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프 컷-33화 (33/49)

러프 컷   33편

<--  -->  현석과 지하 주차장에 내려갔을 때 익숙한 밴이 기다리고 있어 선우는 놀랐다. 오랜만에 촬영이 없는 휴일인 만큼 매니저인 진수형도 휴식을 챙겨주고 싶어 선우는 그가 호텔에 데려다줬을 때 먼저 가라 일렀었다.

“매니저 형이 기다리고 있었나 봐요. 대표님 들어가세요. 아까부터 전화도 계속 울리는 것 같은데.”

“아, 그럴래요? 중요한 전화는 아닌데 마저 정리할 일이 좀 남아있긴 해서. 그럼 올라가볼게요. 조심해서 들어가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현석이 친근하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 후 다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선우는 여전히 갓 뽑은 차처럼 반짝거리는 밴의 문을 열어젖혔다.

“커헉!”

운전석에 앉아 목을 뒤로 꺾고 누운 채 잠을 자던 진수가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어, 왔어?”

“집에 가서 편하게 주무시지 왜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너 휴대폰 놓고 갔더라.”

“아... 내일 돌려주셔도 되는데.”

“뭐, 휴대폰 때문만은 아니고. 네가 괜찮다고 해서 후딱 가버리면 그게 매니저냐? 공으로 월급 타가는 도둑놈이지. 그리고 선우 너 조심해야 돼. 너 일일이 내 사정 봐주고 챙겨주려는 거 마음은 고마운데 가끔은 걱정된다. 너같은 애들이 매니저랍시고 행세하는 나쁜 놈들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된통 당할 수도 있어.”

“그럴 일 없게 쭉 형하고 같이 가면 되죠.”

“말은. 뭐, 내가 썩 괜찮고 훌륭한 인재긴 하지.”

선우의 말에 기분 좋은 듯 웃으면서 진수는 농담처럼 답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밴은 매끄럽게 주차장을 빠져 나왔다. 도로에 진입해 신호대기에 걸렸을 때 진수가 룸미러를 힐긋 보곤 물었다.

“선우야, 근데 너 올라가서 뭐 매운 거 먹었냐?”

“네? 왜요?”

“입술이 빨개져가지고 퉁퉁 불었는데.”

순간적으로 뜨끔한 선우는 모르는 척 태연하게 말했다.

“네, 좀. 배고파서 이것저것 집어 먹긴 했어요. 많이 흉해요?”

선우가 입술을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아니. 나름 섹시한데? 입술 부풀리는 수술도 있다더니 왜 그런 줄 알겠다, 야.”

선우는 민망해져서 스윽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봤자 짙게 선팅 돼 밖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름 진정 효과는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매만지다 도리어 더 부을까봐 얼른 손을 거두었다.

진수는 익숙한 동네 초입에서 밴을 세웠다. 일반 승용차도 진입하지 못하는 동네 길을 밴이 들어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선우야, 이사 생각은 없어? 현석이도 임시 숙소 얘기 꺼내던데.”

현석은 선심 쓰듯 종종 선우에게 필요한 것이 없냐며 물어왔다. 언젠가는 진수를 통해 집과 관련한 얘기를 들었는지 임시 숙소로 쓸 빌라를 마련해줄까 하는 얘기까지 꺼냈다. 선우로선 아직 자신이 회사에 제대로 이득을 준 것도 없는데 숙소까지 받기에는 좀 부담스러웠다. 이미 지금 해주는 지원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만 선우는 지금의 집에 정이 들기는 했지만 저보다는 여러 사람의 편리를 위해 이사할 필요성을 느끼긴 했다.

“안 그래도 조만간 이사하려는 계획이 있긴 해요. 다만 지금은 좀 바빠서 드라마 촬영 다 끝나면 알아볼까 하구요.”

“그래, 그게 낫겠다. 너 불편한 게 신경 쓰여서 한 번 물어봤어. 여기서 내리면 꽤 오래 걸어가야 하잖아. 집 알아볼 거면 언제 한 번 쉬는 날에 같이 알아보든가.”

“네. 그렇게 해요. 챙겨줘서 고마워요, 형. 들어가서 쉬세요.”

“선우 너도 푹 쉬고. 내일 보자.”

멀어져가는 밴을 보다 선우도 몸을 돌렸다. 해경이 몇 번인가 자신을 데려다줬던 자리에는 이제 밴이 대신 들어섰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게 벌써 추억이 되다니. 저의 상황이 나아져 바뀐 변화라는 건 알지만 조금 아쉽기도 했다.

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의 중간쯤에는 선우도 가끔 이용하곤 하는 작은 슈퍼가 하나 있었다. 날씨가 그리 춥지 않은 날에는 종종 주인 할머니가 슈퍼 앞 낡은 의자에 앉아 있곤 했다. 오랜만에 할머니가 밖에 나와 있었다. 선우가 인사를 하려는데 그녀가 대뜸 말을 걸었다.

“총각, 테레비에 나오는 사람이여?”

“네, 안녕하세요.”

“잠깐 일루 들어와 봐.”

노인이 비스듬히 굽은 허리를 두드리며 슈퍼 안으로 들어갔다. 선우가 조금 낮은 문 탓에 머리를 조금 숙이고는 따라 들어섰다. 노인은 주황색 망에 싸인 삶은 달걀 한 꾸러미와 요구르트 한 줄, 꿀꽈배기 한 봉지를 큰 검은 봉투에 넣어 선우의 품에 덥석 안겨줬다.

“이거 가져가서 먹어.”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뭐 좀 사가려고 했었는데.”

선우가 주섬주섬 품안에서 지갑을 꺼내려 들자 노인이 훠이훠이 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냥 주고 싶어서 주는 거여. 앞으로는 나쁜 짓 하지 말고. 원래 좋은 사람이잖여.”

얼마 전에 선우가 연기한 ‘천지훈’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선우가 조금 웃으면서 말했다.

“네. 착하게 살게요.”

그래그래. 정겹게 고개를 끄덕이던 노인이 선우의 얼굴을 보고 눈썹을 실룩이며 물었다.

“입술은 왜 그래. 벌레 물렸어?”

“아뇨.”

선우가 손을 들어 입술을 가리면서 답했다.

“물린 줄도 모르는 거 보니 자는 사이 물렸는 갑네. 기다려봐.”

노인이 다시 슈퍼 안쪽으로 향하더니 부스럭거리며 무언가를 들고 왔다.

“이거 주둥이에 대고 가.”

그녀가 내민 것은 꽝꽝 얼린 뽕따였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한 번 더 숙이고서 돌아서려던 선우는 잠시 멈칫하고선 노인에게 살갑게 말을 붙였다.

“할머니, 저 새로 드라마 해요.”

“그래? 몇 번에서 혀.”

“지난번이랑 똑같아요. 13번이요.”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가 이어 물었다.

“맻 시.”

“수요일, 목요일 밤 10시요.”

“10시면 못 봐. 자야지. 재방송으로 볼게. 전 것도 재방송으로 봤어.”

“네. 재방송으로 꼭 봐주세요. 제목은 ‘시차’예요.”

“그려. 이쁜 총각 다치지 말고 살살 혀.”

“조심해서 찍을게요. 고맙습니다, 할머니.”

혼자 사는 그녀와 말상대도 더할 겸 야무지게 새 드라마 홍보까지 마친 선우는 웃으며 슈퍼 앞에서 돌아섰다. 한 손에는 뽕따를 쥐고 한 손에는 묵직한 검은 봉지를 달랑거리며 선우는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한 선우는 짐들을 내려놓고 거울 앞에 섰다. 진수에 이어 슈퍼 할머니까지 지적을 하자 부은 입술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많이 부었나. 그 정도까진 아닌 거 같은데.”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면서 어색하게 제 입술을 살피던 선우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입술을 이토록 퉁퉁 붓게끔 한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선우는 괜히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곤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다음날 선우가 촬영현장에 도착했을 때 해경은 촬영감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가 끝난 후 해경이 고개를 들었고 은근히 그를 계속해서 살피고 있던 선우와 곧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나 이내 해경이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태도였다.

선우의 가슴이 순간 덜컥하고 내려앉는 듯 했다. 호텔에서의 일 이후로 갑자기 세상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외면하리란 생각은 하지 못 했다.

지나친 의미 부여가 아닐까.

자신을 피한 것이 아닐 것이다. 선우는 애써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해경은 이전까지와는 다른 차가운 태도로 일관했다.

그나마 촬영 현장이라는 사실이 선우에게는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동요하는 감정에 파고들 여유가 없었다. 선우는 연이어 진행된 첫 번째와 두 번째 씬 촬영 모두 평소대로 무사히 끝마치고서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에 도착한 선우의 시선이 언뜻 거울로 향했다. 걱정한 것과 달리 아침에 일어났을 때 선우의 입술은 평소와 같았다. 변한 것은 없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기분이 미묘했다. 선우는 거울에서 시선을 거두고 테이블에 놓여 있던 대본을 집어 의자에 앉았다.

손에 감기는 대본의 존재감에 마음이 안정적으로 가라앉았다. 대본의 표지 색깔은 회차마다 다르게 나왔다. 오늘 촬영하고 있는 회차의 대본은 깊은 바닷속 같은 푸른색이었다. 만지면 시릴 듯한 푸른색 바탕 위에 찍힌 ‘시차’라는 단어를 바라보며 선우는 문득 시간의 틈에 대해 생각했다. 어제와 오늘. 그 사이의 거리가 어쩐지 오늘만큼은 아득하게 느껴졌다.

의상을 챙기러 갔던 민정이 대기실로 돌아오고 선우가 막 옷을 갈아입었을 때였다.

“선우야!”

우렁찬 외침과 함께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진수였다.

“형, 무슨 일 있어요?”

선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진수가 달려와 선우를 와락 끌어안았다.

“광고 들어왔다!”

“네?”

“지금 회사에서 전화 받고 오는 길이야. 커피 광고 들어왔다더라. 그거 있잖아. 로즈!”

로즈라면 인스턴트 커피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기업에서 작년부터 새로 선보인 제품 라인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TV에서 이태형이 모델로 나와 광고하는 걸 스치듯 본 기억이 있었다.

“어휴, 내 새끼. 예뻐 죽겠다.”

정말 선우가 제 자식이라도 되는 양 뿌듯한 얼굴을 한 진수는 뽀뽀까지 할 기세였다. 이전 촬영씬을 끝내고 선우가 벗어둔 의상을 정리하던 민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지. 진수 오빠가 아무리 일찍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가정해도 지금 중학생일 텐데.”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민정아, 넌 안 기쁘냐?”

“헤헤. 너무 좋죠.”

진수와 민정이 손을 마주 잡고 방방 뛰었다. 저보다 더 좋아하는 두 사람을 보며 선우는 조용히 웃었다. 광고 계약보다도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새삼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아까와는 다른 세트장에서 제법 긴 선우의 세 번째 촬영이 끝난 후에 잠깐의 식사 시간을 포함한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선우가 대본을 좀 더 보고 싶다고 말했더니 진수와 민정이 자신들도 간식으로 때우겠다고 해 잠시 실랑이를 벌였다. 선우는 든든한 식사를 해야 우리 팀이 더 단단해진다는 둥 나름 묘하게 설득적인 주장을 펼쳐 가까스로 그들의 등을 밖으로 떠밀 수 있었다.

선우는 간단히 샌드위치로 요기를 하고 화장실에서 양치를 한 뒤 대기실로 돌아왔다.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 전에 두 번이나 발길을 되돌린 진수형이 아직도 포기를 못했나 싶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딸깍. 누군가가 들어선 동시에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문 앞엔 한쪽 손에 콘티를 쥔 서해경이 서 있었다. 몇 시간 만이었다. 촬영장에서의 공적인 업무와는 별도로 해경과 시선이 제대로 마주친 건.

“연선우씨와 상의할 게 있어서요.”

그의 얼굴을 보자 연기를 앞세워 꾹꾹 눌러뒀던 감정들이 뒤늦게 봇물 터지듯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의아함과 불안감, 걱정과 혼란스러운 마음들, 그리고 서운함에 이르기까지. 세 시간에 가까운 촬영이 이어지는 동안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사무적이고 무심한 태도를 보였었다. 많은 말들이 엉키다가 목구멍 아래로 간신히 삼켜졌다.

해경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흔들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던 선우는 몸을 일으키며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말씀하세...”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해경이 선우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콘티는 어느새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해경은 다급히 선우의 뺨을 감싸 쥐고 단번에 입술을 집어삼켰다. 갑작스런 입맞춤에 당황했던 선우도 닫힌 입술 사이를 조급하게 혀로 문지르는 그를 위해 입을 벌렸다.

어제의 일은 거짓도, 환상도 아니었다. 오히려 오늘 내도록 무심함을 가장한 남자의 태도가 연기고 거짓이었음을 선우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의 혀가 사납게 입안을 헤집는 감각에 오싹한 전율이 이는 동시에 한편으론 안도감이 밀려왔다.

짧지만 격렬했던 입맞춤 끝에 해경이 선우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빨았다 놓는 것으로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 거친 호흡을 정리하는 선우의 입술을 해경이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한 번 시작했더니 자제가 돼야 말이죠.”

여전히 변함없이 다정한 그의 눈빛은 가슴을 벅차게 하는 한편, 일시에 서러운 기분을 안겨주기도 해 선우는 당황스러웠다.

선우는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서해경의 다정함에 익숙해졌다는 것은 결국 낯선 공포를 갖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가 평소 타인들을 대할 때 보이는 평범한 무심함이, 이제 제게로 향한다면 견딜 수 없이 가혹하게 느껴질 것이다. 지난 몇 시간이 그랬듯이.

“사실 오늘 서피디님 보면서 조금은 오해했었어요.”

선우에게서 작은 고해 성사와 같은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그나마 계속해서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자신에게 연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와서야 느낀 거지만 외면하려 했던 온갖 어그러진 감정들이 가슴 한구석에는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지금 해경이 다시금 확인시켜준 현실이 지독하게도 달았다.

선우의 말에 해경은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며 이해를 하면서도 한편으론 의아해 했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요?”

“그렇다기보다, 어쩌면 어제 일로 그칠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잠시 침묵하는 해경을 보며 선우는 다급히 덧붙였다.

“저한테 그렇다는 의미가 아니라 서피디님한텐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요.”

해경은 진솔한 감정을 그대로 내보이는 선우의 얼굴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어제의 그 열렬했던 키스도, 해경이 건넨 말도 장소와 타이밍상 애매한 해석의 여지가 있을 수 있었다. 해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런 데다 오늘 말도 없이 그런 태도를 보였으니 선우의 입장에서 보면 꽤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내 책임인 게 맞아요. 보다 확실하게 말했어야 했는데.”

오해했다며 초조했던 속내를 고스란히 내비치는 얼굴마저 만족스럽게 느껴진다면 저를 원망할까. 해경은 품 안에 가두듯이 선우의 허리를 끌어안고 제게로 바싹 끌어당겼다. 옅게 떨리는 선우의 눈꺼풀 위로 그림자가 졌다. 그가 조심스레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해경은 선우의 이마에 가만히 머리를 기댄 채 부드럽게 웃으며 속삭였다.

“연애하자, 선우야.”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쥬방스님, dokhae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