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프 컷-37화 (37/49)

러프 컷   37편

<--  -->  이틀 동안 이어졌던 야외 촬영이 끝나고 오늘부터 며칠간은 세트장에서 촬영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지방 촬영 후 긴 이동시간으로 인한 피곤함을 느낀 선우는 대기 시간에 방송국 내에 있는 카페를 찾았다.

자신이 마실 아메리카노를 포함해 진수가 좋아하는 카라멜 마끼아또와 민정이 마실 연유라떼를 사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불안한 커피 캐리어의 손잡이를 확인하느라 다소 아래로 향해 있던 시선이 누군가 앞을 가로막는 느낌에 위로 들렸다. 그 앞엔 이태형이 서 있었다. 태형이 옆에 있던 매니저에게 눈짓했다.

“먼저 들어가 있어.”

“어? 아, 그래.”

태형의 말에 매니저가 눈치를 보며 자리를 피했다. 뒤늦게 태형의 존재를 알아챈 선우가 모른 척 지나치려 했지만 태형이 슬쩍 옆으로 이동해 그마저도 막아서며 태연하게 웃었다.

“오랜만이네. 광고 찍었다며.”

선우가 헛웃음에 가까운 웃음을 작게 내뱉었다. 태형이 별거 아닌 것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눈썹을 실룩였다.

“왜 웃는데?”

“넌 어떻게 그렇게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다 알고 있는 건지 신기해서.”

그 말에 불쾌한 듯 태형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야 이래저래 아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원하지 않아도 결국 내 귀에 들어와.”

“그래, 그럼 많이 들으면서 살아.”

선우가 무시하고 지나치려 하자 태형이 선우의 팔목을 붙들었다.

“연선우. 기고만장하지 마. 너 같은 애들은 어차피 얼마 못 가게 돼 있어.”

“나 같은 애들?”

“세상 물정 모르고 어리숙하고 노력하면 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거라 믿는 순진한 애들. 아니 멍청하다고 해야 하나.”

선우가 피식 웃었다.

“그래, 내가 그런 놈이라고 쳐. 네 말대로 한 번 보자. 내가 어떻게 되는지. 나도 궁금하니까.”

태형의 시비보다 얼음이 녹아가는 커피가 더 신경 쓰였다. 걸음을 서두르며 멀어지는 선우를 보며 태형이 얼굴을 구겼다.

태형은 하필이면 자신이 찍던 광고가 선우에게 돌아갔다는 게 영 꺼림칙했다. 정말 연기 하나로 땄을까? 그런 의심도 들었다. 아직 스타성은 누가 봐도 자신이 위였다. 재계약을 자신했던 광고였는데 계약이 끝나자마자 칼같이 모델이 바뀌었다. 지금 모델로 있는 의류 광고 또한 곧 기한이 끝나 가는데 별다른 말이 안 나오는 게 불안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태형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얼마 전에 드라마에 같이 나온 게 화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연이나 다름없었던 연선우가 마지막에 가서는 거의 서브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주인공인 자신보다도 화제성에서 앞섰다.

진짜 연기 하나만으로 그게 가능하다고?

역시 계속해서 의심이 들었다. 연선우. 잘 눈에 띄지도 않던 예전이 좋았었는데. 자신과 비교조차 할 수 없었던, 무명의 연선우였을 때가.

대기실이 있는 층에 다다라 커피를 들고 막 모퉁이를 돌던 선우는 비상구로 달려가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았다.

“어?”

지연씨 아닌가. 태형의 스타일리스트인 지연과는 ‘정오의 이별’을 촬영하는 동안 웃으면서 인사를 나눌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비상구는 복도 끝에 있었고 선우의 대기실은 그 근처에 있었다. 대기실 문 앞에 서서 선우는 조금 갈등하다 조용히 비상구 쪽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비상구 앞을 서성거리다 문 손잡이를 잡았을 때 희미하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연의 울음소리였다. 선우는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을 떼었다. 사정은 모르지만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숨죽여 우는 이에겐 누군가의 어설픈 위로보다 눈물을 숨길 수 있는 자유가 더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

선우는 맞은편에서 손에 담뱃갑을 쥐고 걸어오는 방송국 직원을 불안스레 눈여겨보았다. 이 비상구 계단이 종종 흡연 장소로 이용된다는 걸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다. 간간이 그곳을 이용할 때면 미심쩍은 담배냄새가 남아 있곤 했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선우는 입을 열었다.

“문이 고장 난 것 같은데요. 안 열리네요.”

“아, 그래요?”

직원은 눈썹을 한 번 찌푸리더니 다행히 굳이 확인하지 않고 반대편으로 돌아섰다. 거짓말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건물 내에서의 흡연도 금지된 행위니까. 그런 식으로 합리화하며 선우는 문지기라도 된 듯 몇 분간 더 어정쩡하게 그곳에 서 있었다. 다행히 그 후로는 누구의 접근도 없었다.

울음소리가 언젠가부터 잦아들더니 이내 잠잠해지기에 선우는 조용히 발걸음을 떼려 했다. 그 때 뒤에서 문이 열렸다. 선우가 조금 당황스레 뒤를 돌아봤을 때 운 흔적이 여실히 눈가에 남아있는 지연이 입을 열었다.

“선우 오빠.”

“아, 지연씨 오랜만이네요.”

선우가 어색하게 웃어보이자 지연의 입에서 픽 하고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오빤 여전하네요. 오빠랑 일할 수 있었음 좋았을걸.”

미련과 아쉬움이 남은 눈길로 선우를 올려다보던 지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일 그만두려구요. 그동안 감사했어요.”

예상치 못한 말에 선우는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동안 내가 더 고마웠죠.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지연씬 잘할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방금 전에 문 앞에서 지켜주신 거.”

지연이 조금 쑥스러워 하며 말했다.

아, 알고 있었구나. 직원과 대화하는 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웃을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어요. 응원할게요.”

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금 쉬고 나서 다시 일 찾아보려구요. 나중에 방송국에서 마주쳤을 때도 오빠랑 인사할 수 있는 거죠?”

“당연하죠.”

선우의 미소를 보면서 지연도 마주 웃었다. 지연의 사정에 자신이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 울지 않고 웃을 일이 많기를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렇기에 울음 끝에 조그만 미소가 걸린 지연의 얼굴을 보며 그래도 조금은 다행이라고 선우는 생각했다.

대기실 문을 열자 갑자기 양쪽에서 작은 폭죽이 터져 시야를 가렸다. 깜짝 놀란 선우가 간신히 테이크아웃 해온 커피를 추스르는 동안 연이어 박수소리가 짝짝짝 터져 나왔다.

“우리 선우의 첫 광고를 축하합니다!”

대기실 테이블에 커피를 올려놓고 선우는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진수와 민정에게로 다가갔다.

“언제 이런 걸 또 준비하셨어요. 이러다 광고 두 번 찍으면 마을 잔치라도 열어야겠어요.”

“이번에는 처음이니까 기념하는 거고 다음은 열 번째 정도는 됐을 때 또 해야지.”

농담으로 꺼낸 말이었는데 진심으로 미래의 계획을 내비치는 진수를 보며 선우는 못 말린다는 듯이 웃고 말았다.

“오빠, 촛불 꺼요.”

앙증맞은 작은 케이크에는 촛불 하나와 함께 제일 상단에 ‘축’, 그 밑에 ‘첫 광고’라는 글씨가 그려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선우가 인사하고는 작게 입바람을 불어 촛불을 껐다. 다시 한 번 짝짝작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 그럼 이제부터 맛 좀 봐볼까.”

진수가 미리 준비해놓고 있던 포크를 몇 개 꺼내더니 선우와 민정에게 하나씩 건네고선 케이크 앞으로 돌진했다.

“형, 혹시 케이크 먹고 싶어서 산 거 아니죠?”

선우가 장난스럽게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면서 추궁했다.

“으음, 으음.”

입에 든 케이크를 우물거리며 진수가 ‘아냐, 아냐’라는 의미의 소리를 내곤 손을 내저었다.

“이러다 진수오빠가 다 먹겠어요. 선우오빠, 아!”

민정이 얼른 포크로 케이크를 떠서 선우의 입 앞으로 들이밀었다. 선우는 얼떨결에 아기새처럼 입을 벌려 케이크를 받아먹었다.

“야, 나 겨우 두 입 먹었다. 너무 타박하는 거 아니야?”

“오빠 한 입이 어디 한 입이어야 말이죠. 그러니까 처음부터 큰 거 사자니까.”

“선우야 단 거 별로 안 먹으니까 남을까봐 일부러 작은 거 사왔지.”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웃으며 지켜보고 있는데 대기실 문이 열리며 해경이 들어왔다.

“서피디님도 케이크 좀 드세요.”

민정이 반갑게 그를 맞이하며 얘기하자 해경이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습니다.”

그 말에 다시 케이크에 집중하는 진수와 민정을 바라보던 해경이 문득 손을 뻗어 선우의 입술 주변을 훔쳤다. 선우가 머쓱해져선 그의 손길이 지나간 자리를 손등으로 한 번 더 쓸었다. 해경이 선우의 입가를 훔친 손가락을 핥고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작게 속삭였다.

“달고 맛있네요.”

얼굴을 붉힌 선우가 슬쩍 진수와 민정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두 사람은 여전히 케이크에 몰두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자신의 입술을 여전히 빤히 쳐다보는 해경의 시선에, 선우는 목이 타는 것을 느끼고는 뒤늦게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찾아 삼켰다.

세트장 촬영이 3일째 이어진 날이었다. 오늘은 저녁이 되기 전에 모든 촬영이 끝나 모쪼록 일찍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밴의 널찍한 시트에 기대어 깜빡 잠이 들었던 선우는 품 안에서 짧게 진동하는 휴대폰에 눈을 떴다. 휴대폰을 꺼내 확인해보니 경훈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연선우. 너 이거 봤냐?」

경훈이 메시지에 이어 직접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 한 장을 첨부했다. 얼핏 보기에 잡지 기사인 듯 했다.

「이니셜로 나와 있긴 한데 이거 너 노리고 쓴 거 아냐?」

선우는 편하게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키곤 경훈이 보낸 사진을 클릭해 크게 확대했다. 선우의 눈이 차분하게 기사의 첫 문장으로 향했다.

다음은 최근 한 드라마에서 주연에 버금가는 인기로 주목받았던 한 조연 배우와 관련된 일화입니다. A씨는 오랜 무명 생활을 하다 이 작품에 급하게 조연으로 투입돼 외모와 연기력으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는데요. 출연하게 된 계기가 주연인 B씨와의 친분 때문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은 같은 대학교를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를 이용해 A씨가 B씨에게 자신을 드라마에 꽂아달라고 적극적으로 부탁했다는 후문입니다. 이에 곤란해 하는 B씨를 개인적으로 협박하기까지 했다는 소문까지 들려오고 있는데요. 결국 B씨가 A씨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A씨가 드라마에 비중 있는 조연으로 투입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A씨는 일단 드라마 출연이 성사되자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번에는 작가에게 접근해 자기 분량을 늘리도록 수를 썼다고 하는데요. 도대체 무슨 수를 썼기에 작가가 A씨의 분량을 늘릴 수밖에 없었을까요. 자신의 꽃미모로 미인계라도 썼던 걸까요? 글쎄요, 진실은 그들만이 알고 있겠죠.

경훈의 말대로 기사 속 A씨는 정황상 부정할 수 없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선우는 난감하게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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