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프 컷-36화 (36/49)

러프 컷   36편

<--  -->  선우는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떴다. 오랜 세월 동안 날마다 비슷한 양과 세기로 떨어졌을 햇빛의 느낌이 오늘따라 유난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느리게 눈을 뜨며 옆을 봤을 때 그것이 한 사람의 시선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잘 잤어요?”

해경이 팔을 괴고 머리를 받친 채 누워 선우를 내려다보며 빙긋이 웃어 보였다. 꿈인가. 선우는 순간 그런 생각도 들었다.

언젠가 서해경이 나오는 꿈을 꿨던 날이 떠올랐다. 그 꿈을 꾸고 나서 막연히 그를 포기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꿈속의 그가 지금은 연인이 되어 아침에 눈을 뜬 순간 자신의 옆자리에 누워 있었다.

“아침부터 그렇게 뚫어질 듯이 쳐다보면 곤란한데요.”

해경이 웃으며 선우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었다. 그의 손이 작은 바람을 일으키며 제 눈앞을 지나가는 순간 선우는 지난밤 느꼈던 적나라한 감각들이 하나둘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의 크고 따뜻한 손이 부드럽게 자신의 것을 감싸 쥐던 감각이라든가 집요하게 몸 이곳저곳을 지분거리던 입술의 체온, 제 가슴에 턱을 기댄 채 나른하게 웃던 그의 눈빛 같은 것들이.

해경은 선우가 느리게 눈동자를 굴리며 자신을 오래도록 쳐다보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았다. 새벽 사이 해경이 선우 위로 꼼꼼하게 덮어놓은 이불 속에서 따뜻하게 온기를 품은 하얀 손이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선우는 손을 들어 무언가를 확인하듯 그의 뺨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자신의 턱과 뺨, 눈가를 느릿느릿 쓸고 가는 손길이 성적이다기 보다는 애틋하게 느껴져서 해경이 약간은 궁금함이 담긴 눈빛으로 선우를 바라봤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선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꿈인가 해서요."

그 말에 해경은 지난밤 종종 그랬듯이 고개를 돌려 선우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꿈이었으면 좋겠어요?"

"아뇨. 절대."

"나랑 생각이 같아서 다행이네요."

해경이 여전히 선우의 손에 입술을 묻은 채 입가를 끌어올려 웃자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그에 선우도 그를 보며 조금 따라 웃었다. 해경이 선우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보곤 말했다.

“아직 시간이 좀 있긴 한데...”

해경의 손이 어느새 선우의 셔츠를 젖히며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그가 밤새도록 괴롭힌 한 지점을 슬쩍 건드렸다.

“읏. 잠깐,"

당황한 선우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며 해경이 반쯤 몸 위로 올라타는 순간 발랄한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발신인은 알람만큼이나 시간 개념이 정확한 매니저 진수였다.

출근까지 같이 하기에는 진수의 눈치도 있고 해서 두 사람은 각자 촬영장에 가기로 했다. 진수가 데리러 오기 전에 해경을 보내야 했기에 선우는 집에서 멀지 않은 언덕길 중간쯤에서 그를 먼저 배웅하기로 했다.

“이렇게 아침 시작하는 거 꽤 좋은데요.”

최근의 빡빡한 스케줄을 떠올리지 못할 만큼 오늘따라 해경의 웃는 얼굴이 유독 산뜻해 보였다.

“같이 아침 먹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선우는 아쉽고 또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선우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시간이 늦어 있었다. 물론 늘 일찍 준비하는 습관 탓에 지각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요즘 저보다 더 자주 밤을 새는 해경에게 나름 든든한 아침식사를 챙겨주고 싶었던 계획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 대신 새벽에 다른 걸 잔뜩 해서 이미 배부르기도 하고.”

해경이 웃음기 밴 얼굴로 능글맞게 속삭였다. 선우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작은 목소리긴 했지만 엄연히 밖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선우가 나긋한 목소리로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가세요.”

그런 소리 할 거면 차라리 얼른 가라는 투였다. 표정은 차분했으나 미미하게 붉어지는 선우의 얼굴을 보며 해경은 기분 좋게 웃었다.

“먼저 갈게요. 조심해서 와요.”

“운전 조심하세요. 이따 봬요.”

해경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에 새기듯 선우를 꼼꼼히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비록 곧 다시 볼 테지만 선우는 이대로 헤어지는 게 영 아쉬웠다. 그러면서도 이런 배웅조차 그와 공유하는 일상적인 추억을 하나 더 늘리는 것 같아 조금은 설렜다.

해경이 돌아서 걸어가는 순간 작은 바람이 일어 그의 머릿결이 가닥가닥 부드럽게 흩날렸다. 그런 사소한 장면 하나까지도 공들여 찍은 사진처럼 선우의 마음에 일일이 박혀 왔다.

왜 이렇게 좋지.

선우는 괜히 콧잔등을 긁으며 가슴속에 부풀어 오르는 풍선 같은 것을 꾸욱 눌러 담았다.

해경이 길모퉁이를 돌기 직전 힐긋 뒤를 돌아보곤 웃었고 선우는 그를 향해 아이처럼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인사를 끝으로 해경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까지 지켜본 선우는 출근 준비를 마저 하기 위해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오랫동안 혼자 살아온 제 집이, 그가 없다는 이유로 갑자기 허전하게 느껴질 것만 같았다.

========== 작품 후기 ==========

최근 개인 사정으로 계속해서 장거리 이동이 있어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안 그래도 오랜만에 찾아뵙는데 노블 부분을 뭉텅이로 덜어내면 노블을 못 보시는 분들은 읽을 부분이 거의 없는 것 같아서요.

최대한 쥐어짜내보았습니다.

혹시 더 걸러내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추후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정아연님, dokhae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글이 일부 수정됨에 따라 본 회차의 용량이 다소 줄어들었습니다.

러프 컷 19 1편

<-- 36(내용 변경에 따른 삭제) -->

본 회차는 약간의 내용 변경에 따라 삭제되었습니다.

========== 작품 후기 ==========

개인적으로 '노블은 삽입이다'라는 철학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 사실은 아침짹이었는데요...(실토)

댓글에 아침짹이라는 스포가 있어 화들짝 놀란 심경으로 부족하지만 조금 적어봤습니다.

다음에는 제 철학과 가치관을 준수하는 노블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정아연님, dokhae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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