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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프 컷-23화 (23/49)

러프 컷   2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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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비밀 임무를 수행하듯 하영과 선우는 레스토랑의 각기 다른 입구로 따로 들어가서 프라이빗 룸으로 안내되었다. 선우는 잠시, 이게 더 둘 사이를 뭔가 그럴 듯하게 보이는 수상한 움직임이라 생각했지만 이전에 밥 한 번 먹은 걸로 곤욕을 치렀었다는 하영의 주도기에 말없이 조심스레 따랐다.

가까스로 룸에 들어서고 나서 한숨을 돌리는 사이 직원이 주문을 받기 위해 안으로 들어섰다. 메뉴판을 들긴 했지만 잘 모르는 음식명들이 많아 선우는 조금 난감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를 눈치 채듯 하영이 요점만 짚듯이 간결하게 물었다.

“육류가 좋아요? 해물류가 좋아요?”

둘 다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었지만 선우는 빠른 대답 차원에서 ‘해물류’라고 답했다.

“여기 B코스로 두 개 주세요.”

직원이 메뉴판을 거둬 고개를 숙이고는 룸을 빠져 나갔다. 문이 닫히자 잠시 조용한 침묵이 테이블 위를 떠돌았다.

“사귀자고 안 할 테니까 그냥 맛있는 밥이나 같이 한 번 먹는다고 생각해요.”

“사귀자고 하실 거란 생각 안 했습니다.”

“거짓말. 아까부터 털 바짝 세우고 경계하고 있으면서.”

아까부터 자꾸 털 있는 짐승에 비유되고 있었다. 하영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선우가 한 말은 진심이었다. 관심을 표현하기는 했지만 설마 진지하게 연애까지 고려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영은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물었다.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불시의 공격이었다. 선우가 앞에 있던 잔을 들어 물을 몇 모금 삼켰다. 어물쩍 넘어가기를 바랐지만 하영은 진득하게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우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그냥 다...좋습니다.”

그렇다는 건 선우 역시 대답하면서 깨달았다. 어머. 하영이 작게 내뱉고는 배시시 웃었다.

“진짠가 보네. 표정 보니까 이건 뭐 더 놀리지도 못하겠다.”

그녀가 괴고 있던 팔을 내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런데 마냥 좋아하기 쉬운 사람은 아닌가 봐요.”

선우가 조금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 하영이 후후 웃고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사람 앞이 아니라서 그런가. 얼굴에 너무 다 드러내 보이니까 안 볼 수가 있나.

“어려운 사람 좋아해서 뭐해. 마음 바뀌면 나한테 연락해요. 혹시 알아요? 그 때도 내 관심이 유효할지.”

선우는 옅게 웃었다. 자신이 부담을 가질까봐 그녀가 주도하는 가벼움이 내심 고마웠다. 그래서 그에 응답하듯 자기도 모르게 진심을 내비치게 된 건지도 모른다.

“아마 그 사람을 꽤 오랫동안 좋아할 것 같아서요.”

그런 말을 하는 선우의 표정은 선뜻 표현하기 어려운 순도 높은 감정이 서려 있었다. 하영은 밉지 않게 툴툴댔다.

“졌다, 졌어. 몹쓸 사람이네. 관심 있다는 사람 앞에서 그런 얼굴이나 하고. 있던 전투력도 다 사라졌어, 지금.”

그러면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하영은 조금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선우는 그런 그녀를 보고 웃으며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음식이 세팅 되는 부산한 틈을 타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메뉴판에서 봤던 레스토랑 상호를 적어 보낸 뒤 혹시라도 답문이 올까 지켜보던 선우는 하영이 말을 걸어와 휴대폰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때때로 품 안에 있는 작은 기기를 의식했지만 다행인건지 휴대폰은 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신호가 없다는 것이 그를 떠올리지 않도록 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식사를 하는 중간에도 잘 들리지도 않는 바깥의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 소리에 세심히 귀 기울이곤 했다.

요리의 중간 코스쯤을 지났을 때 문자가 짧게 울렸다. 매너가 아닌 것 같아 바로 꺼내보지 못하고 있다가 직원이 비운 접시를 치울 때쯤 빠르게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도착했어요. 나오면 전화해요. 식사 맛있게 하고.」

식사 맛있게 하라는 그의 문자는 차에서 오갔던 통화 때문인지 진실성이 조금 부족해보였다. 어쨌든 한 가지는 분명했다. 지금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 생각에 그의 바람대로 음식맛이 입안에서 희미하게 겉돌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0분쯤이 지났을까.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하영의 매니저가 부산을 떨며 들어섰다.

“뭐야. 노크도 없이.”

하영이 주의를 주자 매니저가 허겁지겁 용건을 꺼냈다.

“누나, 어떡하죠? 기자 붙은 거 같은데.”

“뭐?”

포크를 내려놓던 선우의 고개가 빠르게 그를 향했다. 물론 두 사람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다만 하영이 제일 처음 사귀었던 연예인과의 파파라치 사진이 두 사람이 같이 식사를 하는 모습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그 이후로 하영이 남자 연예인과 밥을 먹는 사진이 찍히면 번번이 스캔들로 이어지거나 찌라시가 붙곤 했다.

“하, 진짜. 언제까지 밥도 못 먹게 할 거냐구!”

한껏 짜증어린 소리를 내지른 하영이 뒤늦게 선우의 존재를 의식하곤 사과했다.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선우는 놀라기보다는 그녀에 대한 안쓰러움과 걱정이 먼저 들었다.

“전 괜찮으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제가 여기서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하영이 자신의 매니저를 힐긋 보자 남자가 브리핑을 하듯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인데 같은 회산지 한 팀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어요. 아까처럼 각자 다른 문으로 나가되 이번에는 동시에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하영이 선우를 돌아보며 자기 의견을 덧붙였다.

“나갈 땐 선우씨 얼굴도 최대한 가리는 게 좋겠어요. 내가 모자랑 마스크 빌려줄게요.”

선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이미 이곳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을 남자가 떠올랐다. 일단 빠르게 이곳을 벗어난 뒤 근처에서 그에게 다시 연락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고 선우는 못 다한 식사를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색 캡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문 안쪽에서 대기하던 선우는 하영의 매니저가 보낸 신호를 보고 빠르게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붙었다는 기자들은 하영이 빠져나간 앞문을 지키고 서 있었는지 선우의 주변은 의외로 조용하기만 했다. 조금 안심하고 여전히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을 지나갈 때쯤 지척에서 빠른 발자국 소리들이 들려왔다. 선우는 민첩하게 차 밑으로 허리를 숙여 몸을 숨겼다. 큰 카메라를 든 남자와 전화기를 귀에 붙인 채 주위를 빠르게 살피는 남자가 선우를 가린 차 앞을 지나가다 발걸음을 멈췄다.

“이쪽으로 오지 않았어?”

“아, 아까 그 차만 아니었으면 찍었는데.”

“어쨌든 방향은 잘 잡았잖아. 윤하영 말고 남자를 찍어야 해.”

불편한 자세로 몸을 숨기고 있던 선우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침도 제대로 못 삼키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는 게. 이제껏 이렇게 살아왔을 하영이 안쓰러웠고 자신 역시 연예인이라는 게 새삼 실감났으며 앞으로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오기도 했다.

선우의 반대편 근처에서 들린 누군가의 발소리에 사내들이 그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선우가 소리가 안 나도록 조심하는 선에서 최대한 걸음을 빠르게 움직였다.

“아씨, 페이크네. 윤하영 매니저잖아.”

“방금 아까 우리가 있던 자리에서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윽. 차와 차 사이가 휑하게 벌어진 주차 공간을 가로지르던 선우가 눈앞의 SUV를 향해 달려갔다. 빈틈없이 주차된 탓에 몸을 숨기기가 여의치 않아 주춤할 때 불쑥 뒤쪽에서 큰 손이 튀어나와 순식간에 선우의 허리를 끌어안고 잡아당겼다.

“쉿.”

남자가 귓가에 입술을 바싹 붙인 채로 속삭였다. 돌출된 기둥을 방패삼아 두 사람이 몸을 가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까이서 분주한 발소리와 다급히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쁜 숨을 미처 다 가누지도 못한 채 온몸을 들썩이는 선우를 뒤에서 끌어안은 해경이 선우의 어깨 위로 느긋하게 턱을 기대왔다.

“연선우씨 모자가 아닌가 봐요. 여자 향수 냄새가 나는데.”

선우는 몸 전체를 울리듯이 뛰는 가슴이 기자들 때문인지 저를 끌어안고 있는 남자 때문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사진, 찍혔어요?”

기자에게 들킬까봐 숨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있던 선우는 느리게 고개만 내저었다.

“잘했어요.”

해경이 칭찬하듯이 속삭였다.

“앞으로도 다른 배우랑 사진 같은 거 찍히지 말고.”

남자의 말은 묘하게 명령처럼 느껴졌다. 선우는 주춤하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약간 까딱였다. 마치 잘했다는 듯이 선우의 허리를 감고 있던 그의 팔이 조금 더 힘을 주어 선우를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해경의 크고도 단단한 몸이 빈틈없이 선우의 몸과 맞물렸다.

“연선우씨 스캔들 나면 내 기분이 꽤 상할 것 같아서요.”

바싹 붙어있던 남자의 얼굴이 낯선 향수 냄새를 피하듯이 선우의 귓가를 훑으며 내려가다 단정한 목덜미에 고개를 깊게 파묻었다.

“역시 이쪽이 훨씬 좋네요.”

그의 뜨겁고도 옅은 숨이 자잘한 솜털들을 스치며 선우를 목가를 간지럽혔다. 어느새 기자들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 서서, 선우는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와 귓가를 스치는 남자의 숨소리로 세상이 온통 시끄러운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 작품 후기 ==========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ㅜㅜ(글은 매일 쓰거나 퇴고하고 있습니다.)

극악한 연재 주기에도 불구하고 선작, 추천, 코멘트 해주시고 읽어주셔서 항상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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