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프 컷 42편
<-- --> 강한 충격은 오히려 냉정함을 찾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선우는 남자와 나눴던 대화를 천천히 곱씹었다.
‘이태형씨요?’
선우는 약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에게 되물었다. 지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냐는 듯이. 그 순간 당황하거나 미심쩍은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는 판단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다면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조금은 놀란 모습을 연출하면서도 일견 천진해 보일 수 있는 되물음을 건네자 남자는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약하게 인상을 썼다. 그는 ‘흐음’하고 낮게 끄는 소리를 내더니 웃음기를 되찾고는 다시 한 번 나직이 속삭였다.
‘그게 무슨 큰 비밀이라고 감춰요. 괜히 섭섭해지려고 그러네. 일단 나가서 좀 걸을까요?’
사실이 아니라면 그의 제안을 굳이 거부하는 것도 부자연스러운 일일 터였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는 저의를 알 수 없어 찝찝했기에 선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남자와 방을 빠져나왔다.
숙소 건물에서 벗어나 두 사람은 인적이 없는 공터를 천천히 걸었다. 남자는 선우를 힐긋거리며 무언가를 끊임없이 재고 계산하는 듯 보였다. 그에 선우가 먼저 정면으로 돌파하기로 했다.
‘어디서 그런 얘기가 도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얼마 전 일도 그렇고, 문제가 되면 기획사와 상의해야 될지도 모르니까.’
‘형이 막상 이렇게 나오니까 좀 헷갈리긴 하네요. 사실 저도 얼마 전에 들은 얘기예요. 더는 못 말해요. 이해해줘요.’
자신이 아는 사람일까. 선우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봤지만 마땅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남자는 무슨 생각에선지 선우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솔직히 저로선 이해가 잘 안되네요. 경원씨가 그 얘기를 한 순간, 저뿐만 아니라 이태형씨에 대한 소문도 언급한 거예요. 내 입에서 관련된 얘기가 퍼져 나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요? 가볍게 입에 담을 만한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 그런가. 어차피 태형 선배는 지금 그런 소문이 문제가 아니기도 하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우형은 당사자니까 제가 말해도 안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웃어 보이는 남자는 선우가 당사자가 아니라거나 그 소문이 허황될 수도 있다는 가정은 전혀 하지 않는 듯 보였다. 어째서일까. 저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선우는 불리한 패라도 쥔 것 같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어쨌든 형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꺼낸 말이었는데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앞으론 조심할게요.’
남자는 마음에도 없는 반성을 하는 척해 보였다.
‘그런데 형 전 그쪽에 진짜 편견 같은 거 없거든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아뇨, 뭐 일단 그렇다고요.’
남자는 자신과 묘한 기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선우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처음에 그 말을 한 의도가 뭐예요?’
‘말했잖아요. 형이랑 친해지고 싶다고. 친해져서 알고 싶은 게 많거든요.’
남자는 묘한 표정으로 샐쭉 웃더니 갑자기 급한 일이라도 생긴 사람처럼 다음에 보자며 사라졌다.
선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자신에게 성적 관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건 남자의 태도에서 느낄 수 있었다. 제게 관심이 있어 보이긴 하지만 거기엔 은근한 경계심과 날을 세운 예리함 같은 것들이 있었다.
「당분간 촬영 현장에서 서로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메시지를 써 내려가던 선우는 멈칫했다. 선우만 주변에 사람들이 많은 게 아니었다. 해경도 상황은 마찬가지였기에 민감한 내용일수록 노출될지도 모르는 위험성에 신경을 써야만 했다. 특히 첫 방송 전후로는 회의와 촬영 준비 때문에 해경의 곁엔 거의 항상 조연출이나 촬영감독, 특정 스태프가 붙어 있었다. 제일 안전한 건 통화를 하거나 직접 만나서 얘기를 하는 건데 지금 당장은 여의치가 않았다.
그래도 한 번은 기회가 오겠지.
선우는 만지작거리던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내일 촬영 현장에서 기회를 보다 적절한 타이밍을 노리기로 했다. 그때가 오기 전까진 선우가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촬영 현장에서 선우는 조금 당황했다. 약간의 변동이 있어 최경원이 출연하는 씬이 앞으로 당겨져 있었다. 결국 그와 함께 촬영하는 씬이 끝날 내까진 내내 같은 공간에 있어야만 했다. 해경에게 사정을 털어놓지 못한 채 남자를 경계해야 하는 상황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촬영장에 들어섰을 때 선우는 본능적으로 대기하고 있는 출연자들을 눈으로 훑다 최경원과 눈이 마주쳤다. 마치 그전부터 선우를 지켜보고 있었던 듯 시선은 흔들림 없이 고정돼 있었다. 선우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남자는 천연덕스럽게 싱긋 웃어 보였다.
처음엔 자신이 너무 예민한 건가 싶었지만 역시 조심해야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최근 들어 진전된 해경과의 관계도 지금 이 상황에선 꽤 신경 써야 할 문제였다. 평소 촬영장에 들어설 때마다 자연스럽게 주고받았던 해경과의 눈인사도 오늘은 생략하기로 했다. 객관적으로 되짚어보니 주의해서 보면 지나치게 친밀해 보일 수도 있었다. 선우가 남자와 만날 수도 있다는 걸 의심하는 이의 시선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선우는 되도록 해경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려 했다. 대신 인사는 주고받아야 했기에 피할 수 없을 만큼 해경이 가까워졌을 땐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선우가 다른 스태프들에게 하는 것처럼 자신에게도 깍듯한 인사를 건네자 해경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그라면 당연히 선우의 태도가 오늘 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 이유만 모를 뿐. 어차피 최경원의 촬영이 끝나면 기회를 봐서 말할 생각이니 해경이 한동안만 대충 넘겨주길 바랄 뿐이었다.
거의 두 시간에 가깝게 꽤 타이트한 촬영이 진행됐다. 컷 소리와 함께 오랜만에 대기시간이 주어졌다. 한 무리의 출연자들이 큰 소리로 ‘수고하셨습니다’를 외치며 우르르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촬영이 끝난 조연 배우들과 보조 출연자들이었다. 그 무리 중에 최경원의 뒷모습이 껴있는 것을 보고 선우는 속으로 조금 안도했다. 뒤늦게 카메라 주변을 훑었을 땐 해경 역시 어느새 촬영장을 나섰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 이 타이밍이면 통화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선우는 휴대폰이 있는 밴을 떠올렸다. 방금 전까지 촬영한 장소는 근처 건물들과 달리 꽤 낡은 데다 몹시 추워서 촬영을 하지 않을 땐 이용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조금 늦게 촬영장을 나선 선우가 복도를 지나 화장실 앞을 지나치려 할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의 손이 튀어나와 선우의 팔을 잡고 안으로 끌어당겼다. 놀란 선우가 눈앞의 얼굴을 채 확인하기도 전에 남자는 빠르게 화장실 가장 안쪽 칸으로 선우를 데리고 가 문을 잠갔다.
선우를 세게 끌어안은 채 해경이 귓가에 입술을 바싹 붙이고는 속삭였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연선우가 이상하게 나를 계속 피하고 있는 것 같은데.”
선우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얼굴을 보려 단단한 가슴을 조금 밀어냈지만 남자는 억센 힘으로 선우를 끌어안은 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선우의 귓불을 잘근잘근 씹기까지 했다.
선우는 가까스로 신음을 억누르며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해경은 그를 무시하고 이번엔 선우의 목에 입술을 묻었다. 여린 살을 입술로 깊게 빨아들였다 놓고는 혀를 내어 간질이듯이 핥았다.
“잠깐만요. 하지...읏.”
“그러게 왜 날 열받게 해요.”
아무리 사람들이 별로 없는 건물이라지만 아예 이용하지 않는 곳도 아니었기에 선우는 내심 조마조마했다. 그런 마음도 모르고 아래쪽에서 상의를 젖히며 슬금슬금 들어오는 손에 선우는 안 되겠다 싶어 눈앞에 있는 어깨를 꽉 물었다.
윽. 심한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해경이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리는 것에 선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의 몸을 밀었다.
“괜찮으세요?”
한쪽 눈가를 찌푸리고 있던 해경은 웃음기를 머금고는 대답했다.
“좀 과격하긴 한데... 이런 것도 꽤 좋은데요.”
선우의 허리께를 짚고 있던 그의 손이 이번엔 하의 속으로 향했다. 선우는 그의 손목을 꽉 잡아 제지해놓곤 속삭였다.
“지금 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의아해하는 해경의 눈빛에 선우는 화장실에 사람이 없는지 문을 열어 다시 한 번 확인하곤 그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작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래서 날 피했던 거군요.”
“네. 당분간은 사적으로 제 대기실이나 밴으로 찾아오는 것도 자제하는 게 ....읍.”
잘 경청하는 듯싶던 해경이 불현듯 고개를 숙여 입술을 집어삼켰다. 당황한 선우가 그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지만 입맞춤은 점점 깊어지기만 했다. 서해경이 집요하게 혀를 빨면서 나는 질척이는 소리가 무척이나 크게 느껴져 선우는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 뛰었다. 그 와중에도 그의 키스는 뒷골이 오싹할 만큼 감미로웠다. 오랜 키스 끝에 입술이 떨어지자 선우에게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하아. 하아. 숨을 고르는 선우를 새까만 눈동자로 응시하며 해경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킬까봐 무서워요?”
“무섭다기보다는...”
선우는 곰곰이 생각하다 정정했다.
“네, 무서워요.”
그런 선우를 가만히 바라보던 해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요. 확실히 조심하는 게 맞긴 하죠.”
해경이 흐트러진 선우의 머리를 한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연선우는 계속 연기해야 하니까.”
지그시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마주하다 선우는 느리게 입을 열었다.
“저 때문이 아니라...솔직히 전 서피디님이 더 신경 쓰여서요. 저야 이태형하고 사귀었던 건 사실이니까 그러려니 해도,”
“걔 얘긴 빼죠.”
남자가 돌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선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네. 어쨌든 저 때문에 괜히 서피디님까지 엮일 수 있으니까요.”
“알아요, 선우씨보다 날 더 걱정했을 거라는 거.”
해경은 선우를 제 품으로 당겨 끌어안았다. 예상치 못한 변수에 잔뜩 긴장한 것 같은 선우에겐 미안하게도 해경은 사실 다소 안이한 감상에 빠져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누군가에게 들켜도 그다지 상관없을 것 같은.
서해경은 누군가에게 두 사람의 관계를 들키는 것에 대해 생각해봤다. 혹은 그런 소문이 따라붙는 것에 대해서. 자신에게로 향하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이야 당연히 관심 밖이었다. 만약 선우에게 그런 게 쏟아진다면... 글쎄. 눈과 귀를 가리는 방법이야 많았다. 정도가 심해진다면 일단은 외국이든 어디든 그런 환경에서 벗어나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지 않을까. 그 참에 못한 데이트도 실컷 하고 여행도 함께 다니면 꽤 괜찮을 듯싶다. 그러다 선우가 연기를 하고 싶어 한다면 자신이 직접 제작을 하든 뭘 하든 마음껏 연기할 수 있는 환경 역시 받쳐줄 것이다. 하지만 역시 안일하고 방만한 상상이다. 그게 온전히 자신의 연인이 원하는 길은 아닐 테니까.
연선우라는 존재는 해경에게 새로운 당위성을 부여해주었다. 배우로 사는 것을 택하고 꿈꿔온 그를 위해 해경은 선우의 불안과 두려움까지도 기꺼이 동조하기로 했다.
"아무 일도 없게, 최대한 주의할게요."
해경은 선우의 목덜미에 깊숙이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연선우한테 중요한 건 이제 나한테도 중요하니까.”
해경의 입술이 닿은 곳은 늘 그랬던 것처럼 기분 좋은 온기가 자리했다. 이제 그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체온이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