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프 컷 25편
<-- --> 선우는 손에 들린 것의 무게감을 끊임없이 확인하며 동네의 완만한 경사길을 오르고 있었다.
‘연선우씨, 나랑 작품 하나 하죠.’
그리고서 남자는 이렇게 덧붙였다.
‘아, 당연히 연선우씨가 주연입니다.’
당연하다는 표현은 분명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이제껏 한 번도 주연을 맡아본 적 없는 선우에게는 더욱 그랬다.
전혀 예상치 못한 남자의 제안에 어떻게 반응했었는지 기억이 흐릿했다. 그 때의 선우는 거의 백지 상태에 가까웠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뛰었고 머리는 멍했으며 한동안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해경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그 모습을 보고 남자는 조금 웃었던가.
‘편성이 애매하게 걸려 있어서 시간이 여유가 좀 없긴 한데, 그래도 선우씨 입장에서 꼼꼼히 검토해보고 얘기해줘요. 대본은 좀 더 추가해서 4회까지 인쇄했어요.’
그렇게 말하며 해경은 차 뒷좌석에서 묵직한 종이뭉치를 꺼내 선우에게 건넸다. 대답을 기다리겠다는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남자는 돌아섰다.
선우는 집에 거의 도착할 때쯤이 돼서야 뒤늦게 현실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대답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 사이에 그의 마음이 바뀔까봐, 내일이면 제안을 취소하겠다고 할까봐, 아니면 이 모든 게 꿈일까봐 초조하고 두려웠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한 선우는 한두 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일어났을 때 사라지지 않은 기획안에 안도했다. 선우는 여전히 얼떨떨한 심정으로 책상 위에 놓인 기획안을 내려다보았다.
시차. 표지에 선명하게 찍힌 두 글자는 이전에 남자의 병문안 때 자신이 읽었던 작품의 제목이었다. 선우는 책상 앞에 앉아 이미 읽었던 내용을 포함한 드라마 4회차의 내용을 한 번에 내리 읽어갔다. 마지막장을 덮었을 땐 그때와는 다른 의미로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며칠이 더 필요한 일일 리가 없었다. 당장 오늘 해경에게 연락해 대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에게서 먼저 전화가 걸려왔다.
[아는 교수님이 연출하는 연극이 오늘 마지막이라 같이 보러 갈까 하는데 시간 어때요.]
의외로 남자의 용건은 작품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같이 공연을 보러 가자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선우는 지금 대학로에 와 있었다.
...너무 넙죽 간다고 그랬나.
분명 첫 주연 제안에, 그것도 서해경의 작품에 출연하게 된다는 것에 정신이 없었던 것도 같은데 어느새 자신은 그와 연극을 보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어차피 어떤 식으로든 연락해 답을 건네려던 참이었으니 이렇게 만나게 된 게 좋은 건지도 모른다. 나름 합리적인 결론에 이르자 민망한 마음이 조금은 덜해졌다.
“오래 기다렸어요?”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나름 애를 먹은 해경이 불쑥 뒤쪽에서 나타났다.
“아뇨. 일찍 도착하셨네요.”
선우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아직 약속시간까지는 10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오늘은 모자 썼네요. 사람들이 알아봐서 불편했을 텐데 데리러 갈 걸 그랬어요.”
처음에 선우는 평소대로 집을 나서 버스와 지하철을 차례로 갈아탔다. 그러다 사람들의 눈길과 수군거림이 계속 이어져 혹시나 싶어 챙겨 온 모자를 뒤늦게 눌러썼다. 선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하철 타면 금방이기도 하고 불편한 건 없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혼자 다니는 것도 곧 마지막일 텐데 마음껏 즐겨야죠.”
현석의 말에 따르면 곧 개인 스태프팀이 꾸려질 것이라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는 개인적인 활동에도 차차 제약이 따를 것이다.
선우가 웃으며 던진 농담에 해경도 부드럽게 마주 웃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대화를 나누며 공연장까지 나란히 걸었다. 그리고 공연장 앞에 도착했을 때 선우는 건물 앞면에 걸린 현수막을 보고 조금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 볼 연극이 이거였나.
그러고 보니 연극을 같이 보자는 말에 덜컥 그러겠다고 했으면서 정작 제목이 뭔지, 무슨 내용인지는 물어보지도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현수막에는 거친 느낌의 필기체로 단 한 글자만이 적혀 있었다. 재. 그것은 선우가 대학교 때 쓴 희곡의 제목이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공연이 시작하자마자 선우는 빠르게 극에 빠져들었다. 미술, 소품, 음악 등을 비롯해 배우들의 연기와 연출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이 빠짐없이 좋았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 연극은 자신이 쓴 원안을 전혀 의식할 수 없을 만큼 흥미로웠고 지금 당장이라도 연기를 하고 싶게끔 만드는 강한 자극을 불러 일으켰다.
공연 중간중간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해경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 역시 금세 연극에 집중하는 듯 보였다.
막이 내려오고 관객들의 박수를 끝으로 연극은 진한 여운을 남긴 채 마무리됐다. 관객들이 대부분 빠져나갔을 때쯤 미리 안내받은 대기실로 향하며 해경이 입을 열었다.
“다행이에요. 재밌게 본 것 같아서.”
“예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재밌게 본 것 같아요.”
선우는 순간적으로 그게 지금 자신의 상태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본 연극인 줄은 몰랐어요. 아주 오래 전에 했다가 재공연하는 거라 설마 봤을 줄은 몰랐는데. 미리 물어볼 걸 그랬어요.”
“아니에요. 정말로 재밌었고 오히려 다시 봐서 좋은 것도 있었어요.”
빈 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선우는 한 편으로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던 연극을 이제야 작품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제대로 즐길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더불어 그 당시 오해하고 있던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정답을 얻은 것 같아 후련한 마음이 있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둘이서 오붓하게 하고 있어?”
빈 대기실에서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던 주인공이 예고 없이 불쑥 나타났다.
“교수님.”
“교수님.”
그의 등장에 해경과 선우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선우의 친근한 호칭에 해경이 조금 놀란 시선을 보냈다.
“해경이야 연락 받아서 오는 줄 미리 알고 있었는데 선우는 서프라이즈네?”
곽형진이 웃으면서 선우의 등을 친근하게 도닥였다.
“두 분이 아는 사이였습니까.”
“연선우, 내 제자.”
남자가 뿌듯하게 씨익 웃어보였다. 단순하고 간결한 그 표현에 은근한 애정이 묻어났다. 선우가 형진과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제가 먼저 찾아뵀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알바하느라 바빠, 연기한다고 바빠. 신입생 때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놈이 찾기는 뭘 찾아. 시간 많은 내가 널 찾아뵙고 모시면 모를까.”
형진이 약간의 장난기를 담아 받아쳤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해경이 신기한 듯이 입을 열었다.
“교수님과 선우씨, 저보다 더 친해 보이는데요.”
“인마, 그걸 말이라고. 너는 그냥 서해경이지만 선우는 우리 선우지.”
형진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말하자 선우가 그 모습을 보며 조금 웃었다.
“내가 보기엔 서해경이랑 연선우가 같이 다니는 게 더 신기한데.”
“이제 본격적으로 좀 더 친해져 보려고요.”
해경이 선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선우는 문득 최근에 익숙해진 해경의 짓궂음과 대학교 시절 익숙하게 접한 교수님의 장난기가 어딘지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형진은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을 곰곰이 살피더니 느닷없이 말을 던졌다.
“생각해보니까 둘이 잘 어울리겠어.”
“네?”
형진의 말에 선우가 화들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해경이 능글맞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받아쳤다.
“교수님 눈에도 그게 보이나 봐요.”
형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연출한 작품들을 봐도 그렇고, 선우 연기하는 것도 나름 꽤 오래 지켜봤으니 잘 알지.”
아… 그 얘기였구나. 선우는 처음에 제가 필요이상으로 당황했던 게 뒤늦게 부끄러워 괜스레 눈가를 쓸었다. 해경이 힐긋 선우를 돌아보며 교수의 의견에 대한 답을 꺼냈다.
“언젠가 같이 할지도 모르죠. 그게 곧일지도 모르고요.”
확정된 게 아니니만큼 해경은 일부러 말을 아끼는 듯 보였다. 선우의 결정은 이미 정해져 있었지만 이 타이밍에 갑자기 대답을 하는 것도 영 아닌 것 같아 덩달아 말을 아끼게 됐다.
“그나저나 여기에서 선우를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언제는 질색팔색을 해가면서 다시는 안 볼 것처럼 그러더니.”
뜻 모를 말에 해경이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다.
“다시는 안 본다니. 뭘 말하시는 겁니까.”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해경이 직접적으로 물어오자 형진이 도리어 놀란 기색을 띄었다.
“이 연극 말야. 다 알고 보러 온 거 아니었어? ‘재’ 희곡 선우가 쓴 거잖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얘기에 해경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선우를 돌아봤다. 뒷목을 어색하게 매만지던 선우가 급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원안은 제가 쓰긴 했지만 이후에 각색하시는 분의 손을 많이 거쳐서 이 작품을 온전히 제가 썼다고 하기에는 좀 그래요.”
해경은 그런 선우를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할 말이 많은 듯 보였지만 뒤이은 형진의 물음에 자연스럽게 주의를 돌렸다.
공연 뒤풀이도 있었기 때문에 세 사람의 만남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교수님, 그럼 조만간 또 찾아뵙겠습니다.”
“일 년에 한 번 보면 됐지 뭘. 또 보려고?”
“예. 이제라도 자주 찾아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래저래 듣고 싶은 얘기도 많고.”
해경이 웃음을 띠운 채 선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해경과 선우는 레스토랑을 찾아 조금 늦은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칸막이로 각각의 테이블 구역이 가려져 있어 사적인 대화를 나누기에도 부담이 없는 곳이었다.
“각본 쪽에도 재능이 있나 봐요.”
후식으로 나온 차를 마시던 해경이 흥미로운 눈초리로 아까 다 하지 못한 연극 얘기를 꺼냈다.
“사실 잠깐 그런 착각에 빠진 적도 있었는데 재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과제로 '재'를 처음 썼을 때 교수님이 생각지도 못하게 계속 칭찬해주셔서 학기가 끝나고 따로 한 편 더 써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땐 혹평을 받았거든요.”
선우는 그때를 떠올리듯 조금 민망하게 웃었다.
“그러고 나서 한참을 생각해봤어요. 도대체 이 두 작품의 간극은 뭘까. 그러다 깨달았어요. 픽션과 논픽션의 차이라는 걸.”
“그게 무슨 뜻이죠.”
“‘재’는…그 당시의 제 상황과 그 때 제가 느끼고 생각했던 걸 많이 투영한 작품이에요. 희곡은 픽션인데 ‘재’를 쓰는 과정은 거의 논픽션에 가까웠던 거죠. 그 다음에 쓴 작품이 제 경험이나 감상과는 상관없는 온전한 창작물이었는데 혹평을 받았고요. 그러니 저는 허구를 짓고 창작하는 작가로서의 소질은 결국 없었던 셈이죠.”
선우는 자신에 대해 가차 없이 평가하면서도 모든 걸 털어놓은 사람 특유의 후련하고 시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반면 선우의 말을 곱씹던 해경의 표정은 점점 가라앉아갔다. 연극 ‘재’는 자신의 연인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결국 스스로 파멸하며 한 줌의 재로 남아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연선우씨의 현실과 생각을 투영한 작품이라.”
어딘지 굳은 듯한 남자의 표정을 바라보다 선우는 조금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순간 그가 오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우는 해명처럼 이 말을 덧붙이는 것이 민망한 자의식 과잉 같아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결국 느리게 입을 열었다.
“다만 그 작품과 저 사이에 조금의 차이점이 있다면.”
뒤늦게 이어지는 말에 무언가를 생각하던 해경이 다시 시선을 들어 선우를 바라봤다.
“집착에 가까웠어도 재의 주인공은 연인을 사랑한 게 맞지만 저 같은 경우는 시간을 지나 생각해보니 사랑이라는 착각이었다는 거예요.”
기분 탓인지 선우의 말을 다 들은 남자의 표정이 조금 풀어지는 듯 보였다. 해경은 잠깐의 사이를 두고 나직이 내뱉었다.
“다행이네요. 연선우씨가 재가 되지 않고 이렇게 내 앞에 있어서.”
해경이 입가를 끌어올리며 농담처럼 건네는 말에 선우는 조금 웃었다. 작지만 순식간에 가슴을 데우는 선우의 따뜻한 웃음에서 해경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느덧 익숙해진 선우의 집 근처에 이르러서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렸다. 동네 특성상 늦은 밤 시간대가 되면 이곳은 인적이 무척 드물었다.
“기획안이랑 대본은 읽어 봤어요?”
“네. 사실 오늘 집에서 나오기 전까지 몇 번이나 계속 반복해서 읽었는지 모르겠어요.”
“그 정도면 꽤 긍정적인 답을 기대해도 되겠는데요.”
해경이 부드럽게 웃으며 눈을 반짝였다. 제안에 대한 자신의 대답을 기대하되 확신하지 못하는 그를 선우는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숱한 단역과 두어번의 조연 경력이 전부인 제게 주연이 당연하다는 표현을 써놓고는, 정작 자신이 이 제안을 수락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이 굴고 있었다. 선우는 그런 태도가 서해경이라는 사람을 더 돋보이게 하고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탠다고 한편으로 생각했다.
“어제 해주신 제안에 대한 대답, 지금 하려고요.”
그 말에 웃음기를 거둔 해경의 시선이 금세 진지해졌다.
"사실 꼭 주연이 아니라도 욕심이 났던 작품입니다. 제안 자체가 정말 영광이고 당연히...꼭 하고 싶습니다."
귀 기울여 선우의 말을 듣고 있던 해경은 선우의 대답을 음미하듯 말없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두 사람의 시선이 소리 없이 길게 부딪쳤다. 차체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선우를 보고 있던 해경이 천천히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서 그는 조용한 미소를 머금은 채 정중한 태도로 선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JBS 드라마 제작1국 PD 서해경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진지하면서도 낯선 그의 인사에 선우는 그제야 이 모든 것들이 서서히 실감 나기 시작했다. 선우는 조금 떨리는 손을 내밀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손을 맞잡았다.
"배우 연선우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던 어느 평범한 날의 오후, 연선우는 서해경의 연출작 '시차'에 출연하는 것을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 작품 후기 ==========
여름의 끝자락 잘 보내고 계신가요. 오랜만에 찾아 뵙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해주신 분들,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