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프 컷 16편
<-- --> 병원 근처에 도착해서 택시에서 내린 선우가 건물 입구로 향하다 멈칫했다. 문득 빈손인 게 신경 쓰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멀지 않은 곳에 환하게 불을 밝힌 편의점이 보였다.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진열대를 쭉 훑어보았다. 사갈만한 게 마땅치 않아 결국 포장된 음료세트 주변을 기웃거렸다. 사과, 포도, 오렌지 등을 비롯한 각종 과일 주스에 꿀물까지... 종류야 무척 다양했지만 그 무엇도 서해경이라는 남자와 도통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그 때 짧은 진동음과 함께 메시지가 도착했다.
「주스 이런 거 안 사와도 되니까 몸만 와요.」
휴대폰을 쥐고 있던 선우의 손가락 끝이 움찔거렸다. 선우는 괜히 CCTV 주변을 머쓱하게 한 번 둘러보곤 점원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후 가게를 빠져나왔다.
병실 번호를 눈으로 더듬으며 걸어가던 선우가 508호 앞에 멈춰 섰다. 소리 나지 않게 문을 조심스레 열자 2인실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침대 하나는 비어 있었다. 해경은 창가 쪽 침대에 앉아 손에 무언가를 들고 읽고 있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든 그가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 문 열고 들어온 사람 중에 제일 반가운 사람이네요.”
밝아 보이는 남자의 얼굴에 안도하던 선우의 시선이 그의 다리 쪽을 향했다.
“많이 다치신 겁니까.”
“큰 부상은 아닙니다. 그래도 연선우씨가 병문안을 와줘야 할 만큼은 다쳤습니다.”
다소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는 그의 얼굴은 어쩐지 방송국에서 마주칠 때보다 더 생기 넘쳐 보였다.
“이 기회에 푹 잤더니 오히려 몸 상태가 더 좋아진 것 같기도 합니다.”
계속해서 가벼운 분위기로 말을 꺼내는 그였지만 사고라는 게 당장 하루만 지켜보고 말 문제는 아닌 만큼 걱정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저보고는 다치지 말라고 하셨으면서...”
선우 나름대로 엄하다면 엄할 수도 있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남자의 눈가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나 지금 혼나는 겁니까. 기분 좋은데요.”
“......”
남자의 입가가 더욱 더 반듯하게 호를 그리며 올라가는 듯했다.
“...앞으로는 더 조심하시고 더 이상 다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웃음기 밴 남자의 시선과 마주하자 갑자기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속에 있는 말을 솔직하게 꺼냈을 뿐인데 뒤늦게 간지럽고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리저리 헤매던 선우의 시선이 그가 읽고 있다 덮어 놓은 종이 뭉치에 가 닿았다. 해경이 그 시선의 방향을 기민하게 알아차리곤 그것을 들어 선우에게 건넸다.
“읽어보겠습니까. 다음에 연출하게 될 작품입니다.”
벌써 차기작을 검토하고 있다는 말에 잠시 놀란 눈을 치켜뜨던 선우는 호기심에 그가 건네는 것을 받아들었다. 용지의 제일 앞장에는 작가, 연출, 제작사 등의 별도 표기 없이 단 두 글자만 눈에 띄게 찍혀 있었다. 〈시차〉. 그것이 작품의 제목인 듯 했다.
“제가 읽어도 되는 걸까요.”
표지를 들추던 선우가 멈칫하며 묻자 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 내용을 누군가에게 유출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당연한 그럴 생각이었기에 선우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기획의도로 시작되는 서두부터 읽어가기 시작했다. 주요 인물 소개에 이어 열 페이지에 가까운 시놉시스가 이어졌다. 선우는 자기도 모르게 스토리에 푹 빠져들어 읽는 내내 뒷내용을 궁금해 하며 빠르게 다음 장을 넘겼다. 후반까지의 스토리가 그려졌지만 마치 의도된 것처럼 결정적 엔딩 부분만 빠져 있었다.
“결말이...”
선우가 조금 야속하면서도 애타는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선우의 마음을 헤아리듯 해경이 입가를 끌어올리며 짧게 웃었다.
“애초에 소수 사람들에게만 배포된 거긴 하지만 결말이 중요한 만큼 유출을 염려해 의도적으로 제외한 듯합니다.”
선우는 곧 수긍을 했다. 그럴 만도 했다. 이런 장르와 스토리라면 결말부의 보안을 무척 신경 써야 할 것 같았다.
“대본도 읽어봐요.”
기획안 뒷부분에 2부작 분량의 대본 또한 프린트돼 있었다. 선우는 기대되는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겨 1회 첫 씬이 시작되는 부분으로 빠르게 시선을 옮겼다. 금세 몰입해 어느새 종이에 얼굴을 묻을 듯 점점 기울어지는 작고 동그란 머리꼭지에 해경의 시선이 박혔다. 그 역시 다시 느긋하게 감상에 빠져들 시간이었다. 가끔씩 나긋하게 들썩이는 속눈썹부터 유독 말랑해 보여 꾹 눌러보고 싶은 귓불까지, 볼 곳이야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
“어떻습니까.”
선우가 마지막 장의 끝부분까지 읽는 것을 확인한 해경이 차분하게 물었다.
“뭐라고 해야 할 지...”
선우가 바싹 마른 목 안을 느끼곤 간신히 침을 삼켰다.
“...좋은데요. 흥분되기도 하고.”
해경이 눈매를 살짝 접었다.
“연선우씨를 흥분시켰군요.”
굳이 남자가 한 번 더 강조하자 어감이 묘하게 다르게 다가왔다.
“흥분시켰고, 또 어땠습니까.”
“이 이후의 대본들도 당장 보고 싶을 만큼 재밌게 읽었습니다. 스토리 자체도 흡인력이 뛰어난데다가 대사들이 대체로 간결하면서도 무척 힘 있게 느껴져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자신의 소감을 증명하듯 선우의 눈빛과 표정에는 기분 좋은 떨림과 흥분, 상기된 감정 같은 것들이 묻어났다.
“스토리 부분 외에 주인공 캐릭터는 어떤 것 같습니까. 배우로서 보기에.”
진지하게 물어오는 남자의 태도에 선우는 최대한 진솔하게 제가 생각한 바를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래도 이야기 특성상 주인공 캐릭터가 초반보다는 중후반으로 갈수록 특화될 것 같은데 초반인 1, 2회에서도 충분히 매력적으로 표현됐다고 생각합니다.”
“배우로서 연기하고 싶은 욕심이 들 정도입니까.”
“그야...네, 그렇습니다.”
마치 선우의 반응을 민감하게 살피기라도 하는 것처럼 해경의 시선이 이상하리만치 집요하게 느껴졌다. 그런 시선 탓일까. 선우는 새삼 말의 무게라는 것이 실감났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래왔다고 생각하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 더욱 더 책임감과 진심을 다 담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배우로서 욕심날 만큼 좋은 대본이고 캐릭터입니다.”
결코 가볍지 않게, 진중한 태도로 답해오는 선우의 얼굴을 꼼꼼한 시선으로 훑던 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의견 고마워요.”
예리하게 촉각을 곤두세우던 남자의 기세가 사라진 자리엔 희미하게 온화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해경이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온 종이 뭉치를 바라보다 손가락으로 표지 위를 톡톡 두드리며 시선을 들었다.
“갑자기 연선우씨 작품 취향이 궁금해지네요. 혹시 좋아하는 작품이나 감독 있습니까.”
선우는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개인적으로 이성호, 서 경 감독님을 좋아합니다.”
규칙적으로 움직이던 남자의 손가락이 순간 움찔하며 굳었다.
“이성호 감독은 그렇다 쳐도 서 경 감독은 작품이 하나뿐인 걸로 아는데요.”
“그렇긴 하지만 그 작품을 무척 인상적으로 봐서요.”
“〈협주곡〉 말입니까.”
“네.”
“인상적이었다니 어떤 부분 때문에 그렇게 느꼈는지 궁금하네요.”
남자의 두 눈은 잔잔한 물결처럼 고요하면서도 그 이면에는 뜨거운 호기심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야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느낀 것뿐이라 잘은 모르지만...자칫 어두울 수 있는 소재와 주제를 담백하면서도 희극적으로 그려낸 점이 좋았습니다.”
해경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계속하라는 듯이 빤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재촉에 선우 또한 마치 그래야 할 것처럼 어물어물 입을 열어 답을 이었다.
“그러면서도 순간순간 휘몰아치는 듯한 강렬한 시퀀스들이 굉장한 몰입감을 주기도 하고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군요. 또요.”
선우의 답을 기대하는 듯한 남자의 시선은 꽤 끈질긴 구석이 있었다. 의외로 타인의 작품에 대한 그의 관심이 꽤 대단하다고 느끼면서 선우는 자신이 느꼈던 점을 찬찬히 더 헤집어보았다.
“또... 평범하고 사소한 순간들을 포착해서 새롭고 낯설게 표현해낸 장면들이 있는데 평소 감독이 가지고 있는 시선이랄까, 그런 게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들어보니 꽤 괜찮은 감독인 것 같네요.”
“네...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남자의 눈매가 순간 가늘어지면서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좋아한다라. 그 표현에 대한 그의 감상이 꽤 긴 시간 동안 이어지는 듯해 선우는 순간 자신이 뭘 잘못 말하기라도 한 건 아닌지 잠시 헷갈리기도 했다.
“좋아하는 감독과 같이 작업해보는 것도 좋을 텐데요.”
“그야 저한테는 너무 꿈같은 일이지만...그 후로 어떤 활동도 하지 않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서요.”
“또 모르죠. 알게 모르게 무언가를 찍고 있을 수도 있고 비슷한 일을 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팬으로서도.”
“제 예감으로는 언젠가 연선우씨가 그 감독과 같이 작업하게 될 것 같습니다.”
선우가 작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런 일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상상만으로도 무척 설레는 일이네요.”
정말로 팬의 마음이랄까, 선우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떠오른 진심어린 감정을 해경은 놓치지 않고 지켜봤다. 정직하게 반짝이는 두 눈동자를 바라보던 서해경의 입가가 유려하게 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네. 저까지 무척 기대됩니다. 그 작품에 담길 연선우씨의 모습이.”
========== 작품 후기 ==========
개인적인 사정으로 글이 조금 늦어졌습니다.
다음 편은 주말 또는 월요일 오전 중으로 올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해주신 분들,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