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프 컷 26편
<-- 2 -->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해경은 선우에게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다며 조만간 한 자리에서 만나 함께 식사할 것을 청했다.
‘강남에 있는 중식당으로 예약 잡았어요.’
이틀 전 남자에게서 연락이 와 선우는 지금 약속 장소로 향하는 중이었다. 집에서 미리 확인하고 나오긴 했지만 정확도를 위해 지도 어플을 실행한 채 선우는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
골목길에 진입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선우는 자신을 앞서가는 남자와 마주 오는 차량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차는 행인을 의식해 속도를 줄여 서서히 진입하고 있었는데 남자는 옆에 충분히 비켜설 공간이 있는데도 교묘하게 차량 쪽으로 바짝 붙어 걸어가고 있었다.
둘의 동선이 거의 겹칠 때쯤 남자는 정지하다시피 한 차의 사이드미러에 손을 슬쩍 갖다 대고는 짧게 비명을 질렀다.
“아!”
손목을 부여잡은 채 끙끙대는 남자를 보고 운전석에서 선글라스를 낀 여성이 놀란 모습으로 차에서 내렸다.
“괜찮으세요?”
“아이구, 아파 죽겠네.”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안절부절 못하는 운전자를 살피던 남자는 과한 리액션과 함께 앓는 소리를 냈다.
“잠시만요. 보험회사에 연락 좀 하고요.”
그 말에 남자가 부딪치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거 부르면 기다려야 되잖아요. 바빠 죽겠는데 보험은 무슨…”
“그래도 다친 거면 병원도 가셔야 하고 이런 일은 또 정확하게 처리해야...”
“아, 중요한 거래처 담당자랑 약속이 있어서 지금 당장 가봐야 한다고. 여기서 시간 지체하다 거래 파기되면 그것도 보험사나 아가씨가 다 물어줄 거요? 내 후딱 볼 일 보고 이따 병원 가서 약이나 타오게 10만원만 주쇼.”
“네?”
남자의 태도에 선글라스에 가려진 여자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그녀가 의심하는 기색을 보이자 남자가 한 번 더 요란하게 끙끙 앓아댔다.
“저기, 잠시만요.”
상황을 지켜보던 선우는 그들에게 다가가 남자를 향해 말했다.
“보험사에서 올 때까지 기다리실 필요 없어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남자와 여자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꺼내 드는 선우를 바라보았다.
“네. 지금 여기가...”
어딘가로 전화를 건 선우는 다짜고짜 현재 위치를 밝히고는 용건을 꺼내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뉴스에서 손목치기라는 사기 수법을 본 적 있는데 지금 현장을 목격한 것 같아서요.”
그 말에 뜨악하는 표정으로 입을 크게 벌린 남자가 허겁지겁 달아나려 하자 선우가 강한 악력으로 그를 붙잡았다.
“제가 잡고 있을 테니까 되도록 빨리 와주셨으면 합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선우가 전화를 끊자 남자가 얼굴을 와락 구기며 소리쳤다.
“당신 뭔데 나보고 사기꾼이라는 거야?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아저씨, 저기 보이시죠?”
선우는 근처 주차장 CCTV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마 다 찍혔을 겁니다.”
당황한 남자의 입이 붕어처럼 뻐끔거리다 ‘에이, 재수가 없으려니까.’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것을 지켜보던 여자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저씨 진짜 사기꾼이었어요?”
“사기꾼이라니! 내 참 원 어이가 없어서. 아, 이것 좀 놓으라니까!”
남자가 억센 몸짓으로 자신을 잡고 있는 손길을 뿌리치려 했지만 호리호리한 인상의 20대 청년은 생각보다 힘이 상당했다.
“그렇게 떳떳하면 아무렇지 않게 조사에 응하시고 가면 되겠네요.”
그로부터 한동안 계속해서 남자의 높은 언성과 거친 저항이 이어졌지만 선우는 꿋꿋이 그를 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차가 도착했다. 남자를 차에 태운 경찰이 선우에게 다가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혹시 배우 연선우씨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아, 긴가민가해서 여쭤 본 건데 맞았군요. 좋은 일 하셨네요.”
그리고서 경찰은 싸인을 받고 악수를 한 뒤에 돌아섰다. 멀어지는 경찰차를 바라보고 있을 때 어깨 위를 톡톡 건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선우가 돌아보자 그녀가 싱긋 웃어보였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저야 그냥 지나가다가 우연히 본 것뿐이라 특별히 한 일은 없지만, 아무쪼록 피해가 없으셔서 다행이에요.”
선글라스에 가려진 여자의 시선이 말없이 빤히 선우를 향했다. 그러다 불쑥 느닷없는 말을 뱉었다.
“합격.”
“네?”
선우가 어리둥절하게 되묻자 여자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잘 생겼지, 연기 잘하지, 인성까지 합격이라구요.”
길 한가운데서 난데없이 떨어진 합격 판정에 선우가 얼떨떨해하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여자는 팔짱을 낀 채 선우를 잠시 바라보다 손끝으로 선글라스를 조금 내리며 물었다.
“혹시 나 몰라요?”
선우는 순간 긴장했다. 연예인인가? 그녀의 화려한 외양을 보니 순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당장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하긴 굳이 팬카페를 뒤지지 않는 이상에야 얼굴은 모를 수도 있겠다. 갓혜정이라고 사람들이 흔히들 부르는데 들어는 봤나 모르겠네.”
여자가 제법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선우는 짧은 사이 부지런히 머리를 굴려봤지만 여전히 그녀에 대해 떠오르는 데이터가 없었다. 드라마는 모니터링 차원에서 거의 다 보기 때문에 배우들은 신인인 경우에도 알아볼 때가 많았지만 가수나 모델 쪽이라면 문외한에 가까웠다.
선글라스 위로 슬쩍 드러난 그녀의 눈이 몹시도 반짝거려 자신이 못 알아보면 크게 실망할 것 같은 기색이었다. 괜히 상처주고 싶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선우는 눈치껏 아는 채 인사를 해보이고 이따 인터넷 검색을 따로 해봐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름이 뭐랬더라.
“아, 가태정씨. 저도 요즘 잘…보고 있습니다.”
“……”
조금 긴장한 채 내뱉는 선우의 말에 여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참았던 무언가가 터지듯이 밝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요, 나도 연선우씨 티비로 잘 보고 있어요. 약속시간 때문에 이만 가봐야겠네요. 방금 전 일 고마웠어요. 그럼 기회 되면 다음에 또 봐요.”
좀 이따가. 혼잣말을 하듯 짧게 중얼거린 그녀가 화사한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도도하게 돌아섰다.
약속한 중식당에 도착해 선우는 자신의 이름을 대고 따로 마련된 룸으로 안내받았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는데도 해경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왔어요? 이리 와 앉아요.”
그는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켜 보였다.
“선배도 이제 곧 도착할 것 같은데.”
해경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문이 열렸다. 자리에 막 앉은 선우는 들어서는 인물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
방금 전에 거리에서 만난 그 사람이었다. 선우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하고 뒷목에 오소소 소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우리 아까 봤었죠? 정식으로 인사할게요. 작가 신혜정이에요.”
티나지 않게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선우와 다르게 혜정은 어딘지 즐거워 보였다. 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처음 뵙겠…아니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연선우입니다.”
“아까 봤다니 무슨 말이에요.”
“그런 게 있어.”
해경의 물음에 혜정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어 보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혜정은 다행히도 아까의 일보다는 다른 쪽에 더 관심이 있는 듯 보였다.
“예전에 잠깐 봤을 때도 느낀 거지만 실제로 보니까 TV 속 이미지랑은 많이 다르네요. 그런 소리 꽤 듣지 않아요?”
“자주는 아니지만 몇 번 들어보긴 했습니다.”
테이블 위에 양 팔을 올리고서 턱을 괸 채 선우를 요모조모 뜯어보던 혜정이 입을 열었다.
“혹시 지금까지 본인이 연기한 영상들 가지고 있어요?”
“대부분 가지고 있긴 합니다.”
“그럼 나한테 보내줄래요?”
“제가 나온 영상들이요?”
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피디가 처음에 연선우씨 얘기하면서 오디션 영상을 보내줘서 덕분에 그건 잘 봤어요.”
자신은 모르는 얘기였다. 선우가 해경을 바라보자 그는 모르는 척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오의 이별이랑 그 전에 조연으로 나온 두 작품도 직접 다운받아서 다 섭렵했어요. 선우씨 연기 보는 게 의외로 대본 쓰는데 도움이 많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못 본 영상들이 있으면 더 보고 싶어서 만나면 부탁하려고 했거든요.”
“사실 그 작품들을 제외하면 거의 다 단역이라. 단역으로 나온 영상들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제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찾기 어려우실 거예요.”
선우는 조금 곤란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대학교 때 영상은요? 한국예대 연영과라고 알고 있는데 공연이나 연기 실습 때 영상 같은 건 없어요?”
“있긴 한데…”
그 말에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해경도 고개를 들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혜정이 씨익 웃었다.
“그럼 보내줘요. 메일 주소 알려줄게요.”
그 때의 영상들이라. 벌써부터 쑥스럽고 민망한 기분이 들었지만 선우는 순순히 네, 하고 대답했다. 보고 있던 메뉴판으로 다시 시선을 돌린 해경이 지나가듯 무심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
“나한테도 보내요.”
첫 촬영을 약 3주 정도 앞두고 선우는 액션스쿨에 등록했다. 급작스러운 편성으로 일정에 그다지 여유가 없어 선우는 촬영 준비를 위해 매일 온 시간을 쏟아 부었다.
쿵! 성인 남성이 매트에 사정없이 내다 꽂히는 사나운 소음과 함께 선우의 거친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아, 하아.
스턴트맨으로 활약하는 액션전문배우와 기본적인 합만 벌써 수십 차례 반복한 선우가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일어섰다. 옆에서 누군가가 건네는 수건을 자연스럽게 받아든 선우가 얼굴을 닦으면서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부지런한 거야 진작 알았지만 여기서도 도통 쉴 생각을 안 하네요.”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선우가 놀라 수건을 내리며 남자를 바라봤다.
“여긴 어떻게… 언제 오신 겁니까.”
“아마 두 시간쯤 됐을 거예요.”
그 말에 선우가 더욱 사색이 되어 말했다.
“오셨으면 바로 부르지 그러셨어요.”
“연선우씨가 언제쯤 날 봐줄까 기대하는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었죠.”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웃으면서 얘기했다. 두 시간이나 기다리고 있었다니. 그의 긴 기다림에 선우는 미안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누가 여기까지 절 찾아올 거란 생각을 안 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어차피 훈련 방해할 생각은 없었어요. 나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계속해요. 다만…”
해경이 이전까지의 웃음기를 거두며 시선을 틀어 한 곳을 빤히 바라봤다. 말없이 이어지는 그의 행동에 천천히 남자의 시선을 좇던 선우의 눈길이 자신의 가슴팍으로 향했다.
“아.”
당황한 선우가 몸에 붙은 티셔츠를 한손으로 빠르게 들어 올렸다. 흰색 티셔츠의 한쪽이 땀에 젖어 은근하게 속살을 비추고 있었다. 학교 다닐 땐 웃통 벗고 축구를 한 적도 있고 지금껏 사우나도 아무렇지 않게 다니곤 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젖은 흰색 티셔츠 안으로 비치는, 유독 도드라지게 선명한 한 곳이 영 민망하고 쑥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난 괜찮은데,”
몸에서 약간 간격을 띄운 채로 티셔츠를 붙잡고 있는 선우를 보고 해경이 묘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도 본다는 게 문제네요.”
열이 오른 선우가 티셔츠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매하게 펄럭거리며 변명하듯 말했다.
“보기에 좀... 그렇긴 한데 다들 훈련에 집중하느라 이런 건 아무도 신경 안 써요.”
“그건 연선우씨 생각이고.”
남자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다른 옷 없어요?”
“있긴 한데 그것도 흰색 티셔츠라…”
남자가 심각한 말이라도 들은 듯이 표정 없는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죠. 기다리고 있는 것 같으니 훈련 계속해요.”
“이대로 그냥 가시려고요?”
“왜요. 같이 있어줄까요?”
해경이 다소 짓궂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계속 기다리기만 하셨잖아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 나도 갑자기 일이 생겨서 어딜 가봐야 하니까.”
“그럼...조심해서 가시고 조만간 다시 봬요.”
“그래요. 선우씨도 다치지 말고 조심해서 해요.”
그 인사를 끝으로 체육관을 나서는 해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선우는 그제야 움켜쥐고 있던 티셔츠를 천천히 놓았다. 채 덜 마른 티셔츠가 여전히 속살을 은근하게 비추고 있었지만 그의 앞이 아니게 되자 굳이 민망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선우씨. 다시 시작할까요.”
“네. 준비 됐어요.”
그 말을 시작으로 선우는 다시 기초 액션 동작과 상대배우와 합을 주고받는 연습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십분쯤 지났을까.
“어? 감독님 또 오셨네.”
남자의 말에 선우의 시선이 뒤늦게 반대편으로 향했다. 문밖을 나선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해경은 고가 브랜드가 새겨진 검은색 티셔츠를 양손에 가득 사들고 체육관에 다시 나타났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해주신 분들,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