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프 컷 15편
<-- --> (2회분 중 두번째 회차입니다.)
“응? 신혜정이 왜 여기 와 있어.”
장PD가 세트장 한 켠을 차지하고 선 그녀를 보고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오랜만이에요, 선배.”
혜정이 직접 사들고 온 아메리카노를 쭉 빨며 생긋 웃었다.
“여기 무슨 볼 일 있어 온 거야?”
“볼 일은 아니고 그냥 구경하러 왔어요.”
“구경? 갑자기?”
재철이 한쪽 눈썹을 쓱 들어 올리며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이 말했다.
“왜요, 난 보러 오면 안 되나?”
“아니, 신 작가 현장 오는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그녀가 그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긴 해요. 오늘이 좀 특별한 거지.”
“그러니까. 대체 여기에 뭐가 있다고.”
재철이 턱을 긁적이며 평소와 같은 촬영 현장을 스윽 둘러봤다. 그러다 그녀가 시종일관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의 시선을 좇았다. 거기엔 연선우가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는 제가 추리한 게 맞나 싶어 고개를 한 번 갸웃한 뒤에 말을 꺼냈다.
“갑자기 연선우는 왜.”
그녀가 시원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하하 웃었다.
“그냥 궁금해서요.”
“무슨 사연인데. 여기 내 현장이야. 구경하려면 사연 팔고 구경해.”
어울리지도 않는 무뢰배 흉내를 내는 그의 말에 혜정이 다시 까르르 웃었다.
“나 서해경하고 작업할지도 몰라요.”
여기서 갑자기 서해경이 왜 나와. 내가 잘못 들었나? 재철이 귀를 후비적거리며 물었다.
“서해경? 내가 아는 그 서해경?”
“드라마PD중에 서해경이 걔 말고 또 누가 있어요.”
혜정이 왜 딴소리냐는 듯 가볍게 핀잔을 건넸다.
“그게 가능하냐?”
그것은 사실 장PD 개인의 의견이라기보다 방송계의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논리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제기될 수밖에 없는 의문이었다.
신혜정이라면 드라마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편성은 제 의지로 골라 갈 수 있을 정도의 작가였다. 어느 방송사를 가든 그 곳의 간판 피디나 적어도 몇 작품 이상 연출력과 흥행성을 보장 받은 피디가 붙는다. 그에 비하면 서해경은 아직 햇병아리나 다름없었다. 그는 이번 작품 ‘타겟’으로 이제야 겨우 메인 연출을 막 맡기 시작했다. 거기다 그 작품은 평균 이상의 시청률로 선방하긴 했지만 딱히 대박작까진 아닌데다 은밀한 사정이 얽힌 탓에 자잘한 구설에 오르내리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 서해경을 신혜정에게 붙이다니. 위에서 싸인을 해줄 리가 없다.
“내가 JBS에서 하는 조건으로 붙였어요, 서해경.”
그 말에 재철이 입을 떡 벌렸다. 그렇게까지 했다고? 신혜정이 직접 조건으로 내걸었다면야 불가능한 일은 아니게 된다. 다만 듣고 나니 이제는 그녀가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가 궁금해진 그였다.
“서해경이한테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만날 때마다 투닥이긴 하지만 재철도 나름 그를 아끼긴 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 무척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연대의 부분이 컸던 탓이다. 그렇기에 혜정이 특별히 그를 콕 집어 고집하는 이유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예전에 저 데뷔하기 전에요.”
혜정이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25살에 지상파 공모전에 당선 됐을 때 저는 세상을 다 가진 줄 알았어요. 당선 나이가 평균보다 어리기도 했고 제 형편에 몇 백이라는 상금은 엄청난 거금이라 기쁜 것도 있었고요. 그런데 그때부터 비극이 시작될 줄은 몰랐던 거죠.”
바로 미니 작가로 데뷔할 수 있을 거란 상상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혜정은 꽤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다만 그런 그녀조차 대비하지 못한 불한당들이 이 바닥에 생각보다 넘친다는 게 문제였다.
임금을 제대로 지불받지 못하는 보조작가 생활과 몇몇 작가들의 뒤치다꺼리만 내내 해주다 몇 년이 지나갔다. 고생 끝에 이제 막 데뷔가 가능할 것처럼 입을 놀리는 사람들 밑에서 굴려지는 동안 잔고는 서서히 바닥나기 시작했다. 틈틈이 단기 알바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지만 예상치 못한 병원비와 밀린 월세 탓에 결국 빚을 져야만 하는 상황까지 가게 됐다. 혜정에게는 결단이 필요했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보류하는 대신 돈을 벌기 위해 잠시 드라마판을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때 자신을 보조작가로 썼던 한 기성 작가가 혜정의 아이템을 자신의 것인 양 대본을 썼다. 그 드라마는 일종의 대박을 쳤다. 지독한 열패감과 정신적인 빈곤에 휩싸인 혜정이 차마 드라마를 볼 수 없어 더더욱 일에만 매달리는 동안 그 모든 일이 벌어졌다.
뒤늦게 사태를 알게 된 혜정이 인터넷에 글을 올렸을 땐 오히려 그 드라마의 팬들로부터 공격받았다. 혜정은 작가의 인기와 명성에 빌붙어 무엇 하나라도 뜯어보려는 실패자로 몰아붙여졌다. 간간이 그녀를 옹호해주는 사람들도 있어 잠시나마 위안이 되었지만 억울한 일의 결과가 뒤바뀌지는 않았다.
'작가님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끈질기게 찾아 간 끝에 겨우 대면할 수 있었던 선배 작가는 오히려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거 왜 이래. 이미 옛날에 저작권 등록한 작품 가지고 도둑으로 몰아붙인 건 너야.'
뒤늦게 찾아본 저작권 등록일은 혜정이 그녀에게 노트를 보여 준 몇 달 뒤의 일이었다. 억울하다고 해도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모든 게 다 부족하고 어리석었던 자신의 탓이었다.
혜정은 정신적 충격에 휩싸여 하던 일을 모두 그만 두고 방안에만 틀어박혔다. 이러다 죽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때쯤 시골에 계시는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잘 지내냐는 지극히 짧은 안부 인사와 함께 50만원밖에 부쳐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힘없는 사과가 전부인 전화. 그녀는 한바탕 처절하게 울고 나서 정신을 차렸다. 먼저 이자가 불어나는 빚부터 없애야 했다. 그녀는 자존심을 다 버리고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그리고 그 때 자신의 간절함에 응답한 이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대학교 후배였던 서해경. 그녀로서는 무척이나 의외의 일이었고 대상이었다.
대학교 시절 딱히 친하게 지내본 적 없는 그는 과거에 고작 한두 번 어울렸을 뿐인 자리에서 거침없는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드라마 작가로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압니까.”
술에 취해 잔뜩 꿈에 부푼 채 오랜 꿈을 떠벌리는 그녀에게 해경은 그렇게 말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현실을 길지도 않고 몇 마디 말로 분명하게 정리해주었다. 뿔이 나 씩씩대는 그녀에게 해경은 이런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포기하란 말은 아닙니다. 그만큼 각오가 필요한 일이라는 얘기죠.”
그러더니 이렇게 툭 하고 내뱉는 것이다. 한 번 해봐요. 그렇게까지 원하는 게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자기 인생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니까.
병주고 약주고냐. 혜정은 다소 뚱하게 받아쳤다. 한참 기대에 부풀어 있을 때 부은 찬물의 여파가 꽤 오래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해경은 몇 년 후, 번호를 바꾸지 않았다는 잘못으로 받게 됐을 혜정의 전화에 이렇게 답했다.
“돈 빌려드리겠습니다. 단, 계속 글 써요. 빌려드린 건 나중에 선배 글 팔 수 있을 정도까지 되면 그 돈으로 갚아요.”
그때 서해경은 이미 PD로 입사한 후였고 막상 그보다 먼저 공모전에 당선되어 방송국에 들어갔던 혜정은 밑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해경은 어쩌면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는 돈 이천만원을 혜정의 계좌에 입금시켜주었다. 혜정은 그 돈으로 사금융에 졌던 빚을 갚고 방세를 내고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밤낮없이 글을 썼다. 그리고 그 해 다른 지상파 방송국 미니시리즈 공모전에 당선됐다.
“새끼가 잘난 척은 그 때도 했었구만.”
이야기를 다 들은 재철이 밉지 않게 투덜거렸다. 혜정이 옆에서 씨익 웃었다.
“서해경 말대로 글 팔아서 번 돈으로 결국 빚을 갚았죠. 그 후로 언젠가 한 번 같이 작업해보고 싶단 생각은 쭉 했었어요. 꼭 그 일 때문만은 아니라 서해경이 연출한 작품 중에 꽤 근사한 게 있었거든요.”
“응? 뭔데. 타겟 말하는 거야?”
“아뇨. 그보다 훨씬 전에 찍은 게 있어요. 영환데 본명으로 나온 게 아니라 선배는 모르려나? 헤헤, 그럼 나만 알고 있어야지.”
궁금해 하는 그의 표정을 보고 혜정이 혀를 쏙 내밀었다. 재철이 허허 거리며 웃다가 ‘됐거든? 나도 그 새끼 작품 하나도 안 궁금하거든?’하고는 어울리지 않게 새침을 떨었다.
“근데 서해경은 딱히 신 작이랑 작업한단 얘기 안 하던데.”
“몇 달 전에 얘기 꺼냈을 때 서해경이 거절하긴 했어요.”
서해경은 이렇게 말했다. 선배 제안은 영광이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지금 연출이 재미없어서요. 선배 작품 망치고 싶지도 않고 잘 할 자신도 없습니다.
그는 여상한 태도로 그렇게 말했고 그것은 진심인 듯 느껴졌다. 그랬던 그가 얼마 전에 자신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마음이 바뀌었다고.
“마음은 갑자기 왜 바뀌었다냐?”
“글쎄요. 저도 모르죠.”
다만... 그 이유를 짐작할 만한 사내가 저기 있었다.
한참 이야기를 듣던 재철이 갑자기 난관에 봉착한 것처럼 얼굴을 와락 구겼다.
“잠깐만. 나 지금 함정에 빠진 거 같은데.”
“뭐가요?”
“그거랑 신 작가가 여기 와서 연선우를 구경하는 이유가 뭔 상관인가 싶어서.”
“아아.”
혜정 역시 뒤늦게 그의 첫 질문이 떠오른 듯 씨익 웃어보였다.
“그러니까 일이 결국 이렇게 된 거예요. 제가 JBS에 편성하는 조건은 PD가 서해경일 것.”
여전히 그녀의 두 눈은 연선우를 향해 있었다. 그 순간 그가 자신에게 꽂히는 지극한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혜정과 재철이 함께 있는 곳을 향해 돌아봤다. 선우와 혜정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말갛고 선한 두 눈동자를 바라보며 가만히 웃었다.
“그리고 서해경은 연선우를 조건으로 걸었거든요.”
* * *
“많이 다쳤냐?”
촬영과 촬영 사이 스태프들의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를 배경으로 세트장 한 켠에서 통화중인 장PD의 음성이 울렸다. 상대의 답을 듣던 재철이 조금 굳어있던 표정을 풀더니 태세를 전환하기 시작했다.
“그러게 왜 오바를 해. 또 멋있는 척 하다 그랬지?”
낄낄거리며 해경을 놀리기에 여념 없던 재철의 시선이 불현듯 대기하고 있던 선우 쪽을 향했다.
“선우씨? 그야 촬영 중이니까 당연히 여기 있지.”
갑자기 들려온 자신의 이름에 선우가 돌아보자 통화하고 있는 재철과 시선이 마주쳤다.
“갑자기 건 또 뭔 소리냐. 선우씨 마른 걸 왜 나를 탓해?”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대화의 흐름에 선우가 의아하게 눈을 키우자 재철이 씨익 웃으며 별 일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에라이, 미친 놈. 너 사실 다친 데 다리 아니고 머리지? 아무튼 알았다. 그래, 쉬어라.”
통화를 끝낸 재철이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선우에게 다가갔다.
“서PD가 촬영하다 좀 다쳐서 지금 병원에 있는데 이 자식이 웃긴 게 선우씨한테 그걸 꼭 좀 전해달라네.”
“네? 어쩌다가... 많이 다치신 겁니까?”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고. 내 소견으로는 꾀병이라고 봐요. 이 자식이 몸이 엄청 튼튼하거든.”
그의 밝은 목소리와 말투에도 선우가 안심하지 못하고 불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재철이 선우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농담 아니고 진짜로 가벼운 부상. 지금 막 필요도 없는 검사 하러 들어간다고 툴툴거리는데 이따 연락이나 한 번 해봐요. 이 자식이 선우씨한테 뭘 맡겨놨나. 은근히 엄청 찾아.”
심각한 상황이 아님을 강조하듯 마지막까지 짓궂은 말투로 해경을 놀리고서 그는 촬영스태프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재철의 노력이 효력을 발휘한 듯 선우는 걱정되던 마음이 그나마 조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 두 씬을 남기고 잠시 갖게 된 휴식을 빌어 선우는 대기실을 찾았다.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에서 서해경의 이름을 찾았다. 통화 버튼 위에서 손이 움찔거리다 혹시나 그가 잘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우선 메시지부터 보내기로 했다. 한참 썼다 지웠다 하던 문자를 고심 끝에 겨우 완성해 전송 버튼을 눌렀다.
「다치셨다고 들었습니다. 다행히 부상은 크지 않다고 하시지만 절대 무리하지 마시고 푹 쉬시기 바랍니다. 빠른 완쾌를 기원합니다.」
오랫동안 한 고민이 무색하게 진심으로 걱정한 마음의 털끝조차도 담아내지 못하는 듯 했다. 기계가 쓴 것처럼 무척 딱딱해 보여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받는 입장에선 오히려 기분 나쁠 수도 있지 않을까. 무슨 말이라도 더 덧붙여야겠다는 생각에 화면을 터치했을 때 메시지가 도착했다.
「병문안 와요. 성운병원 508호입니다.」
남자의 당당한 요구가 어쩐지 반가우면서도 안도감을 들게 했다.
「촬영 끝나는 대로 바로 가겠습니다.」
몇 분쯤 기다렸지만 잠시 일이 있는지 이번에는 답신이 바로 오지 않았다. 선우는 다음 촬영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에 넣기 직전 다시 확인했지만 여전히 새 메시지는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대로 휴대폰을 가방에 넣어두고 선우는 대기실을 나섰다.
마침내 촬영이 다 끝났을 때 대기실로 돌아와 확인한 휴대폰에는 짧은 그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빨리 와요.」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해주신 분들,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