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프 컷 28편
<-- --> 수십 대의 카메라가 모여 내는 셔터음에 흡사 이대로 삼켜질 것만 같았다. 선우는 진행 스태프가 이끄는 대로 해경의 옆자리에 앉았다. 오늘 발표회 진행을 맡기로 한 JBS 소속 아나운서가 큐카드를 들고 무대 옆에 따로 마련된 단상에 올라섰다.
“그럼 JBS 새 수목 미니시리즈 ’시차’의 제작발표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아나운서답게 듣기 좋은 목소리로 남자가 행사의 진행을 이어갔다. 하이라이트 영상을 함께 보고 정신없는 포토타임을 거쳐 마지막에는 질의응답 순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기자들의 요구에 맞춰 이런저런 포즈와 연신 웃는 표정을 짓느라 진이 빠진 선우에게 해경이 뚜껑을 딴 생수병을 건넸다.
“마셔요.”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목이 말랐던 참이라 반갑게 목을 축인 선우가 병을 내려놨을 때 아나운서가 기자들로부터 질문을 받기 시작했다.
“네, 여기 첫줄 중앙에 앉아서 손드신 기자님?”
지명된 기자가 스태프가 건네주는 마이크를 쥐고 소속을 밝힌 뒤 질문을 던졌다.
“일각에서는 이번에 주연을 맡은 연선우씨에 대해 신데렐라라는 표현까지 나오고 있는데요.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별명이 마음에 드시나요?”
각오를 미리 하고 있기는 했지만 막상 첫 질문부터 자신을 향하자 조금 긴장되기는 했다. 선우는 마이크를 들어 올리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제가 연예인을 하기로 한 이상 제가 어떻게 불리는지에 대해서는 선택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게 붙는 수식어나 별명이 신경 쓰인다면 그건 아마 드라마 방영 이후의 일이 될 것 같습니다. 그 때야말로 제가 드라마에서 직접 보여드린 것으로 불러주시는 이름들일 테니까요.”
이어진 질문은 다른 주연배우인 민세아에게 돌아갔다. 기자는 드라마에서 러브라인이 주축이 아닌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가볍게 헤드라인을 뽑기 쉬운 기사감이었다. 다음 질문은 다시 선우에게로 돌아갔다.
“연선우씨 같은 경우 무명시절이 꽤 길었는데요. 어떻게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견딘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하루든,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나름의 목표를 정하고서 그걸 보고 달렸는데 어느덧 돌아보니 많은 날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비록 유명하진 않았지만 저는 늘 무언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견딘다는 생각조차 할 사이가 없었던 거, 그게 비결이라면 비결일 것 같습니다.”
그 후로 질문들이 다시 이어졌지만 몇 개의 질문들은 MC선에서 융통성 있게 커트됐다. 기자들에게 있어 선우는 거의 신인배우나 마찬가지였고 배우로서 스토리텔링이 된 게 많지 않았다. 그래서 흔히 나오는 질문의 키워드가 대개 오랜 무명생활과 바로 전에 찍었던 작품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즉 성의 없이 반복성에 가까운 질문들이었다.
“정오의 이별에서 연선우씨가 맡은 역할의 마지막 장면이 꽤 화제가 됐었는데요. 마지막 연기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주로 영상을 취급하는 인터넷 미디어 기자의 질문이었다. 사실 이런 자리에서 재연하기엔 적절치 않은 장면이었다. 그 장면이 임팩트가 있었던 건 당시에 모든 환경이 조성돼 있었고 편집과 촬영, 연출 등의 과정을 또 한 번 거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 인물이 죽어가는 장면이었다. 나름 진지하게 연기를 펼친다고 해도 장소의 특성때문에 자칫 우스워 보일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 했다. 선우가 그 장면을 머릿속으로 되짚어보고 있을 때였다.
“말씀중에 죄송합니다만.”
툭툭. 신경에 거슬리지 않을 만한 수준으로 해경이 마이크를 두어 번 두드린 후 끼어들었다.
“지금 여긴 오디션장이 아닙니다.”
연선우는 지금 평가받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게 아니었다. 개인기를 펼쳐 보일 필요도, 연기를 증명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마치 자신들이 우위에 있다는 듯이 시험하고 휘두르려는 태도를 삼가달라. 해경의 말뜻은 그러했다.
일시에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해경은 그러거나 말거나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기자들에게 자처해서 밉보일 이유는 없다. 웬만해선 잘 보여야 하는 상대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면 이쪽에서도 나름 꽤 오래 참아준 것이었다.
중간에 사회자가 커트한 질문들 중에는 선우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결여된 것들이 꽤 있었다. 아마 선우가 톱스타였다면 애초에 시도하지도 못했을 종류의 질문들이었다. 잠깐의 타이밍을 틈타 아나운서가 가벼운 농담을 하며 분위기를 한차례 전환했다.
후반에 이르러서야 이번 작품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면서 양호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그쯤엔 선우에게도 몇 차례 괜찮은 질문들이 이어졌다. 해경과 선우, 다른 배우들이 번갈아가며 성심껏 대답했다. 꽤 오랜 시간 이어진 제작발표회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끝이 났다.
제작발표회가 모두 끝나고 두 사람은 건물 뒤편 인적이 드문 흡연 구역을 찾았다. 해경은 벽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조금 틀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작은 불빛이 서늘한 남자의 얼굴을 잠시 환하게 비추었다. 기분이 저조한 듯 해경의 눈빛은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별 탈 없이 제작발표회가 마무리 되었지만 남자는 아직까지 조금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가끔 사람들 때문에 이 일이 지독하게 싫을 때가 있어요.”
약하게 미간을 찌푸린 해경이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 시작은 영화판이었죠.”
의외의 얘기에 선우가 조금 놀란 눈빛을 해보이자 해경이 웃으며 덧붙였다.
“드라마보다 영화 일을 먼저 했었거든요.”
“그럼 영화를 찍으신 적이 있는 건가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감독 한 번. 감독 한 번. 감독이야 뭐, 거의 자비를 들여 찍은 인디 영화라 바로 감독으로 데뷔할 수 있었던 거지만.”
“하지만 서피디님 필모에 영화는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해경이 입가를 부드럽게 휘며 되물었다.
“내 이름 검색해봤어요?”
“그야…네.”
조금 뜨끔하긴 했지만 감출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선우는 순순히 고했다.
“조감독은 하다가 때려 쳐서 크레딧에 없을 거고. 연출한 영화는 본명이 아니라 아마 같이 안 나올 거예요.”
그래서 안 나왔던 거구나. 빠르게 수긍한 선우가 바로 궁금증을 내비쳤다.
“어떤 영환지 궁금하네요.”
“한동안 비밀에 부치려고요.”
남자가 다소 장난스럽게 웃어보였다.
“본명이 아니라면…”
선우가 지금 당장이라도 추리할 태세를 보였다.
“...상상하기 어려운 이름이라 아마 쉽게는 못 찾을 거예요.”
본명이랑 완전히 다른 이름인가? 찾기가 어렵다니 선우는 내심 시무룩해졌다. 그런 선우를 귀엽게 바라보다 해경이 말을 이었다.
“후에 연출한 영화는 인원을 최소화한데다 외국 스태프들이 많아서 괜찮았던 건지 모르겠는데 조감독 할 당시엔 질리는 인간들을 꽤 많이 봤었죠.”
해경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듯이 미간을 조금 구기고는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비윤리적이고 비상식적인데 그걸 쉽게 지적하는 이도 없고, 지적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고. 그러다 서서히 전염되는 거죠. 결국 마지막엔 다들 공범자가 돼버려요.”
이전까지 주역으로 참여한 작품이 없던 선우조차도 남자가 뜻하는 게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물론 영화판이 다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썩은 부분은 지독할 만큼 계속 썩어있죠. 그리고 종종 쓰레기 같은 인간의 영화가 인과응보처럼 망하기도 하는데 신기한 건 몇 년 있다가 보란 듯이 또 영화를 찍어요. 좋은 시나리오도 아니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수십억을 끌어와서 또 망할 영화를 만들죠. 술, 접대, 친목. 그 싸구려 영업이 영화판에서도 종종 먹히거든요.”
남자는 웃으면서 조금 씁쓸하게 덧붙였다.
“그렇다고 드라마판이 또 딱히 낫다거나 좋다고도 할 수 없지만. 조연출로 몇 년 구를 때에도 역한 꼴을 꽤 많이 봤었죠.”
가끔씩 그가 보이는 격렬한 표현에도 선우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당시에 그가 느꼈을 여러 심정들이 그대로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여태껏 내가 보고 겪어온 인간들에 비하면 분명 아까 그 기자들은 댈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지금 기분이 안 좋아요. 나도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로.”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그가 감정이 상한 이유는 아마 기자들의 태도 때문일 터였다. 그리고 그들의 무례함은 사실상 선우를 향한 것이었다. 선우가 보기에 해경의 화는 마치 자신이 응당 느꼈어야 할 감정들이 그에게로 옮겨가 크기를 부풀린 것 같았다.
“저도 담배 하나만 주시겠어요.”
해경이 조금 놀란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그냥 나 위로해주려고 따라온 줄 알았는데요.”
처음 의도는 그렇긴 했다. 선우는 조금 웃었다.
“오랜만에 한 대 피우고 싶어서요.”
담배조차도 연기 때문에 배운 선우였다. 드라마 같은 경우는 흡연 장면이 불가능하지만 영화의 경우는 달랐다. 만약 연기를 하지 않았다면 선우가 하지 않았을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담배였다.
해경은 재킷 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선우에게 건넸다. 뒤이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라이터를 꺼내려다 손을 멈췄다.
“라이터는 고장 나서 안 되겠네요.”
하지만 분명히 방금 전엔…. 선우가 무언갈 지적하기도 전에 해경이 선우의 손목을 휙 끌어당겼다. 해경이 물고 있던 담배 끝이 선우의 입가에 걸린 담배 끝에 닿았다. 불을 붙이기 위해 잠시 담배로 향했던 해경의 시선이 그를 지켜보고 있던 선우의 시선과 마주쳤다. 잠시 두 사람이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는 사이, 이어진 담배 끝에서 새로운 불꽃이 일었다. 선우가 잠에서 깨듯 빠르게 몸을 물러섰다. 그런 그를 보며 해경이 느긋이 입을 열었다.
“연선우씨는 가끔 사람을 착각하게 해요.”
선우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방금 전에도 담배보단 나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던데.”
남자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선우가 태연함을 가장하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관심 많죠. 하나뿐인 감독님이시잖아요.”
선우가 여상하게 웃었다. 해경은 그런 선우에게서 무언가를 찾아내기라도 하듯 집요한 시선을 보냈다. 선우는 화제를 전환할 겸 아까부터 얘기하고 싶었던 것을 꺼내들었다.
“아까 일, 저 때문이라면 화내실 필요 없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해경은 조용히 선우를 바라보았다.
“생각이 좀 많아지긴 했어요. 이제 시작이구나. 앞으론 이보다 더한 일도 많겠지. 그리고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이 모든 것들이 이제야 내가 제대로 출발선에 섰다는 걸 알려주는 증표 같다고. 좀 싸이코 같다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약간 짜릿하기도 했어요.”
열없이 웃는 선우를 따라 해경도 옅은 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고서 내린 결론은 하나예요. 앞으로 더 버거워질지도 모를 상황에서 스스로 흔들리지 않으려면 무기가 필요하겠다는 생각.”
“무기라.”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아마도 연기겠죠.”
그게 정답이었다. 해경은 그 말을 하는 선우에게서 걱정이나 불안감이 없어 보여 웃음이 나왔다. 앞으로 연기를 무기로 삼아야겠다는 각오는 있지만, 그것이 실패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없다는 것을 본인은 알까.
연기에 관한 얘기를 하는 선우는 어딘지 초연한 구석이 있었다. 앞으로의 그림을 그리는 것인지 여유롭게 담배를 피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선우의 모습은 한껏 나른하고 권태로워 보였다. 지금껏 쉽게 볼 수 없었던 분위기라 해경은 욕심껏 제 두 눈 안에 담았다.
느리게 이동하던 해경의 시선이 담배를 물고 있는 선우의 입술에 닿았다. 흰 막대가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붉은 입술은 무방비하고 느슨하게 벌어져 있었다.
잇새로 몇 번인가 담배를 짓씹은 해경이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보니 아까 일이나 지겨운 인간들 같은 거, 별 거 아니긴 하네요.”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선우의 시선이 다시 해경에게로 돌아왔다.
“요즘 내가 참고 있는 거에 비하면.”
남자의 수수께끼 같은 말에 선우는 섣불리 무언가를 물을 수 없었다. 해경 역시 여운을 남긴 채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고요히 서로를 응시했다. 짧은 해질녘의 붉은 빛이 넓고도 강렬하게 두 사람을 뒤덮어갔다.
========== 작품 후기 ==========
사죄합니다.
전편 엔딩 분위기를 보면 이건 분명히 꽃길각인데...
급 담배타임이 소환되었습니다.
사죄드립니다ㅠㅠㅠㅠㅠ
오늘 선우는 대신 예쁜 기사 사진들을 많이 남긴 걸로...
꽃길 한정 굴림수인 느낌 차차 벗어나보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