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프 컷-35화 (35/49)

러프 컷   35편

<--  --> “진수 선배한텐 나랑 볼일이 있다고 말해놨어요. 오늘은 내가 데려다주고 싶어서요.”

모처럼 선우의 촬영이 끝났을 때 해경의 일정도 함께 끝난 하루였다. 대기실로 찾아온 해경이 그렇게 말하고서 선우에게 오랜만에 자신의 차를 타고 갈 것을 권했다. 그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하던 선우는 문득 경훈이 장난처럼 꺼냈던 표현이 떠올랐다.

사내 연애라.

어떻게 보면 지금은 같은 직장에 다니고 있다고 표현할 수도 있었다. ‘정오의 이별’에 이어 ‘시차’까지 연달아 JBS의 작품을 하게 돼서 덕분에 그와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차기작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다른 방송사의 작품을 하게 되면 이곳에서의 우연 같은 만남도 당분간은 사라질 것이다. 건물을 막 빠져나왔을 때 선우는 문득 아쉬움에 방송국을 한 번 돌아보곤 새삼스레 옆에서 나란히 걷는 해경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왜요.”

선우의 시선을 의식하곤 해경이 웃으면서 돌아봤다. 선우는 슬쩍 주차장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그나마 있는 사람들조차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냥 이렇게 같이 퇴근하는 게 좋아서요.”

솔직하게 말하며 기분 좋게 웃는 선우를 해경이 애정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봤다.

“작품 끝나면 피디 때려치우고 연선우씨 매니저 할까요? 매일 같이 출퇴근하게.”

해경의 농담에 선우는 소리 내어 짧게 웃었다. 어느새 해경의 차 앞에 이르러 두 사람은 각자 차 문을 열고 들어가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란히 앉았다.

“제가 서해경 감독님을 좋아해서 그건 안 될 것 같은데요.”

선우가 벨트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대화 흐름상 감독으로서의 서해경을 좋아한다는 뜻이었지만 막상 내뱉고 나니 다른 의미로도 느껴졌다. 그리고 그 의미 또한 사실이기는 했다. 딸깍. 한순간의 적막 속에 벨트를 고정하는 소리가 울리고 선우가 옆을 돌아봤다. 언제부터였는지 해경이 집요한 시선으로 선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굴 좋아한다고요?”

“...서해경 감독님이요.”

“다시.”

“......”

“말해 봐요.”

“좋아해요.”

선우가 해경을 바라보는 시선처럼 잔잔하지만 깊은 울림이 있는 한마디였다. 그는 잠시 말없이 선우를 바라보았다.

“퇴근이 아니라 이대로 도망갈까요?”

해경이 조용히 웃으면서 건넨 말에 선우의 밝은 웃음소리가 차 안에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단지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차 안에서 함께했을 뿐이지만 충만한 기분이었다.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서피디님도 얼른 댁에 돌아가셔서 쉬세요. 오늘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

문을 열기 전 선우가 건넨 인사말에도 해경은 별다른 말없이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뭐가 잘못됐을까? 선우가 묘한 분위기에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한동안 고민해봤지만 도통 알 수 없는 답에 선우는 일단 문고리에 걸쳐져 있던 손을 살포시 무릎 위로 다시 내렸다. 그러자 미세하게 좁혀져 있던 그의 미간이 다시 펴지는 듯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침묵에 선우는 설마 싶은 심정으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괜찮으시면 집에 잠깐 들러서...”

“그러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해경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마치 선우의 제안을 기다리기도 한 것처럼 덥석 반응하는 그의 모습에 선우는 오늘 아침에 빠져나온 집 상태가 어땠는지 급히 헤아려보기 시작했다.

선우의 집으로 가는 길은 구불구불했다. 폭은 넓지 않았고 곡선이 많은 길이었다. 서해경은 느린 시선으로 동네의 낮은 지붕과 담들, 길가에 나와 있는 화분 같은 것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조금 앞서 걷고 있는 선우의 곧은 등에 눈길이 머물렀다.

“이제 다 와가요.”

선우는 간간이 뒤를 보며 그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를 확인했고 부지런히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를 일러 주었다. 그 성실함마저 그 다워서 해경은 조용히 웃었다. 나란히 걷기 힘든 좁은 골목길을 십여 분 정도 걷고 난 뒤 드디어 조금 넓은 길이 나오기 시작했다.

무척 조용한 동네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해경은 기다렸다는 듯이 선우의 옆으로 다가와 손을 잡았다. 제법 일교차가 있는 봄날 저녁, 단단히 잡아오는 해경의 손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두 사람은 페인트칠이 조금 벗겨진 초록색 대문 앞에 도착했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선우는 조심스레 대문을 열고 들어가 해경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2층 집에 주인집 할머니가 사시는데 지금 주무시고 있을 시간이라...”

그 의미를 눈치챈 해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한 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선우가 작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불을 켰다. 해경은 큰 키 탓에 머리를 조금 숙이고 들어가야 했다. 현관 바로 앞은 작은 부엌으로 이어져 있었다. 부엌 한편에 딸린 문을 하나 더 열고 들어가니 작지만 아늑하고 깔끔하게 정돈된 방이 보였다.

“앉아 있으시면 제가... 아, 녹차 괜찮으세요?”

갑작스러운 손님 대접에 머릿속이 분주해진 선우가 약간 허둥대며 물었다.

“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해경이 부엌을 돌아다니느라 문 사이로 보였다 사라지곤 하는 선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방 구경해도 됩니까?”

가스레인지 위에 막 주전자를 올려놓고 물을 끓이던 선우가 고개만 빼꼼 내밀어 ‘네’하고 대답했다. 해경은 작은 책장 앞으로 다가갔다. 허리께까지 올라오는 책장의 상단엔 작은 액자 속에 한 여성이 활짝 웃는 표정으로 어린 소년을 안고 있는 사진이 끼워져 있었다. 어린 선우와 그의 어머니인 것 같았다. 어머니 역시 꽤 미인이었고 사진 속의 두 사람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해경은 시선을 내려 책장 안에 꽂힌 책들을 눈으로 훑었다. 의외로 시집이 많았다. 다른 책들에 비해 높이가 껑충 뛰어 우뚝 솟아있는 대본도 여러 권 꽂혀 있었다. 해경은 그중 최근에 촬영을 끝낸 ‘시차’의 대본을 꺼내 펼쳐 보았다.

형광펜으로 줄 쳐진 대사들 옆에 선우가 직접 쓴 듯한 코멘트들이 빼곡하게 달려 있었다. 해경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반듯하게 써진 글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선우가 녹차가 든 컵을 쟁반에 받쳐 들고 방 안에 들어갔을 때 남자는 벽에 기대앉은 채 대본을 보고 있었다.

“인상적인 코멘트들이 많네요. 복사해서 갖고 싶을 정도예요.”

마치 공부한 흔적들을 들킨 것 같아 쑥스러우면서도 해경이 원한다면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도 참고해야 할 자료라 선우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해경이 그 사정을 짐작하듯 피식 웃었다.

“준다는 말은 안 하네요.”

“촬영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 필요해서요.”

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것들이 쌓여서 그런 연기가 나오는 거겠죠. 그런데 선우씨.”

“네?”

“혹시 자고 가도 됩니까?

“...방이 좁아서 불편하실 텐데요.”

“불편하긴요. 둘이서 오붓하게 안고 자면 되죠.”

남자의 태연한 웃음에 선우는 속이 바짝 타는 것만 같았다.

“나 자고 가요?”

해경이 한 번 더 확인하듯 물음을 가장한 통보를 마쳤다. 달리 안 된다고 밀어붙일 이유가 없긴 했다.

“네.”

조금 늦게, 선우에게서 작은 대답이 나오자 해경이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키가 워낙 큰 탓에 누워있는 그의 머리맡과 발밑에는 여유 공간이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이 별로 답답해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몇 년 동안 사귀면서 고작 두세 번 선우의 집에 방문했던 태형이지만 올 때마다 혀를 차거나 툴툴대곤 했었다.

집이 작네. 도대체 이런 데선 어떻게 사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리곤 했다. 어머니와의 추억이 있어 애정이 있던 집이 그런 식으로 폄하 받는 게 결코 좋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허물어질 땐 이 방이 몹시 작고 초라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돌아보면 그런 적도 있었던 게 신기했다. 이 방은 제 마음의 크기에 따라 종종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그리고 지금 서해경이 차지하고 있는 방은 여전히 크진 않지만 퍽 알맞은 크기로 느껴졌고 스스로 부끄럽거나 초라하게 생각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와 같이 살던 시절 이후 처음으로,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다정한 공간처럼 여겨졌다. 그 모든 감상들이 선우에게는 신기하게 다가왔다.

“자꾸 할 일 있는 척 돌아다니지 말고 이리 와요.”

씻고 나서 선우가 깔아준 매트 위에 먼저 떡하니 자리를 잡은 해경이 자신의 팔을 베고 누운 채 옆자리를 툭툭 치며 가리켰다. 선우는 샤워 후 애꿎은 그릇들을 빡빡 씻어가며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한 설거지를 끝마치고 물을 마시던 중이었다.

“안 그래도 그러려던 참이었어요.”

선우는 애써 당당하게 말했다. 불을 끄고 그의 옆에 누웠다. 해경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그런 선우를 빤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오히려 해경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더 초조해지는 선우였다. 후우.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낮게 새어 나오는 찰나 해경이 선우를 향해 돌아누웠다. 선우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긴장돼요?”

“조금은요.”

“아무렇지 않으면 서운할 뻔했는데 다행이네요.”

해경의 손이 천천히 선우의 티셔츠를 젖히며 슬쩍 안으로 들어왔다.

“아...”

선우의 가슴이 심하게 뛰기 시작했다. 보드라운 맨살을 살살 쓰다듬던 해경이 고개를 들어 선우와 입술을 겹쳤다. 진득한 입맞춤이 한동안 이어졌다. 해경이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켜 선우의 몸 위로 천천히 올라왔다. 해경의 손이 선우의 트레이닝 바지를 끌어내릴 때 선우가 급하게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촉. 입술이 살짝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숨을 몰아쉬는 선우를 향해 해경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왜요.”

“내일 액션씬 때문에 오늘...끝까지는 안 될 것 같아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 안 된다는 말을 하는 선우를 보자 해경은 도리어 아래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선우도 자신의 몸에 닿는 단단한 양감을 느꼈는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연기 열심히 하는 애인 두니까 이런 게 또 곤란하네.”

해경이 눈가를 휘며 슬쩍 미소 지었다.

“내가 잘 찍어준다고 해도?”

선우가 휘휘 고개를 저었다.

“제가 잘해야죠.”

선우라고 그와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촬영을 시작한 이래로 처음 있는 액션씬이었고 저뿐만 아니라 해경의 작품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더욱더 무엇 하나 빠짐없이 완벽히 해내고 싶었다.

잠시 선우를 바라보던 해경이 옅은 숨을 내뱉으며 눈앞의 뺨에 짧게 키스했다.

“알았어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아쉬움을 달래듯 선우의 몸을 쓰다듬던 해경의 손길이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한 손으로 선우의 티셔츠를 점점 위로 젖히며 다른 손으로는 트레이닝 바지를 밑으로 잡아끌었다.

“앗.”

선우가 당황스러운 눈짓을 하자 해경이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끝까지 안 한다고 했지 아무것도 안 한다고 하진 않았어요.”

“그...”

선우의 입술을 집어삼키면서 해경은 단번에 선우의 바지와 속옷을 끌어당겼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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