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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프 컷-30화 (30/49)

러프 컷   3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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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유명 패션 잡지 중 하나인 ‘위’의 창간 20주년 기념 파티가 있는 날이었다. 촬영 기간 중에 흔치 않은 휴일을 헌납하게 된 해경이 조금 귀찮은 표정으로 직원에게 초대장을 보이고는 홀 안으로 들어섰다.

“진짜 왔네.”

한 손에 샴페인잔을 쥔 채 현석이 웃으면서 다가왔다.

“네가 오라며.”

해경이 심드렁하게 내뱉자 현석이 큭큭 웃었다.

“와, 서해경 진짜 많이 변했네. 선우씨 때문인가. 드디어 서해경한테도 약점 하나 생긴 건가.”

해경이 무심하게 홀 안을 휘 둘러보며 말했다.

“연선우가 왜 약점이야. 반대라면 모를까.”

그 말에 현석이 한쪽 눈썹을 스윽 들어올렸다.

“진짜 장난 아니네. 뭐, 나야 옆에서 지켜보는 재미야 있다만.”

그 때 홀 안 쪽에서 화려한 느낌의 미인이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해경이 약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현석을 돌아봤다.

“네가 꾸민 짓이야?”

현석이 억울하다는 듯이 양손을 들어올렸다.

“우리보다 여기 있는 게 더 자연스러운 사람이 희진인데 나 좀 억울하다?”

금세 둘 앞에 다가선 희진이 웃으면서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오늘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혹시 나보러 온 거예요?”

“어떻게 해야 그런 쪽으로 생각이 드는 거지? 내가 지금까지 한 노력이 무색한데.”

해경이 인위적이면서도 차가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가 말한 노력이란 그녀의 끈질긴 대시와 미련에 대한 한결같은 거절을 의미했다.

“그거 알아요? 해경오빤 냉정한 것 같으면서도 결국 바닥까지 내치지는 못하는 거. 그럼 마음 있는 사람은 쉽게 포길 못해요.”

희진은 자신이 이러는 데엔 어느 정도 해경의 탓도 있다는 듯이 말했다. 해경이 연회장에 들어설 때처럼 조금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네가 생각하는 바닥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지.”

그 말에 희진은 조금 자존심 상한 표정을 지었다. 근처에서 모르는 척 어슬렁거리고 있던 현석이 어딘가를 보더니 해경에게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야, 지금 선우씨 왔다.”

“뭐?”

해경이 놀라 돌아보자 현석이 약간 멋쩍어하며 말했다.

“내가 선우씨도 불렀거든.”

해경이 작게 한숨 쉬었다. 입구 부근을 눈으로 훑자 슈트를 차려입은 선우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선우 역시 예상하지 못했는지 해경을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선우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해보인 해경은 여기서 대화를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에 희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생각이 바뀌었어. 굳이 그러고 싶진 않은데 네가 상처를 받아야만 내가 편해진다면 난 뭐라도 할 생각이야. 네가 선택해. 내가 마지막에 어떤 모습으로 남았으면 좋겠는지.”

희진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말은 그렇게 해도 결국 모질게 대하고 싶지 않기에 자신에게 결단을 종용하는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해경이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는 것 또한 희진은 알고 있었다. 이전보다 더 차갑고 단호하게 선을 긋는 느낌이었다. 여기서 더 고집을 피운다면 더 이상은 얼굴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사람 마음이 내가 당장 어떻게 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해경이 흘긋 선우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알아.”

희진이 입술을 꾹 물었다.

“알았어요. 아무튼 더 이상 무턱대고 찾아가거나 이 이상 욕심 부리진 않을게요. 그래도 가끔 연락하고 찾아가는 건 괜찮죠?”

“아니. 그것도 안 돼. 누군가 오해할 수도 있고.”

“뭐야. 혹시 그 사이에 새 애인이라도 생겼어요?”

해경은 잡지 에디터와 인사를 나누고 있는 선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애인은 아니고.”

“어흠, 흠.”

안 그런 척 대화를 듣고 있던 현석이 해경의 시선이 줄기차게 향해있는 곳을 눈치 채고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 희진이 설마 하고 누군가를 찾듯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희진씨. 저기 편집장님이 찾으시는 것 같던데.”

“알았어요. 그렇게 재촉 안 해도 이제 가려고 했어요.”

“아니, 난 뭐.”

다소 억울한 현석의 중얼거림을 뒤로 하고 희진이 반대편으로 멀어졌다.

“야. 선우씨 기껏 소개시켜줘 놓고 바로 스캔들 터뜨려서 날 엿먹일 셈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네 눈빛. 졸라 더럽고 불결하고 음흉하거든?”

해경이 피식 웃었다.

“그럼 연선우를 여기에 부르지 말았어야지.”

“선우씨도 슬슬 여기저기 얼굴 도장 찍어야 할 거 아냐.”

매니지먼트 대표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현석은 이미 꽤 그럴 듯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선우를 챙기려는 마음도 나름 진심이었다.

“그래도 엄한 데 돌리는 건 안 돼.”

“아, 알았다고요. 네가 이렇게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오금이 저려서 내가 잘도 그러겠다. 이제 선우씨한테 가봐. 난 적당히 여기에 있으면서 자리 피해줄 테니까.”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던 해경은 조금 긴장한 채 서 있는 선우에게 다가갔다.

“여러 사람들하고 인사하는 것도 일이죠?”

뒤에서 불쑥 나타난 해경에 선우는 놀란 것도 잠시, 대놓고 반가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지금 절 구하셨어요.”

해경이 가볍게 웃었다. 10분에 가까운 그 짧은 시간에도 끊임없이 처음 만난 사람들과의 어색한 인사 행렬에 시달린 선우가 해경을 보고 살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알아요, 그 기분. 내가 구했으니 선우씬 이제 나한테 뭐 해줄래요.”

“뭐든지 말씀하세요.”

선우도 같이 장난을 치듯 작은 미소를 입에 걸고 말했다. 해경은 빤히 선우를 바라보았다.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닌데.”

“……”

“많은 게 바뀔 수도 있거든요.”

해경의 입가는 여전히 그 끝이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깊고 격렬한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마치 그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해경은 다시 능숙하게 키를 전환했다.

“밖에 나갈래요? 수영장도 있고 야경도 잘 보이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없죠.”

선우는 두말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층에 마련된 호텔의 야외 수영장은 본래의 용도를 잃고 방치되어 있었지만 조명을 비춘 것만으로도 꽤 근사하게 느껴졌다. 홀을 나오기 직전 서버에게서 샴페인 잔 두 개를 받아온 해경이 한 잔을 선우에게 건네며 수영장을 눈짓 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벗고 수영해도 돼요.”

선우가 웃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야경이 보이는 수영장 바깥쪽의 난간을 향해 걸었다.

“연기 외의 첫 공식 활동을 해본 소감이 어때요.”

“쉽지 않네요.”

덤덤히, 그러나 솔직한 마음을 담아 선우는 말했다.

“대표님이 부르셔서 오긴 했는데 연기보다 이런 자리가 훨씬 더 어렵게 느껴져요.”

“그럴 만하죠. 그냥 다른 사람들 모르게, 우리 둘이 여기서 놀다 돌아갈까요.”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해경은 어딘가로 향하며 자연스럽게 선우를 이끌었다. ㄱ자로 꺾인 건물 일부의 외벽과 아치형의 난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생긴 구석진 자리였다.

"야경 보기엔 은근히 여기가 명당이거든요."

그의 말대로였다. 선우가 그곳에 서서 난간 밖을 바라보자 밤하늘 아래 반짝이는 도시의 모습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근사하네요. 이전에 와본 적이 있으신가 봐요."

"몇 번 와봤었죠. 여기서 종종 모임이 있어서."

대답하던 해경은 문득 눈썹을 찌푸리곤 곤란하게 웃었다.

"애인은 아니고 친구들이랑 왔었어요."

딱히 그가 애인과 함께 온 모습을 상상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해경이 부연 설명처럼 덧붙인 말에 선우는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때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가 들렸다. 해경과 선우의 고개가 홀로 이어지는 문쪽으로 향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안쪽이 갑갑했던지 누군가 문을 열고 두 사람이 있는 바깥쪽으로 나왔다.

사람들을 상대하는 피곤한 일을 마다하고 이대로 계속 휴식을 취하고 싶었던 해경과 선우는 마치 짜 맞춘 듯이 없는 사람들처럼 입을 다물었다. 건물 일부에 가려져 두 사람은 자연스레 숨어있는 모양새가 돼버렸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이 때 바로 나갔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아까 보니 서해경 온 거 같던데.”

예상치 못한 언급에 해경과 선우의 시선이 조용히 마주쳤다. 여자의 말에 남자의 반응이 이어졌다.

“웬일이래. 이런 델 다 오고.”

“보니까 아까 신희진이랑 얘기 하는 것 같더라.”

“신희진은 이미 여러 번 까인 거 소문 다 났던데 아직 미련 못 버렸나 보네. 그 정도로 좋은 건가. 신희진 정도면 꿇릴 거 하나 없는 앤데 서해경도 독하네. 나라면 한두 번은 가볍게 만났을 텐데.”

“너 같은 애들 때문에 서해경이 차별화되는 거야.”

“차별화는 무슨. 알고 보면 신희진도 단순히 연예인이 아니라서 까인 거 아냐? 서해경 연예인 킬러라는 소문이 있던데. 찌라시도 한 번 돈 적 있을걸. 같이 작품한 여배우들하고 호텔에 들락거리는 재벌가 PD.”

남자의 목소리엔 옅은 웃음기와 이죽거림이 배어났다. 선우는 슬쩍 눈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보기에 따라 굳은 듯 보이기도 하고 무덤덤해 보이기도 하는, 쉽게 해석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여자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아, 그리고 연선우도 온 것 같았는데 안 보이네.”

“걘 또 누구야.”

“있어. 라이징. 얼마 전에 이태형이랑 드라마 나온 배우.”

“아아, 그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애.”

“열폭 좀 그만하시지?”

“내가 걔한테 열폭을 왜 해.”

“발끈하는 거에서 이미 졌어, 넌.”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은 그게 언젠가 싶게 금세 연애 모드로 빠져들었다. 두 입술이 질척하게 맞붙는 소리를 난감하게 듣고 있던 선우는 한동안 긴장 상태로 굳어 있던 몸이 슬슬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선우와 해경이 발을 딛고 서 있는 좁은 구역의 바로 옆으로는 한가롭게 수영장 물이 일렁이고 있었다.

키스 정도만 하고 들어가겠지 싶던 두 사람은 조명이 비치지 않는 구석으로 가더니 슬슬 듣기 민망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야외임에도 상관하지 않고 당장 일을 치를 것 같은 기세였다.

목소리를 듣고 해경은 저 중에 한 명은 아는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음란 행위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 또한 높았다. 무엇보다 아까부터 동선을 이리저리 옮기고 있어 혹시라도 운이 안 좋으면 이상한 타이밍에 두 사람의 존재가 발각될 수도 있었다. 자신은 괜찮지만 호사가들 입에 연선우를 엮이게 할 생각은 없었다.

“안 되겠네요. 이 이상 길어지면 오히려 더 빠져나가기 힘들겠어요. 내가 지금 나갈 테니까 선우씨는 상황 보고 나중에 나와요.”

“잠시만요. 그냥 기다리는 게…”

갑자기 앞으로 나가려는 해경의 옷깃을 슬쩍 잡아당긴다는 게 사달이 났다. 급하게 내디딘 선우의 발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던 눈앞의 턱에 걸리면서 넘어지듯 앞으로 몸이 쏠렸다. 해경이 급하게 손을 뻗어 선우를 잡는 순간 두 사람은 순식간에 뒤엉켜 수영장 물속으로 빠졌다.

========== 작품 후기 ==========

예약 기능을 처음 써보는데 연참은 어떻게 예약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좌절)

예약이 십분 간격으로 가능하게 돼 있어서 다음편은 십분후에 올라오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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