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프 컷 21편
<-- --> 한 사람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조차 그에게로 향하는 일이라는 것을 선우는 눈을 뜨며 새삼 깨달았다. 서해경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 그와 별다른 일을 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고 영상을 재생한 것처럼 이전에 있었던 일들이 재현되는 꿈이었다.
‘그러니까 당신 꿈, 포기하지 말아요.’
꿈속에서의 표현은 조금 달랐던 것도 같지만 오디션 후 그와 촬영현장에서 재회했을 때 그가 건넸던 말과 의미가 같았다. 왜 갑자기 그 때 꿈을 꾸었을까. 선우는 그저 꿈일 뿐이라는 걸 알지만 그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물론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긴 했었다. 시기적으로 아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연한 계기로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간간이 연극 활동을 했던 선우는 그때부터 대학교에 들어가서까지 적지 않게 꽤 재능이 있다는 얘기들을 들어왔다. 그러나 그 분야에서 재능이란 연료의 일부일 뿐 성공과는 별개였고 선우의 생계 역시 책임져주지 못했다.
이렇다 할 결과도 없이 애매하게 조단역 시절을 오랫동안 이어가자 동기들을 포함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다양해졌다. 때로 안타까워했고 때로는 저를 상대로 승리감을 느끼기도 하였으며 은근히 현실을 깨우쳐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우가 이 일을 포기하지 않았을 때는 안타까움으로 막을 두른 은근한 감정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실패에 무감한 자신에 대한 질책들이었다.
그리고 서해경은 자신이 가장 많은 실패를 누적했던 시점에 그런 말을 건넨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일 이후로도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자신에게 응원을 보내왔고 빈번히 친절했으며 종종 마음에 남을 만큼 다정했다. 물론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부작용이 생기고 말았지만. 선우는 여전히 혼몽한 정신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이 꿈의 답이 뭔데.”
무의식의 반영이라는 꿈은 제게 무언가를 가리키고 싶었던 걸까.
“…포기하지 말라는 건가. 연기처럼.”
지나가듯 생각하다 왠지 제게 유리하도록 내린 결론 같아 선우는 민망하게 웃고 말았다. 괴로워한 지난밤과 꿈을 통틀어 분명한 결론은 하나였다.
굳이 지금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분명 똑같은 마음에 도달했으리라는 것. 결국 서해경을 좋아하는 것은 선우가 가장 하기 쉬운 일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이제 두 번만 더 촬영장에 나가면 ‘정오의 이별’ 촬영은 모두 다 마치게 된다. 오늘 스케쥴은 저녁 늦게 잡혀 있어 선우는 그 전까지 마지막 촬영을 준비하며 하루를 보낼 생각이었다. 지난 회차들을 돌려보며 모니터링하고 캐릭터 노트와 대본을 계속해서 분석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오전이 지났을 때쯤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제 집에 잘 들어갔는지 확인하려고 전화했어요.]
하루가 지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남자의 목소리에 순간 그가 지난밤 일을 모두 기억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 선우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해경이 그날의 일을 기억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가 입 맞추려 했다는 사실 보다도 그 순간 자신이 그에게 보인 눈빛과 표정, 마음의 흔적 같은 것들을. 선우는 불안함을 숨기고서 태연함을 가장했다.
“네. 잘 들어왔습니다. 어제 꽤 무리하신 것 같았는데 몸은 좀 괜찮으세요?”
[두통이 심하긴 한데 약을 먹었더니 좀 가라앉은 듯 합니다. 현석이한테서 들었습니다. 선우씨가 찾아와서 절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고요.]
어젯밤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증명하는 그 말에 선우는 내심 깊게 안도했다.
“네. 부축해보니까 꽤 무거우시던데요.”
그 날 남자는 멀쩡히 제 두 발로 걸어 들어갔지만 선우는 부러 조금 농담을 섞어 말했다. 어차피 그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니까. 그 사실이 안심이 되면서도 저 혼자 끙끙 앓아야 하는 게 조금 심술이 나기도 했다. 건너편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날 부축까지 해줬군요. 많이 힘들었겠어요. 이 빚은 꼭 갚아야겠는데요.]
그게 빚이라기엔 이미 그가 자신에게 해준 것이 더 많았다.
[그래서 지금은 뭐하고 있었어요.]
“오늘하고 마지막 촬영에 대비할까 해서요. 모니터링하고 대본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오늘 세트장 촬영이 있군요. 잘 하면 오후에 방송국에서 볼 수도 있겠네요.]
“...네.”
자연스럽게 그와 마주할 수 있을까. 순간 걱정되기는 했지만 과하게 의식하는 게 오히려 독이라는 생각에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나 본다니까 갑자기 시무룩해진 것 같은데요.]
남자가 조금 웃음기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한테 조금 주사를 부리긴 하셨습니다.”
당연히 다 말 할 생각은 아니었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말해줘요.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잘못까지는 아니고...”
잘못이었다. 하루아침에 자신의 세상이 뒤바뀔 만큼.
“저한테 꽤 충격적이긴 해서 벌로 끝까지 비밀에 붙이려고요.”
[큰일이네요. 연선우씨한테 미움 받기 싫은데.]
장난처럼 오가는 대화에도 예고 없이 가슴이 뜨끔해지곤 했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미워할 정도까진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그 반대라서 문제였다.
모레 있을 선우의 마지막 촬영에 앞서, 오늘은 아역인 유빈이와의 마지막 장면을 찍는 날이었다.
“서어누우혀어엉!”
엄마와 함께 세트장에 들어선 유빈이가 선우를 보고 와다다 달려와 안겼다. 선우가 아이를 가볍게 들어 안았다.
“잘 지냈어?”
유빈이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 진짜 오늘만 보고 이제 못 봐요?”
함박 웃고 있던 아이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시무룩해졌다. 기분을 달래주듯 유빈이의 등을 토닥거리던 선우가 풀이 죽은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었다.
“유빈이 배우가 꿈이라고 했었지?”
“네!”
씩씩하게 대답하는 유빈이의 모습에 작게 웃음지은 선우가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형도 꿈이 배우거든. 형이랑 유빈이 모두 계속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또 만날 수 있을 거야.”
“응! 유빈이 열심히 할 거예요! 서누형이랑 또 같이 드라마 찍을 거예요!”
유빈이가 활짝 웃으며 여전히 품에 안긴 채로 다리를 달랑거리며 선우의 목에 매달렸다. 촬영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두 사람은 내내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각자의 위치로 되돌아가 대기할 때 선우가 심호흡을 하며 느리게 눈을 감는 것을 보던 유빈이가 그것을 따라하듯 두 눈을 꼬옥 힘주어 감았다. 그러자 왠지 앞으로 연기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고 용기도 듬뿍 생기는 것 같았다.
마지막 회차와 관련해 편집기사와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편집실에서 빠져나온 해경은 드라마국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췄다. 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확인한 그는 얼추 이쯤이면 선우의 촬영이 끝났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그전에 몇 번인가 걸음해 익숙한 대기실 문을 열었을 때 이제 막 나서려던 참이었는지 선우가 가방 속에 짐을 챙기고 있었다.
“연선우씨.”
불현듯 가까이에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선우의 어깨가 움찔하고 튀어 올랐다.
“촬영이 끝났을 것 같아 와봤어요.”
“...네. 지금 막 촬영이 끝나서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선우는 최대한 평소와 같이 그를 대하려 애썼지만 본능적으로 그의 시선을 피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전까지와 묘하게 다른 그 모습을 해경이 잠시 말없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조용한 분위기가 오히려 자신에게 불리할 것 같아 선우는 얼른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허겁지겁 꺼내기 시작했다.
“오늘도 출근하셨네요. 어제까지 마지막 촬영이라 피곤하셨을 텐데.”
“네. 편집 때문에요. 그런데 연선우씨.”
가만히 선우가 하는 양을 유심히 지켜보던 해경이 불현듯 이름을 불렀다. 선우는 불안하게 시선을 들어올렸다.
“아까부터 내 시선을 피하고 있는데요.”
남자는 웃으며 말했지만 그의 눈빛은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진짜로 실수한 게 있다면 말해줘요. 지금 연선우씨 보니까 진지하게 걱정되기 시작하네요.”
걱정된다는 그의 말이 사실인 듯 조금 굳은 듯한 남자의 얼굴을 보고 선우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런 것 하나 어쩌지 못하면서 무슨 배우를 한다고 그럴까. 선우는 처음으로 연기의 한계를 느꼈다.
“그것 때문이 아니에요. 사실 오늘 좀 긴장되는 일이 있어서요.”
어느 정도는 진실이었다. 그와 이렇게 마주보고 있는 것 자체가 그랬으니까. 순간 제 자신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죄책감과 그의 다정함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제 그와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 하지 않을까. 이렇듯 불시에 자신을 찾아오고 거리를 좁혀오는 그와 어색해진다는 것은 나쁜 일만은 아닐 지도 모른다. 조금 불편하고 적당히 먼 관계. 그게 더 나은 길인 것은 아닐까.
그리고 선우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던 해경이 문득 손을 뻗어 선우의 손목을 잡아왔다. 선우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봤을 때 남자 또한 자신의 돌발적인 행동을 완전히 납득하기 힘든 듯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든 건지는 모르겠는데…”
해경은 난감하게 조금 웃었다.
“왠지 잡아야 할 것 같아서요.”
대기실 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내내 자신을 경계하듯 물러서는 연선우가 왠지 달아나기라도 할 것 같아서. 이상하게 초조해진 마음에 해경은 불쑥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남자의 본능적인 감이었을까. 선우는 내심 속을 들킨 기분에 당황하면서도 막상 그가 그렇게 나오자 한결 더 자연스러워진 모습으로 그를 마주할 수 있었다.
“저 어디 안 갑니다.”
그런 선우를 조금 미심쩍게 바라보던 해경이 조용한 목소리로 재차 확인했다.
“약속했어요.”
“…네.”
그게 약속까지 할 일인가 싶었지만 남자가 끈질기게 대답을 기다리기에 선우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 손 좀 놔주시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선우는 남자가 붙들고 있는 손목을 약하게 흔들었다. 그 움직임이 바람에 흔들리는 강아지풀 마냥 미약하기만 해서 해경은 결국 웃으며 선우의 손을 놓아주었다.
“내 시선 피하지도 말고. 그거 은근히 보는 사람 애타거든요.”
선우의 눈동자가 도로록 굴러 이전처럼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남자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해경이 바로 옆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는 선우의 짐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촬영 끝나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오늘은 꽤 서둘러서 퇴근하는 것 같네요.”
“네. 일찍 들어가서 마지막 촬영을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죠. 일이 다 안 끝나서 엘리베이터까지밖에 못 데려다 주겠네요.”
“…혼자 갈 수 있는데요.”
“어제 일 사례해야죠.”
짓궂게 말을 꺼낸 남자의 손은 다시 선우의 손목을 가볍게 잡고 있었다. 이제 가자는 듯이. 선우는 그에게 붙들린 채 어정쩡한 자세로 가방을 챙겨 들고는 앞장서는 그를 따라 나섰다. 대기실 앞 복도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지만 선우는 괜히 신경 쓰여 또 손목을 두어번 들썩였다. 흔들흔들. 이번에도 또 강아지풀 마냥 귀엽게 두어번 흔들리고는 말았다.
“친한 배우랑 감독들은 다 이러고 다니더군요.”
믿기 힘들었다. 선우도 꽤 오래 방송국을 들락날락 했지만 이런 식으로 나란히 걷는 감독과 배우는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선우는 소리 없이 요란한 가슴을 숨기고 그와 함께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가끔 그런 순간들이 있다. 번잡하고 사람이 쉴 새 없이 오가는 방송국 안에서도 때때로 텅 빈 복도를 한가로운 오후 같이 거닐 수 있는 순간이. 그것이 지금 그들에게 찾아온 것을 하필이라고 해야 할지 고마운 우연이라고 해야 할지. 선우는 심경이 조금 복잡해졌다.
여전히 해경은 선우의 손목 가까이를 부드럽게 잡고 있었고 걷는 걸음마다 두 사람의 손이 느릿느릿 흔들렸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복도 모퉁이를 돌기 전에 근처에서 사람들 인기척이 들려왔다. 해경은 자연스럽게 선우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건만 갑자기 제자리를 찾은 자유로운 손이 선우는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까 그 말 잊지 마요.”
남자는 복도 벽에 기대어 선우를 보며 말했다. 자신은 어디 가지 않을 테니 잡은 손을 놓아 달라 했었던가. 잠깐의 자유와 맞바꾼 그 약속은 해경이 선우에게 자신을 계속 좋아하라고 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남자는 알까. 선우는 조금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있다 보면, 저한테도 좋은 일이 있을까요.”
“네. 있을 겁니다, 분명히.”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 또한 약속하듯이 말했다.
“내가 보장할게요.”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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