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프 컷 31편
<-- --> (2/2) *두 화 업로드라 앞편이 있습니다.
두 명의 성인 남성이 물속에 빠진 만큼 그 순간 커다란 소음과 함께 수영장 바깥으로 물이 흘러넘쳤다. 공공장소에서 은밀한 행위를 나누려던 남녀의 동작 역시 굳은 듯이 멈추었다.
먼저 물속에서 고개를 내민 해경이 본능적으로 선우를 등져 그의 모습이 안 보이게 가렸다. 뒤늦게 선우가 물살을 헤치며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해경은 재킷을 벗어 대충 물기를 짠 후 선우의 머리 위로 씌웠다.
“얼굴 안 보이게 가려요.”
그리고는 해경은 빠르게 물 바깥으로 나섰다. 일어선 해경의 전신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사이 두 사람은 흐트러진 차림을 바로 하고 있었다. 해경을 알아본 듯 눈이 커지는 남자를 흘깃 보곤 해경은 여자를 향해 말했다.
“미안한데 직원 좀 불러줄래요? 보다시피 지금 내가 이래서.”
“네? 아, 네. 그럴게요.”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여자는 꽤 침착하게 홀로 이어지는 문을 열고 사라졌다.
“최명훈. 넌 현석이 좀 불러와.”
“어? 어. 그래. 알았어.”
남자는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서해경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후부터 얼굴이 허옇게 질려 있었다. 다소 명령 같은 해경의 말투에도 남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곤 부리나케 사라졌다. 해경은 자신의 재킷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 막 수영장에서 빠져나오는 선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둘은 저기 비상구로 빠져 나가죠.”
해경이 막 수영장에서 빠져나온 선우의 손을 잡은 채로 앞장서 걸었다. 비상구로 나온 뒤로도 해경은 갈 곳을 아는 사람처럼 어딘가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꽤 많은 계단을 부지런히 오르고서야 해경이 걸음을 멈추었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요. 금방 돌아올 테니까.”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선우를 확인하곤 해경이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였지.
따지고 보면 딱히 두 사람이 잘못한 것도 없었다. 그저 한 순간 타이밍이 어긋났을 뿐이다. 다만 선우는 연예인이었고 해경 역시 이래저래 알려진 사람이라는 게 문제였다.
두 사람은 별다른 의도 없이 야경을 보고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지만 한 순간 숨어있는 모양새가 돼버렸고 그 자체로 뉘앙스는 은밀해졌다. 무엇보다 현장엔 해경에 관한 루머를 직접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몇 가지 키워드만으로도 충분히 얘기를 부풀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해경은 아까 본인의 소문을 들먹인 그들로부터 과도하다 싶을 만큼 선우를 꽁꽁 숨기려했던 건지 모른다.
점점 으슬으슬 떨려오는 몸을 느끼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을 무렵, 벌컥 문이 열렸다. 순간 해경이 아닌 낯선 사람이면 어쩌나 싶었다. 누가 봐도 지금 제 모습은 가십란에 실리기 좋은 몰골이었으니까.
긴장한 채 눈동자를 빠르게 굴려 눈앞의 인물을 확인한 선우는 속으로 안도했다. 문 앞에는 여전히 물에 젖은 채로 용케도 카드키를 구한 서해경이 서 있었다.
카드키를 찍고 들어간 곳은 잠깐 머물다 가기엔 아까울 만큼 꽤 넓은 구조의 객실이었다.
“찝찝할 테니까 먼저 씻어요. 옷은 부탁해놨지만 조금 기다려야 할 거예요. 욕실 안에 가운 있으니까 일단 그거라도 입고 있어요.”
순서를 양보하려던 선우는 그가 물기를 닦아낸 휴대폰의 화면을 켜는 것을 보고 선선히 욕실로 향했다.
물에 젖어 몸에 착 달라붙은 옷가지들을 간신히 벗어 욕실 한쪽에 쌓아놓고 선우는 샤워를 했다. 다 씻고 나서 타월로 몸을 닦고 가운을 걸쳤다. 속옷 역시 물에 젖어 맨몸에 가운을 걸쳐야 한다는 걸 그때가 돼서야 깨달았다.
속에 아무 것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이 영 불편하고 어색했다. 욕실을 나오던 선우와 테이블에 기댄 채 서있던 해경의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는 막 씻어 머리가 젖은 채 가운을 입고 있는 선우를 보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옷은 30분 정도 더 기다리면 올 거예요. 쉬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곤 해경 역시 씻기 위해 선우가 막 빠져나온 욕실로 향했다. 선우는 괜히 목이 말라 냉장고 안에 있던 생수를 꺼내 마셨다. 넓은 객실 안을 괜히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야경이 보이는 창문 앞에 섰다. 높은 곳에서 훤히 트인 창으로 바라보는 서울의 야경은 꽤 낭만이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황급히 돌아보자 선우와 같은 가운을 입은 해경이 욕실에서 막 나오고 있었다.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힌 선우는 괜스레 목이 바싹 타는 것을 느꼈다.
“기분이 이상하네요.”
해경이 복잡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헤매던 선우의 시선이 남자의 젖은 머리에 닿았다. 머리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 습관이라.”
선우의 시선을 눈치 챈 해경이 뒤늦게 타월을 들어 머리의 물기를 마저 거둬냈다. 평소 샤워 후에 머리를 대충 닦고 나오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 용도를 다한 타월을 대충 던져 놓으며 해경이 난감하게 웃었다.
“그렇게 티나게 긴장하면 괜히 오해하고 싶은데요.”
아. 선우는 뒤늦게 그가 욕실에서 나온 이후 자신이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에 대한 민망함도 잠시, 그가 꺼낸 표현이 귀에 거슬렸다.
“...오해하고 싶다는 게.”
“선우씨가 날 의식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돼요.”
의외로 해경은 직접적으로 설명했다. 남자는 자신이 태형과 만났었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성적 취향을 알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선우는 조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누구와 이렇게 호텔에 와본 적이 없어서 좀 어색한 게 사실이에요.”
거짓은 아니었다. 그 말에 해경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귀는 사람하고도 와본 적이 없어요?”
“네. 그냥 집에서…”
“아.”
그저 변명하듯 급하게 말을 꺼내는 데 여념이 없던 선우는 순간 아차 싶었다. 그런데 남자도 왠지 모르게 낭패감에 젖은 얼굴을 해보였다.
“그래요. 그 얘기는 그만하고 와인이나 한 잔 할까요. 배고프진 않아요?”
“아뇨. 괜찮아요. 좀 졸리기도 해서 술은 마시면 바로 곯아떨어질 것 같기도 하고요.”
아까의 긴장된 분위기가 전환돼서 조금 마음이 놓인 선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해경이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졸리면 여기서 자도 돼요. 내가 깨워줄 테니까.”
선우가 고개를 저었다.
“거기에 누우면 아마 그대로 아침까지 푹 잘 것 같아서요.”
“그럼 자고 가면 되죠.”
해경은 여상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그 말이 뒤늦게 마음에 든 것처럼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이어서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진짜 자고 갈까요? 아직 한 번도 경험 없다면서요.”
선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해경은 몰아붙이듯이 바로 덧붙였다.
“생각해보니 촬영도 내일 오후나 돼야 있겠다, 여기서 푹 쉬고 가죠.”
“...사실 전 집이 더 편해서요."
선우가 어색하게 목덜미를 매만지며 말했다. 이대로 호텔방에서 그와 함께 단 둘이 있는다는 건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슬쩍 시선을 피하는 선우를 바라보다 해경이 앞으로 할 걸음 다가섰다.
“혹시 나하고 있는 게 불편해요?”
선우는 자신이 긴장한 이유를 해경이 혹 알아챘을까 싶어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남자는 꽤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해경이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들은 내 소문 때문이라면…”
소문? 의아해하는 선우의 머릿속에 아까 수영장에서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그 때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는데 신경 쓰고 있었던 걸까. 선우가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해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배우들하고 호텔 들락거린 적도, 따로 만나거나 사귄 적도 없습니다.”
그의 느닷없는 해명에 어쩔 수 없이 조금 기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뒤이은 말에 선우는 금세 마음이 다시 가라앉았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 없고.”
그 말은 그의 세계엔 자신 역시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쩌지 못할 실망감으로 작게 흔들리는 선우의 시선을 잠시 바라보다, 해경은 조용히 덧붙였다.
“당신 빼고는.”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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