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프 컷 18편
<-- --> 선우와 통화를 끝내자마자 해경은 오랜만에 윤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알아봐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전달사항을 말하고 전화를 끊은 해경은 마지막 촬영을 위해 휴대폰 전원을 꺼뒀다. 촬영 전 이미 머릿속에서 여러 번 복기했던 장면은 무리 없이 촬영이 진행됐고 예정보다 빠르게 모든 일정이 마무리됐다. 아직 종방연과 후작업에 필요한 일들이 남아 있었지만 묵은 일을 해결한 것처럼 후련한 느낌이 있었다. 긴장감이 풀어지자 차곡차곡 쌓여왔던 피로감이 단번에 몰려왔다.
그가 가는 길마다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받고 돌려주는 과정들이 되풀이됐다. 그런 긴 과정 끝에 방송국 건물을 나선 해경은 휴대폰 전원을 켜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쓰러져 자고 싶었지만 아직 알아볼 일이 있었다.
주차돼 있던 자신의 차에 오른 해경은 윤비서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걸려온 것을 확인하고 발신 버튼을 눌렀다.
“결과 나왔습니까.”
[네. 지금 보고할까요.]
“말씀하세요.”
[새원 같은 경우 자본이나 수익 구조면에서는 나쁘지 않습니다. 최근 1년간은 자금력으로 밀어붙여서 여러 명의 주연급 배우들과 계약하기도 했습니다. 배우들 위주로 봤을 때 4대 기획사까지는 아니더라도 규모나 인지도가 무시할 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다만 소속된 서너 명의 유명 연예인들 외에는 소속사가 케어를 잘 안 해준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다른 것보다 대표 쪽이 좀 안 좋은 소문이 있기도 하고요.]
“무슨 소문입니까.”
[왕년에 유흥업 쪽에서 불법적인 일로 세를 불린 후에 이쪽으로 진출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회사는 이름을 바꾼 후에 설립한 듯합니다.]
해경이 한쪽 눈썹을 스윽 들어올렸다.
“그런 쪽에서 한 번 돈맛을 보면 완전히 끊기가 힘든 법인데요.”
[안 그래도 좀 찝찝한 구석이 있긴 합니다. 새원 대표가 가진 고급 술집들이 몇 개 있는데 보안 유지 하에 정재계 인사들이 드나들기도 한답니다. 그런데 그게 좀…]
흐린 뒷말에 어떤 내용이 따라올지는 어렵지 않게 예상이 가능했다.
“이에스는 어떻습니까.”
[자료가 많지 않습니다만 대표 쪽은 문제가 없는 대신 회사 운영이 좀 불안해 보입니다. 배우 5명과 신인 아이돌 한 팀이 소속돼 있는데 그 중 일부는 본업보다는 돈 되는 행사 쪽으로 많이 뛰는 것 같습니다.]
여기도 아니군. 해경이 눈가를 찌푸렸다.
“알겠습니다. 그 정도면 더 들을 것도 없겠네요. 수고했습니다. 다음에 또 연락드리죠.”
전화를 끊자마자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연선우가 담당자를 만나고 있을 시간이었다. 해경은 선우에게 간략하게 메시지를 써서 전송했다.
「거기랑 계약하지 마요.」
잠시 생각에 빠진 해경이 핸들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결론을 내린 듯 차에 시동을 켜고 빠르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공간을 가득 채우는 게임 효과음이 들이덮쳤다. 해경이 미간을 슬쩍 좁힌 채 긴 복도를 걸어가자 거대한 TV 앞에서 게임기를 조종하고 있는 현석이 보였다.
“어, 왔냐?”
인기척에 그를 힐긋 돌아본 남자가 현란하게 팔을 휘두르며 막판 스퍼트를 끌어 올렸다. 해경은 부엌으로 향해 제 집처럼 익숙하게 얼음을 채운 잔과 위스키를 꺼내 들었다. 다이닝 룸에 마련된 긴 테이블의 한 좌석을 차지하고 앉아 해경은 위스키 잔을 기울였다.
“웬일이냐. 집을 다 찾아오고.”
만족스럽게 게임 라운드를 끝마친 현석이 어기적거리며 다가왔다.
“부탁할 게 있어서.”
“네가?”
해경의 말에 현석은 놀란 듯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되받아쳤다.
“매니지먼트 계열사 만든다고 했던 거 어디까지 진행 중이야.”
“거의 다 돼가. 오늘 사무실 둘러보고 왔는데 역시 내 안목, 캬.”
평소 건축과 인테리어 등에 관심이 많은 현석이 흡족하게 자평하는 동안 해경이 말을 이었다.
“이번엔 네가 직접 하는 거냐?”
“글쎄. 아직 생각 중이야.”
있는 집 막내로 태어나 한량 노릇을 하고 있지만 현석은 일단 뭐든지 마음먹고 하기 시작하면 수완도 좋고 타율도 높은 편이었다. 무엇보다 새원 대표처럼 나쁜 짓할 만한 인사도 못 되고. 오랜 시간 곁에서 지켜봐온 만큼 주위에 몇 안 되는 믿을만한 놈이었다.
“그거 대리인 붙이지 말고 네가 직접 해.”
“뭐? 왜?”
“소속사가 필요한 배우가 있는 데 다른 덴 영 못 믿겠거든.”
현석이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물었다.
“그래서 나보고 영입하라고?”
“그래. 한동안 네가 직접 여러 가지로 좀 신경써줘.”
현석이 입을 합 다물어버리자 해경이 왜 그러냐는 듯 무심히 눈짓했다.
“어째 앞 뒤 관계가 이상한 것 같지 않냐?”
“뭐가.”
“그러니까 네 말대로라면 꼭 연예인 하나 때문에 회사를 차리라는 말 같잖아.”
“그러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
현석은 해경의 뻔뻔함에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얼떨떨한 얼굴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너 뭐 잘못 먹었냐?”
“농담 아니니까 내 말대로 해. 아, 이거 부탁이야.”
부탁이라면서 오만한 눈빛으로 응시해오는 남자를 현석이 어이없이 바라봤다.
“참나... 됐다. 다른 건 둘째 치고, 그래서 누군데.”
일단 다른 거 다 떠나서 누구기에 서해경이 이렇게 나오나 싶어 궁금해진 현석이 그에게 물었다.
“연선우.”
“연선우?”
그다지 익숙하진 않은 이름에 현석이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열심히 머리를 굴려댔다.
“아, 그 이번에 정자의 이별인가 거기 나온 배우?”
“정오.”
“정오나 정자나 그게 그거지.”
해경이 현석을 잠시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기껏해야 아직 조연인 거 아냐? 굳이 기획사가 필요하나?”
“곧 주연할 거야.”
해경은 여상하게 답했다.
“뭐 주연한다고 다 잘 된다는 보장도 없고. 막말로 네 회사도 아니고 내 회산데 이왕이면 돈 되는 연예인이랑 계약해야지.”
“연선우 데리고 장사할 생각하지 마.”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다그치는 해경에게 현석이 울컥해서 소리쳤다.
“아, 씨발! 그럼 네가 직접 기획사 차리든가!”
“나야 힘없는 일개 회사원이고.”
해경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일개 회사원은 지랄. 현석이 가볍게 이죽거렸다. 해경이 뒤이어 조건을 덧붙였다.
“제주도에 있는 별장 너한테 팔게.”
준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판다는 말에 현석이 두 눈을 둥그렇게 뜨며 흥분했다.
“야, 진짜? 너 무르기 없기다?”
“계약서 쓰든가.”
해경이 귀찮다는 듯이 내뱉었다. 욕설과 예스 따위를 마구잡이로 섞어 외치던 현석이 한순간 다시 돌아온 이성에 정신을 차리고선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네.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해경이 피곤한 듯 눈가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그냥…연선우가 불편한 게 신경 쓰여.”
현석의 눈이 순간 가늘게 좁혀졌다.
“호오. 뭐야, 이거. 네가 남이 불편하든 말든 관심이나 둘 사람이냐?”
그저 눈썹을 슬쩍 들어 올릴 뿐 요지부동인 해경을 보며 현석이 얼마 전 TV에서 봤던 남자를 떠올렸다. 연선우라. 꽤 잘생기긴 했었다. 웃으면 예쁜 인상일 것 같은데 최근 나오는 드라마에선 악역이라 그런지 꽤 서늘한 느낌의 무표정이 주된 이미지였다. 그래도 눈빛만큼은 사연을 가진 듯 촉촉한 게 때때로 묘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어쨌든 그래봤자 남자였다. 현석은 심드렁한 말투로 물었다.
“너 혹시… 바이였냐?”
그냥 별 생각 없이 막무가내로 던져본 거였다. 그런데 의외로 해경이 진지하게 반응해왔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해경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알아볼 예정이야.”
현석이 입을 떡 하니 벌린 채 잠시 멍하니 굳어 있다 훠이훠이 손사래를 쳤다.
“됐다, 더는 말하지 마라. 나도 그 이상은 안 물어보련다.”
현석이 눈을 질끈 감은 채 뻗어나가려는 상상을 저지하듯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그러다 여전히 조금은 아쉽다는 듯이 꿍얼거렸다.
“그래도 이왕이면 톱스타로다가 떡하니 계약해서 사업 시작하는 게 모양새도 그렇고 썩 그럴 듯한데...”
아쉬운 듯 입맛을 쩝 다시는 현석에게 해경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후회할 일은 없을 거야.”
단호한 그의 말투에 현석이 궁금증어린 시선으로 그를 쳐다봤다. 해경은 탁 트인 유리창 너머의 어딘가를 바라보며 태연하게 덧붙였다.
“연선우는 무조건 뜰 거니까.”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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