그 남자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어]
어린 재희가 걱정돼 속이 바짝 타들어간 남자는 좁은 방을 초조하게 돌아다녔다. 잠도 못 자고 밤을 지새웠으나 채팅방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제발...아무것도 하지 말고 집에 들어와."
범인은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정면으로 부딪쳐 몸싸움이라도 난다면 틀림없이 어린 재희가 불리할 것이다. 그는 불안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밥도 먹지 못하고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한 채 대기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채팅방에 누군가 접속한 것을 알려주는 신호음이 짧게 울렸다. 남자는 빠르게 손을 뻗어 자판을 두드렸다.
[한재희 너 괜찮아?]
[어떡하지 급하게 도망치긴 했는데 나 들킨 것 같아]
[일단 문 다 걸어 잠그고 나가지 말고 집에 있어]
[그 남자 거기에 살고 있었어 왜 학교 뒷산에 오래된 폐가 있잖아]
어딜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 숨어서 봤어 그 사람이 음료수병에 뭐 타고 있는 거... 그런 게 박스 안에 수십 개나 쌓여 있었어 그걸로 사람들 죽인 거야 엄마도 진희도]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범인의 행방을 알아낸 건 다행이었지만 어린 재희가 이미 범인에게 노출됐을지도 모르는 상황은 걱정스러웠다. 대비가 너무 부족했다. 자신의 책임이었다.
[형 지금 마을에 인터넷 다 안 돼. 근데 웃기지 이 채팅은 된다는 게]
그래. 그런 일이 있었었지. 불길한 징조였다. 남자는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어렵게 자판을 쳐 메시지를 띄웠다.
[재희야 일단 밖에 나가지 말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나랑 같이 생각해보자]
시간이 얼마 없었지만 이대로 재희가 위험한 상황에 뛰어드는 걸 방치할 수도 없었다.
[형 내가 저번에 얘기했지. 누군가 우릴 선택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그런 일은 너무 끔찍하니까 우리한테 한 번은 바꿀 기회를 준 거야]
남자는 입술을 아플 만큼 깨물었다. 처음엔 그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게 의심스러웠다. 오히려 저 때문에 어린 재희마저도 위험에 빠져버렸다.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어딘가 결연해 보이는 소년의 메시지에 남자는 다급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잠깐 기다려봐]
[형 그냥 나 기특하다고 잘하고 있다고 말해줘]
[재희야]
[다른 사람들은 다 나보고 미쳤다고 하니까 형만이라도 칭찬해줘]
[잘하긴 뭘 잘해 바보야]
[ㅎㅎㅎ]
녀석은 이미 무언가 굳은 결심을 내린 듯 보였다. 모든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언젠가부터 화면 건너편의 꼬마 녀석이 과거의 자신이라기보다 제 동생처럼 여겨졌다. 그렇게 어리기만 한 소년을 궁지로 몰아붙인 게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에 남자에겐 때늦은 후회와 죄책감이 밀려왔다.
쿵쿵쿵. 그 순간 누군가 원룸의 현관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한재희씨, 경찰서에서 나왔습니다."
뭐? 남자는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경찰이 찾아온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왜 하필 이런 때에...
[얼마 전 그 일 때문에 경찰이 찾아왔나 봐 형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너 계속 이거 켜놓고 있어 집에서 나가지 말고]
상대는 답이 없었다
[재희야 제발 대답]
[ㅇㅇ 다녀와]
마음이 놓이진 않았지만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향했다. 그때 채팅 상대가 방을 빠져나가는 신호음이 울렸다. 노트북 앞으로 빠르게 되돌아갔을 땐 소년이 마지막으로 입력한 메시지만이 남아 있었다.
[형... 아마 형이 나였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순 없었다. 일단 찾아온 경찰을 별 탈 없이 돌려보내는 게 우선이었다.
"한재희씨!"
다시 한 번 거세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노트북을 접어 침대 매트리스 밑에 넣어놓고 방을 나섰다. 현관문을 빼꼼 열자 30대 중반쯤 돼 보이는 남성이 문 앞에 서 있었다.
"한재희씨 되십니까?"
"네. 무슨 일이시죠?"
"얼마 전에 노트북 도난 신고 때문에 경찰서에 오셨었죠?"
"아, 범인 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물건은 잘 돌려받았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런데 일단 신고를 하셨기 때문에 서류 처리를 하려면 몇 가지 조사에 답변을 해주셔야 하거든요.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아무리 경찰이라고 해도 안으로 들이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거부하는 것은 오히려 경찰의 의심을 부추길 수 있기에 남자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들어오세요."
"감사합니다."
남자가 먼저 안으로 들어서고 경찰이 따라 들어왔다. 철컥.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조용해진 기척에 남자가 돌아보는 순간이었다.
퍽!
둔탁한 소음과 앞게 머리 뒤쪽에 끔찍한 고통이 들이닥쳤다. 머리를 감쌀 틈도 없이 쓰러져내리는 남자의 시야로 빙긋이 웃는 경찰의 얼굴이 보였다.
재희가 불시에 둔기를 얻어맞고 쓰러지는 장면은 꽤 여러 번 찍어야 했다. 원인 제공은 의심스러운 경찰 역을 맡고 있는 경원에게 있었다. 모니터를 했을 때 옷 속에 감춘 소품용 스패너를 꺼내 휘두르는 동작이 번번이 눈에 띄게 어색하게 나왔다.
소품용 둔기에 직접 맞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맨바닥에 넘어지는 장면이었지만 촬영이 거듭될수록 해경의 얼굴이 굳어졌다. 물론 매끄러운 세트장 바닥이라도 계속해서 쓰러지며 부딪치다 보니 전혀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저렇게 사색이 될 정도는 아닌데. 해경의 굳은 얼굴을 몇 번 본 선우는 자신이라도 NG컷을 보태지 않기 위해 같은 촬영을 반복하면서도 매번 처음처럼 집중하고자 했다.
“컷!”
가까스로 오케이 사인이 나왔다. 거듭된 NG로 한동안 쭈뼛대며 민망해하던 경원은 어느새 밝게 웃는 얼굴이 되어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오늘자 촬영을 모두 마친 그가 잠시 뒤 촬영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곤 선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최경원의 퇴근은 마치 학교 다닐 때 휴식 시간을 알리던 종소리처럼 숨통을 트이게 하는 신호가 되었다.
짧은 휴식 후 바로 다음씬을 찍기로 했다. 애매한 휴식에 대체로 현장에서 각자 대기 시간을 갖고 있을 때 재철이 촬영장에 놀러 왔다.
“여어. 선우씨, 오랜만이네.”
선우는 반가운 표정으로 재철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에 봬요, 감독님. 그동안 잘 지내셨죠?”
“나야 지금은 거의 반백수라 매일 살맛 나게 놀고 있죠. 선우씨도 조금만 더 고생해요.”
재철은 선우의 어깨를 친근하게 두드리며 격려하곤 모니터를 하고 있는 해경에게로 향했다.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다 선우는 시선을 돌렸다. 최경원은 퇴근하긴 했지만 그와 유독 친한 스태프 한 명이 선우를 노골적으로 지켜보는 듯해 신경이 쓰였다.
해경과 재철은 상대적으로 한산한 세트장 한편으로 향했다.
“스파이야? 왜 제일 바쁠 때 놀러 와.”
재철이 낄낄대며 웃었다.
“몰랐냐? 너 괴롭히는 게 몇 안 되는 내 삶의 낙 중에 하나란다.”
피식 웃은 해경이 품에서 담뱃갑을 꺼내들자 재철이 놀라 돌아봤다.
"야, 인마."
"안 피워. 그냥 물고만 있는 거야."
"왜. 너 요즘 금연하냐?"
"피우러 갈 시간 없어."
"아, 하긴..."
해경은 세트장 어딘가를 바라보며 입에 문 담배를 몇 번이고 짓씹었다. 그의 시선이 꽤나 끈질기게 느껴져서 재철은 뭐 신기한 거라도 있나 싶어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그냥 평범한 세트장 내 풍경이었다. 분주한 스태프들과 대기하는 배우들이 있는. 해경은 금세 필터 끝이 망가진 장초를 근처 휴지통에 버리고는 담뱃갑을 다시 꺼내들었다. 새 담배를 이로 잘근거리며 같은 짓을 반복하는 그를 보고 재철이 어이없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금단증상인 거냐, 아님 뭐 요즘 욕구불만?"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었다. 다만 유독 그 부분이 두드러지게 귀에 꽂혔던 탓에 선우는 저도 모르게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채 저를 보고 있던 해경과 시선이 마주쳤다.
"맞아. 욕구불만."
그 순간 선우는 왠지 간담이 다 서늘해지는 기분에 모른 척 빠르게 시선을 외면했다.
"허이구, 살다 보니 네가 그런 소릴 하는 것도 다 듣고. 나 참."
재철이 황당하다는 듯이 힘 빠진 웃음을 지으며 뭐라 대꾸하는 것을 등 뒤로 들으며 선우는 대본에 푹 파묻힐 듯 고개를 숙였다. 공부에 매진하는 학생 같은 선우의 뒷모습에 담배를 걸친 남자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주연배우의 귓바퀴가 은근히 달아올라 있는 것을 눈치챈 이는 감독 한 사람 외엔 아무도 없었다.
========== 작품 후기 ==========
눈치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되도록 이틀에 한 번 정도는 올리려 하고 있었는데요.
드라마 내용이 46화에서 끝날 것 같은데 두 편을 한 번에 올리는 게 나을 것 같아
평소보다 좀 더 늦게 찾아뵐 것 같습니다.
소장본 계획은 없습니다.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생각도 못 해봤습니다^^;
말씀 주신 것만으로도 황송합니다ㅠㅠ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날씨 변동이 잦으니 감기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