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프 컷 17편
<-- --> 대기실에 짐을 풀어 놓던 선우의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서해경의 메시지였다.
「퇴원했습니다. 병문안은 더 이상 못 받게 됐네요. 아쉽게도.」
선우는 그에게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그래도 한동안은 몸을 움직이는 데 있어 주의하라는 당부의 말을 적어 보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이 소용없게도 이미 촬영 현장이라는 그의 대답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마무리는 제가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예의 바르게 잔소리를 덧붙이려던 선우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타겟’은 급하게 다른 피디가 투입되어 촬영을 진행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의 드라마가 예정보다 일찍 끝나게 되었다는 소식 또한 스태프들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병원에서 만났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쯤이면 이미 모든 게 확정된 이후였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우울하거나 어두운 기색은 아니었었지 아마. 사정은 모르지만 걱정보다 나쁘게 진행된 일은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궁금한 것도, 염려되는 것도 많았지만 불필요한 말을 모두 삼키고 가장 중요한 말을 적어 전송 버튼을 눌렀다.
「바로 얼마 전까지 환자였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너무 무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치 안내문 같은 문자에 휴대폰을 확인한 해경에게서 웃음이 새어나온 것도 모른 채 선우는 소지품들을 반듯하게 정리해 놓고 세트장으로 향했다. 가방 속에 갇힌 휴대폰이 짧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네. 말 잘 듣겠습니다.」
* * *
그 후 그렇게 자주 마주쳤던 것이 전부 거짓이었던 것처럼 선우는 한동안 방송국에서 해경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때때로 오던 그의 연락 역시 잠잠해졌다. 드라마 마지막 회차 촬영을 남겨두고 있는 만큼 그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해경과 마찬가지로 시기적으로 선우 역시 촬영 막바지에 들어서 있었다.
부산했던 나날들을 지나 모처럼 촬영이 없는 날 약속 장소로 향하던 선우는 진동을 느끼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화면에는 오랜만에 보는 남자의 이름이 떠 있었다.
“서PD님.”
[연선우씨 목소리 무척 오랜만에 듣네요.]
듣기 좋은 저음이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오늘 마지막 촬영이라고 들었습니다.”
[네. 이제 두 씬 정도만 더 찍으면 됩니다. 연선우씨 촬영도 얼마 안 남았겠군요.]
"저는 아마 이번 주 안으로 마지막 촬영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이르네요. 결국 역할이 죽는 걸로 마무리되나 봅니다.]
"네. 작가님도 고민 많이 하시다가 어렵게 결정 내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시청자들이 많이 아쉬워하겠습니다. 인기가 많은 캐릭터라. 연선우씨는 아쉽지 않습니까.]
"마음이 좀 복잡하긴 합니다. 아무래도 방송에서 이렇게 긴 시간을 연기한 캐릭터는 처음이라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몰입이 뛰어날수록 배역에서 벗어나기가 더 힘들다고 하던데. 괜찮겠습니까.]
“촬영이 다 끝나봐야 알 것 같습니다. 아직은 제대로 실감이 안 나서요.”
[마지막 촬영 이후에 당분간 일정이 어떻습니까.]
"캐스팅 제의 온 게 몇 개 있어서 검토 중입니다."
[흠...]
그 말에 남자가 무언가를 생각하듯 전화기 건너편이 한동안 잠잠했다. 그 문제는 조만간 한 번 더 조정해보기로 하고.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혼잣말을 하듯이 그가 작게 읊조렸다.
[바빠지면 지금처럼 혼자서 활동하긴 힘들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지금 전속 계약 건 때문에 담당자분을 만나러 가는 중입니다."
[오늘 계약하는 겁니까.]
"그 자리에서 계약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오늘은 계약 상세 부분을 검토하고 대화를 나누는 데 중점을 두기로 했습니다."
[그렇군요. 혹시 그 회사가 어딘지 알려줄 수 있습니까.]
"새원입니다."
[다른 데서도 연락 온 게 있습니까.]
"네. 이에스란 곳에서도 연락이 오긴 했는데 거의 정보가 없다시피 해서요. 제가 알아볼 수 있는 선에서는 새원이 그나마 정보가 나오기도 하고 이름도 꽤 들어본 적이 있어서 여기를 우선순위로 두고 고민해볼까 합니다."
[개인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정보라는 게 한계가 있긴 하죠. 그럼 일단 오늘은 되도록 얘기 위주로만 해요. 웬만하면 도장 찍지 말고.]
"네."
[갖은 수로 꼬셔도 넘어가지 말고.]
"...네."
[왜 이렇게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죠.]
"저...스물여덟입니다."
선우가 작게 항변하듯이 말했다. 건너편에서 듣기 좋은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알아요. 그래도 자꾸 걱정되고 신경 쓰입니다.]
"......"
[조심해서 다녀와요. 여기가 워낙 사기꾼이 많은 동네라. 웬만하면 사람들 잘 믿지 마요.]
그리고서 남자는 조용히 덧붙였다.
[나 빼고.]
새원의 담당자가 만나자고 한 곳에 도착해보니 모던한 느낌의 신축 건물이 눈앞에 있었다. 건물 입구로 들어서 긴 통로 같은 것을 통과하자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술집 내부가 보였다. 은은한 조명 아래서 선우가 누군가를 찾듯 두리번거리자 정장을 입은 직원이 선우에게 다가왔다.
"혹시 예약이 돼 있으십니까."
"김원형 실장님이라고, 여기에서 만나기로 한 분이 있어서요."
"아, 방금 전 도착하셔서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꽤 신경 쓴 듯한 내부 인테리어는 긴 복도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직원은 복도 끝의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주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안경 쓴 30대 남자가 일어나 선우를 맞았다.
"이야, 실물이 더 멋지시네요. 제가 연락드렸던 김원형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연선우입니다."
선우는 남자와 악수를 나누고서 자리에 앉았다.
"혹시 특별히 선호하시는 술 같은 게 있으시면..."
"아니오. 없습니다.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계약과 관련해서는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제가 술이 약한 편이라 걱정되는 부분도 있고 해서요."
"아아. 그래요. 그럼 술은 중요한 얘기부터 나누고 나서 하기로 하고 그럼 바로 본론으로 넘어갈까요?"
남자는 서류 가방에서 서류철을 꺼내 빳빳한 a4용지 묶음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궁금해 하신 세부 조항들을 포함한 계약서 완본입니다. 천천히 보시고 궁금한 게 있으시면 물어보세요."
감사합니다. 선우는 생애 첫 소속사가 될지도 모를 회사와의 계약에서 실수하지 않기 위해 문서를 꼼꼼하게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십여 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마침내 선우가 서류를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계약서 내용을 검토하는 선우를 지켜보다 막판에는 결국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슬며시 딴청을 피우던 남자가 긴 숨을 내쉬었다.
"하하. 괜히 보는 제가 다 진땀이 나네요, 엄청 신중하게 보셔서."
"아무래도 이런 쪽 경험이 없어서요.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유, 아닙니다. 당연히 사소한 거 하나도 놓치지 말고 다 보셔야죠. 보셔서 알겠지만 계약 조건이 꽤 괜찮은 편이라고 자부합니다. 나름 유명한 배우들도 몇 명 있고 계속 사업을 확장해나가는 추세라 회사 비전이 더 좋아졌으면 좋아졌지 나빠질 일은 없다고 보고요."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회사 PR을 시작했다. 선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의 말을 경청했지만 막상 계약서를 보고 나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새원에서 제시한 계약금은 5000만원이었다. 그 정도면 아직 조연일 뿐인 선우에게는 꽤나 좋은 조건이었다. 회사 입장에서 선우를 대우해주고 있음을 나타내는 성의의 표시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런 태도가 고맙기는 하지만 문제는 위약금이었다. 위약금이 1억이었다. 보통 소속사와 연예인간에 실제로 위약금이 오고갈 만한 상황이 벌어지는 경우가 극히 적다고는 해도 아예 없는 일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위약금 조항이 걸리네요.”
김실장이 곤란한 듯 웃어 보이며 손가락으로 이마께를 긁적였다.
“좋은 게 좋은 거긴 한데 회사 입장에서도 보험이 필요해서요. 뉴스 같은 데에 억울한 지망생이나 연예인들이 종종 나오긴 하지만 알고 보면 회사 입장에서도 억울한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거든요. 아, 물론 그렇다고 연선우씨를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건 아닙니다.”
남자는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선우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회사측 입장은 저도 이해합니다. 다만...저로선 예상하지 못한 조항인 만큼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남자는 잠깐 개운치 않은 듯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선우의 입장 또한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 더 생각해보는 걸로 하고 일단 오늘은 즐겁게 술이나 마시죠.”
취하고 싶지 않아 남자가 기분 나쁘지 않을 만큼만 적당히 술을 받아 마셨다. 남자와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술을 마시는 동안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자신이 너무 재는 것일까. 이쪽 일에 대해 아는 것이 부족하니 판단할 기준 자체가 없어 내심 막막했다. 그래도 위약금을 떠올릴 때마다 계약을 보류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집으로 돌아가서 일단 최대한 좀 더 정보를 구한 후에 다시 생각해보자고 마음먹을 때쯤 휴대폰에 불빛이 들어왔다. 선우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던 휴대폰 화면이 남자에게 보이지 않도록 순간적으로 빠르게 들어올렸다. 서해경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거기랑 계약하지 마요.」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해주신 분들,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