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프 컷 43편
<-- --> "요즘 많이 바쁘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번 휴가 때 뉴욕 별장 내주시겠다는 말씀 듣고 꾹 참았습니다."
윤비서의 말은 반은 농담조였으나 해경이 약속한 것을 어느 정도 기대하고 있는 눈치긴 했다. 내달 애인과 함께 보낼 휴가만을 바라보며 슬슬 업무를 정리하고 있던 윤비서에게 급히 배우 최경원의 조사를 맡기면서 해경도 약간은 양심에 찔렸었다. 그에 평소 윤비서에게 따로 지급하던 임금 외에도 뉴욕에 있는 개인 별장을 휴가 때 쓸 수 있도록 내주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에 바로 한층 밝아진 대답이 돌아왔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윤비서님, 부럽네요."
무슨 말이냐는 듯 남자가 힐끗 돌아보자 해경이 웃으며 말했다.
"나도 애인이랑 휴가 가고 싶거든요."
햇수로 7년 정도 곁에서 그를 지켜봐 온 윤비서는 처음 보는 해경의 모습에 슬쩍 놀란 눈을 치켜떴다.
"솔직히...지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해경이 피식 웃었다.
"반응은 됐고, 종종 여유되실 때 제가 차마 신경 쓰지 못한 부분들이 있으면 대신 좀 챙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해경이 누구라고 굳이 언급하진 않았지만 윤비서는 이미 대상을 알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럼 다음에 또 뵙죠."
해경은 윤비서가 건네준 USB를 챙겨 차에서 내렸다. 순간, 엄연히 공공의 방송 콘텐츠를 만드는 방송국에서 이런 불법적인 자료를 주고받아도 되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일단 드라마가 전파를 탄 순간부터는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고 일의 연장선이었다. 여유 있게 외출을 하거나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최근엔 선우 역시 편하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해경에겐 그 어떤 작품보다 이 작품을 더 잘 찍고 싶고 찍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견뎌야 할 모든 것들이 그에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남자는 누적된 피로로 다소 무거워진 걸음을 옮기며 새벽의 쌀쌀한 주차장을 가로질렀다.
* * *
첫 주 방송의 시청률 결과가 나왔다. 1화 7.4%, 2화 8.7%로 최근 다소 침체돼 있는 드라마 시장을 감안하면 꽤 높은 시청률이라고 볼 수 있었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 현장은 활기가 흘러넘쳤다. 시청률이 뜨는 이른 아침마다 긴장해서 포털사이트를 들락거렸던 선우 역시 큰 짐을 내려놓은 듯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세트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마냥 가볍지는 않았다. 최경원 때문이었다. 촬영 하나만 집중하기에도 벅찬 상황에서 그를 계속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꽤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10부작으로 특별 편성된 '시차'는 일부 사전 제작으로 진행돼 이제 촬영은 어느덧 드라마 중후반부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최근 들어 최경원과의 촬영이 연달아 겹쳤다.
막바지 작업에 한창인 촬영장에 도착했을 때 선우는 되도록 넓은 시야 안에서 자연스럽게 경원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는 평소와 달리 선우의 등장을 바로 알아채지 못하고 어딘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길을 좇자 그 끝에는 서해경이 있었다.
의아했다. 촬영 현장에서 배우가 피디를 응시하는 일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었지만 느낌이 조금 달랐다. 순간 의식할 사이도 없이 선우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쉽게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불안감과 함께 묘한 불쾌감, 경계심 같은 것들이 덮쳐왔다. 오랫동안 해경을 향해 있던 남자의 고개가 움직이는 순간 선우는 빠르게 얼굴을 돌렸다. 최경원은 아마 높은 확률로 이제는 선우를 바라보고 있을 터였다. 제게로 꽂히는 듯한 시선을 어깨너머로 느끼면서도 선우의 머릿속엔 방금 전에 봤던 장면이 찝찝하게 계속 맴돌고 있었다.
* * *
열여덟의 한재희와 스물여덟의 한재희는 우여곡절 끝에 과거와 현재에서 서로 소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심지어 과거의 변수가 현재에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스물여덟의 한재희는 종종 눈을 떴을 때 달라진 주변 환경에 몹시 놀라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약간의 두통과 함께 새롭게 생성된 기억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모든 일들이 얼떨떨한 와중에도 스물여덟의 한재희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정말로 단순히 과거와 현재가 연결된 걸까'
어린 재희의 행동으로 인해 그 시기의 몇몇 요소들이 바뀌면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했다. 다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과거가 바뀌어도 현재에 변하지 않는 것 또한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재희의 ‘몸’이었다. 정말로 모니터 건너편이 서로의 과거와 현재인지 실험하는 과정에서 어린 재희는 예기치 못한 사고를 겪었다. 흉터로 남을 만한 깊은 상처가 생겼으나 스물여덟의 재희에게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형이랑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라 그런 거 아닐까]
[뭐?]
[왜 하필 우리한테 이런 일이 벌어졌겠어. 영화나 만화 같은 걸로 치자면 우리가 주인공이니까 그런 거지. 그러니까 일종의 혜택 같은 걸 준 거야. 내가 다치거나 죽어도 형은 불사신처럼 딱!]
죽는다니. 아무리 말이라도...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어쨌든 형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다 알고 있는 거잖아. 와 대박!]
채팅창 속의 소년은 계속 흥분한 채로 감탄을 해 보였지만 남자는 심경이 무척 복잡했다.
[형 그럼 우리나라 2010, 2014 월드컵 어떻게 돼? 16강 가?]
[아냐아냐 말하지마 나 안 들을래]
신이 나서 보내는 어린 재희의 메시지들을 흘려 보며 남자는 생각에 잠겼다. 현재가 몇 차례 바뀐 결과 지금 재희는 허름한 원룸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여동생, 마을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의 결과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과거의 일을 바꿀 수 있다면... 그 일도 되돌릴 수 있는 걸까.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엄마랑 진희, 마을 사람들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남자는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글자를 입력해나가기 시작했다.
[잘 들어, 한재희. 한 달 후에 네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이 벌어질 거야.]
* * *
오후에 찍을 씬들의 감정선을 위해 대기실에서 이전 내용을 대본으로 훑고 있던 선우의 귀에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그래. 기다리지 말고 저녁 먹어.”
대기실 구석에서 통화 중이던 진수가 선우를 힐긋 돌아보곤 헛기침을 큼큼했다. 그리고는 휴대폰 하단을 손으로 가리더니 작게 속삭였다. 나도 사랑해. 잠시 뒤 전화를 끊는 진수를 보곤 선우가 웃으며 말했다.
“왜 눈치를 보세요. 마음껏 말하셔도 되는데.”
“아니, 그게 좀... 듣기 그렇잖아.”
쑥스럽게 뒷머리를 긁적이는 진수를 보며 선우는 그가 문득 부러워졌다. 휴일 이후 사적으로 해경을 만나지 못한지도 어느새 2주 가까이 되고 있었다.
보고 싶다. 선우는 차마 입으로는 뱉지 못하고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다. 촬영 현장에서 그를 보고 있지만 종종 그것만으로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로는 부족했다. 촬영으로 바쁜 시기인 만큼 대본 분석이나 연기 준비로 여유가 없는데도 문득 이렇게 그에 대한 감정으로 물드는 것이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선우는 아쉬움을 달랠 겸 '시차'의 공식 홈페이지를 방문했다. 포토란을 클릭해 올린 지 가장 오래된, 맨 끝에 있는 페이지를 열었다. 대본 리딩 현장이 찍힌 사진들이 나타났다.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떳떳하게 볼 수 있는 매우 공식적인 자료였다.
스크롤을 내리던 손길이 멈추고 선우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물렀다. 대본을 읽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그런 자신을 보고 있는 서해경의 모습이 보였다. 사실 그때는 알아채지 못했던 순간이었다. 사진 속의 서해경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대로 오랫동안 선우를 바라본 건지 아니면 찰나였던 건지 그 역시도 불분명했다. 그러나 뒤늦게 이 모습을 발견했을 때 선우는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가슴이 설렜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사진을 보다 보니 묘한 그리움이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배가되는 듯했다.
역시...보고 싶었다. 자신에게만 다정하고 무척이나 사적인 서해경의 모습이.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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